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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광성당 대건회 원문보기 글쓴이: Gabrile
저는 이제민 신부님이 이글을 읽고 무한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부활에 대하여 부활의 삶에 대하여 하루만 심각하게 생각하여
이글을 읽어 보시기 권장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원천에 대하여 알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해답이 나옵니다. 은총을 듬뿍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1. 이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아니 우리들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지만 나 자신 아직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을 뿐더러,
부활의 경지에 이르러 못한 자로서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답시고 남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대충 주워섬기거나,
아니면 자아 도취되어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부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나만의 이론을 펼치다가 그만 둘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죽은 다음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되살아나는 것으로 상상한다.
그리하여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이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난다는 것에 대한 믿음과 함께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지금 이승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묻기도 한다.
이는 현재의 자기의 삶이 끝나는 허무를 받아들일 수 없어 부활을 믿는 것이 된다.
이들의 이러한 믿음에 확신을 주고 내세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동조하여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내가 지금 이야기할까?
그것을 성서의 문헌을 인용하면서 증명해 볼까?
또는 사람이 죽으면 되살아나거나 되살아나지 않을 확률은 어차피 반반인데
이왕이면 되살아난다는 쪽에 인생을 거는 것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쪽에 인생을 거는 것보다 낫다고
괴변을 늘어놓는 측의 견해(차동엽 신부)에 따라 부활을 이야기할까?
그리하여 50% 확률에 인생을 걸라고 이야기할까?
여러분은 지금 내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시체가 부활하리라고 믿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50%의 확률에 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 정도의 이야기,
조금 더 나아가 거기에 확신을 주는 정도로 이야기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부활이 주는 메시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러분도 부활이 주는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사실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가 믿어온 부활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그 정도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삶의 신비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의 메시지를 통해 삶의 신비에 도달하려고 하기보다 ‘시체의 되살아남’에 머물러 버린다.
그래서 예컨대 내가 시체는 부활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 근거하여
시체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가?
부활의 메시지를 깨닫기 위해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가 고백한 부활은
그러한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그들은 먼저 깨달아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교회의 전통이라고 생각하며 믿고 있는 부활이,
부활에 대한 자기의 그 믿음이 2천년 동안 교회를 통해 전해오는 부활의 전부라고 확신한다면,
그래서 자기와 달리 말하는 것을 교회의 전통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스스로 자기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선포한 부활을 다 깨쳤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이보다 더한 교만이 있을까?
자기의 주장을 고수하기 전에
그들보다 더 위대한 영성가나 신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활의 신비를 깨치기 위해
우리는 교회가 지난 2천년 동안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해 온 것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의 신학 수준은
지금 우리들의 신학 수준보다 훨씬 심오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부활이
교회가 선포한 부활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머물지 말고
교회가, 성서가 선포한 부활을 깨치도록 해야 한다.
부활을 선포하는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부활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온갖 논리와 가설을 펼치는 말의 잔치를 넘어
부활을 사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학)는 아직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고민한다.
똑같이 ‘부활’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도
서로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1)
그래서 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먼저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제안한다.
당신은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활한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그려보라.
그 세계에서 부활한 당신이 만나게 될 사람들을 떠올려보라.
당신들은 문인이다.
부활은 많은 소설에서 주제로 나타난다.
시의 주제이기도 하다.
부활에 대하여 쓰면서 당신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당신이 그린 당신의 부활한 모습이 예수님께서 보고 싶어 하는 그 얼굴일까?
예수님께서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그리신다면 어떻게 그리셨을까?
당신이 그린 그 그림과 일치할까?
어쩌면 당신은 당신의 죽음을 먼저 상상하고
그 다음 당신이 다시 살아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부활한 당신이 누리게 될 행복을 그리는 것은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사람이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사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
부활한 그 과부의 아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라자로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타비타는?(사도 9,41)
부활한 그들은 지금도 세상 어디선가 살고 있을까?
아니면 다시 살아난 세상에서 얼마만큼 더 살다가 또 다시 죽었을까?
그렇다. 그들은 지금 지구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다.
다시 죽은 것이다.
그렇게 죽을 삶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 할 수 있을까?(인생낱말사전, 라자로와 타비타)
(1) 어머니 이야기 하나
내 어머니는 내가 쓴 책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는다.
당신의 아들이 쓴 책이기에 자랑스럽게 읽는다. “책이 어려울 텐데요...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던데요...” 하고 말하면 “아냐, 재미있어.”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사람이 죽으면 부활 안한다는 게 맞어?”
어머니는 내가 쓴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를 읽으신 모양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책이 부활을 부정하고 있다는 소문도 주워들으신 모양이었다.
“그러니 걱정이 될 수밖에.”
순간 어느 주교가 자기 교구의 신자들에게 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이래서 그는 내 책을 자기의 신자들에게 금지시켰구나.
부활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그도 부활을 부정한 것으로 알아들었구나. 그에게 부활은 무엇일까?
그는 부활의 그림을 어떻게 그릴까?”
부활이 없다면 죽음이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저승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기쁨과 희망도 영원히 무덤에 묻어버린다는 것이 된다.
이보다 더 삶을 허무하고 슬프게 만드는 일이 있을까?
실망과 서운함을 어머니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느끼며 내가 물었다.
“왜요? 내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거 같아요?”
“아니, 그냥.” 어머니는 말을 얼버무렸다. 자기 아들이 부활을 부정한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심하세요. 죽은 다음 우리 당연히 부활하지요.
부활하지 않으면 이렇게 내가 신부로 살 수 있겠어요?”
어머니가 안심하는 것을 온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내 아들이 부활을 부정했을 리가 없지. 신분데...” 어머니가 내게 말한다.
“나는 아무 것도 몰라. 그러나 나는 신부 말을 믿어.”
“그럼요.” 내가 대답했다. 어머니는 보통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사후의 부활을 믿는다.
죽었다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무덤 속에서 다시 깨어날 것이라 믿고 있다.
죽음이 영원한 이별일 수 없다.
어머니는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흐른 다음 무덤을 열고 나오셨다고 믿고 있다.
부활에 대한 어머니의 그림은 신학적으로는 틀렸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부활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믿음에서 나는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내가 살지 못하는 부활의 삶을 어머니에게서 느낀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돌고 있다고 믿는 어머니에게도
태양의 빛은 여전히 따스하게 내리쬐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미숙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부활을 느끼게 해 주시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내 어머니의 신앙을 보면서 나는 힐데가르다를 생각한다.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너 비록 나의 보잘것없는 피조물 가운데 섞여 있지만,
그리고 많이 배운 학자들처럼 어려운 책을 술술 읽어내지 못하는 여인의 몸이지만,
그래도 너를 나의 빛으로 쓰다듬어
타오르는 해처럼 그 빛이 뜨거운 불꽃으로 네 속을 밝히고 있나니,
내가 너에게 보여주는 것을 세상에 대고 외쳐 말하여라.
머뭇거리지 말아라.
내가 내 영으로 너에게 말한 바를
그리하여 네가 이해한 바를 서슴없이 말하여라.
내 백성에게 참된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데도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자들,
자기 몸에 주인처럼 달라붙어
하느님의 얼굴을 피하고 진리를 부끄러워하는 자들,
그런 자들처럼 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신비로운 영감으로 가르쳤으니,
비록 뭇 남성에게 짓밟히는 몸이지만 네가 보았고,
지금 네 안에 타오르고 있는 불에 대하여 터놓고 언제나 말하여라.”
