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使東來 : 사신(使臣)을 받들어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 아니라, 봉사(奉使)는 봉명사 신(奉命使臣)의 줄임말로서, 임금의 명을 받드는 사신의 자격으로 동래했다는 뜻 이다.
*中和 : 평안도에 있는 지역.
자(字)는 자운, 호(號)는 암곡, 또는 초수라고도 한다. 중원 홍농사람이다. 고려 광종 11년 경신년에 [서기 960년] 태학사로서 봉명사신(奉命使臣)의 자격으로 동래(東來)하였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 태보(正一品), 평장사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선의이다. 계해 10월 15일에 나서, 계묘 9월 9일에 졸하였으니, 101세를 누리셨다. 묘는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배(配)는 모씨, 또는 계씨라고도 한다. ○일설에 선의공께서는 기주 주악산 아래에서 태어났고, 동래(東來)시 중화 당악산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어느 보(譜)에서는 선의공이 동래시에 신경, 홍경, 곽경, 원경, 노경, 장경, 이경 등 칠학사가 공과 더불어 함께 왔을 적에 팔경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일설에는 공의 얼굴은 까맣고, 몸의 빛깔은 하얗고, 이마가 높고, 코가 길고, 귀가 뒤로 젖혀져 있고, 뼈대가 삼촌이며, 발은 한척 반이나 컸다고 한다.
#. 유독 경(鏡)을 휘(諱)로 하는 성씨들의 시조(始祖)들이 꽤 있습니다. 아마도 신라말기와 고려초기에 중국에서 팔학사(八學士)들이 종종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며, 그들이 모두 경(鏡)을 이름으로 썼는데 그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무슨 다른 내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에는 참고로 경(鏡)을 이름자로 삼는 다른 성씨의 시조들입니다. 그러나 선의(宣懿)공과 함께 동래하였다는 나머지 7경(鏡)들과는 그 동래(東來)시기를 볼 때 별 관계가 없는 분들 같습니다.
○ 郭鏡 : 현풍(玄豊) 곽씨의 시조로 관서지방의 홍농 사람으로 고려 인종11년 (서기 1133 년)에 귀화하여 금자광록대부,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고, 포산(지금의 현풍)君에 봉해졌다.
○ 辛鏡 : 영산(靈山) 신씨의 시조로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 元鏡 : 원주 원씨 응암 운곡계의 시조로, 당나라 태종 때 우리나라로 파견왔다.
○ 魏鏡 : 중국 당나라 관서 홍농 사람으로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도예지사를 청하 자 보내준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아랑상서 시중에 이 르렀으며 회주(장흥)君에 봉해졌다.
二世 高麗 太祖 己亥生 (AD 939)
海貫
門下大雅贊成事,墓坡州郡臨津面沙?里卯坐῁
配西海郡夫人金氏,墓捽῁正廟丙午,得誌石Ҷ改封築,行歲一祭῁
*誌石 : 죽은 사람의 성명, 행적, 등을 적어 무덤앞에 묻어둔 판석(板石).
*卯坐 : 무덤의 방향, 즉 좌향(坐向)을 말한다. 묘(卯)는 그 방위(方位)를 나타낸다.
*封築 : 무덤을 만들기 위해 흙을 쌓아 올림.
벼슬은 문하대아찬성사, 묘는 파주군 임해면 사?리 묘방향에 있다. [*현존한다*]
배(配)는 서해군부인 김씨, 묘는 합장. 조선 정조(正祖) 병오년에 지석을 찾아, 봉축을 고쳐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三世 高麗 光宗 甲戊生 (AD 749)
瀛(영) 해관의 둘째아들, 첫째는 胤(윤)
副元帥
配安氏῁父判書繼泳῁墓庭山῁
벼슬은 부원수.
배(配)는 안씨, 부(父)는 판서벼슬의 이름은 계영이고, 묘는 정산이다.
四世 高麗穆宗庚子生(AD 1000)
得尙(득상)
平章事
配庾氏,墓長湍῁
벼슬은 평장사.
배(配)는 유씨이고 묘는 장단에 있다.
五世 顯宗甲午生 (AD 1024)
겁(나무 목 木변의 及자)
字天一,號雲谷῁領同政῁
配門氏῁父中郞將必遠῁墓衿川῁
자는 천일, 호는 운곡이며, 벼슬은 영동정이다.
배(配)는 문씨, 부(父)는 중랑장, 이름은 필원이다. 묘는 금천.
六世 文宗任辰生(AD 1052)
宗海(종해)
字文淑,號雲巖῁門下侍郞平章事,封忠原伯,娶居忠州,因以爲貫῁事載靑邱事林及海東姓譜῁
配金氏῁父平章事汝信῁墓上同῁
*忠原 : 지금의 忠州의 옛 이름.
자는 문숙, 호는 운암,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 충원백에 봉해졌고, 충주에서 장가들어 살았다. 그러한 연유로 그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이 사실은 청구사림과 해동성보에 실려 있다.
*傍註 : 족보에서 선조의 諱(죽은 사람의 이름을 휘라 한다.)옆에 그 생졸연일, 행적, 배위(配位) 등을 적어 놓은 것, 또는 그 적는 장소.
벼슬은 평장사이며, 공의 생김새가 기이하고, 겨드랑이 아래에는 물고기 비늘이 세 개가 있어, 고려왕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어씨성을 주었다. 충주 어씨보(譜)를 보건대, 공의 위로 5세조의 이름을 방주에 싣되, 단 공을 고려조의 시초로 삼고 있다. [時자는 始로 써야 옳을 것 같다.]
배(配)는 김씨.
#. 어씨에는 충주 어씨와 함종 어씨가 있다. 참고로 충주 어씨의 인구수는 1985년 기준으로 3,053명이고, 함종 어씨는 同年기준으로 10,952명이다. 충주 지씨는 同年기준으로 118,410명이다. 충주 어씨 중에는 조선 세종 때의 공신 어유소(魚有沼)가 유명하며, 그가 예성군(蘂城君, 예성은 충주의 옛 지역명)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충주로 삼았다.
七世 高麗文宗庚申生(AD1080)
憲 (헌)
字希瞻,號省谷῁門下平章事῁諡文道῁
配卞氏῁墓庭山῁
자는 희첨, 호는 성곡,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 시호(諡號)는 문도이다.
