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집안 100년사 이야기 -
경북 울진군 온정면 광품리 평전동 안가네 집안 내력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살아 계시는 올해 92세 아버지와 어머니(안덕출, 이명분 할아버지 할머니)그리고, 77세, 81세 종형님 내외분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우리 집안 내력을 소상히 써내려 가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가족사를 함께 똑 바로 알고 있어야 참된 후손이 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글쓴이로서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하려고 애써 노력하였음을 먼저 밝혀두며, 장황한 글이 되지 않도록 간략한 약사에 이어서 자세한 이야기들은 몇 장 몇 절 형식(인물 별)의 단락으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약사 : 전국적으로 명성이 알려져 있는 유황온천의 대명사 백암온천이 있는 곳이 행정구역명으로 온정이다. 면소재지로서 해발 1,004m 백암산 아래 터를 잡고 있으며, 동해안을 바라보고 있다는 가정에서 백암산 오른쪽 마을인 조금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이 있고, 왼쪽으로는 구주령 아래 마을 선미 쪽에서 흐르는 강으로 둘려 쌓여 있는 곳이다. 조금 쪽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나마실을 지나서 소태리와 하음이라는 마을을 지나며 곧 두 강물이 합하는 곳을 뜻하는 합세라는 곳이 있고, 합세 바로 11시 방향 위쪽에 80호 가까이 모여 살았던 ‘하음’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증조할아버지(시골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의호’ 어른이 가세 좋게 사셨던 곳이며, 어른의 인품은 인물이 출중하게 좋아 6척 장신의 장사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내에게는 십중팔구 집안이 좋아 곱게 커서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부잣집 처녀가 시집와 살림을 차리게 되기 쉬운 법이다. 남들은 끼니를 걱정할 판에 쌀을 팔아 엿을 사먹음으므로 점점 집안 가세가 기울게 되었고, 마침 할머니가 아들 하나와 딸을 키워놓으시고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 할머니 아들의 후손들이 바로 ‘너럽지’ 친척들이다.그 할머니 묘는 진티 마을 뒷산 세 묘 중에 가장 아래에 위치한 산소이며, 그 할머니의 아들 묘는 진갱빈 우리집 뒷산 정상에 있고, 영양 너럽지 사람들의 시조가 된다. 현 시골 할아버지의 고모(위 할머니의 딸)도 계셨는 데 먹고 살기가 어려워 일찍 만주로 가서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의호 할아버지의 산소는 진티 세 산소 중 첫번째 산소이며, 가운데 산소는 의호 할아버지의 모친 그러니까 우리의 고조모 산소라고 한다.
한편, 늦게 새 여자를 맞아 두 아들을 낳아 사시던 증조할아버지께서 영양 수비로 가서 살게 되었는 데 돌아가시게 되자(진티 뒷산 첫 번째의 산소임) 친 증조할머니(묘는 ‘가빼’ 앞 깨터골에 있는 산소임)는 혼자 어렵게 두 아들을 키웠는데 무척 어려워서 남의 집 머슴까지 시키게 되었다. 그 첫 아들이 ‘진갱빈’에 터를 잡고 95세까지 사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이시며 친자가 없이 돌아가셨다.