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면도기
세면장 선반 위를 무심히 보다
녹슨 면도기를 발견했다
말라버린 비눗물 사이에
아버지 수염
그대로 묻어 있다
왜 버리지 않으셨을까
날마다 동짓밤
어머니를 지킨 것은
까끌한 수염 몇 조각이었을 거다
저승 가실 때까지
곁에 두고 싶었을 거다
내가 받는 전화
세월 갈수록
내가 걸지 않으면
내 휴대폰은
하루 종일 벙어리입니다
어쩌다
빙하 속의 침묵을 깨고
벨소리라도 울리면
발신자 확인도 제대로 못하는
나의 시력을 우롱이나 하듯
걸려온 전화들은
십중팔구 음란전화거나,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지연과 학연을 팔며
은근히 친한 척을 하다
끝내는 본색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공시지가 만원도 안 되는 땅을
열 배나 뻥튀기해서 부르며
삼 년만 지나면 다섯 배는 남는다고
미끼에 걸려고 하는 여자의 전화
끊으려 하면 파리처럼 달라붙어
열 번을 찍으려는 여자에게
그렇게 자비로우면
당신 형제자매 일가친척
부자나 만들라고
꽥 소리를 지르고는
휴대폰을 다시 빙하 속에 가둔다
이런 날은 공연히 화가 나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전어창자 같은 성질 참으며
긴 신호음을 기다린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삐- 소리가 나면
음성녹음을 하라고 한다
삐- 소리가 울리자
나는 소리쳤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아들 졸업식 날에
잠자는 시간 빼면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데
아내와 내가 가정의 부모라면
선생님들은 부모 이상의 부모인데
무심하게 학교 한 번 찾아간 일이 없기에
아들놈 졸업식 가는 길
가출한 학생 학생과에 끌려가는 기분이다
우리들 때는
눈보라 휘날리는 엄동설한에도
운동장에서 이별연습을 했는데
졸업식 끝나고 돌아설 땐
입영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로 떠나는 날 같았는데
요즈음은 온풍기 훈훈한 교실에서
대형 모니터를 보며 졸업식을 거행 한다
얼굴 마주 보고 얘기할 때와
전화기로 얘기할 때가 다른데
식이 끝나면
식권 나누어주듯 주는 졸업장 받고는
예식장에 밥 먹으러 가듯 나가면 끝나는 졸업식
아들놈 교실 밖으로 나오자
우리도 공식처럼 꽃다발을 주고
사진 한 장 찍고 졸업식 소감을 물었다
“아빠, 피자 먹고 싶어”
이것이 졸업식 소감 전부였다
아부지요
백발성성해도
제게는 구절초였고
저승꽃 피었어도
우담바라였습니다
자식들 공부 많이 못 시켜
늘 미안해하던 당신이었어도,
검정고무신만 사주셨어도,
월사금 못 내어 교무실에 끌려가게 했어도
당신은 저의 방패였고
성벽이었습니다
아부지요
저를 아빠라 부르던 아이들이
문득 남처럼 느껴질 때
세상 살다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았을 때
저 혼자 허허벌판에 서 있었을 때
징징 울며
당신 산소로 달려갑니다
아부지요
아부지요
아부지요
빈 메아리 듣다
돌아오는 밤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규야, 우리 규야
니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놈 아니고
내 새끼다”
내 새끼다
내 새끼다
내 새끼다……
달을 따라오시며
아버지 목이 쉬도록 외칩니다
꽃에게
비록 베란다에 있지만
보온도 안 되는 너의 집,
화분에서
겨울을 난다는 것은
어린 날 성에 낀 벽 속에서 잠자던
우리들의 모습일 거다
재래식 화장실이 무서워
고향 집에도 못 가는 요즈음 아이들
우리들처럼 성에 낀 방에서 자고 나면
폐렴이 걸려 죽을지도 모르지
이사를 오면서 버릴까 하다가
그냥 들고 와서는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떠밀어 놓았는데
버리지 않고 데리고 온 것만도 감격이었을까
이 봄 꽃을 피우네
외박하고 조간신문과 함께 들어온 날
하품으로 나를 맞는 아내 얼굴 볼 수 없어
고개를 들지 못하네
멀찌감치 서서
눈길을 피하네
부치지 못하는 편지
비 오는 날은
베란다 유리창에
편지를 씁니다
아부지요
저승에도 비 내리지요
어릴 적 초가집처럼
비는 안 새는지요
꽃 좋아하시는 것 알지만