배(配)는 변씨, 묘는 정산이다.
八世 高麗肅宗任午生(AD 1102)
愼耉 (신구)
字子益,號獨齋῁刑部尙書,門下平章事῁諡恭道῁
配李氏῁墓豊德῁
자는 자익, 호는 독재, 벼슬은 형부상서, 문하평장사이고, 시호(諡號)는 공도이다.
배(配) 는 이씨, 묘는 풍덕이다.
九世 高麗仁宗乙巳生(AD 1125)
希
禮部尙書῁
配許氏῁墓上同῁
벼슬은 예부상서.
배(配)는 허씨, 묘는 위와 같다.
十世 穆宗秉午生(AD 1150)
好文 (호문)
字淸淑,號梅軒῁門下平章事῁諡忠簡῁
配李氏῁父尙書根῁墓交河῁
자는 청숙, 호는 매헌, 벼슬은 문하평장사이고, 시호(諡號)는 충간이다.
배(配)는 이씨, 父는 벼슬이 상서, 이름은 근이다. 묘는 교하이다.
(十世)
資深 (자심)
平章事῁按麗史,明宗十六年,公爲按撫使,征耽羅῁神宗五年,拜慶尙按察使῁
配金氏,墓洪山
*耽羅 : 제주도의 옛 이름
*拜 : 벼슬을 제수하다.
벼슬은 평장사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명종 15년, 공이 안무사가 되어 탐라를 정벌하였다. 신종 5년에는 경상도 안찰사에 제수되었다.
배(配) 는 김씨이고, 묘는 홍산이다.
#. 고려사(高麗史)에 공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즉, 위에서 기술한 공의 행적은 고려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十一世 高麗明宗甲午生(AD 1174)
秀 (수)
平章事῁
配裵氏῁墓交河῁
벼슬은 평장사이다.
배(配)는 배씨이고, 묘는 교하이다.
十二世 神宗壬戊生(AD 1202)
聖三 (성삼)
吏部尙書῁集賢殿太學士῁
配唐氏῁父永修῁墓長湍῁
벼슬은 이부상서, 집현전 태학사를 지냈다.
배(配) 는 당씨이고, 父의 이름은 영수이다. 묘는 장단이다.
十三世 高麗高宗乙酉生(AD 1225)
翕 (흡)
字和之,號寒竹῁門下平章事῁諡忠文Ҷ一本作良簡῁
配趙氏῁墓交河῁
*一本 : 어느 책, 다른 책.
자는 화지, 호는 한죽, 벼슬은 문하평장사이고, 시호(諡號)는 충문, 또는 어느 본(本)에는 양간이라고도 되어 있다.
배(配)는 조씨이고, 묘는 교하이다.
十四世 高麗高宗任子生(AD1252)
德老 (덕노), 둘째 德溟(덕명)
字聖華,號石川῁戶部尙書,平章事῁居松京左樂谷῁
配光山金氏῁墓開城Ҷ西面Ҷ石城山南後Ҷ西江Ҷ亥坐῁
자는 성화, 호는 석천, 벼슬은 호부상서, 평장사이고, 송경 좌락곡에 살았다.
배(配)는 광산 김씨, 묘는 개성 서면 석성산 남쪽아래 서강이며, 좌향은 해방향이다.
十五世 高麗忠列王乙亥生(AD 1275)
演(연)
贊成事,贈門下平章事῁
配宋氏῁墓楊州῁
벼슬은 찬성사, 문하평장사에 추증되다.
배(配)는 송씨, 묘는 양주이다.
十五世, 13세 흡의 손자요, 13세 흡의 둘째 아들 덕명의 아들)
奫 (윤)
吏部尙書῁按麗史,公以贊成事屢立戰功῁禑王三年,以李仁任黨下獄死῁子益謙從坐῁
配順興安氏῁墓豊德῁
벼슬은 이부상서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공은 찬성사로서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우왕 3년에 이인임의 무리로 몰려 옥사하였고, 아들 익겸은 따라 죽었다.
배(配)는 순흥 안씨, 묘는 풍덕이다.
#. ?∼1377(우왕 3). 고려의 무신(武臣). 무녀(巫女)의 소생으로서 [父는 員外郞 諱 德溟] 처음 군졸에서 출발하였으나 점차 무공을 세워 공민왕 말년에는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었으며, 서북면원수·경상도 상원수 등 출정군(出征軍)의 지휘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우왕 때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재상에 올랐는데, 당시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과 한패가 되어 친원 정책을 비판하는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박상충(朴尙衷) 등을 탄압하였다. 관직과 옥(獄)을 팔아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심복들을 대간에 배치, 그들을 사주하여 위복(威福)을 부렸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익겸(益謙)을 왜구토벌의 지휘관으로 내보내는 문제 등으로 점차 이인임과 사이가 나빠졌는데, 기회를 엿보던 이인임이 김승득(金承得)·이열(李悅)·화지원(華之元)【高麗史에서는 이들이 스스로 지문사걸(池門四傑)이라 자칭했다 함】 등 지윤의 심복들을 정부비방죄로 몰아 유배시키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지신사(知申事) 김윤승(金允升)과 공모하여 이인임·최영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함으로써 가족·당여(黨與)와 함께 처형되었다. (以上,高麗史姦臣篇, 高麗史節要, 朝鮮太祖實錄]
윤의 아들 益謙, 得鱗은 족보에 별 기사가 없고,
첫째딸
女
鎭安大君 芳雨
諡靖懿῁子奉寧君福根Ҷ元尹德根῁女李叔畝῁知敦寧Ҷ叔畝Ҷ曾孫Ҷ潸參贊Ҷ號陰崖῁
公의 딸은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太祖의 長子로서 開國후 얼마 안 있어 卒하였다)에게 출가하였다.