(존 키르반 엮음, 이현주 번역, 빙겐의 힐데가르다와 함께 하는 30일 묵상, 바오로딸 2007, 19-21)
나는 부활을 믿는 내 어머니를 보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내 어머니의 언어를 통하여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내 어머니의 언어를 통하여 저 또한 부활의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주님, 어머니의 믿음에서 부활의 노래를 듣게 하여 주십시오.
어머니의 언어에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제 어머니의 언어에서 제가 부활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또 기도한다.
“주님, 사람들이 ‘제 말에 머물지 않고
제 말을 넘어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
(마르티니) 부활의 삶을 지금 살게 하여 주십시오.”
(2) 어머니 이야기 둘
어머니를 통하여 나는 하느님은 놀랍게도 인간의 미숙한,때로는 잘못된 신학을 통해서도 당신을 알리고 계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 올바로 하느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전문 신학자가 되라고,
신학공부를 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그런 미숙한 신학을 가진 자 안에도
현존하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에게 전문 신학을 요구할 수 없다고 하여
신학자(교회)마저 전문 신학의 언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신자들을 위하여 신앙의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교회가 오히려 대신 책임을 지고 올바른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에는 신학이 없다.
내 어머니의 신학 수준이 그대로 우리 한국교회의 신학 수준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불행히도 우리 교회는 내 어머니가 믿듯이 그렇게 신을 믿고 있다.
내 어머니가 믿듯이 그렇게 부활을 믿고 있다.
내 어머니가 믿듯이 그렇게 마리아가 동정녀라고 믿고 있다.2)
이리하여 교회는 발전해가는 현대인에게
늘 과거의 사고방식만을 전통이라는 포장지에 말아서 주입시키려하고 있다.
신학의 발전을 스스로 막고 있는 셈이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는 내 어머니의 신앙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하고,
내 어머니의 부활관에서 참 부활을 느끼는 피부를 가지지 못한다.
단어 몇 개 더 아는 것을 학식으로 여기며 그것에 만족한다.
우리 교회의 비극의 시작이다.
교회의 전통을 선포해야할 의무를 지닌 주교는 달라야 한다.
신학을 공부한 주교라면 부활이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을 공부하지 아니한 내 어머니의 언어로 이야기하면서도
대학의 언어로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3) 어머니 이야기 셋
어느 자매가 내게 물었다.
“신부님, 신이 존재합니까?”
내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 자매가 놀란 듯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신부님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자매님이 생각하는 신이 누군지 모르니까요.”
나는 그 자매가 생각하는 신이 어떤 분인 줄 모른다.
자매는 신은 존재하는가 하고 질문하면서 신을 A와 같은 존재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 신은 A가 아니라 B일 수 있다.
자매는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A가 있는가 하고 묻는데
내가 내 생각대로 “있다”고 대답하면 그 자매는 “자기가 상상한 A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자매의 생각을 알아채고 “없다”고 답변하면
자매는 내가 신을 B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없다”라는 말만을 듣고,
“나를 무신론자로 여길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우리는 신이 누구인지 성찰함이 없이 신을 믿고 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이 전해주는 메시지에 대한 성찰함이 없이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남에게 부활을 거부한 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신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부활하리라 믿으면서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께 고백하면서
하느님을 천국과 부활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맹신과 광신의 무리가 된다.
신과 천국과 부활과 종교가 인간들에 의해서 수난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정화해야 한다. 언어가 가리키는 바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언어를 성찰한 후 말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올바로 신을 믿고 올바로 부활을 믿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신학 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에게 전문적인 언어로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린아이보고 아인슈타인의 언어로 이야기하라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말이 유치하다 해도 그 말이 세상의 온갖 진리를 드러내고 있음을 안다.3)
아침에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저녁 서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말하면 과학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문학적 표현을 거부하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과학적인 언어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야말로 메마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과학적이지 못한 어린아이의 언어에서
영원한 진리를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우리는 익혀야 한다.
부활은 그런 언어이다.
소설가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도 전문 신학자들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신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신을 찾았다고 진지하게 털어놓는 고백도
신학자들이 보기에 신과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찾은 신은 신학자가 볼 때 신이 아닐 수 있다.
그가 찾은 신은 철학자 니체가 죽었다며 사형선고를 내린 신,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그런 신일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천국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이 아닐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신을 찾음으로써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고 고백하면 그 고백은 진실하다.
실제로 독자들은 그들의 고백에서 신학자들이 강론할 때보다 더 진하게 신을 느낀다.
신학자들은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작가들이 전문 신학자인 그들보다
종교가 전하는 진리를 더 감동적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음을 시기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앞에 말한 내 어머니가 신학자인 나보다 더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는 논리와도 같다.
그들(작가와 소설 속 인물들)이 모두 전문 신학자처럼 고백한다면,
그리고 그 인물들을 소설에 등장시키는 작가들이
전문 신학자의 안목으로 소설을 써주기를 요구한다면
그 소설은 그야말로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하는 글모음이 되고 말 것이다.
소설가들이 비록 소설 속의 한 인물로 하여금 이승에 남아 있는 자에게
저승에 가서 만나자며 이별을 고하는 말을 하게 하였을 때,
그 말에는 - 본인도 느끼지 못하였을,
그래서 찾지 못한 (이 찾지 못함은 어쩌면 작가가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
현실 안에서 이루지 못한 행복을, 사실은 현실 안에 감추어 있는 행복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의 진리를 종교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엔 미숙하다 하더라도,
부활의 삶이 여전히 이승이 끝난 다음 오는 어떤 세상처럼 여기고 있다하더라도,
현실이 끝난 다음 행복을 보장하는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다하더라도,
소설 속 인물의 말에서 현실 안에 감추어 있는 영원한 부활의 삶을 감동적으로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에게 신학자가 되어 소설을 쓰라고 요구할 수 없으며
그들의 신관이 유치하다고 비판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언어로 신앙인들의 감각을 잘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4)
소설을 대하는 독자도 어쩌면 소설의 인물을 통하여 작가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작가의 사고보다 더 깊이 진리의 세계로 몰입할 수도 있다.
예컨대 소설의 주인공이 ‘나는 신을 찾았다’거나 임종하는 애인에게
‘나중에 천국서 만나자’고 하면서 재래의 신관에 한정되어 대화를 한다 하더라도,
또는 시체가 부활하여 가게 될 천국을 그리며 그것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 작가도 그 정도의 지식만 있으니까 그 정도의 수준에서 이야기 했을 수도 있다 -
독자는 소설 속 인물이 만난 하느님에서 이 세상 안에 현존하는 우주 창조주의 하느님,
시체가 아니라 인간의 부활을 읽을 수 있다.
작가가 생각한 것을 훨씬 초월하여, 작가도 생각하지 못한 참 하느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의 그 고백을 통하여(그 고백이 신학적으로는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여태껏 살던 삶과는 다른 삶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가 지금 비록 통습적인 언어에 따라 - 그것이 작가의 언어일 수도 있다 -
초월자 하느님을 찾았다고 고백한다면
그 체험의 장소가 바로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임을 세상에 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난 곳 어디서,
이 세상을 초월한 장소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느님을 찾았다는 것은 숨어계신 하느님을 찾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자기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하느님을 찾았다는 것은
- 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
하느님이 자기의 삶 속에 숨어 계셨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로 말하자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은 것이고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찾은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그 밭이 그저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곳인 줄만 알았다.
