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군왕릉(悉直君王陵)
-강기옥-
정광태라는 개그 가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곡의 흐름이 경쾌하여 많은 국민의 입에 오르내릴 무렵 정부는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하여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곡이 되었다. 지금은 해금이 되었지만 방송에서 들어본 적은 없다. 일본이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란다. 우스운 일은 그 노래를 부른 정광태에게 일본 정부는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아직도 일본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독도는 그렇게 한일간의 묘한 외교 문제가 겹쳐 내 나라 땅인데도 마음대로 입에 올릴 수도 없고 함부로 들어 갈 수 없는 환상의 섬이 되어버렸다.
일제시대 이전의 "Mer de coree" 또는 "조선해"라고 영문으로 사용하던 동해를 일제시대 이후에는 대부분의 세계 지도에 "Sea of Japan"으로 표기하도록 술수를 부리더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가 62년 한,일 국교정상화교섭 당시 독도를 폭파하자고 일본측에 제안했던 사실이 확인되면서 국민을 분노케 했던 독도. 98년 11월 국회에서 총리가 암석이라고 답변해서 그런지 이제는 일본의 총리까지 나서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억지를 부려 울화통이 터지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분쟁의 지혜로운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삼척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
* 지증왕 십삼년 섬나라 우산국 / 세종실록지리지 오십페지 세째줄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일본땅 / 독도는 우리땅
*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섬이라고 /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 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 독도는 우리땅 우리땅
"독도는 우리 땅"의 4절과 5절 가사다. 여기에는 역사적 사실이 실려 있다. 지증왕13년(512년)에 이사부가 독도를 복속했다는 내용이다.
국가는 군장국가, 연맹국가, 중앙집권국가의 형태로 발전했다. 군장은 원시 부족 사회 최고 지배자를 말하고, 한 마을의 부족장이 주변 마을을 힘으로 복속하거나 회유하여 지배의 영역을 넓힌 큰 마을을 군장국가라 한다. 작은 마을에서 큰 마을로 성장하는 과정의 형태라 할 수 있다. 그 시절에 전국적으로 130여 개의 군장국가가 있었는데 강릉의 예국(濊國), 삼척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의 파조곡(波朝國)을 통칭하여 창해(滄海)삼국이라 한다. 이들끼리도 철기시대를 맞아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벌였다. 실직국은 지역을 대표하는 국가로 성장했는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밀려 481년 영해까지 점령당한 후 20여 년간 고구려의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다. 그 후 505년 이 곳에 부임한 신라의 이사부는 512년에 지금의 울릉도 우산국을 정복했다. 삼척과 울릉도, 독도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
갈야산의 실직군왕릉
삼척의 성북동 갈야산 중턱에 지방기념물 15호로 지정된 실직군왕릉(悉直君王陵)이 있다. 삼척김씨의 시조 김위옹의 묘다. 김위옹의 아버지 추(錐)는 경순왕이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여덟 번째 아들인데 一善君에 봉해졌으나 은둔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김위옹이 목종대에 실직군으로 봉해졌고 국왕의 사성(賜姓)에 의해 성씨를 가져야 하는 상황에다 성씨가 없으면 과거에 응시도 못하게 하자 본관을 삼척으로 정해 삼척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실직국의 왕릉이 아니라 실직군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실직군왕릉이다.
오십천이 휘감아 가는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누워 천여 년의 세월을 지켜 온 실직군왕은 그렇게 삼척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역사가 살아있는 삼척에서 실직군왕릉의 앞에 서면 삼한과 가야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기억하던 답사객에게 역사를 다시 보는 눈을 뜨게 한다. 그래서 역사는 흘러갔어도 현재로 이어져 다시 살아나고, 현재는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돈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이다. 태조 이성계가 1393년에 목조의 외향이라 하여 군을 부로 승격시키고 내린 훙서대(허리띠)가 삼척김씨 종중에서 제각 운한각에 보관하고 있는데 사전 연락을 취하지 못해 보지 못하고 되돌아 오며 그 수레바퀴의 의미를 새겨 본다. 역사는 그렇게 실물로 살아 있는데, 역사를 속이고 감추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여행을 통해서 겸허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깨닫는 것도 큰 보람이다.