자는 뇌성, 호는 월정, 벼슬은 시랑평장사, 상원수, 시호는 충의, 충목왕 때에 최영, 안우경, 이순, 박춘 등과 더불어 공을 세웠다. 이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배(配)는 밀양 박씨, 父는 중랑장, 이름은 충원이고, 묘는 문경 마성면 정곡 성주봉 아랫 마을 뒷편, 좌향은 경방향, 합장되어 있다. 단종조 계유년의 화가 있을 때, 묘를 실전하였으나, 고종 을축년에 이르러, 봉분을 [奉은 封의 誤字] 찾아 개축하여, 제전을 마련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묘는 현존한다*]
#. 단종 "계유년의 화"로 묘를 실전하였다는 것은, 공의 5대손인 절제사(節制使) 봉원(逢遠)공이 안평대군의 무리로 몰려, 단종 폐위시 연류되어 화를 입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후에 절제사 공은 복권되고 그 분을 추모하는 뜻에서 안동(安東)에 우송정(友松亭)을 세웠다. (아래 참조)
자는 하성, 호는 월송, 벼슬은 광정대부, 문하시랑 겸 서북면 상원수, 찬성사이고, 시호는 충무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공민조에 당하여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문헌지에 상세히 나와 있다.
배(配)는 김씨.
#. 고려의 대신(大臣). 충목왕 때 현릉직(顯陵直)을 거쳐, 1362년(공민왕 11) 판전객시로서 서북면 지병마사가 되고, 앞서 홍건적 침입 때 안우(安祐)를 도와 경성 수복에 공을 세워서, 이듬해 1등 공신이 되었으며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전공판서(典工判書)에 이르러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 덕흥군(德興君) 혜가 원나라에 의해 고려왕에 임명되어 입국한다는 소식이 있자, 전공판서로서 서북면 도순무사가 되어 용주(龍州, 지금의 龍城)에 주둔하였다가 덕흥군이 물러간 뒤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1365년 밀직사, 지도첨의·상원수(知都僉議上元帥)가 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교동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 1367년 서북면 도순문사가 되었다. 1369년 서북면 상원수·평양윤이 되고, 이듬해 원나라에서 평장사를 지낸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김빠이앤(金伯顔) 등과 동녕부를 근거로 서북면에 침입하자 부원수 양백안(楊伯顔), 안주상만호 임견미(林堅味), 이성계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이를 물리쳐 동녕부를 회복하고 북원과 국교를 단절케 했다. (以上,高麗史池龍壽篇, 高麗史節要)
(子) 瓚 : 吏曹佐郞῁太祖革正之初,以不服臣謫明川῁後徙鏡城῁
配裵氏῁墓明川西面古城洞橡原,失傳῁
벼슬은 이조좌랑, 태조의 혁정(革正) 초기에 불복신(不腹臣)으로 명천에 유배되고, 후에 경성으로 이주하였다.
*筊 : 오자(誤字)인 듯하다. 술어가 쓰여야 하는데(拄+술어), 아래에서는 문맥상 맞게 풀었다.
벼슬은 문하찬성사, 판호조사, 군기윤을 지냈고, 병의익대좌명공신으로 추증되었다. 후손 덕해공이(池德海 : 구보 서문을 썼다.) 지은 족보 서문을 삼가 살펴보건대, 즉 "공은 충혜왕을 보좌하고, 그 아들 충의군은 공민·공양왕을 대대로 섬기었다."라고 간략히 말하고 있다. 입조(立朝)하여서는 포은, 목은과 더불어 명의와 절개로 함께 일컬어졌으니, 역성혁명의 시기에 이르러는 죄를 면하지 못하였다. 유배된 후 3년이 되어서, 임신년 4월에 죽은 즉, 그 때를 계산해봄에 공이 세상에 있지 않음이 오래 되었는데도 좌명훈적에 들어 있으니 후인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공이 태조에게 잠룡시절에 오래된 약속이 있어 일찍이 위난의 시절을 지켜낸 것으로 그 공을 추록한 듯 하다. 문헌지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배(配)는 영가군부인 송씨이고, 묘는 [현재] 당진군 합덕면 소소리 태곡에 있으며, 좌향은 곤방향이고, 쌍분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그 묘를 실전하였으나, 고종때 다시 임진년에 후손 헌종, 헌영등이 봉축[奉築이 아니라, 封築이 옳음]을 찾아내고, 석의를 갖춘 다음, 후손 재우가 묘문을 지었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묘는 현존한다*]
*彛初의 獄 : 고려말 이성계의 세력이 커지자, 명나라 사신으로 있던 尹彛와 李初가 명 황제에 호소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어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 당시 사 신으로 명나에 머물러 있던 순안군(順安君) 방(昉),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조반(趙懈)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께 알렸으므로 공양왕 2년 (1390년) 옥사 가 크게 일어 났으니 이를 彛初의 獄이라 한다.
*流 : 유배(流配)되었다는 뜻.
*遂 : 마침내.
*尋 : 얼마 있다가
*棘圍 : 가시로 둘레를 친다는 말로, 여기서는 역성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시(감금?)한다는 의미인 듯 하다.
*姑 : 우선
호는 의재, 벼슬은 벽상삼한삼중대광, 판삼사사, 판호조사, 문하평장사, 충의군, 충원부원군에 올랐다. 공민조에 삼사사를 여러번 제수하였다. 우왕, 창왕 때에는 태조와 정몽주 등을 따라 공양왕을 책립하여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의 호를 받고, 충의군에 올랐다. 공양왕 2년 경오년에, 이초의 옥이 일어나자 삼척에 유배되었고, 얼마 안 있어 외방에서 편리를 따르도록 허락되어 마침내 면천에서 거처하다가 임신년 4월에 졸하였다. 문헌지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배(配)는 영가군부인 이천 서씨, 부(父)는 승지벼슬의 이름은 욱, 조(祖)는 집의벼슬의 이름은 인, 증조(曾祖)는 예빈벼슬의 이름은 윤찬, 외조(外祖)는 여산 송씨의 이름은 자연이다. 묘는 당진군 합덕면 석우리 분토동에 소재하고 좌향은 자(子)방향, 합장되어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묘를 실전하였으나, 정조 경신년에 후손 덕진이 지석을 찾아내고, 봉축을 고치고, 석의를 갖추고, 제전을 두었다. [*묘는 현존한다*] 갑오보와 을유보를 삼가 살펴 보건대, 공이 삼척에 유배된 후, 면천으로 이주하였는데, 태조의 혁정의 시절이래로 극위가 매우 심하여 마침내 13일간 단식하다가 졸하였다고 하는데, 이상의 사실은 국사와 상위한 고로, 우선은 생략하고 기록하지는 않으니, 이것으로써 후인이 바로 밝혀주기를 기다리노라.
