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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0.11.11-12(1박2일)
행로
대전-호남고속도로 정읍 IC 출구-18번도로-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 입구-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 출구-해남 땅끝관광지행
거리 약650KM
비용 342,000원
교통비 188,400원 (유류비 약 130,000원, 통행료 15,000원, 승선료(차량, 2인)43,400원)
식사 점심 32,000 저녁 20,000 간식 20,000 아침 20,000 숙박 50,000 점심 12,000
아내와 보길도를 향한다
8시에 대전 집을 출발해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예상대로 12시 해남 갈두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산양진항 배편이 13시에 있다
노화도에서 보길도를 잇는 보길대교 개통후에는 땅끝에서 보길도행은 없고 노화도 산양진항 가는 배만 있다
보길도로 직접들어가려면 완도에서 승선을 해야한다.
우선 선착장에서 가까운 매운탕집에서 낙지볶음에 점심을 먹었다.
야채가 듬뿍들어간 얼큰하고 달달한 낙지 한 접시가 3만원에 공기밥은 별도란다
이거이 낙지볶음 한 상
배가 땅끝 갈두 선착장을 출발하여
30여분지나 노화도 산양진 선착장에 도착한다
약 7.2KM 노화도를 관통하여 보길대교를 지나 보길도를 진입한다( 레니게이드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보길도사진
보길대교 건너 우측으로 면사무소를 지나 왼쪽 방면으로 부황리에 윤선도 유적지가있다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부정공(副正公) 유심(唯深)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8세 때 백부인 관찰공(觀察公) 유기(唯幾)의 양자로 가서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16년(광해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 夢天謠〉 5수,
〈우후요 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읊은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다.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漁父四時詞
1651년(효종 2)에 윤선도(尹善道 : 1587~1671)가 지은 연시조.
지은이가 65세 때 벼슬을 그만두고 전라남도 보길도 부용동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한몸이 되어 강호한정(江湖閑情)에 빠지는 것이 주제이다. 4계절을 각 10수씩 40수로 하고 여음이 붙어 있다. 여음은 배를 띄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따라 말을 붙였다. 고려 후기의 〈어부가〉를 이어받아 다시 창작한 것으로, 이현보의 〈어부사〉나
그밖의 어부가에 속하는 노래는 한시에 여음이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래는 순 우리말로 새롭게 썼다. 〈오우가 五友歌〉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고산유고 孤山遺稿〉에 실려 전한다
부황리에있는 고산 선생의 유적지 중 으뜸은 계곡을 막은 연못위에 지은 정자 세연정이다
세연지, 회수담, 세연정, 세연칠암, 판석보 등이 있는 부황리 정원은 '윤선도 원림'(명승34호)으로 보호되고 있다
노송과 은행나무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세연정
건너편에서 세연정을 배경으로 아내와....
연못에 비친 세연정
판석을 세워 속을 채운뒤 판석을 덮어만든 보, 갈수기에 물막음이되고 물이 넘치면 폭포가 된다
여기는 봄에 와야 제격일듯하다, 온통 동백이다 숲을 이룬 동백이 필 때 언제 한 번 다시 올 수 있을까
큰길재와 수리봉을 거쳐 격자봉 산행을 계획하고 마을 입구로 들어간다
금방 빗방울이도 떨어질 듯 바람이 불고 심란한 날씨다
산행 초입, 잠시후 동백숲을 지나 작을 계류를 건너니 수풀이 우거져 아내와 함께 산행하기에는 어려울듯하다
산행은 생략하고 돌아선다
돌아서서 맞은편 산 중턱에 보이는 동천석실이.
고산선생이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했던 동천석실은 부용동이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에 있다.
그리고 동천석실이란 이름은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복지라고 부르던 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멀리 왼쪽에 보이는 것이 곡수당이고 오른쪽 위에 있는 건물이 낙서재다
곡수당역시 계곡을 막아 두 갈래 물길을 내고 그위에 집을 지었다(정면에 보이는 집)
낙서재 고산선생이 여생을 보낸 집( 레니게이드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뾰족산(보죽산)을 향하는 바닷가에서
망끝전망대 오늘 일몰은 잔뜩 흐린날 덕분에 포기하고 뾰족산과 공룡알 해변으로 간다
공룡알해변에서 진짜 공룡알을 닮은 돌을 주었다
아내는 학교 친구도 만나고.....