하느님이 그런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밭이 보물이 묻혀 있는 밭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았다는 말은
밭이 하느님이 숨어계시는 밭임을 알았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은 사람은 밭을 찾은 사람이다.
그는 이제 밭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았다는 그의 고백은
- 그가 알든 모르든 -
그동안 희로애락의 감정에 싸여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리하여 감정의 표피에만 머물러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이제 그 현상을 뚫고 그 안에 계신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의 고백은 그렇게
- 그가 알든 모르든 -
초월자 하느님은 동시에 내재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의 고백은 초월자 하느님이 늘 그의 마음 안에 이 현실 안에 숨어 있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함으로써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표면에 묻은 현상을 뚫고
그 안에 숨어계신 생명의 하느님을 보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귀의(또는 회개, 회심, 개심)는 세상을 잊고 세상 바깥에 몰두하는 행위가 아니라
현실을 올바로 살아가게 한다. 그는 하느님을 만남으로 부활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주인공이 설사 부활에 대한 통념처럼 시체의 부활을 믿는다 해도
그에게 부활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죽음을 향하여 살던 한 인간이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메시지이다. 죽은 다음 잘 살게 되리라는 헛된 희망을 안겨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영원한 삶을 살게 해주는 메시지이다.
어쩌면 작가들 자신도 이 메시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작가들이 그들이 창작해낸 소설 속의 죽어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 통념대로 -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 저 세상 가서 만나자는 말을 하게 했다 해도,
사자는
- 작가도 깨닫지 못한 -
현실 안에서의 부활을 체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에서 영생을 체험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때로는 작가도 읽지 못한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을 읽고 싶을 때가 많다.
1. 이제 나는 신학자의 언어로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이 (강의) 시간이
장차 (죽은 다음) 부활하게 되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부활을 느끼는,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부활은 온 인생으로 체험해야 하는 사건이고,
지금 이 순간을 지나쳐서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나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죽으면 장차 부활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아니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죽은 다음 부활이 없다면 부활에 대한 나의 이 믿음은 무엇이며,
부활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승에서의 나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과 의구심에 있지 않고,
부활의 메시지를 거의 매일 들으면서도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데에 있다.
“나는 언제 부활이 주는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을까?
나는 언제 그분처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나에겐 언제 그분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하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영원히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사라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인생을 마칠까 나는 더 두렵다.
내가 지금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인지,
살아난다면 어떤 조건 아래 어떻게 살아나는 것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일단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내 삶을 이런 식으로 살지 않을 터인가?
이런 물음을 던지며 고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적어도 우리 인생이 시체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벗어난 차원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물음을 던지는 우리의 존재 밑바닥에는
지금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 충동이 감추어 있는 것이다.
그 감추어져 있는 진실한 삶을 지금 이승의 삶으로 끌어내고 싶은 것이다.
‘사후’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존재의 깊은 곳에는
지금 여기서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 충동이 나도 모르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 내면의 소리는 지금 우리를 향하여 외친다.
“부활의 삶을 죽은 이후로 미루지 마라.
살아 있는 동안 죽도록 하라.
(죽어야 부활한다면!) 죽고 나면 다시는 죽을 수 없다.
부활은 ‘사후’를 죽기 전의 시간으로 만들어 그 안에서 살게 한다.
‘죽기 전의 사람만이 죽을 수 있다.
죽기 전에만 인간은 ‘사후’에 대해서 또는 ‘사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죽기 전에 인간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도 부활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죽어 무덤에 묻힌 자는 영원한 침묵 속으로 돌아간다.
살아있는 자에게 ‘사후’에 대해서도 부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루카 16,30-31)
부활로 나아가게 하는 십자가는 죽은 다음에는 짊어질 수 없다.
십자가를 지기가 어려운 것처럼 부활의 삶을 살기가 어렵다.
너는 그것을 놓치지 마라.”
부활은 살았어도 죽음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을 살리는 메시지이다.
죽은 자가 더는 슬픔도 고통도 없는 영복을 누리는 세계로 부활하리라는 믿음은
인간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행복을 체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그것은 이 눈물의 골짜기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부활신앙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2.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더 부활한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자.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그려보라.
그리고 부활한 당신이 살게 될 미래의 세계를 한번 그려보라!
거기에 누가 있는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만 보이는가?
살아생전 보기 싫던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가?
아니면 생전에 보기 싫던 그 미운 사람도 이제는 안 밉고 예쁘게 보이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가 부활하여 있을 그곳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았던 그것이
- 그게 좋든 싫든 -
오롯하게 다 천국에도 있다.
그렇게 천국에도 꽃이 피고 지며, 개들이 쫓아다니며 짖어대고 소들이 음매 운다.
그 꽃과 개와 소는 죽은 다음 부활하여 천국에 간 것들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 꽃과 개와 소들이다.
우리가 부활하여 있게 될 천국은 이승과 다를 바 없다.5)
이 사실은 엄청난 삶의 이치를 우리에게 선포한다.
인간만이 부활할 수 있다.
개와 소에게는 부활이 없다.
그런데도 천국에는 개와 소가 있고 꽃도 피고 진다.
천국에 있는 개와 소는 부활한 개와 소가 아니다.
천국에서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도 다 부활한 사람들만이 아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죽기 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승과
부활하여 살게 될 천국이 다른 세계가 아님을 알게 된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승과 저승을 가르고,
생과 사를 갈라놓는 우리의 의식에서 깨어나
이승 안에서 천국을,
이승에서 만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 경지는 지식이나 막연한 믿음으로 도달하게 되는 세계가 아니다.
부활은 머리로 증명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경지도,
“나는 죽으면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믿음으로 이르게 되는 경지도 아니다.
부활은 “하느님 나라(영생)가 와 있다.”는 복음을 깨달음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부활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한 메시지이다.
부활은 하느님 나라가 우리 살아 있는 자의 삶 안에 와 있다는
복음이 사실임을 알리는 메시지이다.
1. 부활은 삶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부활을 증명하여 믿게 하려는 것은 인생을 증명하고 나서 살겠다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복음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려 들지 않고 부활을 살도록 한다.
부활을 증명하여 믿게 하겠다는 것은 끊임없는 말장난만 일으킬 뿐이다.
지금 사람들이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부활이 증명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빈 무덤사화와 현현 사화를 그 증거로 댄다.
“예수님은 죽은 다음 무덤에 묻히셨다.
그런데 사흘 후에 보니 무덤이 비어 있었다.
그분은 무덤에 안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부활했다”하는 식의 증명은 논리의 비약이다.
이는 “지금 이 책상 위에는 꽃이 한 송이 있다.
그 전엔 여기에 책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보이는 이 꽃은 꽃이 된 책이다.”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는 것도 논리의 비약이다.
2. 부활은 인생은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시공에 제한된 존재이지만
영원의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알려주는 메시지이다.
부활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을 열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를 열어 인생의 신비를 들여다보며 인생을 깨우쳐주는 경지이다.
눈을 열고 귀를 열도록 하라.