#. ?∼1392(공양왕 4). 고려의 대신(大臣). 공민왕 때에 삼사우윤에 이르고, 우왕 때에 예의판서에 전보되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여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나 1381년에 지밀직사사로서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가 되어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패퇴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양광·전라·경상도 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로 기용되어 원수 이을진(李乙珍)과 함께 반남현(潘南縣)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4년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라도도원수가 되었고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나가 왜를 쳤다. 1388년에는 요동(遼東) 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하였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으나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된 김종연(金宗衍)의 당인(黨人)으로 지적되어 탄핵을 받아 삼척에 유배되었다. 당시의 대사헌 김사형(金士衡) 등이 그의 죄를 덜어 공신과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으나 낭사(郎舍) 진의귀(陳義貴)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삼척에 귀양보냈으며 가산은 적몰(籍沒)하였다. 1391년 처(妻)의 재종(再從) 왕익부(王益富)가 충선왕의 증손이 된다고 자칭하는 것을 정양군(定陽君) 우(瑀)가 알고서 용기가 왕씨의 후예를 숨겨두었다가 후에 모반하여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이라하여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벽지에 감금하였으나, 뒤에 사면받고 귀양지에서 죽었다. 비록 역모와 관련되어 불우한 최후를 맞기는 하였으나, 그의 행동은 전장(戰場)에서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에 비교되었으며,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 [두 사람은 唐나라 때,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명장]과 같은 자질을 소유한 자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以上, 高麗史池湧奇篇, 高麗史節要, 朝鮮太祖實錄,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사교과서에 公이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왔었는데 요즘도 있는지 궁금함)
公의 딸은 해주사람 최용에게 출가하다. 벼슬은 서운관부정이다. (최용의) 父는 벼슬은 총랑, 이름은 득전이고, (최용은) 충헌공 유엄의 증손이다. 세조 병자년에 소릉(단종의 어머니인 덕혜왕후의 능)으로 인하여 (최용의) 외조는 화를 입다. (최용의) 아들은 이름이 최륜이고, (최용의) 딸은 화산 부원군 권전에게 출가하다. 부원군의 시호는 경혜이고, 덕혜왕후를 낳았다.
경(卿)은 영매(英邁)한 자질과 웅위(雄偉)한 기량으로 항상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과 같은 충실(忠實)을 마음속에 지니고,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을 겸하였으니, 군사(軍士)들을 위무할 때는 부순(捦循)의 효(效)가 있으며, 전진(戰陣)에 임해서는 적개(敵愾)의 공(功)이 있었다. 현릉(玄陵: 恭愍王으로 생각됨)께서 붕어하신 뒤로 간활(姦猾)한 무리들이 용사(用事)하니, 우창(禑昌) 부자(父子)가 끼어들어 왕위를 훔쳐, 기강(紀綱)을 어지럽히고, 이윤(彛倫)을 해쳤으니, 구묘(九廟)가 진경(震驚)하였다. 경(卿)은 시중(侍中) 이성계와 함께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결의(決義) 정책(定策)하여, 내가 왕씨 혈통에 가장 가깝기에, 벌써 떨어진 정통(正統)의 실마리를 잇게하였으니, 이미 끊어진 제사를 다시 잇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보면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한(漢)나라를 안정시키고, 적인걸(狄人傑)과 장간지(張柬之)가 당(唐: 두사람은 唐나라의 中興功臣임)나라를 회복했던 것과 같은 찬란함이 있다. 일찍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관작을 높여 조고(祖考)를 봉하고(:15世 諱演公은 위에서 보았듯이 門下平章事에 추층되었음), 각(閣)을 세워 그 형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그 적장(嫡長: 諱湧奇公을 가리킴)은 충의(忠義)의 호(號)를 받고(: 忠義君에 봉해진 것을 말함), 그 지서(支庶: 毅齋公의 남동생이 셋이 더 있음)는 영세(永世)의 유(宥: 조그만 죄과는 면제함)를 입게 되었으며, 토전(土田)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그 공(功)이 큰 데, 그 상(賞)이 작음을 생각하면,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기에 부족하여, 이제 경(卿)에게 은정(銀錠)과 마필(馬匹), 견백(絹帛)을 하사하노라.
이조 세종조에,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충청안무사, 판의주 목사, 그리고, 충청 수사선생의 안(案)을 삼가 살펴 보건대, 公은 덕을 베풀어 신해년에 도임하였고, 임자년에 종성 절제사로 승진하여 떠났다라고 되어 있다. 묘는 양주군 미금면 가운리 가좌곡에 소재하고 좌향은 해(亥)방향이다. [*묘는 현존한다* *以下다른 조상들의 경우도 모두 묘는 현존한다]
배(配)는 정부인 최씨, 부(父)는 목사벼슬의 이름은 윤우, 외조(外祖)는 문정공 능성 구씨의 이름은 위이다. 묘는 공의 묘의 한 단(段) 아래에 있고, 좌향은 자(子)방향이다. 두 묘 모두 묘의 비석이 있다.
#. 高麗史池湧奇篇 참고하시기 바람.
#. 世宗實錄에 公에 대한 언급이 10여 차례 나오니 참고하시기 바람.
제가 세종 실록을 열람하였는데 열람할 당시 정리해두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지금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公은 위에서 언급한 벼슬 외에도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셨고, 卒하였을 때는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어 조문(弔問)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실록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선대의 휘(諱)를 가만히 상고해 볼 때, 시조(始祖) 선의(宣懿)공으로부터 20世祖까지 이름자가 한 글자, 두 글자, 한 글자, 두 글자 이런식으로 규칙성을 보인다. 이러한 규칙성이 지켜지지 않는 계통도 있지만 대체로 상당히 잘 지켜져 내려왔다. 지금과 같은 항렬자를 지켜서 작명(作名)한 것은 어느 성씨이든 조선 초기를 지나서 중기에 접어 들면서의 일로서 고려 시대에는 어느 성씨이고 항렬자를 쓰지 않았지만 충주 지씨 선세(先世)들의 휘(諱)자가 일정한 규칙을 보인다는 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에 이는 아마도 충주 지씨 선조들께서 작명시 지켜온 내력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봅니다.
