조소앙(趙素昻)은 고종 24년(1887) 4월 30일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월롱면에서 태어났는데 소앙은 아호이고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다.
조소앙은 정치의 균등화, 경제의 균등화, 교육의 균등화라는 삼균주의(三均主義)라는 이론체계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으로 삼게 한 것이 유명하다. 조소앙이 이런 이론체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동서양에 걸친 방대한 지식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섯 살 무렵부터 조부 조성룡(趙性龍)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해서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했다. 그는 스물두 살 이상이 입학자격이었던 성균관 경학과를 열다섯 살 때인 고종 39년(1902년) 7월에 들어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가학(家學)에서 관학(官學)으로 전환된 셈이지만 이때는 이미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 때였다.
훗날 을사오적이 되는 이하영(李夏榮)이 1903년 산림과 천택(川澤)을 일본에 팔아넘기려는 사건이 발생하자 신채호 등과 함께 성토문을 만들어 항의에 나섰는데 이것이 조소앙에게는 평생을 일관하는 최초의 사회운동이었다.
조소앙은 1904년 황실유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해서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는데 최남선(崔南善), 최린(崔麟) 등이 동기였다.
조소앙은 일본 유학시절 쓴 ‘동유략초(東遊略抄)’에서 꿈에 조부가 나타나 ‘너는 왜 외물(外物)에 마음을 풀어놓고 책을 읽지 않느냐’고 지팡이로 때렸다면서 “나는 두렵고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며 안으로 들어가 책을 읽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도쿄제대 출신의 제일중학교 교장 가츠우라(勝浦炳雄)는 국가주의적 교육관과 민족폄하적 사고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905년 일본의 ‘보지신문(報知新聞)’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유학생들이 ‘일본어는 빠르게 습득하지만 수학과 과학 등에 있어서는 어른이라 하더라도 일본 소년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한국인을 비하했다.
수학과 과학의 기초이론을 습득할 기회가 없었던 한국 유학생들의 현실을 무시한 민족비하 발언이었다. 조소앙을 비롯한 37명 전원이 이에 항의해 퇴학을 단행했지만 이 경우 관비유학생 자격이 상실되는 문제가 발생해서 다시 재입학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이 사건의 여파로 기숙사 감독제가 폐지돼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조소앙은 제일중학교와 명치대학 법학부에서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이미 할아버지와 성균관에서 동양 고전을 익힌 후 일본에서 서양학문을 익혔다. 더구나 명치대학 교장 키시모토(岸本辰雄)는 프랑스를 유학한 자유주의적 법학자로서 국가주의적 법학파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더구나 대한제국의 주독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던 맏형 조용하가 베를린에서 중국의 민족주의 혁명가 ‘손문전(孫文傳)’과 막심 고리키의 저서를 보내주는데 이런 경험들이 훗날 삼균주의(三均主義)라는 좌우통합적 이념을 정립하는데 자양분이 됐을 것이다.
명치대학 재학 중인 1909년 도쿄에 있는 여러 유학생들의 단체를 통합해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해 회지의 주필이 됐지만 대한제국은 점점 가망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조소앙은 망국 직전인 1910년 8월 경 그때까지는 친일파가 아니었던 윤치호를 비롯해 김규식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는 한편 대한흥학회 주최로 도쿄에서 ‘합방’ 반대 집회를 개최하려 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의 한국 강점 직전인 8월25일 일제 경찰에 체포돼 심문을 받게 됐다. 또한 그는 이 무렵 기독교에 입교했는데 1911년 10월22일 미국인 선교사 스웨어러(W. Swearer, 한국명 서원보) 목사와 전덕기(1875~1914)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신민회를 비롯해서 각종 민족운동을 주도하다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불리는 신민회 사건 때 체포돼 혹독한 심문과 수형생활 끝에 석방되었지만 이때 얻은 병으로 마흔도 못돼 사망하고 말았다. 조소앙은 1912년 7월 명치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동유략초’에 법학에 관한 기술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조소앙은 ‘동유략초’에서 “내가 동쪽으로 유학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는데 옛일을 더듬어보니 흐느끼며 통곡할 일이 많았다. 내가 나라의 은혜에 털끝만큼이라도 보답한 일이 있었는가”라고 토로했듯이 일제가 나라를 빼앗는 상황에서 법학이론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소앙은 조부와 성균관에서 동양 고전을 섭렵하고 일본 유학시절 일본어와 영어는 물론 각종 서양이론을 습득했다. 조소앙은 1915년 경 단군·공자·예수·석가모니·마호메트·소크라테스의 여섯 성자를 모시는 육성교(六聖敎)라는 독자종교를 구상하고, ‘일신교령(一神敎令)’이라는 경문도 작성했다.