멸치를 삶아내어 망을 펴고 널어 바닷바람에 말린다
멸치 건조마당
멸치를 삶아 소쿠리에 담아내는 아주머니 손 놀림이 바쁘다
갓 삶안낸 멸치 소쿠리다, 물빠지기를 기다려 마당에 펼쳐 말린다
아내 친구 가족과 청별항에서 맛난 매운탕 식사를 하고 예송리 숙소를 향한다
늦은 시간까지 가슴 깊은 사연들을 토해내며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시간을 갖고 서로의 침실로 향한다
아직 어두운 새벽시간
이른 아침 일출 시간에 맞추어놓은 알람에 일어나 밖을 보니 흐미한 별이 보인다
멋진 일출을 기대하며 옷을 입고 나가 당최 어째 시간이????? 전화기를 열어보니 4시40분이다
새벽기도 맞추어 놓은 알람에 일어난 것이다 옷 입은채로 졸다가 6시 넘어 예송리전망대를 찾았다
안개가 심해 일출은 못볼 것 같고 전망대에서 예송리 마을 전경을 여명의 빛에 담았다
아침식사는 주인댁에 전복죽을 예약하였다 주인댁에서 양식한 전복으로 흔치않은 아침상을 받는다
자녀들 도회지 나가고 두 어르신이 아담하게 황토집 지어 어장 돌보며 민박에 식사 손님까지 맞이한다
예송리 몽돌(갯돌)해변전경 레니게이드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마을 앞 예송리 몽돌 해수욕장에서 파도에 휩쓸리는 몽돌 부딫히는 소리 달그르르르...............
한 움큼 몽돌을 주은 친구, 어 이거 주어가면 안되는데...
나가는 길에 송시열글쓴 바위에 들렀다
송시열글쓴바위 앞에서 친구가족과
송시열글쓴바위는 보길도의 선백도마을 앞 바닷가의 암벽을 말한다. 이곳은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인 우암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 유배길에 올라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잠시 쉬며 임금에 대한 서움함과 그리움을 시로
읇어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여든세살 늙은 몸이 만경창파를 해치며 바다를 가는 구나......』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시로 표현하여 바위에 새겨놓았다.
이후 우암의 후학인 임관주라는 사람이 1707년 같은 바닷길로 유배를 가다 이곳에 들러 『동국의 』라는 오언 절구를
남겨 오늘에 전하고 있다.
글쓴바위는 보길도와 소안도 사이 해협으로 소안도가 손에 잡힐 듯이 바다에 떠있으며 주변은 해조류가 풍부하고
해식애가 발달한 천혜의 바다낚시터이다
바닷가오솔길
외로운 여자랍니다
산양진선착장에 9시 25분 도착했는데 30분에 땅끝갈두선착장 가는 배가 있다 서둘러 표를 사고 승용차를 싣기위해
다가가니 이유없이 저리 비키란다
영문도 모르고 잠시 비켜서있는데 어제 만난 친구는 배에 차를 싣는다 당최 영문을 몰라 차에서 내려 안내 직원에게 물었다
이런 새로운 사실이 있을 줄이야... 농협에서 운항하는 배는 화믈차만 싣고 간다
친구는 승용밴차량이라서 싣고 먼저 떠난다. 우린 이렇게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승용차는 승객이 함께 탈 수 있는 여객선에 실어야 한다는 사실.........
아래 시각은 혹 버스를 이용하게 되면 도움될까? 해남 갈두리 선착장에서 광주 목포 가는 시각표다
땅끝에 돌아왔다 어제 보길도 가는 길이 바빠서 그냥 지나친 그 곳, 2년 전 국토종단 한다고 처음 밟은 땅끝마을이다
어제 이곳을 들어오며 아내에게 저기 저 집에서 자고 저녁은 저기서 먹고 요기 골목안에 교회가 있었는데.....
나는 쉴 새없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 감동을 공감하려고 온맘으로 대꾸해주는 아내가 고맙다.
해 돋이 명소, 형제바위 촬영포인트다 해보다 예쁜 보름달이 있어 감사하다
역시 보름달...(피오나?)
2년전 밤에 호기심에 혼자 걸었던 그길 해안 산책로를 오늘은 혜영이와 손잡고 느긋하게 걷는다
아 땅끝탑???!!!
2년전의 그 감동이 밀려온다 이렇게 기도하고 20일 국토종단을 시작했는데.....
지구촌의 먹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돕자고 알리고 싶어 시작한 국토종단,(땅끝-임진각)
작은 현수막 배낭에 꽂고 1400리길을 18일동안 걸었다
그 탑이다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
그 탑 아래 혜영이와 왔다 그 많은 감동이 밀려온다
인증샷 한 방
역시 보름달이다
땅끝탑을 뒤로하고 올라오는 길에 아쉬움에 다시 한 방.....
땅끝 전망대에 이르러 파란 하늘이 아름답다
오르막길에 약한 보름달의 휴식
갈두봉 봉수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갈두리 해안 선착장 전경
모노레일을 마다하고 걸어서 내려오는 우리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만난 단풍이 곱다
많은 추억과 감동의 땅끝마을을 뒤로하고 그 때 걷던 길을 따라 승용차를 달린다
갈등끝에 완도로 방향을 틀어 해신 촬영장 가는길 청해초등학교 교정에 아름다운 은행나무아래서
해남 북평 남창 용줄달리기
언젠가 TV에서 본 그거다. 짚으로 엮은 줄이 사람 몸통 만큼 굵다 용줄이라고 하는데 여러지방에서 문화 행사로 한다
두 팀으로 나누어 풍물패를 앞세우고 마주 행진하여 읍내 한복판에서 만나 줄달리기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준비 과정만 보고 발을 돌렸다
아내는 북평 시장구경 하는 동안 줄달리기 공여 사진찍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올라갈 길이 멀어 본 행사는 보지못하고 발길을 돌려 강진 오는길에 다산초당에 들렸다
강진군 신전면소재지 유일한 개인택시 강태훈사장님을 찾아뵈었다
2년전 국토종단을 할 때 첫날 컨테이너 택시차부에서 나를 재워주신 사장님인데 늘 고마운마음 간직하고 있었다
전화드리니 이발소에서 황급하게 나와 반갑게 맞아 주신다
인증샷은 못찍고 2년전 그때 사진으로 강사장님 얼굴을 다시 만나 본다
주변에 좋은산 많으니까 놀러오라시는 사장님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강진으로 고고..