(‘우깨골’ 계곡 쪽 산소임) 친자를 보려고 여러 번 새 여자를 집안에 들게 하였으나 모두 허사여서 느지막이 노후를 보호받고자 조카인 우리 아버지를 양자로 들게 하여 진갱빈에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친 증조할머니의 둘째 아들이자 막내자식인 친 할아버지(묘는 우깨골 능선에 있는 산소임)는 서른에 가깝도록 두실마을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이 시집가서 남편을 잃고, 친정으로 되돌아와 살던 중 인물 좋고 마음씨 괜찮은 총각머슴이 마음에 들게 되었고, 결국에는 두 사람이 눈이 맞아 야밤보쌈으로 영양 수비 번동의 친지 댁(큰 집 인근)으로 새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아들 셋을 두었으며, 할머니(묘는 영굴에 있는 산소)가 억척스럽게 살림을 야무지게 모아 첫 아들을 공부까지 시킬 수 있게 된 바 바로 큰아버지가 되시며, (묘는 평밭 마을 바로 뒤 ‘오태산’의 8부 능선에 있는 산소) 둘째 아들은 집안일을 시켜 키웠고, 후일 몹시 애정을 표시하게 되었던 우리 진갱빈 아버지라고 한다. 막내아들은 더욱 신체 강건하게 잘 커서는 일본 군대에 자원하여 지내다 해방 후 한국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하던 중 장렬히 전사하게 된 작은 아버지가 되신다.(묘는 광품 상점 못 미쳐 도로 바로 인접해 비석이 세워져 있는 산소)
번동에서 자식들 공부시키기가 어려움을 느끼시던차에 수하에 살림나서 살던 아버지께서 처가(평밭) 쪽에서 내려와 살아라는 외할머니의 권유로 이사를 하여 살게 되자.(현재 평밭 종형님 댁) 친 할아버지께서도 덩달아 처가가 있는 두실마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렇게 사시던 중 두실에서할아버지와 큰 어머니,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진갱빈 꼬꼬할아버지가 아버지(둘째 조카)를 양자로 부르게 되면서 평밭에서 진갱빈으로 다시 이사를 하였고, 두실에 사시던 큰 아버님네의 장남이신 종형님이 평밭 살던 우리 집으로 이사를 하여 살게 된다. 이 때 함께 사시던 큰 아버지께서 다시 재혼을 하시면서 진갱빈 꼬꼬 할아버지(그 분의 큰아버지) 집 앞 터에 이사와서 살다가 사라호 태풍에 집을 잃게되자 평밭 아들네 집 앞터에 작은 오두막집을 지어 살게되었으며 그 후의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글쓴이 본인이 수집하여 알고 있는 우리 가족에 대한 개괄적인 약사이며, 의호 증조할아버지 바로 윗대 어르신들에 대해서 들은 바를 전하면 역시 하음 마을에 사시다 돌아가셨고, 그 묘는 달의골 5-6부 능선에 있다. 또 그 윗분들은 서해산 정상 부근과 우깨골 조부 묘가 있는 능선의 정상에 연달아 있는 묘들이라고 전한다.
무척 아쉽게도 우리 집 가첩 전수가 살기 어려울 때 제대로 연결이 되지 못해서 족보가 정확하지 않음이 애통하다. 그렇다고 우리 윗분들에 대하여 외면한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며 상식이하의 행동이므로 잘 알아두어서 우리들의 후손들에게라도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정확히 잘 전하며 살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는 친 할아버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집안의 세세한 그러나 의미가 있는 이야기들을 기술하여 전하겠으며, 이야기 뒷부분에 ‘너럽지’ 친척들과, ‘진갱빈’ 承正할아버지에 대한 가족 이야기를 참고적으로 소개해 두고자 한다.
(이하 상세한 이야기는 오는 겨울방학에 시골에서 작성하되 보다 정확히 종형님 내외분과 아버님어머님, 참고로 대구 맏형님 내외분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완성시켜 볼 예정이랍니다. 물론 위의 글도 보다 매끄럽게 다듬어야 하겠구요....)
Ⅰ. 조부 承龍
첫댓글 자랑스럽지는 못할지라도 당당히 조상님 뿌리를 찾아 알리고자하는 많은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아버님과 큰 집 종형님 맏형님 살아 생전에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서 시작을 하여 보았습니다만 구전과 기억에 의한 글이라서 틈틈이 확인 점검하고 다듬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소 거칠게 진술되었으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로 위안하며, 본격적인 작업이 가능한 겨울방학을 기다리렵니다.
형식적인 족보보다 몇백배 가치가 있습니다.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