생사의 굴레를 벗어 인생을 새롭게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부활의 삶이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두 제자가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부활체험을 이야기하였을 때
다른 제자들이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보도한다.(마르 16,13; 루카 24,11)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눈과 귀가 열리지 않아서이다.
뿐만 아니라 부활한 주님을 보면서도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 하였다.”(루카 24,16)
복음사가는 여러 군데에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과 들어도 듣지 못하는 제자들의 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게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가에서 그분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분을 몰라 뵈었다.
불과 사흘 전에 뵈었던 그분을 동산지기로 여겼다.
그렇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반나절을 그분과 같이 걸으면서도 그분을 몰라 뵈었고,
베드로도 주님을 보면서도 몰라 뵈었다.
그분이 낯선 얼굴을 하고 나타났거나
-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
부활하신 분의 얼굴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눈과 귀가 열리지 않아서이다.
마르코는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들을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토마스의 불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알아들을 수 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과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는 깨달음으로만 열릴 것이다.
이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온 몸과 온 마음이 일치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부활은 이성 없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도달하게 되는 인생의 경지이다.
부활은 단순히 한 개인의 육체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생에 빛을 밝혀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사건이다.
어둠에 죽은 자를 빛으로 다시 살리는 사건이다.
부활은 그렇게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삶을 깨우쳐주는 사건이다.
3. 이런 의미에서 복음사가들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시간으로 고요한 새벽을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비롯해서 여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한 것은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 동틀 무렵이었다.(마태 28,1; 마르 16,2.9; 루카 24,1.22-23; 요한 20,1)
여자들의 말을 듣고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간 때도 새벽이었다.(루카 24,12; 요한 20,3)
베드로와 동료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때도 새벽이었다(요한 21,4)
베드로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한 때도 아침녘이었다(요한 21,15)
예수님은 왜 새벽녘에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을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빛 속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셨을까?6)
그것은 희미한 빛 때문에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리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닐까?
볼 눈을 가진 자만이 부활하신 그분을 볼 수 있다.
부활한 자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눈을 실낱같이 가늘게 뜨고 집중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명상하듯 서서히 인생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은 이성을 포기하고 무조건 믿어야 할 사건이 아니다.
4. 새벽은 낮도 밤도 아닌 시간, 희미한 시간이지만
밤에서 낮으로 나아가는 시간,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며 빛이 세상을 밝혀 주는 시간이다.
이는 교회가 예수부활을 기념하는 미사를
한밤중에 거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한밤중은 밤 12시가 지나는 시간으로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간으로 새벽을 향하여 나아가는 때이다.
밤이 점점 사라지며 낮이 서서히 밝아 오는 시간에,
어둠이 사라지며 빛이 서서히 스며드는,
온 우주에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간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미사가 거행된다는 것은
부활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밝혀 주는 사건이며
보지 못하는 눈을 치유해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무지에 대해 죽고 깨달음으로 눈을 뜰 때 부활의 삶이 열린다.
5. 부활하신 주님은 물론 아침이 아닌, 대낮이나 저녁에도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지만 그때도 그분은 마치 새벽의 희미한 빛을 뚫고 자신을 드러내시듯
그렇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 분위기는 새벽의 희미한 분위기이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한낮인데도 그분을 첫눈에 알아보지 못 한다.
한 나절을 그분과 함께 걸으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도(마르 16,14; 루카 24, 30-31)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착각한다.’
그렇게 예수님의 일곱 제자들도 그분과 이야기하면서도 그분을 몰라본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일곱 제자들은 상심하여 한 곳에 모여 있다가
베드로의 제안으로 고기 잡으러 간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 때 새벽녘에 어떤 낯선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묻는다.
“무얼 좀 잡았느냐?”
제자들이 “못 잡았다.”하고 대답하자 그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라.”하고 외친다.
그렇게 대화하면서도 그들은 그가 누군지 모른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니 그물 가득히 고기가 잡혔다.
그제야 요한이 “주님이시다.”하고 말한다.(요한 21, 1-14)
새벽의 시간, 새벽의 빛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부활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6. 제자들이 그분을 보면서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활이 깨달음의 사건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부활하신 그분의 모습은 우리가 보통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가 보통 육체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으로는 볼 수 없다.
깨달은 자만이 그분을 알아 뵐 수 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부활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깨달음으로 안내한다.
7. 깨달음은 내면의 사건이다.
부활도 내면의 사건이다. 여기서 ‘내면’은 단순히 심리작용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헛것을 보듯이 그렇게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깨달음은 갑자기 어느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만도 아니다.
새벽은 서서히 밝아 온다.
밝아 오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어느새 조금씩 더 밝아 있다.
깨달음도 그렇게 일어난다.
부활의 이치를 한꺼번에 증명하여 깨달으려 드는 것은
손으로 온 세상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짓이나 마찬가지다.
인생은 한꺼번에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평생을 살면서 깨쳐야 할 인생의 과제이다.
8.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깨치려고 하지 않고
시체가 되살아나는 것을 부활로 믿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시체가 ‘되살아난’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새 성경이 여기서 ‘되살아남’이라는 표현을 선택한 것은 많은 오해의 여지를 남긴다.
되살아난다는 것은 마치 필름을 되감았다가 다시 돌린다는 느낌을 준다.
부활은 필름을 되감듯이 그렇게 되감아 다시 사는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되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부활은 깨달음의 지평이다.
산 자만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깨달은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깨달으라.”는 말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할 수 있다.
부활 메시지의 수신인은 무덤에 묻히기 전 아직 살아 있는 우리들이다.
무덤에 묻혀 썩어가고 있는 또는 썩어 사라진 이는 이 말씀을 듣지 못한다.
무덤 속의 시체는 썩어갈 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9. 부활이 깨달음의 영역이라는 것은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부활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은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를 바꾸게 해주는 새로운 언어의 영역이다.
부활은 우리의 사고를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더 이상 부활이 없다면,
굳이 신앙을 가지고 희생하면서 착하게 살 이유가 무엇인가?”
부활의 메시지는 말한다.
“인간이여, 바로 그런 생각을 죽여라.
부활하여 혼자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죽여라.
한번 죽여 보아라. 삶이 달라짐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게 부활의 삶이다.
그것을 자연의 이치에서 깨닫도록 하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부활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예수님 말씀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여기에 부활의 신비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문장에서
대부분 “열매를 맺는다.” 는 것만을 부각시켜 생각한다.
또는
밀알이 다시 살아나 열매가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 없어진다” 는 것은 쉽게 지나쳐버린다.
밀알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밀알은 썩으면 그뿐이다.
밀알 하나의 일생은 썩음으로 끝이 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일단 그것으로 끝이다.
썩은 밀알이 새로운 밀알로 되살아나 나무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씨앗과는 다른 열매가 열리듯이
한 인간도 죽은 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으로 열려 남을 살린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인간도 밀알처럼 자신을 죽여 없앨 때
다른 인생이 열매로 맺히게 된다.
씨앗은
철저히 열매를 위해 생을 바쳐야 하듯이
인간은
철저히 남을 위하여 자기 생을 바쳐야 한다.
부활은 한 인간의 다시 살아남을 넘어
남을, 인류를, 우주를 살리는 일이다.
부활은
내 개인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인 사건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고
인류를 다시 살리셨다.
그렇게 그분의 죽음은 우주를 살리는 사건이었다.
온 우주가 그분을 통해 창조되었다.(골로 1,16)
씨앗 속에
꽃과 열매가 숨어 있다.
