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그 권세가 대단하지만 예전의, 특히 고대국가 왕들의 권세는 하늘보다 더 높았습니다.
그러니 일개
수행자가 그것도 가장 강력한 나라의 왕을 친견한다는 일은 개인이나 집단으로 볼 때 엄청난 사건이였지요. 부처님 일대기에서 빔비사라왕과의 만남을
비중있게 다루는 이유는 바로 이같은 이유입니다. 빔비사라왕은 북인도 맹주인 마가다의 국왕이고 더우기 앞날이 창창한 젊은 왕이였으니 불교 쪽으로
봐서는 아주 커다란 사건였던 것입니다.
훗날 빔비사라 왕은 부인과 함께 독실한 불자가 되어 불교를 외호할 만큼 철학적 사색을 좋아하고
인품이 온화한 사람이였다고 합니다. 보살과 헤어지면서 왕은 ‘그대가 성불하면 먼저 자신을 제도해 달라’고 청하는데 이 말은 수행자에 대한 단순한
예의라기 보다 왕이 진실로 싯달타라는 수행자를 존경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며, 또한 보살의 품위와 행동이 여느 수행자와 다름을 간파했기 때문이지요.
왕이 직접 수행자의 처소를 방문한 것으로 미루워 왕의 수행자에 대한 관심과 호의가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왕이 수행자에게 관대했기 때문에 라자가하 성 곳곳에 수행자들이 쉴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많은 수행자들이 자유스럽게 모여들게
됩니다. 자연히 훌륭한 수행자들도 많았지요. 보살이 이곳에서 두번째 스승이라고 일컫는 명상의 대가를 만나는데 그 이름이 웃타까 라마풋타입니다.
옛경전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보살께서 방문하신 곳은 라자가하 성 교외의 강가에 있는 라마풋타 촌으로
본시 한 선인이 있어 라마라 불리였고 그 뒤를 세습하여 아들 웃따까 라마풋타가 수행자들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보살께서 그에게 찾아가
법행을 물으니 웃타카가 말하되 고타마여, 무릇 상(相)과 상 아님을 취한다면 그것은 큰 근심이요 환이라, 크게 어리석고 어두우나니 만일
세밀하게 관찰하면 모든 거칠은 생각이 단절되고 미세한 형체.Vicara를 받으며 그 과보(果報)로서 순수한 의식만 존재하는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에 이르는 나는 그런 묘한 법을 가르친다오 라고 설명하였다
보살께서는 그의 문하에 머물며 수행법을 참구했으나 역시 오래지 않아 그 요가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또한 그가 바라던 최상의 깨달음이 아님을 알았다. 왜냐하면 이 법으론 결코 중생을 제도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보살은 다시
그곳을 떠났다.
그 때에 라마의 교인중 다섯 명의 뛰어난 수행자가 있었는데 서로 상의하되 저 사문은 짦은 동안에 스승의 경지를 모두
참증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본받고 공부해 볼만 하지 아니한가? 말하며 보살을 사모하고 웃따까의 회당을 나와 보살을 따르니 이들이 곧
안냐꼰단냐, 밧디야, 와포, 마하나마, 앗사지 등 이니라 .......
웃따까
라마 풋타는 라자가하 인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상의 대가입니다. 그의 초막에는 무려 7백이 넘는 제자들이 명상수련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라마는 검은 색이고 풋다는 아이를 뜻하니까, 이를 풀면 라마족의 아이, 즉 라마족 출신이라는 뜻이 됩니다. 검은 색은 원주민을 의미하니까 마루워
비아리안 계통임을 짐작할 수 있지요.
아라라와 웃따까의 명상법은 큰 차이는 없는데 다만 호흡방식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아라라는 숨을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는 시간비율을 엇비슷하게 조율한 반면, 웃다까는 숨을 멈추는 지식의 시간비율을 길게 잡는
호흡방식을 추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숨을 마심PuraKa, 숨을 참음KumbhaKa, 숨을 내쉼Rexaka을 삼단계로 나누고서
아라라는 시간비율을 1:1:1이나 1:2:2로 비율한 반면 웃따까는 1:4:2로 정해서, 숨을 멈추는 시간 비율이 다른 비율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경전을 보면 고행하던 보살이 숨을 멈추자 머리가 뚫어지는듯 아파왔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지식止息호흡법을 말하는
겁니다.
