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_노공(盧公) 묘비기(墓碑記)[9세_노숙동]
공의 휘는 숙동(叔仝) 자는 화중(和仲) 본관(本貫)은 풍천(豐川)으로 국자진사(國子進士) 휘 유(裕)의 후예이다.
증조(曾祖) 휘 천계(天桂)는 승사낭(承仕郞) 용구(龍駒)(용인)현령(縣令)이었다가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사윤(司僕寺尹)에 추증되고 조(祖) 휘 흥길(興吉)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고 고(考) 휘 언(焉)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추증되었으니 삼대(三代)에 이 은전(恩典)이 미친 것은 다 공(公)의 영귀(榮貴)로서이다. 비(妣)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는 봉상대부(奉常大夫)군기소윤(軍器少尹) 양귀(良貴)의 따님으로 영락(永樂)[명(明) 성조(成祖)의 연호] 1년(1403년) 3월 임인(壬寅)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학문의 힘쓰고 문장을 잘 구사하여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가 나이 25세 즉 선덕(宣德)[명(明) 선종(宣宗)의 연호] 2년(1,427년)에 을과(乙科) 2등으로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의 보직. 박사(博士)에서 교리(校理)로 전임 되었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이임(移任)되어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편수(編修)에 참여하였다. 이에 집현전(集賢殿)에 선발되어 수찬지제교(修撰知製敎)를 지내고 또 정통(正統)(명(明) 영종(英宗) 연호) 1년 (1436년)에 중시(重試)에 합격 바로 성균직강(成均直講)과 전라도사(全羅都事)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교리응교(校吏應敎)를 지냈다. 이후부터서는 항상 경연(經筵)에 있으면서 춘추관(春秋館) 세자필선(世子弼善) 보덕(輔德)을 겸임하다가 다시 사인(舍人)을 거쳐 지사간(知司諫)의 이르러서는 사건에 관련되어 통례원첨사(通禮院詹事)로 체임(遞任)되었다. 이어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거쳐 집현전(集賢殿)으로 옮겨졌다가 이윽고 호분위상장(虎賁衛上將)에 승진되어 지병조사(知兵曹事)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임하고 다시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겨졌다가 좌승지(左承旨)에 전염되었다.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승진되어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고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겸임, 전례에 따라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철권(鐵券)[공신(功臣)의 공훈(功勳)을 기록한 책]을 받았다. 이어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옮겨졌다가 가정대부(嘉靖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의 전임, 춘추관(春秋館) 빈객(賓客)을 이전처럼 겸임하고 다시 호조(戶曹) 형조(刑曹)로 옮겨졌다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는데, 전라도(全羅道)에서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재수되고 충청도(忠淸道)에서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고 경상도(慶尙道)에서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승진되어 관찰사를 겸임하고 최후에는 상호군(上護軍)에 재수 되었으니 이것이 공(公)의 관로(官路)에 대한 약력(略歷)이다.
천순(天順)[명(明)의 영종(英宗)] 7년 (1463년) 7월 7일에 61세를 일기로 경제(京第)에서 별세하셨다.
함양군 북쪽 지(池)내(內) 부(釜)농에 안장되고 정부인김씨(貞夫人金氏)는 본관이 경주(慶州)로 고(考) 점(點)은 생원(生員)이고 조(祖) 성용(成用)은 세자우유선(世子右諭善)이고 비(妣)하동정씨(河東鄭氏)는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 복주(復周)에 따님인데 부인(夫人)은 공(公)에게 와서 부도(婦道)를 다 하다가 공(公)보다 37년 뒤 홍치(弘治)[명(明)의 효종(孝宗)의 연호] 12년(1499년) 7월 14일에 89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공(公)과 묘(墓)는 같으나 혈(穴)만 달리 안장(安葬)되었다.
소생(所生)은 2남2녀로 장남 윤(昀)은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이고 차남 분(昐)은 예문관(藝文館) 교리(敎理)였다가 뒤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으며 장녀은 제능직(齊陵直) 양정(梁楨)에게 차녀는 대사헌(大司憲) 김제신(金悌臣)에게 출가하였으나 후사(後嗣)가 없다.
사평공(司評公)은 처음 상호군(上護軍) 정효충(鄭孝忠)의 따님을 맞이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드님 우익(友益)은 계공랑(啓功郞)이고 따님은 영의정(領議政) 김전(金銓)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 한숭조(韓崇祖)에 따님을 맞이하여 아드님 우필(右弼)를 두었으니 문소전(文昭殿) 참봉(參奉)이다.