#. 충주 지씨는 21세조를 분파조(分派祖)로 하여 40여개의 파로 나누어진다. 단, 27세손인충성군(忠城君)의 후손은 참의공파에서 분파하여 충성군파로 나누어진다.
#. 이상으로 고려시대까지의 조상의 계보를 간략히 마치고, 조선시대 조상의 내력은 그 계보가 방대하므로, 역사적으로 이름난 몇몇 분과 백호의 지계만 시었습니다.
또 다른 휘(諱)는 정(淨, 實錄에는 바로 이 諱字로 되어 있다)이라고도 한다. 字는 희용, 號는 우송정(友松亭)이다. 세종 신해년에 나셨다. 문종때의 경오 문과에 급제하여서 임금의 특지(特旨)로 판사복시사를 제수하다. 단종 계유년에 도승지로서 충청도 절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卒하였다. 안평대군의 무리로 영암에 유배되고, 이에 화를 입으니 바로 이 때가 겨울 11월 10일이었다. 이 일은 삼종실록, 장릉지와 동학초빙기, 그리고 국조실록에 실려 있다. 정조 신해년에 장릉(莊陵: 단종의 능)에 배향하고 식단을 올렸다. 단종으로부터 8계유년에 우송정을 안동군 와룡면 가구동 송정리에 세워서 경모의 뜻을 두었다. 정해년 봄에 동향(同鄕)의 유림들이 이로 인해 제사를 지내고(祖는 俎의 誤字임), 실기(實紀) 한 권을 간행하였다. 문헌지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字는 거원, 진사(進士), 성화(:중국연호)간에 을유 문과에 급제. 벼슬은 이조정랑, 승문교리.
配는 진천 송씨. 父는 윤상, 祖는 전직 벼슬의 이름은 전. 曾祖는 낭장 벼슬의 이름은 광도.
配는 원주 김씨. 父는 부사 벼슬의 이름은 유경, 祖는 정랑 벼슬의 이름은 연간, 曾祖는 판서 벼슬의 이름은 을신, 外祖는 부사 벼슬의 순흥 안씨 이름은 지선. 묘는 승지공 묘 아래로 좌향은 자(子)방향. 묘표가 있다. 삼가 보건대, 공은 이문(吏文: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정통하였다. 그리고 국조방목(國朝榜目: 과거 급제자 명단)에 실려 있다. 어릴 적에는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그 정이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매월당집에 나온다. 자세한 것은 문헌지에 나와 있다.
二十三世
世蓮(세련)
江陵府史
贈吏曺參議
二十三世 (毅齋公曾孫郭山公諱繼江長子經歷公諱允溫派, : 원문과 配位는 족보참조바람)
世涵
생부(生父)는 한보(漢輔)이고, 자(字)는 양중(養仲)이다. 중종(中宗) 갑신(甲申) 생(生)이다. 진사(進士),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옳은 행실과 도의(道義)로 조정(朝廷)에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해(丁亥)년에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 64살이었다. 막내 아들, 달기(達沂)가 정사종훈(靖社從勳)에 오르자 좌승지(左承旨)에 추층되었다. 묘(墓)는 선영(先塋), 왼쪽 기슭, 좌향(坐向)은 경좌(庚坐)이다. 청음(淸陰) 김(金) 문정공(文正公)이 묘문(墓文)을 찬(撰)하였으니, 이르기를, "어찌 하필(何必) 소학(小學)을 읽을 필요가 있으랴? 그저 지씨(池氏) 집안을 보면 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달해(達海), 달문(達汶), 봉휘(鳳輝) 씨 등이 효성순행(孝性純行)으로 선인군자(先人君子: 別提公을 가리킴)를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공(公)이 바로 자신의 몸으로 가르친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하였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쓰다.
(經歷公派, 別提公의 子: 二十四世)
達海
자(字)는 득원(得遠)이고, 호(號)는 송정(松亭)이다. 명종(明宗) 신축(辛丑)년에 생(生)하다. 선조(宣祖) 계유(癸酉) 생원(生員)이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갑자(甲子)년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84살이었다. 묘(墓)는 공주(公州) 우정동(牛井洞) 단평(丹坪)이며,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의 성품(性品)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사람들이 공(公)을 민자건(閔子騫)에 비유하였다. (閔子騫은 孔子의 弟子로 孔門十哲 중의 한 사람이며, 효성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효성(孝誠)으로 인해 사림(士林)에서 글을 올린 일이 있다. 이 일은 공산읍지(公山邑誌: 公山은 지금의 公州)에 실려 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서울에서 공주(公州)로 떠나오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두 능(陵)의 수치(羞恥)가 씻기지 않았는데도 조정(朝廷)에 서는 것이 어찌 열사(烈士)가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 배알(拜謁)하러 갔을 때, 중국인들이 그의 문장(文章)을 만당(晩唐)의 시(詩)에 비할만 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雷峰公의 舊譜序文에도 언급된 사실이다) 기아(箕雅)에 실려있다.
二十四世
永深(영심)
永同縣監
二十四世 (經歷公派, 別提公의 子 )
達海
자(字)는 득원(得遠)이고, 호(號)는 송정(松亭)이다. 명종(明宗) 신축(辛丑)년에 생(生)하다. 선조(宣祖) 계유(癸酉) 생원(生員)이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갑자(甲子)년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84살이었다. 묘(墓)는 공주(公州) 우정동(牛井洞) 단평(丹坪)이며,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의 성품(性品)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사람들이 공(公)을 민자건(閔子騫)에 비유하였다. (閔子騫은 孔子의 弟子로 孔門十哲 중의 한 사람이며, 효성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효성(孝誠)으로 인해 사림(士林)에서 글을 올린 일이 있다. 이 일은 공산읍지(公山邑誌: 公山은 지금의 公州)에 실려 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서울에서 공주(公州)로 떠나오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두 능(陵)의 수치(羞恥)가 씻기지 않았는데도 조정(朝廷)에 서는 것이 어찌 열사(烈士)가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 배알(拜謁)하러 갔을 때, 중국인들이 그의 문장(文章)을 만당(晩唐)의 시(詩)에 비할만 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雷峰公의 舊譜序文에도 언급된 사실이다) 기아(箕雅)에 실려있다.