비 맞고 꽃모종 하지 마시고
비 그치면 하이소
어머니요
마실도 못 가고
답답하시지예
기름 아깝다고 떨지 마시고
보일러 따끈하게 때이소
감기 드시면 기름값보다
돈 더 듭니다
아들아
뭐 하고 있노
밥이 보약이다
밥은 묵었나
가시나들에게 한눈팔지 말고
공부 단디 하거라
눈물 찍어 편지를 쓰지만
한 번도 부치지 못했다
장래희망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를 쓰시던 선생님께서
장래희망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대통령
육군 대장
판사 의사 과학자
하고 말하려다
공부도 못 하는 놈이
주제 파악도 못 한다고
나쁜 머리통 맞을 것 같아
입에서 나오는 말 쥐어 뜯어버리고
아부지 하고 말하다
아이들 웃게 한 죄로
담임선생님께
꿀밤 한 대 맞았습니다
내 아이들
나 어떻게 볼지 몰라도
나
꿈을 이루었습니다
잔업을 끝내고 돌아오며
하늘이 나를 사내로 내려 보낸
이유
이제야 알았습니다
한 여자를 짝 지워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게 한 것과
세 사람을 위해 살라고
족쇄를 채운 것
이제야 알았습니다
고슴도치 1
아무리 주관적으로 봐도
이건 아니다
곱슬머리에
까만 얼굴
면도칼로 찢어놓다 만 눈
아내 눈에 콩깍지가 끼지 않았다면
나 어떻게 되었을까
보나마나지
무능한 남편
물리치지 않고
고슴도치로 키우고 있는 아내
나의 황후여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고슴도치 2
철없는 나를
아내는 농 삼아
또 하나의 아들을 키우고 있다고 말하지만
잠자리에 함께 누우면
내 수염이 까끌하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는
그녀에게 진정한 고슴도치는 아닙니다
어머니
저승의 아버지
외롭다고 칭얼대도
제발 가지 마옵소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치매도 걸리지 마옵소서
당신 가시면
이 아들놈
더 이상
고슴도치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봉급날
봉급날입니다
세계에서
배를 가장 잘 만드는 사내들이 받은 것은
봉급명세서뿐
봉급은 통장을 통해
고스란히 아내들에게 돌아가고
이 날
회사 앞 대폿집은
파리를 날립니다
오일장날
어머니 잠 못 자고
몇 날 며칠 길쌈한 베 팔아
탁배기 한 잔 걸치고
자반갈치 몇 마리
새끼에 꿰어 들고 오던 아버지
그립습니다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 반찬엔 손대지 말라시던
어머니의 엄명 그립습니다
봉급 다음날
회사 담장에
줄장미 피었어도
핀 줄 모르고
잔업까지 했지만
봉급 다음날
우리는 무일푼입니다
언제부턴가
구석기 시대 모계사회에서
찍 소리 못하고
더부살이 하고 있습니다
다람쥐야 미안하다
벌초하고 내려오다
풀 섶에 떨어진
도토리 다섯 알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나 때문에
오늘밤
다람쥐 한 놈
밤새 배고프겠다
변종인간
어릴 적 젖배를 곯았을까
아니면 애정 결핍증일까
마시기를 좋아해서
홀짝 홀짝 마시는 커피 하루에 열 잔은 되는 것 같다
출근해서 일 시작 전에 한 잔
아침회의 하며 한 잔
회의 마치고 담배 피면서 한 잔
목마르면 한 잔
일하다 따분하면 한 잔
점심 먹고 마시고
오후 일 시작하기 전 담배 한 대 피우며 마시고
업무 협의 한답시고 모여서 마시고
방문객 맞는다고 마시고
싫은 소리 들으면 기분 잡쳐서 마시고
퇴근시간엔 일 마무리 한다고 마신다
집에 오면
베란다에서 피우는 담배도
눈총을 받는데
커피까지 마시려 들면
아내는 사랑의 이름으로
곤장을 칠 것이다
남들은
하루에 두 잔만 마셔도
밤잠을 못 잔다고 하던데
잠 잘 자고
여지껏 안 죽고 살아 있는 것 보면
나는 변종인간
시험 때마다
잠 안 오는 약 먹어도
먹자마자 꿈나라로 가던
학창시절처럼
내게 커피는 최상의 수면제다
새 달력을 펼치면
새 달력을 받으면
징검다리 연휴부터 살피고
가족들의 대소사에
붉은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친다
3순위 아버지 기일
2순위 어머님 생신
1순위 아이들 생일
0순위
국경일보다
더 소중한
아내의 생일,
나를 수렴청정하고 있는
황후와의
결혼기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