교리공(敎理公)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선경(愼先庚)의 따님을 맞이하여 3남을 두었으니 장남 우량(友良)은 진사(進士)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차남은 곧 나의 선부군(先父君) 휘 우명(友眀)인데 진사(進士)로서 집현전(集賢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양(梁)능(陵)직(直)은 침(忱), 순(侚), 흔(忻)등 3남을 두었고 안팎의 증(曾), 현손자녀(玄孫子女) 100여 명이 있다.
공(公)이 별세한 뒤에 바로 묘표(墓表)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모든 일이 그 시기가 있다고 하지만 얼마 안 돼어 양조(兩祖)[司評 윤(昀)과 교리(敎理) 분(昐)]가 뒤를 이어 별세함으로써 공에 대한 서술이 없으니 지금 아무리 공에 덕행(德行)을 표현하고 경력(經歷)을 열거하려 한들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삼가 생각하는데 공(公)이 관로(官路)에 나간 시기는 세종조(世宗朝) 중기(中期)로서 그때 집현전(集賢殿)에 많은 인재(人材)가 모였던 사실은 지금도 일컬어지고 있으며 공(公)이 수년 동안 임금을 가까이 모시어 여러 차례의 자문(諮問)에 응하였고 퇴조(退朝)하여서는 집현전(集賢殿)의 제공(諸公)들과 접촉하였으니 당시의 높은 은총과 명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또 사가서공(四佳徐公)[거정(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도 이를 상고할 수 있다.
그 중에 공(公)이 사인(舍人)으로 사간(司諫)에 제수된 데는 마침 문종(文宗)이 감국(監國)[세자(世子)가 나라의 대권(大權)을 대행(代行)하는 기관]을 맡았는데 전조(詮曹)[이조(李朝) 때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통칭]에서 공의 자격과 경력으로 보아 사인(舍人)이 걸맞지 않다고 하여 특명으로 품계를 높여 사간(司諫)의 임명한 것이다. 이후로부터 수년 사이에 좌이(佐貳)[조선(朝鮮) 때 육조(六曹)에 참의(參議),참판(參判)]에 품계에까지 올랐으나 자주 외직(外職)으로 나갔기 때문에 마침내 대배(大拜)[의정(議政) 벼슬에 제소됨]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세조(世祖)도 공(公)의 명론(名論)[사리에 맞고 뛰어난 이론]을 존중하여 여러 차례 접견하고 친구로 부르면서 대우가 융숭하였다.
대저 공(公)은 세종조(世宗朝) 때에는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집(撰集)하였고 세조(世祖)가 감국(監國)을 맞았을 적에는 그 참속(參屬)이 되었다. 일찍이 어버이 봉양하기를 간청하여 진주목(晉州牧)에 재수되어 사조(辭朝)(지방관이 부임에 앞서 임금에게 하직하는 것)할 적에는 도승지(都承旨)을 국문(國門) 밖에 보내어 전송한 사실이 국사(國史)의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어버이의 상(喪)을 만나 마침내 올라오지 못하게 되었다.
국정(國政)을 참논(參論) 할 적에는 정의에 입각하여 영원히 폐단이 없을 정책을 내세웠고 강연(講筵)의 입시(入侍)할 적에는 본문(本文)에 따라 설명하되 되풀이해서 진계(陳戒)하여 많은 도움이 있었고 서연(書筵)[왕세자(王世子)에게 강론하는 곳]에 있을 적에는 더욱 근간(勤懇)을 다하여 남아도는 시간이 없었다.
하루는 시강원(侍講院)에서 시강(侍講)을 마치고 물러나왔는데 그때 덕종(德宗)이 동궁(東宮)으로써 중관(中官)-내시에게 하론(下論)하기를 “나를 가르쳐 준 말들이 절실하고 지당함으로 마땅히 궤안(几案)에 써서 가슴속에 간직해야 하겠다.” 하였으니 그 권애(眷愛)와 존경을 받아 이러하였다. 사평공(司評公)이 충주판관(忠州判官)으로 나갈 적에는 공(公)이 여덟글자를 가져 경계하였다. 즉 성(誠)신(信)염(廉)공(公)근(勤)간(簡)화(和)혜(惠) 여덟 글자로 글자마다 뜻을 풀이하여 침식(寢食)하는 사이에서도 잊지 말도록 하였으니 자손의 세법(世法)이 될 만하다. 이는 그 목록(目錄)에서 상고할 수 있다.
공(公)의 묘(墓)의 표지가 없어 늘 민망스러웠으나 힘이 모자라 마련하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다행히 묘갈(墓碣)을 마련하고 또 따로 조그마한 묘비(墓碑)를 세워 공(公)의 경력을 대충 서술하여 후예(後裔)들의 상고 자료로 삼는 바이다.
증손(曾孫) 전(前)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진(禛)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