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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문 - 유신을 가른 불꽃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 위원장. 1970년대≫
[이 글은1993년 대동출판사에서「쓰여지지 않은 현대사」를 편집한다고 이재문동지에 관한 인터뷰의 요청을 받아 구술한 내용을 출판사 편집부가 다른 기록과 아울러 편집한 글입니다.
4월을 맞이하여 고 이재문 동지를 추모하면서 여기에 옮겨 게재합니다.]
이재문
대중을 사랑하고 신뢰함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고자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이유를 당신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중은 혁명을 떠받쳐주는 기반이고
혁명을 밀어주고 이끌어주는 원동력이고
최후까지 혁명을 지켜주는 철옹성이기 때문이라고
김남주의 시 ≪투쟁과 그날 그날≫ 중에서
연보
1934. 7. 9 경북 의성에서 태어남
1953 선산고 졸업
1957 경북대 정치학과 졸업. ≪영남일보≫ 입사
1960 ≪민족일보≫ 기자, 통일민주청년동맹 참가
1964 인혁당사건으로 구속, 집행유예
1976. 2. 29 남조선임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1979. 10. 4 ≪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됨
1980. 12. 23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1981. 11. 22 옥중에서 순절
그 시절의 풍경화
70년대 후반, 일본 관동군장교 출신으로 검은 안경을 즐겨 쓴 깡마른 독재자가 다스리던 때로 돌아가보자. 거리는 참으로 살풍경하다. 전파사 스피커로 긴급조치 9호 방송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들은 척 만 척 굳은 얼굴로 바삐 어디론가 가고 있다. 김상진이라는 서울대생이 ≪민주주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외치면서 농대강의실 5층에서 투신한다. 눈물과 분노로 한껏 상기된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뒤따른다. 장준하라는 유력한 재야의 지도자이자 경험 많은 등산가가 도봉산에서 ≪실족사≫했다는 호외가 바람에 흩날린다.
1976년 2월 29일 서울시 중구 청계천 3가에 있는 중국음식점 태성장 2층방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세 사람이 은밀하게 밀담을 나누고 있다. 얘기가 끝나자 세 사람은 결연한 얼굴로 허리를 펴고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잡는다. 강령하고 뜨거운 시선이 오고간다. 그 중 한 사람이 재크나이프를 탁자 위에 놓는다. 세 사람이 포개잡고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한자 한자를 새기듯이 또박또박 선서한다. 이런 내용이다.
나는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의 강령과 규약을 적극 찬동하고 민주투사의 영예로운 사명과 임무를 받음에 있어서 나의 온갖 노력과 재산과 생명을 다바쳐 반독재민주투쟁을 위하여 멸사할 것이며 만약 규약과 조직의 결정을 위배할 때에는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굳게 맹세하고 이에 엄숙히 선서함.
이들 세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이 바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온몸으로 유신과 싸웠던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의 전사들인 이재문, 신향식(申香植), 김병권(金秉權)이다. 이들은 이 작은 방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발기인 대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강령, 규약 및 선서문 등을 검토 확정하고 반제반독재민주주의 투쟁을 조직 계획하기 위한 지도부로 발기인 3명이 다같이 중앙위원으로 취임하여 지도부를 형성했다. 이재문은 조직의 관리, 확산 및 자금관리를 담당하고, 신향식은 조직원의 학습담당, 김병권은 빈민촌 실태파악 및 노인층을 포섭 교양하기로 임무를 분담했다.
이들은 이미 사회주의국가와 제3세계 각국의 민족해방전선에 관한 혁명운동자료를 참고하여, 유신체제는 ≪미?일 제국주의 신식민지로화횄다≫고 규정하고 이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학생, 노동자, 농민들을 조직하고 민중항쟁을 일으켜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후 연합정권을 수립하고 미?일 제국주의를 배격해야 한다는 목표에 합의한 바 있었다. 또 이들은 1960년대의 인혁당, 통혁당 형태의 조직보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서 일반적 조직형태인 검증된 민족해방전선을 조직하여 반제국, 반봉건, 반식민 투쟁을 광범하게 전개하고 민족해방민주혁명을 수행할 비밀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 단체명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로 결정했다.