육성교는 동서양의 모든 현자를 아우르면서도 단군을 신의 가장 첫 머리로 내세운 것 자체가 그의 사상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즉 동서양의 모든 사상, 학문을 망라하지만 그 중심에는 한민족이 있었다.
조소앙은 1913년 상해로 망명하는데 이때 긴밀하게 연락한 인물이 신규식이었다. 신규식은 1909년 나철이 개창한 단군교, 즉 이듬해 개칭한 대종교(大倧敎)의 핵심인물이었다.
이후 조소앙은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일관되게 추구했다. 1917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조소앙은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도 기초했다. 기미년(1919) 이전의 무오년(1918)에 발표되었다는 이유로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리는데 1919년 2월을 음력으로 볼 경우 3·1독립선언서보다 늦게 되고, 양력으로 볼 경우 3·1독립선언서보다 빠르게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시기보다도 그 내용이다. 조소앙이 39인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자인데 이 선언서는 대한독립의군부에서 주도한 것이었다. 조소앙은 1918년 국내외동포들의 대동단결을 실현하기 위해서 1918년 중국 길림지방으로 갔다. 조소앙은 광복 후 ‘자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19년 1월에 여준·김좌진·박남파·손일민 등 여러 동지들과 대한독립의군부를 창립했다. 여준은 정령이 되었고, 나는 부령의 임무를 맡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손수 기초하였다. 국내 대표가 가져온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살펴보고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하였다”
국내 대표란 나경석을 뜻하는데, 그가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보고 작성했다는 것이니 시기의 선후문제에 크게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독립의군부의 정령인 여준은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독립운동의 주요인물이고 김좌진 등은 두만강 대안의 북간도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이니 독립의군부는 만주 독립운동의 양축인 서간도 및 북간도의 무장독립운동세력이 합쳐진 것이었다.
3·1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선언서는 모두 대한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3·1 독립선언서가 평화적 방법을 강조한 것은 국내라는 정치환경 때문이며 대한독립선언서가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 것을 주장한 것은 일제의 통치력이 직접 미치지 않는 만주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대한독립선언서는 김교헌, 여준, 이상룡, 박용만, 김동삼 등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무장항일투쟁가들이 대거 망라된 선언서였다. 조소앙은 훗날 ‘회고’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삼균주의의 배태기였다고 회고하면서 토지는 국민의 소유라는 점을 밝혔다.
삼균주의는 정치적 균등과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을 뜻하는데 이는 개인 사이의 균등이자 나아가 국가와 민족 사이의 균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조소앙이 삼균주의 사상을 확립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그 배경에 민족유일당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926년 이후 만주를 중심으로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의 당으로 단일화하자는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유일당 운동은 이당치국(以黨治國)으로 표현되는데 하나의 단일당으로 나라를 다스리자는 뜻이었다. 그 중심에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대표되는 만주의 삼부(三府)가 있어서 1928년 삼부통일회의가 열리고 그 결과 혁신의회와 국민부가 결성된다.
그런데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 등으로 나뉘어 있는 여러 독립운동 조직을 통합하려면 좌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념이 필요했다.
비록 민족유일당 건설 운동은 실패했지만 조소앙의 제창한 삼균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 명시되었다. 임정은 1941년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다”고 명시한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에 유법(遺法)을 두었다”면서 임시정부는 “혁명적 삼균제도로써 복국과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의 공리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의 3종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이라고 규정했다. 조소앙이 확립한 삼균주의가 새로 되찾을 나라의 건국원칙이 된 것이다.
광복이 분단으로 이어지자 조소앙은 삼균주의 청년동맹을 조직하는 한편 통일운동에 투신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으며 6·25 직전에 실시된 1950년 5월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북구에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었다. 6·25가 발생하자 수도를 사수하기 위해서 서울에 남았다가 납북되고 말았다.
조소앙은 1956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 북한이 엄항섭을 체포하자 이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으로 병을 얻어 그해 9월 10일 순국했다고 전해진다. 이태호가 저술한 ‘압록강변의 겨울’에 따르면 조소앙은 임종하는 동지들에게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전해달라.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다.
그 이념과 사상을 후세에 전해달라’고 유언하고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의 피쉔코프 1등 서기관이 작성한 자료(1958년 11월)에는 병사한 것이 아니라 반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위한 통일운동 혐의를 받아 북한 당국의 조사를 받던 도중 투신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소련측의 자료가 맞을 것이다.
조소앙이 사후 30여년이 지난 1987년에야 평양시 교외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