그리고 열매 속에
새로운 씨앗이 숨어 있다.
씨앗이 썩으면
그 안에 숨어 있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리고 열매와 함께 그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씨앗이 다시 땅에 떨어지게 된다.
땅에 떨어져 썩은 씨앗은 사라질 뿐
다시는 그 씨앗으로 소생하지 않는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지금 이 꽃을 피우고 이 열매를 맺게 한
그 씨앗은
썩어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씨앗의 삶을 찬미하며
우리 인생에 부활의 노래를 부른다면
썩어 없어질
씨앗의 운명을 살기 위해서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나는 썩고 죽는다.
내 안에
내 죽은 다음 필 꽃이 숨어 있고
열매가 감추어 있다.
그렇게 내 안에 우주가 숨을 쉬고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
그게 부활이다.
(부활 6, 인생낱말사전에서)
나무는 해마다 부활한다.
부활한 나무에서 해마다 푸른 잎이 부활한다.
꽃과 열매가 부활한다.
부활한 꽃과 열매는 자기의 존재가 씨앗에서 온 것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씨앗은 아니다.
부활한 그들은
새로운 씨앗을
자기 안에 머금고 있다.
(부활 9, 인생낱말사전에서)
당신이 부활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이 당신의 인생에 가져다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잘 사는 것인가?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죽은 당신이
다시 일어나 그 삶을 살 수 있을까?
죽은 저 무덤 속의 시체들이 언젠가 다시 일어나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그런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부활을 원하는 우리는
은연중 죽음을 거부하고 있다.
죽음을
불길하고 무서운 것으로 생각한다.
생과 사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켜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죽음 이면에 감추어 있는 영원한 생명과
생명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놓치고 만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밀알 이면에 감추어 있는 생명을 느끼지 못하고,
은연중 밀알이 되기를 거부한다.
밀알은 썩으면
다시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이다.
죽은 후에
지금의 이 존재로 다시 나타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한번 죽은 씨앗은
다시는 그 씨앗으로 돌아가 태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전혀 다른 열매만을 맺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열매 안에 감추어 있는 씨앗 또한
그 열매를 맺게 한 그 씨앗과는 다르다.
나의 생명은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주(남)를 위한 우주(남)의 것이다.
부활이 전하는 진리이다.
부활은
이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사라지는 데서 시작한다.
사라지기 위해서.
부활의 삶을 살고 싶지 않은가?
지금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남을 위해 사라지는 법을 몸에 익혀라.
(부활 5, 인생낱말사전에서)
묘비는 산 자가 죽은 자를 생각하며 세운 비다.
그 비에는 이승의 삶을 마무리하며
저승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죽은 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거기에 새겨진 글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남기는 마지막 소망이기도 하다.
이승에서 내가 찾지 못한 영원한 안식을
너희는 살아 있는 동안 찾아 누리도록 하라.
묘비명은
죽은 자가 살아 있는 동안 미리 준비한 것이기도 한다.
묘비에 새겨진 그 글은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은 자의 입을 통해
자기를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이를 위해 새긴 글이다.
부활은
그렇게 묘비명처럼 산 자를 위한 것이다.
부활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하여 바라는 영원한 삶이다.
어떤 성지를 찾은 적이 있다.
성지를 지키는 한 사제가 순례자들에게 한 말은 잊을 수 없다.
그는 순례자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여기 무엇 하러 오셨습니까?”
여기 저기 순례자들의 입에서 답은 금방 나왔다.
“저희를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성지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성지가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 묻힌 성인들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성인들이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이분들은 자기들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았다.
그들의 후손을 위해서,
이 땅을 위해서. 부활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 설사 그들이 자기들의 영생을 위해 기도하고 그런 믿음 속에서 죽었다 해도 -
결국은 남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부활은 남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혼자만 잘 살려는 삶을 죽이고
온 인류와 연대하며 온 인류를 살린다.
부활은 연대성의 표현이다.
“부활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한 복음이다.
장차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먼 미래의 시간에 우리가 되살아나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시간은
언젠가 올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 안에 이미 와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부활의 때를 알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그 씨앗은 너무도 작아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 보면 이미 자라 있다.
우리가 부활의 때를 기다린다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의 시간 안에 감추어 있다는 것은
행복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 이 공간 안에 이미 와 있다는 말이다.
행복은 그렇게 우리 안에 이미 감추어 있으며
우리 안에서 이미 자라고 있다.
우리는 이를 온 몸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고해를 헤쳐 나가듯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문득문득 이 순간을 느낀다.
그 느낌을 과거로 흘려보내지 마라.
죽은 인생을 사는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다.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다.
무덤 속의 썩어가는 시체가
어떻게 부활을 체험하겠는가?
수천 년 전에 죽은 이집트의 미라가
어떻게 다시 일어나 우리 앞에 산 모습을 보이겠는가?
살아서 부활의 삶을 체험하도록 하라.7)
복음서는 이 복음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아니 성경 전체가
우리가 부활 체험을 체험하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예컨대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마라.
빵도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마라는 이야기는
부활은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모든 것을 털어버린 빈 몸일 때만
체험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람들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빵도 보따리도 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관심도
‘버림’으로 도달하게 되는 '부활의 삶’이 아니라
오로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은 다음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탁상공론에 휘말린다. 그런 마음으로는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낫게 한 이야기도
그저 병을 낫게 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의해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부활의 기쁨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다.
병에서 다시 나은 사람들은 다시 아프고 다시 죽게 될 것이다.
이런 자연의 이치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
예수님도 그런 자연의 이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부활은 이런 이치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면
이는 자연의 이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의 이치 안에서 새 삶을 살게 되었다.
부활은
어려운 주제이지만 쉬운 주제이다,
어렵다는 것은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여러 가설을 만들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그것을 논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쉽다는 것은
부활은 일상에서 항상 일어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일상에서
우리에게 문득 문득 일어나는 일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일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부활의 삶을 살도록 안내하기 위해 쓴 책이다.
부활이 인생을 완성시켜주는 복음의
사건임을 알려주는 책이다.
부활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이제 나는 성경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부활을 체험하기를 바라면서.
하느님과 천국과 영생을 체험하기를 바라면서.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1.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장소는 성삼일의 현장이었다.
그들이 성삼일로부터 멀리 도망쳤을 때
그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체험할 수 없었다.
시선을 돌려 그 현장으로 향하였을 때
비로소 그분의 살아계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부활하신 그분은 제자들을 당신 죽음의 현장으로 안내하신다.
성삼일로 안내하신다. 부활은 성삼일을 지나쳐서는 체험할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삼일의 현장에서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물고기와 빵으로 초대하는데,
이는 성목요일로의 초대이다.
그분은 토마스에게 자기의 상처를 만져보게 하시는데,
이는 성금요일로의 초대이다.
그 어디에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사후의 세계로의 초대는 볼 수 없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성삼일을 지나친다.
부활에 대한 기쁨은
사후 되살아난 생명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는 기쁨이다.
이를 통해 인생을 다시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이다.
우리 인생이 찾아야 할 것은 고통에 감추어있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한다.
그것을 믿으라 하기에 믿는다며 고백을 하지만
다시 살아나신 그분이 내 몸에 느껴 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고백하기 전이나 후나
내 인생에 달라진 것도 별로 없다.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믿는 것은 그분의 부활이 아니라
그분이 부활했다고 말하는 남의 말(소문, 교의)이 아닌가?