이 날의 모임은 이 결정을 현실화하는 것이었다. 이 날의 모임에서 이재문이 조직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미 60, 70년대 사회운동과정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인간의 양심마저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긴급조치시대의 겨울공화국. 고개만 살짝 들어도 칼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쳐오던 그 고난의 시절에 고개를 꼿꼿이 쳐들과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이재문의 일생을 되살려보자.
변혁운동에 뛰어들기까지
이재문(李在汶)은 1934년 7월 9일 경북 의성군 옥산면 진흥리의 한 엄격한 유가(儒家)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말귀를 알아들을 만할 때부터 영남지방에서 한학과 도학으로 상당한 명성이 있던 큰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게 된다. 새벽 다섯 시가 되면 큰아버지는 의관을 정제하고 이재문과 다른 자제들의 아침 문안을 기다렸으며 인사가 끝나면 바로 글을 읽히기 시작했다.
어린 이재문은 잘못을 저질러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했던 형이 벌을 주면 동짓달 대구 수성천의 얼음을 깨고 뼛골까지 시리는 얼음물 속에 들어갈 만큼 독한 면이 있었다. 이재문의 큰아버지도 대단히 대가 곧은 사람으로 곡학아세하는 삶을 가장 경멸하였고 무릇 사람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선비정신을 각별히 강조하여 가르쳤다. 이러한 유교적 도의(道義)개념은 유년기 이재문의 의식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1960년 4월민중항쟁 이후 본격적인 사회의식을 갖게 될 때까지 그가 건전하고 강직한 성품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머리가 대단히 총명한 편이었던 이재문은 국민학교부터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57년 4월 기자의 길을 택해 ≪영남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이때도 입사시험에서 수석을 했다.
당시 ≪영남일보≫에는 쟁쟁한 언론인이 많이 있었다. 특히 박정봉(朴靜鳳)은 성향이 곧고 필체가 날카로워 자유당 정권이 꽤 애를 먹었다. 그가 졸업할 당시는 말기에 도달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고 지금과는 달리 그나마 언론이 거의 유일한 저항세력으로 이정권에 맞서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미 대학시절부터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했던 유한종 등 대구사회의 진보적 장년층과 접촉하며 일정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던 이재문이 기자의 길을 택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영남일보≫ 사장이 자유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 원선거에 출마하자 이재문은 야당지였던 ≪대구매일신문≫으로 적을 옮겼다. 그러던중 4?19가 터졌다. 자유와 정의를 외치며 목숨 걸고 항쟁의 거리를 가득 메운 이름 없는 영웅들의 격정적 영상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관, 인생관을 심어주었다. 개인에 매몰된 삶을 거부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분단된 조국의 하나됨을 지향하고자 하는 숱한 젊은 사자(獅子)들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4?19세대다. 물론 그들 중에는 한 차례 격정이 지나간 후 안락과 출세의 길을 찾아 유신의 전위로, 매문가로 변절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4?19의 정신을 자기 삶 속에 그대로 이어나가고자 했다. 이재문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재문의 의식이 결정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한 것은 ≪대구매일신문≫ 재직 당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학생시위를 취재하러 갔다가 김주열 학생의 주검을 목도하면서부터였다. ≪민중의 힘≫이 눈앞에 살아 꿈틀거리던 그 시절, 펄펄 피가 끓는 청년 이재문은 이미 평범한 기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항쟁 내내 시위대를 쫓아다니며 민중의 역동적인 파고를 기사화했다.
