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송리 무안박씨 음죽파
<금송리 무안박씨 음죽파 계보>
금송리에 살고 있는 무안박씨 음죽파는 금산의 박정길과 향동의 박무웅 가족이 있다. 입향조와 묘지, 진례에 살았던 분들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석정리의 무안박씨 음죽파와는 21세손에서 갈리게 되었다. 즉 20세 응성(應星)을 같은 조상으로 두고 있다.
진례 금산부락 박정길가 계보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박연환 |
| 1877년 동림동으로 입향 |
(오동암) | 박재원 | 금산부락으로 이전 |
| (정서우) | 정길(최연자) | 홍찬(안선영) | 준형, 재희, 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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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찬(김금숙) | 재우,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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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찬(김지연) | 민서, 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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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찬(김미정) | 연진, 신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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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희(김찬근) | 태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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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희(양우석) | 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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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김상현) | 영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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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임(김천형) | 성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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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임(최병칠) | 웅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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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 함평군 학교면 금송리 산78-2에 연환, 재원, 정길을 모셨다. |
진례 향동 박무웅가의 계보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박연환 |
| 1877년 동림동으로 입향함 |
(오동암) | 박재근 | 금산에서 향동으로 이주함 |
| (고재동) | 병석(정영례) | 무웅(노순임) | 용주(김희순), 을주(정현옥), 현이(김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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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정향란) | 봉주, 현아(최진호), 현숙(인석남), 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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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김명자) | 형주(전희정), 광주(김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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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희(정생룡) | 호선, 대중, 경미, 경희, 경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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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순(정양채) | 정웅, 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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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석(배오금) | 흥수(이봉애) | 성주(박희정), 현주, 성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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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수(강애란) | 영주, 훈희, 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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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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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숙(김성배) | 양기, 동기, 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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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애(김봉기) | 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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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애(윤권혁) | 호진, 지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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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숙(안경수) | 정환, 혜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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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석(정정례) | 윤수(김순례) | 성룡(김주희), 석주, 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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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장은영) | 채영, 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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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희(김영래) | 헌수, 남수, 해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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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희(유종철) | 근영, 화정, 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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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정선학) | 병수, 승희, 선정, 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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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자(김응천) | 상현 |
| 묘지 : 함평군 학교면 금송리 232번지 재근, 병석, 갑석, 문수를 학교면 금송리 976-16번지에 정석을 모셨다 |
치환 | 묘지 : 나주군 문평면 죽곡리 81번지 병풍산(치환과 광산김씨) 함평군 학교면 월호리 45번지 계란봉횡간좌(남평문씨) |
| 재술 | 묘지 : 함평군 학교면 월호리 동막곡 계란봉횡간좌(금성정씨와 쌍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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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석(노순례) | 기수 | 미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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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수 | 원주 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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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 이례 유임 점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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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석(나주임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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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석(낙안오씨) | 정수 정미 선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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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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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술은 고막리에 살다가 오셨으며 한 때는 금산부락에 일가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모두 외지로 나가 살고 있어 같은 족보내의 친척으로 여기에 기록해둔다. 묘지 : 판석은 국립임실호국원에 모셔져있다. |
<금송리 음죽파 진례 입향조와 활동>
금산의 박정길과박윤수, 향동에 박무웅,박정수 가족이 있다.
금산부락에 사는 박정길은 그 할아버지 연환(蓮煥,1868)이 죽곡리에 살다가 1877년경 진례 동림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에 죽곡리에 살던 무안박씨 음죽파들이 권세가 높은 사람들과 충돌이 생겨 1번 국도와 고막강을 따라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1877년은 함평 고양촌 세거지에 세워진 세장비에 쓰인 연대인데 연환은 10살밖에 되지 않았다. 위의 연대가 맞는다면 7촌 당숙인 일로의 동환공이 동림동에서 12년을 사셨다니 그 집으로 오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연환공의 아버지 동균공의 묘가 죽곡리에 있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어려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연환은 금송리로 세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향동에 사는 박무웅(朴茂雄)의 할아버지 재근은 결혼하면서 향동으로 이거하였다. 정석은 결혼하면서 다시 금산부락으로 옮겼다. 석정리의 무안박씨 음죽파와는 21세 손에서 갈라졌으며 같은 족보 내에 있는 친척이다.