2천 년 전 그분의 제자들도
처음엔 그분의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이 다시 살아나 누구누구에게 나타나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동료들이 부활하여 나타나신 그분을 체험했다는 말을 듣긴 하였지만
그 체험은 그때 그 순간의 일이었을 뿐
나타나신 그분은 그들에게서 다시 사라지곤 했다.
그들에게 그분은 그렇게 죽은 자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절망과 좌절의 나날을 보낸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는 베드로나
그를 따라 나선 동료들의 마음엔 주님은 죽어 있다.
주님이 죽어 없는 세상에서
그물을 던지고 당기는 그들의 어깨는 힘이 빠졌다.
신명이 나지 않으니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어도
고기는 한 마리도 걸려 올라오지 않았다. (요한 21, 1-3)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은 그런 동료들을
그분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시던 성 목요일의 현장으로 안내한다.(요한 21, 9-13)
빵처럼 자기의 몸을 쪼개는 자만이
그분이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몸을 쪼개어 남에게 나누어주는 자만이
자기가 새로 태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 나타나셨다가 곧 사라지셨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 그들의 몸을 쪼개어
서로에게 나누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게다.
그분의 성삼일에 온 몸으로 동참하는 날
그들은 그들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체험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 한 가운데 살아계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1.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고백을 하게 한 삶의 원천으로
자신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고백을 하도록 하였는가?
복음사가는
제자들을 끊임없이 그 원천으로 안내하고 있다.
*2. 종교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의 머리에 주입시켜
입으로 고백하도록 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죽음의 현장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사람들이 부활의 삶을 살도록 해주는 자이다.
종교인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체험으로 사람들을 안내한다.
*3. 종교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하늘에서 떨어진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암기해야 할 교의 이상임을 안다.
그는 교의와 율법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성찰한 언어로 이야기하며
그렇게 또 사람들이 교의의 언어를 성찰하도록 한다.
언어를 성찰하는 자만이 부활의 경지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은 교의 이상이다.
(인생낱말사전에서)
루카 복음서는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부활체험을 길게 서술한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어 십자가형을 받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린 채 돌아가시자
실망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엠마오로 낙향하던 제자들은
길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하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을 서로 나누고 있다.
그들도 끼어들어 한 몫 거든다.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식사에 초대하고,
그분이 빵을 쪼갤 때에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아 뵙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그들이 그렇게 부활에 대한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가운데에 나타나시어 평화를 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런데 여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나타나신 것이 놀랍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
갑자기 그들에게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놀랍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이 아닌가?
당연히 기뻐하며 환영해야 마땅할 터인데
어찌하여 그들은 겁부터 먹었을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 바로 나다.” 하고 그들을 진정시켜야 했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지만
그들의 눈은 여전히 가리어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24,16).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를
깨닫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된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서 나타났다는 사실이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남이 아니기에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부활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구멍 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다.
주님께서 못 자국으로 뚫린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는 것은
사흘 전에 못 박힌 흔적을 보여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신의 손과 발이 군인들의 못질로 구멍이 나던
성금요일의 현장으로 초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찾으신 것도
당신의 몸을 쪼개어 주시던 성목요일의 현장으로 그들을 초대하시는 것이다.
부활의 생명은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그리고 성토요일을 지나쳐서는 깨달을 수 없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면서도
이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아직 성삼일로 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분께서는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 46)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강조하신다.
그분께서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십자가를 놓지 않고 골고타에 오르신 것은
골고타에서 부활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자 겁이 나고 두려웠던 것은
아직 성삼일의 현장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성삼일에 일어난 일이
무서워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승이 붙잡히자 도망을 쳤고,
도망친 곳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들은 지금
부활하신 주님을 뵈면서도 여전히 떨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당하신 고통과 십자가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한,
그들은 부활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은 그런 그들을 성삼일로 초대하신다.
당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여주시며 성삼일을 상기시키고
그때 일어난 일들을 깨닫게 하신다.
성삼일에 있었던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은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외국인 노동자, 매 맞는 여인,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놓으셨다.
그러므로 이들의 아픔을 지나쳐서는
그분의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하신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남을 위한 고통,
남을 위해 자기의 몸을 쪼개는 그 현장을 상기시키는 것은
이들의 아픔에 동참함이 없이는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고통 받는 남을 외면한 채
자기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겠다고 꿈꾸는 한,
부활하신 그분을 만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의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의 세계는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자가 만든 이상의 세계가 아니다.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을 위하여 고난을 겪어야 하고
남을 위하여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분은 제자들로 하여금
남의 고통에 연대를 느끼고 동참하게 하여
그들을 먼저 부활시킨다.
부활하신 그분은 부활한 자만이 체험할 수 있다.
부활하고 싶은가?
죽은 다음에 살아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기보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의 이기심을 두고 고민하라.
부활 신앙이란
죽은 다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열심히 기도하며 산 대가로)
어려운 이웃에게
자기의 목숨을 나눌 때 얻게 되는 새 생명에 대한 확신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날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래도 간간히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을 체험하였다면
그들이 그분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완전히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일은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로 그들의 실존을 완전히 향하는 것이다.
(인생낱말사전에서)
부활은 우리를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그리고 성토요일
이후의 시간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시간들 안으로의 초대라는 것은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것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세 번째였다고 기록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벌써 세 번씩이나 만났는데도
이야기의 흐름은 왠지 어둡다.
그들은 번번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밤새 고기를 잡은 그날 아침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는데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무얼 좀 잡았느냐?” 는 물음에 “못 잡았습니다.”
하고 답변을 하면서도
그분이 누군지 모른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는 말씀에 시키는 대로 그물을 던지면서도
그분이 주님이라는 것은 까마득히 알아보지 못한다.
가능한 일인가?
그런 중 그분을 알아본 자가 있긴 하였지만
(그분을 알아본 자는 그분이 “사랑하신 그 제자”였다. 사랑이 그분을 알아 뵙게 하였는가?)
이미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그분을 보았으면서도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제자들은 그렇게 어제 주님을 체험했다고 기뻐하다가
오늘 그분을 뵙고 두려워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의 눈에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거나,
사나흘 여행을 하고 돌아 온 사람처럼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아직 주님의 성삼일에 동참하지 못한 까닭이다.
예수님께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오른쪽으로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게 하신 뒤,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식사에 초대하신다면
이는 성목요일로의 초대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여기서 단순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식사에 초대하시어
그들을 배불리 먹게 하셨다는 것을 기술하고자 함이 아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여기서 예수님이 빵을 들어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 또한 그렇게 나누어 주시는 행위를 통해서
당신의 몸을 나누어주시던 성목요일의 일을 상기시킨다.
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그 현장을 상기시킨다.
제자들이 더 이상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그 날의 일들을 상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목요일의 현장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체험하도록
그들을 성목요일로 초대하신 것이다.(요한 21,)
빵을 나누어 먹으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몸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잡은 큰 물고기도 갖다 내놓는다.
나누는 자만이 부활을 체험할 수 있다.
부활한 자만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난 자는 이웃에게 자기를 나누어 준다.
그는 성삼일을 향하여 산다.
성삼일은
우리가 부활하기 위하여 통과해야 할 문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도달해야 할 목표점이다.