이재문은 진보적 민족언론을 표방하며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대구 매일신문사를 그만두고 바로 ≪민족일보≫에 뛰어들었다. 그 시절에 그는 혁신정당 담당기자로 당대의 사회운동가들과 교분을 쌓았다. 이때 맺어진 인간관계는 십오 년 뒤 남민전 시절까지 끈끈히 이어지게 된다. 당시 그는 베트남과 쿠바 등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관련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로 그의 사고영역은 이미 사회의 근본적 변혁문제에까지 미쳤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4월민중항쟁의 격동기 속에 하루가 다르게 의식의 발전을 거듭하던 그의 언론 차원의 활동영역을 더욱 넓혀 진보적 청년운동단체인 통민청에 참여한다. 당시 통민청에는 우홍선, 김배영, 김영옥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통민청 활동뿐만 아니라 대구지역에서 활동하던 민민청의 서도원, 도예종 등과도 교류를 가졌다. 그는 이들을 통해 60, 70년대 내내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많은 진보적 청년들과 교분을 맺게 된다. 특히 그는 당시 통민청의 실질적인 조직자였던 사회당 조직부정 최백근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땅이 뉘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의 구호 아래 열화와 같이 번져갔던 평화통일운동에서도 일익을 담당했다.
인혁당사건에 연루되어
4.19를 계기로 급격히 확대되었던 그의 활동은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일정한 단절을 겪게 된다. 군사쿠데타가 나자마자 ≪민족일보≫는 즉각 폐간되었고 ≪민족일보≫의 간부와 기자들은 구속되었다. 이재문은 군사정권에 쫓기는 몸이 되어 첫 수배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군사쿠데타가 나자 민자통과 혁신계 정당 일각에서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과거 경력을 들먹이면서 섣불리 탄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어떤 기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 통민청, 민민청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던 청년들도 6월 18일 김낙중(金洛中)이 근무하고 있던 한국농업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비공식 모임을 갖고 이 문제를 토의했다. 결과 전원이 일단 피신해야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 판단은 정확했다. 군사쿠데타 주역들은 혁신계와 민자통 인사들을 깡그리 구속했다. ≪민족일보≫ 사장이었던 조용수(趙鏞壽)와 사회당의 최백근은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당했다.
평생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그는 특히 이때의 수배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 이나영의 ≪조선민족해방투쟁사≫, 소련의 교과서였던 ≪철학교정≫, ≪경제학교정≫, 칼 맑스의 ≪자본론≫, 민족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저서, 일본 AALA연구소에서 펴낸 ≪민족운동개관≫등이 이 시절 그의 주요한 독서목록이었다.
얼마 후 수배가 풀려 자유로운 몸이 된 이재문은 다시 ≪대구매일신문≫에 들어가 서울주재 국회출입기자로 일했다. 그러던중 1차 인혁당 사건이 터졌다. 이재문도 사건의 파장 안에 들어 있었다.
이 사건에 연관되어 이재문은 1964년 8월 구속되었지만 다른 동료들과 함께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이듬해 1월에 석방되었다. 5개월간의 억울한 옥살이였다. 당시 이재문은 대학 후배들이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나서는 것을 적극 지원하기는 하였으나 어떤 조직사건으로 꼬투리 잡힐 여지는 전혀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965년 5월에 다시 재판을 해서 이재문에게 기어이 1년징역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전위조직 건설 논쟁
감옥을 나온 그는 헌신적으로 자신의 옥바라지를 했던 김재원과 명동성당에서 혼례를 올린다. 김재원은 이재문이 ≪대구매일신문≫의 서울주재 국회출입기자로 일할 때 같은 계열의 카톨릭신문 기자였다. 김재원은 그의 인상을 ≪처음에는 촌뜨기 같아 관심이 없었으나 내가 모르는 부분을 많이 알고 있었고 약속시간에는 5분도 늦는 일이 없는 정확한 사람이었다. 말을 하면 반드시 실천하는 보기 드문 사람임을 몇 번 만나지 않아 쉽게 느낄 수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만난 지 석달 만에 1차 인혁당사건이 터져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를 면회 갔더니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대범하고 당당해 그때부터 ≪이 사람은 내가 꼭 도와야겠다≫고 결심하고 그 길로 기자직까지 버리고 옥바라지에 발벗고 나섰다고 한다.