복식호흡腹息呼吸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숨을 마실 때 배가 팽창하고 잠시 멈췄다가 숨을 내쉴 때 배가 수축되도록
복부를 움직이는 호흡법이지요. 요즘에는 시간비율로 따져 1:0:3 으로 흡이 1 이라면 멈춤이 0 이고 호가 3 정도입니다. 즉 3초 동안 숨을
마셨다면 9초 동안 내쉬는거에요. 사이의 0 은 멈추지만 멈추는듯 마는듯 합니다.그래서 비율에 포함시키지 않지요.
이처럼 가르치는
방식이 다르니 당연히 수행의 과정이나 경계도 달랐어요. 아라라는 무의 경지를 성취하면 그곳이 최상의 경계라고 주장했고 웃다까는 한단계 더 높은,
의식도 비의식도 아닌 경지 즉 비상비비상처멸非想非非想處定이 최상의 경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아라라는 7단계 선정법, 웃타까는 8단계
선정법이라고 구분하기도 하지요.
이에 관해 좀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인도 선정은 기본적으로 4선정四禪定과 4무색정四無禪定이
있습니다. 위의 8선정이란 이 둘을 합한 것인데 달리 팔등지八等至, 팔정八定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선정이란 초선初禪, 2선二禪, 3선三禪,
4선四禪이고 사무색정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인데 사선정을 심心과 신身이
균형을 이루는 기본수행 단계라고 해서 색계정色界定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무색정은 이보다 높은 단계, 즉 더 집중된 명상상태에서
나오는 순수정신의 영역으로, 육체의 작용이 거의 멈춰진 상태였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선정단계는 다시 막가maggadhk와
팔라phala로 분류하면서 수다원이니 사다함이니 하는 복잡한 경계로 나아가는데 지도론을 보면 증상만을 일으킨 비구가 사선정을 사소문과四沙門果로
착각한다는 내용을 유츄할 때 사선정을 초보적 선정단계로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는 실제 경험가능한 과정이라기 보다 차등적
경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명칭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할 것이지요.
아무튼 인도사람들은 명상의 단계를 이렇게 복잡하게
나눠 생각했습니다.
보살은 웃따까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고 오래지 않아 그가 이룩한 최상의 경계에 도달합니다. 위에 말씀드린 육체의
작용이 거의 멈춰진 비상비비상처멸의 상태에 이르른 것이지요.
그때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무색정이란 육체적
기능이 극도로 저하된, 죽기 직전의 몽롱한 상태로, 육체적 근력만 축소될 뿐 도저히 해탈에 이르는 길과는 다르다. 생각도 아니고 생각이 아님의
경지란 육체의 작용이 마비된 상태에서 나오는 몽롱한 희열이요. 비정상적인 엑스타시의 체험에 불과하지 않은가?
행여 어느 순간 높은
정신적 자유를 획득 할지는 모르지만 평상시에도 그 자유가 이어지지 않는 것은 참다운 수행이 아니다. 한순간 마음을 풀면 오만 잡생각이 다시
떠오르고 감각이 끊임없이 자신을 속박하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 ....
평상심이 도라는 말이 있듯이, 보살은 제
아무리 높은 정신적 영역에 도달하더라도 그것이 일상에서 경험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실참실구 정신이예요. 굉장히
현실적이지요. 마치 어떤 병자가 고통을 이기고자 진통제를 맞았을 때 잠시 아픔을 잊을 수 있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고통스러운 것과 같다.
이같은 수행 역시 몽롱한 희열에 불과하고 수행의 온전한 길이 아니다 이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전 달에 엑스타시의 체함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뇌의 몽롱한 체험을 깨달음인양 착각하는 도인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아요. 번뇌의 때가 새까맣게 끼어있으면서도 깨달은 양 착각하며 날뛰는
악성적인 수행자들 말입니다.
뇌생리학자의 기록에는 흥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들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깊은 명상상태에 이르면
주의력을 관장하고 있는 영역이 크게 활성화되고 위치방향영역은 반대로 비활성화된다고 합니다.
위치 방향영역은 두 부분으로 분류되는데 좌측은
몸이 다른 문체와 분리되는 느낌을 갖게 하고 우측은 물리적 공간속에서 자신이 중심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합니다.