부활은
십자가 후에 오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있다.
부활한 그분의 손과 발에 십자가의 상처가 나 있다.
(인생낱말사전에서)
만일 내가 예수님처럼
내일 이 시간에 나를 노리는 사람들 손에 넘겨지고,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다가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고,
모레는 처형되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처신을 할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몇 번이고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였지만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유다스가
곧 자기를 팔아넘기리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치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데리고 겟세마니로 가서 기도하셨다.
그들에게 사랑과 일치의 유언을 남기고 그들을 위하여 애절히 기도하셨다.
요한복음은
성목요일 오후 예수님께서 처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무려 다섯 장 이상을 할애한다(요한 13,1-18,17).
복음의 거의 4분의 1이다.
요한복음과는 달리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자들과 떨어져
홀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고 전한다.
제자들은 여전히 스승의 언행에서 아무런 감을 잡지 못하고 잠만 잔다.
침묵과 고요 가운데 긴장이 흐르는 시간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긴장된 상황에서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신이 곧 붙잡혀 심문을 받고
높이 들어 올려 죽게 될 그 고통이 두려워 피해 가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당신에게 폭력을 쓰는 자들을 더 큰 폭력으로,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물리치셨다면,
혹은 재판을 받으실 때 아버지로부터 군대를 보내어 달라고 청하여
빌라도를 제압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아픔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다면,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그분의 전능한 힘에 놀랐을 것이다.
그분이 병을 낫게 하셨을 때, 죽은 자를 살리셨을 때 놀랐듯이
사람들은 더한 놀람으로 경악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그분을 따라 다닌 보람을 느끼며 우쭐하였을 것이고
사람들은 더욱 그분께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으로 모든 것도 끝이 났을 것이다.
그분은 역사에서 하나의 과거 인물로 사라졌을 것이고,
우리는 지금 더 이상 그분을 기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분의 죽음도 삶도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역설이게도
우리는 그분이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고통을 당했기에 지금 그분을 믿고 있다.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인 것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맥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역설을 깨달으려고 하기보다
여전히 그렇게 돌아가신 분을 향하여
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고통을 제거해달라고,
내 믿음을 봐서라도 치유의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분처럼 고통을 당하고
그분처럼 아픔을 당하고
그분처럼 죽기를 피하면서
부활만은
내 몫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분은
고통과 사귀어라,
아픔과 사귀어라,
병과 사귀어라,
십자가와 화해하라,
죽음과 화해하라
하시며 스스로 고통과 아픔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모습을 보여주셨건만
우리는 여전히 이것들을
피해가야 할 악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분은 유다스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나에게 고통이 일어나게 하라.
유다스가 나가자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요한 13,31)
고통과 아픔과 죽음은
인류가 몰아내야 할 적이 아니라
인류에게 자비를 느끼게 해주는 친구들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인류가 마지막으로 사랑해야 할 것들이다.
인류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고통과 사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와 계시는 하느님을 뵙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고
자신의 영광만을 드러내려 한 때문이다.
성목요일의 고뇌를 피하는 자는
성금요일의 십자가에도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낱말사전에서)
예수께서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군인 하나가
다리를 꺾는 대신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요한 19,33-34)
사람들은 저마다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존경받지 못할 때,
멸시와 모욕을 받을 때,
특히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할 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그리스도께서도 상처를 입었다.
어찌 못에 뚫린 손과 발,
창에 찔린 옆구리의 오상만이 상처이겠는가.
배반당하고 멸시당하고 조롱받고,
하느님조차 저주하고 떠나버린 듯한 그 상황들이
그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원수가 나를 모욕했다면 참아 주었을 것을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맞서왔다면 비켜나 숨었을 것을,
그러나 너였도다.
내 동배 내 동무 내 친구 정다웁게 서로 같이 사귀던 너
축제의 모임에서 주님의 집을 함께 거닐었던 너였도다”(시편 55, 13-15)
우리가 그 상처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분도 우리의 위로를 원하셨을까?
상처투성이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그분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신의 손과 발에 못질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흐느끼는 군상들,
평소 당신의 설교와 당신의 삶이 먹혀들지 않았던
많은 이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급기야 목숨까지 바치며 죽도록 사랑하였는데
그 죽음이 두려워 달아난 제자들의 빈자리를 느끼며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
숨이 넘어가는 순간, 어쩌면 그분은
그저 당신께서 입으신 상처와 죽음만을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보라 이 상처를,
이 죽음을,
이것이 모든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을 껴안는 상처와 죽음,
그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시위(示威)였다.
그분이 달리신 십자가는
그분이 평생 선포한 복음의 시위였다.
그 상처와 죽음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다.
창에 찔린 그분의 벌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교부들은 이것을 성체성사와 성세성사에 대한 상징으로 알아들었다.
예수님과 함께 상처는 그저 고통스러운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치유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사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물과
우리를 살리는 피가 흘러나오는 곳.
상처는 내가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원천이며
내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원천으로 이끈다.
상처를 통해서 나는 비로소 나의 근본,
나의 원천에 이르게 된다.
고통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구원받고 싶고 위로 받고 싶을 때가 많다.
가장 위로를 받은 때가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라.
그때
나를 위로해준 사람은 누구였는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건 사람,
내가 매 맞지 않게 하려고 대신 매를 맞는 사람,
나를 위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 사람,
나를 위해 “꽁무니를 빼지” 아니하는 사람,
나를 위해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 사람,
나를 위해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 사람.(이사 50,5-6).
나의 고통을 제거해준 사람보다 나에게 자비를 보이며 나와 함께 고통을 당하는 사람.
상처를 치유하는데 너무 급급하지 마라.
“그 속에 숨은 보배를 발견하고
발견된 그 빛나는 보배를 가지고 기뻐하라”(요한 크리소스또무스)
너의 상처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통해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만나도록 하라.
너의 원천에 이르도록 하라. 너의 상처에서 구원의 피와 물이 흘러나오게 하라.
(인생낱말사전에서)
예수님이 땅에 묻히신 날 “깊은 침묵이 온 땅을 덮고 있다.
과연 엄숙한 침묵과 고독이다”(옛 강론)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이 날 예수께서 죽으신 후 "저승에 가셨다"고 고백한다.
주님께서 저승에 가심으로써 지옥이 잠깼다.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당신의 죽음으로써 최후의 적인 죽음을 이기시고(1고린 15,26)
명부의 문을 부수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아담에 의해 하느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죽을 운명에 놓인 인류에게 땅속 깊은 곳,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영혼들,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1베드 3,1920)에게 찾아가셔서
명부의 문을 열어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성서신학사전)
지옥은
절대 고독의 장소이다.
인간은
고독을 체험하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 어떤 목소리도 스며들 수 없고
어떤 손도 닿을 수 없는 고독,
절대적 불안을 일으키는 절대적 고독,
그 고독과 불안을 우리는 지옥이라 부를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고독에 짓눌려 있다면
그는 자기 안에 지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옥은
사랑이 더 이상 침투할 수 없는 절대 고독의 상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면,
우리의 절대적 고독의 심연으로 들어가셨다면,
어떤 손도, 어떤 목소리도, 어떤 ������너������도
가 닿을 수 없던 그곳에도 이제 그분께서 계시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분께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막다른 지옥,
모든 친교가 단절된 곳, 아무 것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곳,
철저히 고립되어 극심하게 외로운 곳”(안젤름 그륀)
바로 그곳에 내려가서 실의에 찬 인류의 손을 붙잡고 말씀하신다.