二十五世
魚躍(어약)
進士軍資縣判官
贈吏曺參議
二十五世 (經歷公派, 松亭公의 子 )
鳳輝
자(字)는 덕이(德而)이고, 호(號)는 부촌(浮村)이다. 명종(明宗) 갑자(甲子) 생(生)이다. 선조(宣祖) 병오(丙午) 진사(進士)이고, 공릉(恭陵) 참봉(參奉)과 왕자(王子) 사부(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병자(丙子)년에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 73살이었다. 묘(墓)는 위와 같고,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은 일찍이 우계(牛溪) 성(成) 선생(先生)을 섬겨, 학문(學問)이 순정(淳正)하고, 효행(孝行)이 순독(淳篤)하였으니, 진사(進士) 임만형(林晩亨) 등 백여인이 함께 소(疎)를 올려 임금께 아뢰었다. 초로계(草盧季)에 실려 있다. (이하, 원문에 誤字가 있는 듯하다) 공(公)은 다만 문고(文稿)를 태(泰)하고, 감사(監司) 죽서(竹西) 이민유(李敏迪) 공(公)이 글을 썼다. 공산읍지(公山邑誌)에 나온다.
字는 수오, 호는 뇌봉. 인조 계미년에 나셨다. 체소 이춘영 선생께 수업하였다. 병자 생원, 갑자 문과에 급제. 벼슬은 춘방을 거쳐 장령에 이르다. 병자호란 때에 충청좌도소모관이 되어 병량(兵糧)을 모으고 근왕하였다.(勤王: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다). 화친이 성립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인조 신사년 8월 13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진무종훈으로써 도승지에 추증하다. 문학과 기절(氣節)이 매우 뛰어났으며, 언관(言官)이 되어서는 함인을[稟鱗: 무엇을 지칭하는지 제가 모르겠지만, 아래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람) 여러번 비판하였다. 문집이 있으며 세상에 간행되었다. 묘는 공주로 지금의 대덕군 탄동면 원송림 오른편 기슭에 있고 좌향은 간(艮)방향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묘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 선생이 글을 쓰고, 서곡 이정영 선생이 전서(篆書)를 하다.
配는 숙부인 추증 파평 윤씨. 父는 참판 추증 이름은 직방, 祖는 생원으로 이름은 상운, 曾祖는 첨추 벼슬의 이름은 평(枰)으로 대사헌 민(慱)의 5세손이다. 外祖는 하동 정씨 이름은 호지. 尹 부인은 기축년에 나서 병인년에 졸하다. 2남 4녀를 기르셨고, 묘는 오른편에 합장하다.
配는 숙부인 성산 이씨. 父는 이름은 구(埦)이고, 曾祖는 양안공 성견기의 후손이다. 外祖는 군수로 평산 신씨 이름은 무(茂)이다. 李 부인은 경술년에 나서 계해년에 졸하다. 1女를 기르셨다. 묘는 공의 왼편에 합장.
#. 1583(선조 16)∼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아버지는 생원(生員) 경청(景淸)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수(璲)의 딸이다. 이춘영(李春英)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생원으로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 유생들이 이에 가담하는 것으로써 벼슬을 얻으려 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조반정후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저작(著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으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향리에 머물고 있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를 전주로 배위(陪衛)하며 《분조일기, 分朝日記: 분조는 국가위기시 왕조를 둘로 나눠 그 계통을 유지하려는 것》 4권을 기록해 올렸다. 뒤에 전적·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예조와 병조의 좌랑, 용강현령, 예조와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사헌부정언으로 있을 때인 1632년 사친추숭(私親追崇: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그의 아버지(私親)를 왕으로 추대(追崇)하려는 것)을 반대한 대사헌 박동헌(朴東憲), 집의 권도(權濤) 등이 화를 당하자 간언을 임무로 하는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 하여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혀 구원함)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다. 그뒤 병조정랑·춘추관기주관·사예·장령·영해부사를 거쳐 1632년 정언(正言)에 거용되어 상경하던 도중 박서(朴?)의 추천으로 충청좌도소모관이 되어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어 모병(募兵)과 모량(募糧)에 힘쓰고 이듬해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 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以上,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字는 수지. 선조 신묘년에 나셨다. 영변통판, 용천·철산부사를 지냈다. 인조 병자년에(병자호란시) 임금의 수레를 호종(扈從: 호위)하였으며 남한산성에서 12월 29일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그 다음해 정축년에 청주에 있는 선영(先塋=先幐)으로 이장하여 첨추공묘의 왼편 임(壬)방향에 모셨다. 공의 지기(志氣)는 웅원하며 또한 장수의 재목이 있었다. 변방에 임하면서 여러번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병자호란시 순절한 다음] 주상(主上)으로부터 급복(給復: 충신, 효자 등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던 일)과 등용(쓰임)을 받았다. 公의 外孫되는 우암 송 문정公(송시열)이 묘문을 찬(撰)하였다. 숙종조에는 정려하였다.(旌閭: 충신, 효자 등을 표창하기 위해 마을에 旌門을 세움). 영조 병자년, 순조 병자년, 그리고 고종 병자년에 각각 관리들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다. 청주 검암사(儉岩祠)와 광주 병천사(秉天祠)에 배향하다. 이 일은 병정사와 존주록에 실려 있다.
配는 정부인 추증 고령 박씨. 父는 찰방 벼슬의 이름은 순성이고 祖는 정랑 벼슬의 이름은 세호, 曾祖는 부제학 벼슬의 이름은 처륜이다. 묘는 합장.