그래서 좌측
위치방향영역이 기능을 멈추면 자신의 육체와 외부세계와의 경계가 사라지고 마치 우주가 합일되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를 무한의식이라고 부르지요.
나아가 우측위치방향영역(뇌의 측두엽 해마)의 기능이 멈추면 전후좌후의 방향과 거리감각이 사라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무한한 공간을 자각하게 되는데
이것을 숙명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사무색정의 공무변처정을 비롯한 4단계 공간경험은 바로 이같은 체험을 의미한다고 할 것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이같은 명상의 뇌경험이 이뤄지는데 예를 들어 집단적인 종교의식이나 예배 등에서도 뇌의 일부에 감각공급이 중단되면
뇌의 일부기능이 정지되고 분리감이나 일체감 영적의식이 개현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뇌의 기능이 마비되는 겁니다. 요즈음 전자식 헬멧을 쓰고
위치방향영역을 차단하여 초자연적 현상이나 유체이탈과 같은 신비체험을 하는 경우도 사실 이와같은 뇌의 기능정지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어찌 생각하면 과학을 이용하여 가볍게 몇 분만에 우주가득한 영기를 느끼는 것이나 몇 십년 고생한 수행의 신비로운 체험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명상체험 자체가 곧 깨달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명상체험의
통찰이 그대로 세상에 대한 통찰과 자각은 아니라는 거에요. 보살은 이러한 사실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실제 우리 주변을 보면 소위
도통했노라고 주장하면서 산속에 홀로 좌정하고 독살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보살의 행로에서도 보이듯이 수행의 목적은 홀로
좌정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올바른 통찰과 자각의 능력을 함양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요가의
첫걸음이 사회적 금계인 야마를 닦는 것이고 불교수행 역시 초심자에게 계율을 닦는 것을 중시하는 이유는 바로 수행은 사회적으로 널리 승화될 때 그
가치가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수행한다면서 깊은 산속에 꼭꼭 숨어사는 은둔수행자는 분명히 잘못된 삶입니다. 결코 선승이라고
추앙받을 일이 아니에요.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 취미와 경향성이 되어 그곳에 안주하고 몇 몇 신자들과
친교하는 정도라면 그것은 바른 수행자의 길이 아니에요.
다시 본론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럼 그들의 명상과 수행방법이 전부
무용한 것이냐? 그건 아니에요. 웃따까가 행하는 고행과 명상법은 당시 수정주의修定主義 최고의 수련법이고 여러 문헌이 전하는 바, 두 스승은
초능력을 소유하여 자유자재로 생사를 움직이는 고매한 영적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보살이 6년정진을 하면서 견뎌낸 불굴의 의지는 첫째
보살의 굳건한 정진력이 우선이겠지만 이와 더불어 이들의 훈화와 수행법도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합니다. 보살의 사상적 토대가 된
샹카철학이나 명상의 주요한 기법 등은 모두 그들에게 전수받았었지요. 또 보살이 독특하게 체득한 8정도라는 중도madhyama-pratipad의
바탕 역시 이들에게 배운 4선정에서 비롯되었어요.
경전에는 아라라나 웃타까가 젊은 나이의 싯달타보다 못한 얼띠기로 표현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만일 그들이 정말 형편없었다면 보살이 그들의 처소를 방문할 이유도 없고 그들의 훈화를 경청할 리도 없겠지요. 보살이 대각을
성취하였을 때 맨먼저 두 분을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한마디로 그 이유는 보살이 평소 그 두분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각의 기쁨을 그들에게 맨 먼저 알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경전기록은 사실과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튼 보살은 몸의
오묘한 안락에 머무는 명상체험가나 초능력자가 되고자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히 사는 길을 찾고 나아가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하는 목적였기
때문에 그들의 만류를 뿌리친 것입니다.
이러한 보살의 중생을 향한 대비원력이야말로 불교가 소멸되지 않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간 원동력이
되었고 훗날 대승불교로 나아가는 발판이 됩니다.