“잠자는 너는 죽음에서 일어나거라.
나는 너에게 빛이 될 것이다”(옛 강론)
그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면
이제 그 지옥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
“오리게네스 이후로 땅 아래 지옥으로 내려가는 표상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혼 안에 자리잡고 있는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표상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땅으로, 세속적인 세계로,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인간성으로 내려가야 한다”(안젤름 그륀)
예수와 함께
이제 절대 고독이, 지옥이, 죽음이 극복되었다.
주님은 지옥의 고독에서 천국을 체험하게 해 주셨다.
예수와 함께 전에는 지옥이었던 죽음이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아니다.
죽음 한가운데 생명이 있다.
죽음 한가운데 사랑이 있다.
우리를 절대 고독으로 안내하는 성토요일,
생명과 사랑을
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게 해 주는 날.
이날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성토요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부활을 체험할 수 없으리라.
부활은 성토요일에 감추어 있다.
(인생낱말사전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땅과
세상과
인간과 죽음을
우주적으로 대하게 하여 주셨다.
우리의 시야를
하늘로 우주로 영원으로 넓혀
살도록 해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땅과 재물과 명예의 노예가 되어
편협하게만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우리가 우주적으로 새로 돋아나는
생명을 살도록 해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의 우주적인 삶을
생명 없는 시체에게 미루면서
죽은 다음 나는 어떻게 될까,
다시 살아날까
썩어 없어질까,
천국은 있을까,
있다면 어디 있을까
하는 별 영양가 없는 물음으로
나의 실존을 생사에 옭아매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부활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죽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땅과 세상과 인간과 죽음을
십자가를
우주적으로 찬양하는 법을
몸으로 익혀야 한다.
세상이 내게 고통과 상처를 준
십자가로 다가온다 해도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부활한 내 몸을 느낄 것이다.
1.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부활은
보통 우리가 습관적으로 말하는 정도의 관념을 넘은
삶의 영역을 펼쳐 보여준다.
부활은 살아 있는 자의 인생에 관한 물음에 대한
종교가 던질 수 있는 해답이다.
살아 있는 인생이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인생이다.
부활은
죽어야 한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닌 것이
또 인생임을 강조한다.
부활을 인생 이후로 미루기에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허무하게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의 삶은
미래의 영원한 삶으로 건너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삶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현세의 삶을 잠시의 삶으로 여기게 하는 인생관이야말로
종교가 극복하고자 한 인생관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복음으로 선포하셨고,
이 복음의 극치가 부활인 것이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죽은 다음의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나를 위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의 현실에서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나라는
저 위 하늘 너머의 세상이 아니라
여기 이 세상에 와 있다.
땅에 감추어 있다
영원한 삶이니 부활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이
모두 이 현실 안에 감추어 있다는 것이다.
현실을 떠나서는
인간은 행복도 부활도 체험할 수 없다.
현실이 하도 고통스러워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 때가 많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과 생명과 부활의 삶을 지향하면서
저 위 허공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많다.
내 고통을 떠난 곳에
유토피아가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현실을 떠나는 날
영원한 생명도 너에게서 떠나게 될 것이다.
부활의 삶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현실 안으로 파고들어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현실을 너에게로 사들여라.
고통을 너에게로 사들여라.
미움을 너에게로 사들여라.
너를 미워하는 원수를 너에게로 사들여라.
너를 저주하는 사람을 너에게로 사들여라.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때 너는
하늘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놀랍게도 부활하여 있는 너를 느끼게 될 것이다.
종교는
현실이 끝난 다음 행복을 보장하는 그런 세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로 고통 속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가운데 감추어 있는 새 삶을 보여 주신다.
부활이 십자가 안에 감추어 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온 존재를 팔아 부활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보는가?
성목요일의 쪼개진 빵에서 영원한 생명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몸에서 부활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들은
하나같이 성목요일과 성금요일의 일들을 상기시킨다.
“보아라, 나 부활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가 아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제자들을
성삼일의 일상으로 초대하신다.
부활은 거기에 감추어 있다.
이 날들을 지나쳐서는
부활을 살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을 현세가 끝난 사후로 미룬다.
부활을
‘사후’로 미루는 것은 일면 옳다.
하지만 이때 사후는
이승의 삶이 끝난 이후에 비로소 펼쳐지는 시간이 아니라
내 인생 안에서 펼쳐지는 시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삶을 살 수 있다.
현실 안에 감추어 있는
하늘나라를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죽은 삶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죽은 삶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2007년 10월 6일 서울: 가톨릭 문인회)
1) 똑같은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발설해도 예수의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그리스도가 달랐듯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의 그리스도이다. 이제민, 우리가 예수는 찾는 이유는, 197 이하 참조.
2) 검열!
3) 문제는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을뿐더러 그 언어로 세상과 우주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우리가 자기의 언어로 사고하도록 주문하지 못한다. 인간은 시간에 제한된 존재라 백 년 후 또는 천 년 후 사람들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 미래의 사람들이 보기에 최첨단의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고는 원시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온 우주를 논하고 있는 우리의 설명이 그들에게 원시적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우리의 언어와 사고는 대단히 과학적이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우리의 감각은 그들이 보기에 미개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감각과 언어로 지금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대로 수 백 년 수 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가 지금 보기에 그들의 언어 방식이 미개하다 하더라도 당시 그들은 대를 초월한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말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삶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사고방식을 배워야 하며 그들의 언어 방식을 통해 우리의 인생관(진리관)을 깨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미래의 사람들도 우리의 인생관을 통해 그들의 인생관을 배워야 하며, 그 때문에 우리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시작해야 한다. 비록 과거의 사람들이 시체의 부활을 믿었다 하더라도 - 그게 언어 사용의 한계이다. 그들은 그 수준에서 살았다 - 그들은 그 믿음으로 지금 우리가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 인간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그 표현 방식에 나타난 영원한 진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4)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관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교 본래의 부활관이 어떠한 것인지 하는 물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5) 이제민,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 바오로딸 참조.
6) 여기서 나는 새벽에 건국한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를 생각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조선의 인간이다.
7) 이제민,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 참조.
리를 해독할 과제를 안고 있다. 어린아이의 언어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 수 천 년 전 우리 조상의 언어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 신에 대한 그들의 언어, 부활에 대한 그들의 언어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 이 언어들은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하는 암호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언어는 그대로 우리의 후손들이 그들의 진실한 삶을 위해 해석해야 하는 암호이다.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우리는 그 시대의 언어사용방식, 사고방식, 문화를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후손들은 그렇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사고방식, 문화를 공부해야 한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부활에 대한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그 주교는 이런 과제에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모든 언어는 시대를 초월하여 전하는 메시지를 안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면서 그 시대의 언어, 당시 사람들이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의 그 언어를
첫댓글 A4용지로 40장 분량입니다.
많기도 하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을겁니다
적어두 한 서너번 읽는다면
하느님나라가 다가왔다는 뜻 .
성삼일의 중요성. 한알의 밀알과 부활과의 관계.
2000년동안 내려온 교의 등 그리고 수많은 깨달음이 다가올 것밉니다.
가마동 회원님들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