* 미수 허목과 척주시비
허목의 척주 동해시비죽서루와 오십천이 삼척을 상징하더니 요즈음에는 덕항산의 환선굴이 삼척을 대신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것을 그 지역의 상징물로 정하는 당연한 추세라 하겠다. 죽서루나 오십천, 환선굴 등이 삼척을 상징해주는 유형의 자원이라 한다면 동안거사 이숭휴나 미수 허목은 그것들을 능가하는 삼척의 자존심이다. 여행이 단순한 휴식이나 유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자기 발견의 재충전을 위해 그 지역 인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나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의 반열에 오른 사람, 음사(蔭仕: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른 사람)로서 기로소(耆老所)의 당상에 오르는 등 그의 삶은 파격의 연속이다. 허목은 영의정 이원익의 손녀 사위이며 어머니는 임제의 딸이다. 그만큼 명문가인데 과거장에 나가지 않은 데서부터 그의 파격적인 인생이 시작된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의 복상문제와 관련해 정거(停擧:과거에 응시할 수 없음)의 벌을 받는다. 그 후 해벌되었는데도 과거장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며 재야의 학자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허목이 정계에 두드러진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던 1660년대부터다. 효종의 장례에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가 몇 년동안 상복을 입어야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소위 예송(禮訟)론이다. 여기에서 패한 자는 좌천당하고, 승자는 권력을 잡아 반대파를 제거하는 기회였다. 효종 임금의 죽음으로 시작된 1차 예송에는 1년을 입어야 한다는 송시열의 서인이, 3년을 입어야 한다는 허목의 남인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 일로 인해 허목은 삼척으로 좌천당해 삼척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5년이 지난 1674년에 효종비가 죽었다. 조대비가 먼저 죽었으면 문제는 간단한데 며느리가 죽었으니 또 복상 문제가 대두되었다. 2차 예송에서는 서인이 9개월을, 남인이 1년을 주장했는데 이번에는 남인의 1년 복이 승리했다. 당연히 권력의 이동이 있었다. 승자는 패자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갈려 새로운 파벌을 형성하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자기들의 모든 것을 예(禮)에 걸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에는 성리학의 이상을 인간 사회에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가 성리학자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 관심의 최정상에 예(禮)라는 가치를 설정해 놓고, 그 예를 바로 세우는 것이 사회의 기강을 세우는 것이고 그 예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보았다. 관혼상제의 모든 절차와 인간 관계에 이르기까지 이 예에서 벗어나면 매장당하기도 하고 국가로부터 벌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상복문제가 정치적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학문의 세계와 현실이 따로 있을 수 없는 유교적 이념이 당시의 최대 가치관이기 때문에 예송 문제에서 절대로 밀리면 안 되는 현실의 문제였다.
요즈음으로 보면 국가 보안법 문제로 여야가 갈라지고 같은 당끼리도 찬반으로 갈라지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내막을 알아야 한다. 왕위 계승에 대한 종법(宗法) 해석을 두고 효종의 왕통을 어떻게 보느냐의 해석 차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기 때문에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허목은 효종이 차자(次子)라 할지라도 왕위를 이었으니 장남이 왕통을 잇는 예에 의해 장남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서인은 임금일지라도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가통(家統)을 적용하여 왕권보다는 사대부의 위상을 존중하려 했고 허목은 종통(宗統)을 중시하여 사대부보다는 왕권을 존중하려는 문제로 접근했던 점이다. 그 진심은 2차 예송에서 여지없이 밝혀졌는데 효종비를 장남며느리로 대우하지 않고 며느리도 대우했기 때문에 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현종의 반감을 산 것이다.
허목은 목민관으로서 주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준 선정의 치적이 있어 삼척 주민들은 그 행적을 자랑스럽게 기억한다. 그가 삼척 1660년에 부사로 부임할 당시 파도가 심하여 강의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인명과 재산 피해가 큰 것을 보고 동해 바다를 달래는 동해송이라는 시를 썼다. 동양 제일의 필체라고 인정받은 그의 필체로 새긴 비를 항구 앞 바위(정라진 앞 만리도)에 세웠는데 그 뒤로 재앙이 없어졌다. 정성이 하늘에 닿았음인가. 바다는 잔잔해지고 오십천은 평화로운 물길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파도를 물리친 碑라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하는 이 비는 육향산 정상에 세워 놓은 비각 안에서 아직도 출렁이는 동해의 파도를 지켜보고 있다. 척주 동해시비다. 그 비문은 쉽게 읽을 수 있는 해서나 행서도 아니고 초서도 아니다. 한 자 한 자가 그림처럼 그려나간 전서체(篆書體)다. 그는 또 삼척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척주지를 펴내 후학들이 삼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남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