#. 1591(선조 24)∼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변통판으로 300여 군사를 이끌고 운산의 적을 기습, 패주시켰다. 이 전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용천부사가 되었으나 모함하는 자의 참소로 의주에 충군(充軍)되었다. 배소에 있을 때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의 변란에 백의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고 장연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뒤 철산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체찰사 김류(金?)의 비장(裨將)으로서 지략을 발휘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적의 포위 속에 있을 때 김류에게 출전을 간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고 어영포수(御營砲手) 200여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패보를 접한 인조는 매우 슬퍼하고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추증하고 전사자를 수습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以上,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字는 대수, 호는 호산. 광해군 경신년에 나셨다. 우암 송 선생을 사사(師事)하였다. 무자 진사, 병인 문과에 급제. 벼슬은 승지. 숙종 기묘년 12월18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82세이다. 문학과 충효가 저명하여 국조보감에 이 일이 실려 있다. 순종조에 충효와 학행의 사적을 채순(採詢; 묻고 채집)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에 특증(特贈)하고, 장헌(章憲)의 시호(諡號)를 내리다. 대제학 김학진이 시상(諡狀: 시호의 내력)을 찬(撰)하였다. 묘는 父의 묘와 같은 곳이며 묘비가 있다.
配는 정부인 간성 이씨. 父는 진사(進士)로 이름은 선승, 祖는 진사로 이름은 형원, 증조는 좌승지로 이름은 인, 외조는 진사로 청주 김씨 이름은 득락이다. [配는] 임술년에 나서 정축 9월 21일에 졸하였다. 묘는 동원.
配는 정부인 청주 이씨. 父는 이름이 사원. [配의] 기신(忌辰, 忌日)은 6월 1일. 묘는 어랑면 무계동 안마현이고, 좌향은 卯방향. 표석이 있다.
二十六世
世倫(세륜)
준源殿參奉
贈戶曹判書淸與君
22세 한생으로부터 26세 헤륜에 이르기 까지 족보상에 상세가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봐서 그 시기에 별로 빛을 내지 못한듯 싶다.
字는 언숙, 호는 표곡. 선조 계사년에 나셨다. 인조 갑자년에 의병을 규합하여(屟는 糾의 誤字)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3等)에 책록되다. 병인년에는 남해에 나아가 지켰다. 정묘재란시에 다시 공을 세워 의주 판관에 제수되고 서흥 부사로 승진하였다. 병자호란시에 상소(上疏)하여 적진에 나아가기를 자원하였다. 서흥에서 적을 맞아 싸워 적의 목을 벤 것이 아주 많았으나 이윽고 적에게 포위되어 신계 서목촌에서 순절하였으니, 바로 이때가 인조(仁祖) 정축년 정월 4일이며, 향년 45세의 일이다. 한성 판윤에 추증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해졌으며 왕께서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 일은 존주록에 나와 있다. 고종 신사년에는 旌閭(旌門을 마을 입구에 세움)하였고, 광주 병천사(秉天祠)에 배향하였다. 이 일은 훈부적과 문헌지에 실려 있다. 묘는 부원동 차자봉에 있으며, 좌향은 술(戌) 방향이다. 公의 손녀사위 李?가 행장을 찬(撰)하였고, 숭정(:중국의 연호)후 6계유년에 묘표(墓表)를 다시 세워, 의령 남씨 규희가 찬(撰)하고, 여흥 민씨 병승이 글을 쓰고 해평 윤씨 용구가 전면에 글을 썼다. 실기(實紀) 한 권이 있다.
配는 정부인 추증, 여산 송씨. 父는 이름이 인경. [송 부인은]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나으셨다. 묘는 부원동 대송리이며 묘향은 간좌(艮坐)이다.
配는 정부인 전주 이씨, 父는 성종대왕의 현손 광원정호(琥)이고, 祖는 신의부 이름은 수비이고, 증조는 이천군(伊川君) 이름은 수(壽)이고, 외조는 부장벼슬의 이름은 유의남이다. [이 부인은] 두 아들을 나으셨다. 묘는 公의 옷과 신발의 유장품과 함께 경기도 평택군 진무향교 뒷 기슭 성황치에 함께 묻었다.
인조(仁祖)조에 관리들에게 명하여 公을 예장(禮葬)하고, 산지(山地), 전택, 노비, 마필 등을 사패하였다.(賜牌: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토지나 노비 등을 하사할 때 그 소유에 관한 문서를 주는 것, 또는 그 문서를 말함)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公은 이괄의 난으로 가족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난을 평정한 후에는 홀로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자들은 송 부인이 난중에 죽었을 것이라고 말들을 하자 매우 한탄하고 있었다. 주상(主上)이 그의 홀로 지냄을 불쌍히 여겨 그를 권면코자 종실의 딸로 그를 장가들게 하였고, 公은 부득이 광원정호의 딸에게 장가들어 같이 살게 되었다. 그후, 송 부인이 모든 자식들을 데리고 모두 집으로 돌아오자 조정에 이 일을 알리니, 주상께서 이르시길, "이미 송 부인이 죽은 줄 알고 다시 장가를 들은 것이니 이 부인이 적실이요, 송 부인은 후실이 됨이 옳도다"하였다. 그래서 그후 수보(修譜: 족보를 새로 만듦)시에 이 부인을 적실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후손들이 항상 이를 가지고서 언쟁을 벌이는 까닭에 지금 기사년 수보시에 公의 후손, 11세손 상화, 상권 12세손 구하, 13세손 재균 등이 부여 문중과 송 부인을 적실로 할 것을 합의를 끝내니, 이상의 사실을 상지(詳知)하라. 세제일은 매년 음력 10월 18일에 봉행한다.
#. 조선 중기의 충신(忠臣). 1623년(인조 1) 관서행영(關西行營)의 도원수 장만(張晩)에게 의병 800명을 이끌고 가서 그 휘하에서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이 되었다. 이듬해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그의 친구 강적(姜適)을 보내어 난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적의 목을 벤 다음 부하를 거느리고 서울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난이 일어나 왕은 남행(南幸)한 뒤였다. 그는 군사를 사현(沙峴)에 주둔시켰다가 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이수일(李守一) 등과 더불어 난군을 맞아 싸워서 적을 섬멸시켰다. 이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이 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해졌다. 뒤에 서흥부사가 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1636년 김자점(金自點)이 원수가 되고 그 휘하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서흥검수참(劍水站)에서 맞아 싸워 수백명의 적을 베고 용전하였으나 말에서 떨어져 팔뚝이 부러졌으므로 더 싸울 수가 없었다. 부하군사를 원수에게 부속시키고 편비(?裨) 수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달리다가 신계(新溪)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칼을 빼어 자진하였다. 뒤에 한성부판윤에 추증되었다. (以上, 仁祖實錄, 鼓山集)
#. 충남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 97의 1에 장군의 神道碑(신도비)가 있다.