다시 보살은 마가다국의 여러 곳을 전전 유행遊行하다가 우르벨라촌에
이릅니다. 그곳은 보드가야 근처 네란자강가에 위치하는 고행자의 숲인데 수많은 금욕수행자들이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네란자강은 팔구강의 지류가운데
하나인데 이름처럼 맑은 물과 깨끗한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진 곳이지요. 우루uru는 허리를 뜻하는 데 옛날 힌두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수행할 때
망상이 들 때마다 강변의 모래vela를 한 웅큼씩 퍼와 곁에 두었는데 점차 수행자의 허리까지 모래가 쌓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그만큼
예전부터 많은 수행자들이 정진하던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가지각색의 사문단이 난립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브라만
수행자들도 함께 수행했다고 합니다. 브라만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수행한 이유는 그곳이 고수들이 수행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제사장으로서 권위를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외도와 동침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사라시경에서 보살은 우루벨라의 정경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아, 나는 다시 선함을 구하고 최상의 진리를 추구하고자 마가다국을 차례로 유행하다가 우루벨라 세나니 가마村로
갔다. 그곳에서 쾌적한 땅과 깨끗한 숲을 보았다. 맑은 강이 굽이쳐 흘렀고 주위의 경관이 매우 수려하였다. 제자들아, 나는 생각했다.
이
땅은 상쾌하고 숲은 깨끗하구나. 맑은 강은 굽이쳐 흐르고 주위경관은 수려하다. 선남자가 열심히 수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보살이 이곳에 온 이유는 두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이미 두분 스승에게 샹카철학과 명상을 터득했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고행의 세계를 터득하려는 목적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같은 도반을 기대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보살은 그곳에서 그러한 대비이념의
수행자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믿는 종교와 이론을 고집하며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온갖 애착과 세속적 명예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옛
경전은 전하고 있지요.
이러한 그들을 가르켜 보살은 ‘삿되게 도를 구하는 외도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있었지만 보살과
대화가 통할 상대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거에요. 그게 결국 보살을 홀로 수행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과
같은 목적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입니다. 더우기 외로운 처지에 뜻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생긴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보살에게 진정한 도반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에요.
지금 우리 불교안에도 이렇게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교가 가는 방향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걸 제대로 개선하려는 사람들이 없다보니 중간에서 어정쩡 ‘이게 아닌데’하고 뒤쳐져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대세에 눌린다고 할까요.
그래서 요즘 신승新僧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기영 박사가 주장한 신승도래설이 그것이지요.
즉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출가승, 재가승이 아닌 새로운 보살승의 출현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아무튼 부처님의 처지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쟁쟁한 수행자들이 기거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대비원력을 주장하는 이가 주변에 없었어요. 모두 자신들이 상상한 세상에 갇혀
주의주장만 고집하고 자신의 위치만 공고히 하려는 무리들만 가득했지요. 그래서 보살은 그들을 싸잡아 ‘삿된 외도’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는 이곳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사문단들입니다.
외도라는 말은 불교적 입장에서 타종교인을
비하한 말이고 실제로 육인의 사상가, 혹은 종교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들의 이론과 사상은 당시 많은 수행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불교와 더불어
당시 사상계를 지배하던 대표적 신흥종교라고 할 수 있어요.
6인은 그들 사상계의 대표주자들이지요.
그들의 사상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모두 무도덕과 세상에 대한 반윤리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문헌에
의하면 그들은 아리안족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비아리안 계통의 사람들로, 나라를 잃고 방랑생활을 하다보니 당연히 세상에 대한 불만과 기존사상에
대해 회의를 가졌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육사의 한 사람인 아지타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갠지스강 남쪽이건 북쪽이건
어디서든 나쁜 짓을 하더라도 악의 과보같은 것은 미래에 없다. 브라흐마나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보시를 행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죽은 뒤 몸뚱이는
썩고 허무로 돌아갈 뿐이라고 주장했어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사회에 대해 기존의 도덕, 윤리 혹은 기성종교가
제 역활을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 회의 등으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요즈음도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렇게 허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천국이나 지옥은 인간의 상상이 지어낸 허무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어요.
특정 교인이 모여사는 천국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사람이 죽어 완전한 무無가 된다는 사고 역시 과학에 맹종한 편협일 뿐이에요.