박정길은 교장으로 정년을 맞았고 정길의 아들과 딸들은 주로 교육계에 근무하고 있으며 치과의사도 있다. 병석과 갑석은 농사를 지으면서 한옥을 짓는 기술이 있었으며 그 자손들은 교육계와 삼성전자 부장으로 신학과와 전기학 분야에도 근무하고 있다. 정석의 자손들은 함평군청 사무관, 전기분야, 전남대학교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무안박씨의 연원>
박씨는 모두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로부터 연유하였는바, 통일신라 시대 무안에 살던 신라 박씨는 고려조에서 토성 분정 정책에 따라 본관을 무안으로 정하고 고려초 성종 왕조에서 국자감(國子監)의 좨주(祭酒) 벼슬을 하신 박진승(朴進昇)공이 전라남도 무안을 식읍으로 받아 무안박씨의 문중을 열었다.
고려사 열전에 기록하기를 현종(顯宗 1009~1031)왕조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고위직에 오르신 무안박씨 2세 섬(暹)공의 선향(先鄕)이 무안(務安)이라 하였으니 박씨는 무안지방의 영향력 있는 세가(世家)였음을 고증하고 있다. 인종(仁宗) 때에 승중(昇中)이 정승(政丞) 중서시랑평장사요 충렬왕 때에 문오(文晤)가 정승(政丞) 문하시랑평장사이다. 이로써 무안박씨가 권문세가(權門世家)로 불리게 된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는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인 호조판서 의룡(義龍)의 후손들이 서울 한성부로 옮겨와 터전을 잡고 조선조에서 관직에 나아갔다. 일부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사방에 흩어져 터를 잡아 문호를 열고 세가를 이루어 살고 있다.
<무안 박씨 음죽파(찬선공파)>
음죽파의 파조이신 박함(朴咸)은 무안박씨 중조이신 박진승(朴進昇)의 13세 손으로 1398년에 경저에서 출생하였다. 단종 임금님의 시강 경연이 되어 찬선(贊善)이란 벼슬로 성균관 제주였다. 1456년(세조 원년 병자)에 단종께서 불운을 만나니 벼슬을 버리고 1475년 승하하실 때까지 산림에 묻혀 지냈다. 그곳이 지금의 이천시 장호원읍 대서리(봉미산 아래)향동 마을이었으니 그 옛이름을 따서 음죽파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도 그의 장남 원근(元根)의 후손들은 이천시 장호원읍 대서1리(행동), 대서2리(대정), 어석2리(미륵댕이), 송산4리(산대) 충청북도 충주 일원에 세거지를 이루어 살고 있다.
충주에 세거지가 이루어진 것은 19세 운가정 자(稵)공으로부터인데 당시에 병자호란 전의 시대로 국내정세가 갑론을박으로 소요일극함에 따라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충주 신당리골에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삼아 생활하였다. 충주댐으로 수몰되자 이장하여 살미면 용천리 산 63번지에 가족묘로 합장하였다.
<무안박씨 음죽파의 호남진출>
음죽파의 시조인 함(咸)의 둘째 아들인 숙근(淑根)의 후손인 17세 만천(萬天, 1549-1610)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나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나주의 나대용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거북선 안에 무기를 배치하고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여 많은 군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주군 문평면 죽곡마을에 세거지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호남의 무안박씨 음죽파가 자리잡게 된 이유이다. 만천은 나주군 문평면 송산리 산32-2에 이런 사연을 적은 비석과 함께 누워계신다. 함평의 박행석이 이 만천의 무덤 주변으로 아버지 공(恭)과 그의 후손들을 모셔두었다. 호남 음죽파들의 조상이 되는 분들이다. 4월 시제 때면 호남의 음죽파들이 같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마음의 고향이다.
<책임작성자> |
| 이름 : 박무웅(朴茂雄) |
본관 : 무안박씨 음죽파 31세손 |
힉력 : 남교 5회, 학중 10회, 학고 9회 |
경력 : 금송리 이장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