강진하면 다산어른유적지를 반드시 돌아보고 가야한다는 아내의 말에 다산초당을 들어선다
정다산유적(丁茶山遺蹟)은 사적 제107호로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이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이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백여 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하였다.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길에 인심좋은 아저씨에게 야생 차나무를 두 그루 얻었다
천주쟁이라는 죄명으로 강진에 귀양을 와서 주막집 뒷방을 전전하다 8년만에 자리를 잡은곳이 다산초당이다
외딴 귀양지에서 채마밭을 가꾸고 차를 달여 밤새도록 제자들과 토론하고 책을 500권이나 쓰셨다
손수 바위에 丁石이란 글을 새겨 생활에 결의를 다진 선생의 결연함이 느껴진다
종지님 블로그 사진이 좋아 몇장 땡겨놓았는데 아쉽게 여기도 다산4경 사진이 없다
다산4경, 저물고 마음이 급해 사진을 찍지 못해서 바람의 나라님 블로그를 훔쳐보았다
1경. 다조 - 넓은 바위로 차를 끓이는 부뚜막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2경. 약천 -
3경. 연지석가산 - 다산선생이 직접 만든 연못으로 초당옆에 있다
4경. 정석 - 초당 뒤 편 바위에 결의를 다지기위해 직접 새긴 글씨 丁石
유적 복원이 원형을 살리지 못하고 영화세트 같은 아쉬움이 있다
다산동암이다 초당 동쪽에있는 동암(송풍루)은 다산어른이 18년 유배기간에 책을 집필하던 곳인데
2000여권의 책을 준비하고 500권을 글로 쏟아낸 넘치게 채워진 선생의 박식함이 놀랍다
천일각, 백련사 올라가는 길이다 (http://cfile239.uf.daum.net)
천일각이다
강진만이 발아래로 보이는 전망좋은 정자다
다산은 여기 올라 우이도(소흑산도)에 유배중인 몸이 약한 형 정약전을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백련사 길이 이어지는데 다음기회를 약속하고 하산
내려오는 길에 초당에서 보름달 인증샷
돌아오는 길에 작은 수레에 짐을 싣고 쉬고 계신 할머니를 만났다.
오르막이 꽤 급한 고개를 수레를 끌고 가시기에 힘이 부칠듯하여 "할머니 제가 끌고 갈게요"하고 수레를 잡으니 일어나신다.
연세가 여든셋이신 할머니는 허리가 굽으신거 말고는 모두 건강하시단다
거름할려고 은행잎을 마대자루에 담아오신단다 아들보면 혼난다고 집 들어가기전에 밭에 뿌려 놓고 가신다는 할머니와 헤어지며 "할머니 예수믿으세요?" 했더니 두 손을 꼭 잡으시며 반가워하신다
도암에 있는 교회를 새벽예배까지 참석하시는 권사님이시란다.
건강하시길를 축복하고 헤어져 아까 얻어 감추어 둔 야생 차나무를 찾아들고 내려와 다산어른
과 작별을 한다
늦었다 차를 달려서 강진 영랑생가에 왔다 앞 마당 돌담길이 정겹다
연출도 해보고.....좀 뒤쪽에 있으면 좋았을 걸..
의례적인 인증샷
안채 오른편 정원에 모란이 풍성한데 찬바람에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흐드러지게 모란이 핀날 혜영이와 오리라 다짐했는데 시기를 놓쳤다
여기도 다음 기회에..... 모란 풍성한 영랑님 생가 인증샷 기대해본다
마지막 돌담길 작품
올라오는 길 어디로 갈등이다 나주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탈까 아니면 광주로가서 호남고속도로를 탈까.
가장 다거리 13번 국도로 장성까지 내달리는데 퇴근 시간에 나주, 광주 시내를 통과했다
많이 지체되어 9시 조금 넘어서 대전에 도착하여 여행을 마쳤다
아내와 둘이 오붓한 여행이었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오붓함에 질높은 식사로 스스로 위로하고 해남과 보길도 여행기를 마친다.
첫댓글 햐. 그림 허벌나게 좋구나.
넘 길어 불러올리는데 한참 걸린다. 짤라 두세개로 올리는게 좋겠는데.
와~~ 86년쯤인가~~ 광양제철유치원 샘들과 미니버스 대절해서 다녀왔었는데 이제 잘 꾸면놨네... 그림 좋고...
편하게 앉아서 구경 한번 잘했네요. 여행은 정말 마음의 쉼을 가져다 주는 귀한 시간 같아요. 시간나는 대로 좋은 추억 많이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