어느
과학자가 죽음이 가까와진 환자들을 100만 분의 1의 미세한 파동까지 기록할 수 있는 특수장치 속에서 8,000명의 죽음에 대하여 관찰하였는데
죽음 직전 혹은 직후에 시체에서 빠져 나가리라는 영혼(혹은 혼불, 엑토플라즘)은 체내 가스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해요. 그래서
죽음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러한 특수장치라는 것으로 모든 걸 다 볼 수는 없어요.
그리고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과학은 완전한 증거품이 아니에요. 우리가 과학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사실을 맹종하고 있지만 실제 커다란 우주
전체를 놓고 볼 때 현재 인류가 이룩한 과학 수준은 극히 미미한 정도입니다. 즉 무한한 천체가 과학이 밝혀내야할 부분이라면 지금까지 과학의
성과는 아주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과학을 주도하는 인간은 오관안에서 모든 과학적 지식을 판단하기 때문에 애시당초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만일 귀가 완전한 영역이라면 모든 소리를 다 들어야 하지만 인간의 귀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주 큰 소리도 듣지 못해요. 그래서 그러한 감관으로 판단하는 과학의 수준이란 결국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능장애,
기능제한이라고 말합니다.
눈도 귀도 코도 ...감각기관이 다 마찬가지이지요.
그렇게 볼 때 공상과 신비경을 헤매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과학실험 등의 방법에 무조건 의지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혼불이 나가요. 저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이 혼불을 영체靈體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별같은 몸이라고 해서 astral body라고 해요. 이 혼불을 영국 과학자 탈리움은 유체
실험을 통해서 사후에 대략 49일간 존속한다고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사후세계는 죽었다 다시 산 사람들에 의해서 일부 밝혀지기도 하는데
동양사람이나 사양사람이나 그들이 죽어 경험한 공통된 부분은 공중부유- 깜깜한 터널- 과거회상- 바깥세상 등의 순서이고 바깥세상은 동양사람에게는
동양적 풍물로, 서양사람에게는 서양적 풍물로 인식된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터널을 통과할 때 괴거를 회상하는데 마치 모니터에 영상이 비치듯
자신의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난다고 해요. 그걸 보면서 엉엉 울기도 하고 깊은 회한에 잠긴다고 합니다. 이 모니터가 옛날로 치면
업경대입니다.
아무튼 영혼단멸의 사상역시 문제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또 이원론을 주장한 니간다 나타풋타는 절대자나 신을
의지하는 일은 바보이며 은총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오로지 자신만 믿는 자력수행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물질과 정신의 선차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원론을 주장했는데 즉 우주는 영혼을 의미하는 영아靈我jiva과 물질, 운동의 조건, 정지의 조건, 허공의 네가지를 포함하는
비영아非靈我ajiva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몸. 업. 마음의 삼업의 활동에 의해 물질이 영아에게 부착하기 때문에
결국 영아는 속박되며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에요. 육체에 붙은 업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업의 유입을 방지해야 하고 엄중한 고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육체의 안락과 욕망으로 인해서 업이 쌓이는데 이로 인해 정신이 흐려지며 자유가 구속된다 그래서
고통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망을 제어해서 정신을 맑게 하고 새로운 업의 유입을 막으면 인간은 자연히 해탈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주장한
것입니다.
보살의 사유에 니간타의 사상이 큰 영향을 주었고 훗날 자이나교로 성장하게 되는데 불교와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유사한 종교로 남게
됩니다. 더우기 붓다의 출생연대와 출신계급, 출가동기 등이 엇비슷하지요. 아무튼 보살은 니간타 나타풋타의 ‘육체의 안락과 욕망으로 인해 업이
생기기 때문에 탐욕을 떠나 번뇌의 불을 소멸하는 고행만이 올바른 도다’라는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62견六十二見 등,
비슷한 교리와 사상들이 많았지만 육사외도가 사상계의 대표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육사외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사문과경沙門果經에 전합니다.
불본행집경과 방광대장엄경에서 이때의 보살의 결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수행자가 좋은 음식을 봉양하고 쾌락을 즐기면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잘못이다. 물에 젖은 나무에 불길이 일어날 수는 없지 않은가? 좀더 혹심한 고행을 감내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고타마는
다섯 수행자와 함께 네란자강이 굽이쳐 흐르느 가야산에 올라 산꼭대기 한 나무아래 풀을 깔고 앉아 생각하였다.