이재문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정권의 압력으로 가자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대구로 내려가 대덕산 아래 조그만 전셋집에 등지를 틀었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생활을 운동이론 습득과 토론, 후배양성에 바치면서 ≪혁명가≫로 변신해나갔다. 1967년 경부터 그 곳에는 뒤에 ≪인혁당을 재건하여 민청학력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한 서도원, 하재완, 송상신, 여정남 등 대구지방의 의식 있는 청장년 및 학생들이 자주 들러 각종 토론으로 밤새는 줄 모르곤 했다. 당시를 안재구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대덕산 기슭에 비치는 등창불
어둔 산 그늘에 유달리 밝았네
그 빛따라 그대 둘레
모인 젊은이
가슴마다
작은 불씨 피워나갔네
파쇼의 모진 칼날에
그대 육신 찢겨도
아! 그대는 지상의 별이어라
당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토론주제도 최첨단을 달려 중소논쟁과 전위조직논쟁 등 당시의 중요사안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특히 중소논쟁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관심하였다. 한창 때는 모스크바방송, 북경방송까지 들어가며 어디든 모여 앉기만 하면 이를 주제로 격론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이재문은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중국의 입장을 옹호했던 것과는 달리 소련을 입장을 옹호했다. 그는 소련이 주장하는 긴장완화론이 한반도 통일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중립적 입장으로 정리하는데, 북한에서 중소 양쪽을 다 비판하면서 ≪우리는 남의 책상에 양다리 걸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을 민족자주적 입장이라 하여 좋게 생각했다 한다.
군사쿠데타와 한일회담반대투쟁을 거치면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혁명의 지도부 건설이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지도부 건설의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라졌다. 즉각 전위조직 건설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인사들은 해방정국과 4월민중항쟁 등 그간의 투쟁에서 검열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전위조직건설을 당면 일정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로 1974년 인혁당재건위사건에 관계되는 인사들이 이러한 주장을 폈다고 한다. 이에 반해 후자의 견해는 과거 해방 직후 남로당이 범한 한탕주의, 모험주의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중운동 속에서 운동의 핵심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재문은 후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이재문은 즉각적인 당건설 주장에 대해 ≪누굴 믿고 당을 만들자는 것인가. 과거 운동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인자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우선 전선조직을 만들어 대중과 깊이 결합하고 여기서 단련되어 올라오는 사람들로 전위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남민전은 바로 이러한 구상이 현실화한 것이다.
이재문은 특히 새로운 학생운동 세대들과 목적의식적으로 접촉을 확대하고 학습을 이끌었다.
1968년 9월부터는 당시 경북대 교수였으며 후에 남민전 중앙위원으로 함께 활동한 안재구 등과 함께 정사회(正思會)라는 반공개 이념서클을 조직 지도했다. 정사회는 후에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여정남이 중심인물이었으며 경북대 학생회를 장악하고 삼선개헌 반대투쟁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는 71년 4월 경북대에서 모든 공개 이념서클 활동이 불가능해진 뒤에도 안재구, 여정남과 함께 ≪한국풍토연구회≫라는 비공개 서클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 비공개 서클은 정보당국의 눈을 피해가며 1974년 민청학련사건이 터지기 직전까지 활동을 지속했다. 이 밖에도 이재문은 박정희의 장기집권구도가 날로 노골화되는 가운데 1971년 ≪민주수호국미협의회≫가 구성되자 이 조직의 대구지부 운영위원 겸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활발했던 그의 대구시절은 민청학련사건과 함께 마감된다. 영구집권을 향해 치달리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이어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논의마저 불법으로 규정한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가장 강력한 반정부세력이었던 학생운동과 그 지도세력을 일거에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학생운동은 10월유신과 함께 내린 휴교령으로 한동안 잠잠하다가 1973년 서울대 문리대의 11?2 시위를 계기로 아연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재문도 서울의 요청에 따라 임구호, 임공이었다. 대구지역 학생 1,000여 명이 참가하여 도청과 경찰청 앞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당시 경찰은 주모자가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했을 만큼 시위는 치밀하게 계획 진행되었고 이를 중요 계기점으로 하여 유신반대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재문은 이 날의 시위를 성공으로 이끈 후 즉각 후퇴를 결정했다. 그는 ≪투쟁이 계속되면 기반이 취약한 역량이 다 바닥난다. 우리는 정권측이 냄새도 맡지 못하는 ≪바람 같은 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서도원, 여정남 등은 ≪투쟁 속에서 당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위를 계속 조직했다. 이들의 주장은 일정한 여파를 미쳐 1974년 봄에 들어서서는 전국적인 연대시위로 박정권에 타격을 줄 때가 왔다는 ≪봉기론≫ 혹은 ≪전진국면론≫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이재문과 안재구는 대중운동이 고양되고 있는 지금 그동안 계속 투쟁해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위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서도원 등의 견해에 계속 반대했다. 그는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라 조직적으로 후퇴할 때라는 ≪후퇴국면론≫을 주장했다.