#. 충남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 97의 1에 장군의 忠臣門(충신문)이 있다.
#. 충남 부여군 초촌면 봉곡리에 장군의 旌閭閣(정려각)이 있다.
#. 충남 금산군 제원면 동곡리에 장군의 忠義閣(충의각)이 있다.
#. 여담입니다만, 제가 公의 孫子들을 헤아려 보니 무려 61명이나 되더군요. 忠城君派의 인구 수가 충주 지씨 중에서는 제일 많고, 세대수도 일부 빠른 경우 무려 46世에까지 이르고 있 습니다.
字는 공윤, 號는 송촌, 철종 을묘년에 나셨다. 계미 문과 급제. 벼슬은 정언, 관찰사, 좌승지에 이르다. 갑술 12월 26일에 졸하니 향년 80이다. 묘는 망우리 가족 묘지이다. 公은 文에 박식하여 계몽의 치적이 있으며, 의술에도 정통하여 대중을 구제한 공이 있다. 문집이 있다.
配는 숙부인 여흥 진씨. 父는 석규, 祖는 서유, 증조는 기수, 외조는 전주 이씨 이름은 인명이다. 기일은 7월 6일이다. 일남 일녀가 있다.
配는 숙부인 김해 김씨. 父는 의관 벼슬의 이름은 현구, 祖는 도정 벼슬의 이름은 만식, 증조는 제근, 외조는 청주 한씨 양열이다.
#. 서울대학 병원내에 선생의 동상이 있다.
동상(銅像)과 더불어 적힌 글:
松村 池錫永 先生은 朝鮮王朝末에 처음으로 種痘法을 보급한 近代 醫學의 開拓者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最初로 設立된 近代醫學敎育機關인 官立醫學校 初代 校長으로 이땅에 醫學敎育의 기틀을 마련한 先驅者로서 이제 後學들은 先生의 높은 業績을 기리고 敎育과 社會奉仕에 바친 先生의 崇高한 理念을 길이 傳하기 위하여 뜻있는 이들의 精誠을 모아 이 銅像을 建立한다.
#. 先生은 근대 의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국문 연구에도 공헌한 바가 크다. 1905년에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왕께 상소하여 공포케 하고, 학부(學部) 안에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를 설치케 하였다.
字는 대형, 또다른 이름은 석우, 호는 백산. 1888년 갑자 1월 25일에 나서 1957년 정유 1월 10일에 졸하다. 묘는 도봉구 수유동 광복 공원묘지. 만주 통화현 신흥무관학교 교관, 고려 혁명군관학교 교장, 정의부 군사요원 겸 총사령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쌍성전투 및 대순자령 전투에 승리,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군사부장,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제헌 국회의원, 대동청년단장, 초대 무임소장관, 건국공로훈장 복장, 중앙 종친회 초대 회장 역임. 配는 파평 윤씨. 父는 기희, 묘는 합장.
#. 천안 독립기념관 정문에 장군의 어록비가 있다. 어록비 내용: 大旬子嶺의 攻擊은 二千萬大韓人民을 爲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다. 총알 한 개 한 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英魂이 保佑하여주는 피의 使者이니 諸君은 檀君의 아들로 굳세게 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 萬代 자손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우라.
三十三世 英祖丙辰生 高宗甲茂 九月十一日卒(AD 1796-1874)
基弼(기필) 配 密陽朴氏
僉知中福府事. 묘는 선산(선산이 두곳에 있음), 영일군서면사가리
(1) 基載(33세)-成涵의 손자요, 海貞의 아들.
肅宗丁未生 純祖任申十二月八日卒(1727-1812)
(2) 기재의 아들 德麟이 (34세) 禮曺參議를 지님
* 기필 할아버지 이후부터 족보에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三十四世 英祖甲午生 正祖戊午八月二十五日卒 (AD 1774-1798)
命得(득명) 配 密陽朴氏
묘 서면사가리 선영
三十五世
宅潤(35) -達源(36)-完鉉(37)-坤求(38)
鈺求(38)-仁根(39)-正煥(40)
錘求(38)-相根(39)-植煥(40)
經根(39)-徹煥(40)
輝煥(40)
孝根(39)-正煥(40)
三十五世
宅久(35)-菊源(36)-永鉉(37)-世求(38)-旭根(39)庚申(AD 1920.5.9)
順哲(39)(女)癸亥(AD 1923)
貞根(39) 戊辰(AD 1928)
(1명 正德 ) 景根(39)-聖煥(40)
-吉煥(40)-------善培(41)
俊培(41)
-聖美(女)(40)
茂根(39)
達根(39)
三十五世 純祖任戊生 哲宗乙未四月二十八日卒(AD 1802-1859)
宅久(택구)
묘 西面中丹里 선산, 配密陽朴氏
三十六世 純祖丁亥生 高宗己丑三月六日卒 (AD1827-1889)
菊源(국원) 묘 영천 고천면 상수동, 配陽川許氏
三十七世 高宗任申五月二十三日生 (AD 1872-1936
永鉉 (영현) (일명 永圭) )
配 月城金氏 父 炳重, 高宗己巳八月三十日生 (AD 1869-1942)
할아버지 1936년에 별세하시었으나, 아버지가 안강에서 목회하실때 일제시에는 선산에 장례를 치루지 못하여 묘는 경북 안강교회 김해천(외가와 인척) 장로님 부인 산소 곁에 안치하였다가. 백호가 미국이민온 관계로 1985년 추석날, 선산 西面 中丹里에 이장하였다.
古 池永圭之 墓 라는 비석이 서 있다.
할머니의 산소는 평안북도 용천군 내중면 동당리 공동묘에 모셨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을 듯 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38선이 가로막힌 탓이다.
* 족보에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자가 기록되지 않을 것을 봐서, 이 족보는 할아버지 생존시에 편찬된 것임을 알수 있다. 백호의 3살때 돌아가신 것으로 구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