세간에 사마나나 브라만들이
몸과 마음이 방일하여 타오르는 욕망에 집착하면 비록 고행을 닦더라도 도에 이를 수 없다. 또한 몸을 제어하여 욕락을 행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오히려 쾌락에 집착하면 비록 고행을 닦는다 해도 도에 이를 수 없다. 몸을 제어항 욕락에 탐착하지 않고 마음이 순일하여 타오르는 번뇌를 소멸하고
부지런히 고행을 닦아 행하면 곧 스스로 이익되고 남을 이익케하는 도를 증득할 수 있으리라.
몸을 제어하여 욕락을 행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쾌락에 집착하면....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걸 생각케 하는 경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중부경전 ‘브라만 잔누쏘니에게
설한 말씀’에도 이때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깊은 숲속의 외진 곳에 거주하는 모든 고행자들과 브라만들은 아직 몸. 말.
생각 등의 삶이 청정하지 않다. 갈애와 질투.정욕.증오.탐욕으로 가득 찼다. 나태와 무기력.마음의 보조화와 불균형. 의심과 불확실로 그들의
마음은 혼란스럽다. 혹 그들은 제 잘난 맛에 숲속생활을 하며 남을 헐뜯는 다. 명예와 명성을 얻고 지키기 위해 비굴해진다. ....지능은
감퇴되고 자제력은 줄어들며 마음은 쉽게 동요된다. 이러한 청정하지 못함 때문에 그들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바보처럼 두려움과 공포를
자초한다.
보살이 우르벨라 고행자의 숲을 떠난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욕망에 집착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순일하지 않는 수행자를 ‘물에 젖은 나무’에 비유했어요.
보살은 수행자가 탁발할 때 맛난 음식을 탐하고 세속적 명예나 자기
고집만 내세우면서 천국에 나기를 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혼자 고행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보살은 가야산에 올라가
주위를 살펴 봅니다. 앞에는 네란자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엔 넓은 평지, 그 위로 길게 솟은 둥게스와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보살은 그곳이 자신의
수행처로 직감합니다.
가야산에서 둥게스와리까지는 8킬로 정도의 거리. 원래 지명은 ‘둥게스와리’였지만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깨달음을
이루기 전의 산이란 뜻으로 전정각산前正覺山으로 불렸습니다. 산아래에는 죽은 사람을 갖다 버리는 시타림이 있고 산등성에는 3개의 큰 동굴이
있지요.
이 가운데 가장 큰 동굴은 부처님이 용을 위로하기 위해 그림자를 남겼다는 유영굴留影窟입니다. 대중 예배를 볼 정도로 안이 넓고
지금은 티벳스님들이 관리하고 있지요. 산은 가시나무 천지인 박토이고 정상은 매우 험한 칼날 바위산이지만 주변은 드넓게 모래평야가 펼져진
곳입니다. 드문드문 인가가 보이고 저멀리 네란가강이 보이는 아주 평화스러운 곳이에요. 마치 잘 다듬어진 공원같지요.
지금은 하라잔
중에서도 최하의 계급인 불가촉 천민이 살고 있고 인도에서 가장 빈곤한 미개발지역중의 하나입니다. 문맹률이 100%에 육박하는 이곳에 제3세계
아동교육을 서원한 법륜스님의 정토회 수자타 아카데미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지금도 서쪽마을 유치원 개장식에 가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보살은 죽음을 불사한 수행에 들어갑니다.
실로 스승없는 무사독오武師獨悟의 출발은 이곳에서
비롯됩니다.
다섯명의 수행자도 보살과 함께 동거동락합니다. 안냐꼰단냐, 밧디야, 와포, 마하나마, 앗사지 등인데 어떤 경전에는 그들이
숫도다나 라쟈가 보낸 태자의 시종으로 전하기도 합니다만 확실치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번갈아 공양을 얻으러 나갑니다.
한 사람이
탁발을 해오면 다같이 나눠 먹습니다. 모두 소식했기 때문에 한사람의 수행자가 먹는 양으로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보살의 의지는 점점
금욕수행으로 기웁니다. 욕망의 근원인 육체를 조복받는 길이 해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견디는 수행법, 마음을 제어하는 명상법,
호흡을 멈추게 하는 방법, 극도의 단식 등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수행법을 총동원하기에 이릅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