지금까지 투쟁을 계속해왔다는 사람들이 언제 투쟁했는가? 밥상 차려놓으니까 숟가락 들고 달려드는 것이 투쟁인가? 유지 몇 사람이 모여서 당을 만든다면 몇 달도 못가고 파괴된다. 정보기관에서도 테두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후퇴해서 앞으로의 투쟁역량을 재고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이재문과 안재구는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국적 연대시위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서도원, 여정남 등과의 모든 선을 끊고 지하로 잠적한다. 이때가 민청학련사건이 터지기 바로 전날인 1974년 4월 3일이었다. 결국 대구에 남아 있던 이재문의 동료들은 모두 검거되어 ≪인혁당재건사건≫으로 엮여 처형되었다.
이재문은 가까스로 검거는 피했지만 도예종, 서도원 다음의 3인자로 지목되어 전국에 지명수배되었다. 애초 박정권의 의도가 청장년세대의 지하저항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자는 데 있었기에 이른바 인혁당 재건그룹과는 의견이 달랐던 그도 주요한 타켓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도피중에 몇 번의 검거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는데 여기에는 몇몇 사람들의 결정적 도움이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민청학련사건이 터지고 얼마 후 이재문은 서울의 전창일의 집에 일시 피신하고 있었다. 당시 전창일은 인혁당사건과 깊은 관련이 없어 경찰이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재문과 저녁식사를 하던 도중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는 자기는 잡혀도 목숨은 건지지만 이재문은 잡히면 죽는다고 판단하여 대문에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며 시간을 끌었다. 그동안 그의 부인이 재빨리 이재문의 신발과 식기, 수저를 치우고 그를 벽장 속으로 밀어 넣어 이재문은 식은 땀나는 고비를 넘기게 된다.
당시 경찰은 6개월 동안 이재문에 대한 특별검거반을 편성하여 집요하게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재문과 매우 가까웠다. 김병권≪해방전략당사건으로 구속되어 5년형을 살고 1973년 출소, 후에 이재문과 함께 남민전 중앙위원으로 활동≫의 신병을 확보하게 된다. 뚜렷한 혐의도 드러나지 않은 데다가 특별검거반에 아는 사람이 있었던 덕분에 구속을 면한 김병권은 대신 매일 아침 특별검거반에 출근해 일당 1천원을 받고 그들과 함께 이재문을 잡으로 다녀야만 했다.
김병권의 곡예생활이 시작되었다. 김병권은 낮에는 특별검거반을 따라다니고 밤에는 이재문을 만나 함께 정세토론도 하고 수사 진척상황을 그때그때 알려줘 그의 피신을 도왔다.
하루는 김병권이 이재문과 함께 아현동 일대 골목을 돌며 얘기를 나누다 헤어졌는데 다음날 아침 특별 검거반에 나가자 반장이 특의만만해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이재문이 잡았다. 어젯밤 아현동에서 이재문이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는 제보가 있었다. 아현동만 꽉 막고 있으면 분명히 이재문을 잡을 수 있다.≫ 그날 이후로 이재문이 아현동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오랜 피신기간 동안 이재문은 자기 나름의 경험에 입각하여 피신술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기도 했다. 원래 그는 대구시절에도 그렇게 많은 독서와 토론을 하면서도 자기 집에는 이념서적 한권도 보관하지 않을만큼 보안의식이 강했던 사람이다. 서울에서의 피신생활 동안 그는,
≪피신은 행정력과 행정관계의 모순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피신에는 사람을 전혀 만나지 않는 절대피신과 한정된 범위에서 만나는 상대피신이 있다. 버스를 탈 때는 도심을 통과하는 버스를 피하고 운전수 맞은 편의 앞에서 두 번째 좌석에 앉는 것이 보는 사람도 적고 안전하며 길을 걸을 때는 차가 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 피신자와 함께 다닐 때는 버스 승하차시 피신자를 엄호하여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는 요지의 피신론을 정립하고 이를 철저히 실천했다.
일각일각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숨가쁜 수배생활을 거치면서 갖 불혹의 나이인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렸다. 그러나 덕분에 사진과 실제인물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 피신에는 매우 유리했다. 한번은 자기의 수배전단이 골목골목마다 붙어 있는 인천의 어느 동네에서 길목을 차단하고 집중검문을 실시하고 있던 경찰과 정면으로 부딪힌 적이 있었다. 등짝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는 태연하게 경찰에게 다가가 그 지역 국회의원 이름을 대며 그의 집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백발의 노신사≫에게 택시까지 잡아주고 경례까지 붙여 보냈다고 한다.
남민전의 닻을 올린다.
체포는 곧 죽음을 뜻했던 수배생활을 통해 그는 강인한 혁명가로 단련되었다. 그는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생활 속에서도 반유신저항조직의 통일성과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주로 김병권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김병권은 해방 직후에 대구 ≪대중신문≫의 기자로 있었고, 4?19 이후 사회당 경북도당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68년 ≪해방전략당≫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경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든 저항조직이 파괴된만큼 새로운 저항조직이 필요하며, 모든 합법활동의 가능성이 사라진만큼 그 조직은 비합법조직일 수밖에 없다는 데 대체로 합의했다. 그러던중 민청학련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재건위사건의 8인이 예상을 뒤엎고 전격적으로 처형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는 대법원에서 사형확정판결이 난 다음날인 1975년 4월 9일 새벽의 일이었다.
동료들의 죽음은 이재문이 조직구상을 가속화하는 계기로 되었다. 그는 유신정권의 극단적인 탄압에 맞설 수 있는 지하저항조직이 없으면 앞으로 이런 비극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때 처음으로 접촉한 사람이 신향식의 총무부장으로 있다가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3년 6개월간 복역한 경력이 있었다. 김병권은 해방전략당사건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후배≫로 추천받았다고 한다. 이들 세 사람에 의해 드디어 1976년 2월 29일 유신의 장막을 정면으로 가르고 남민전의 닻이 올려졌다.
남민전을 결성살 당시 이재문은 당시의 정세를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남한은 미일제국주의 세력의 신식민지로 화하였고 그 주구인 매판자본가와 그와 결탁한 군사파쇼집권층은 민중을 억압 착취함으로써 부익부를 부르고, 민족자본과 양심적 중소기업은 특권층과 야합된 매판재벌에 합하여 몰락상태에 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노동자, 농민, 소시민, 중소기업가, 민족자본가, 양심기업인 등이 연합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민중항쟁으로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적 연합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재문의 인식에 동의했다. 이재문과 지도부는 토론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각계각층의 산발적인 투쟁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통일적인 단일조직이 필요하다. 둘째, 그물처럼 얽어놓은 악법의 굴레 때문에 합법투쟁의 한계가 극히 좁아졌다. 섯째, 물샐 틈 없는 정보정찰조직과 탄압조직의 강화로 공개투쟁은 거의 불가능하다. 넷째, 정보부의 살인적인 고문과 사법부의 괴뢰화로 취조 및 법정 투쟁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요지는 남민전의 목표, 투쟁대상, 당면과제, 조직노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강령 제1조는 이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미일을 비롯한 국제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
한국사회를 신식민지로 규정한 것은 4.19 때부터 이재문이 나름대로 실천과 연구활동 속에서 얻어낸 결론이었다. 이에 대한 안재구의 증언을 들어보자.
민주화투쟁은 외세의 한반도 침략이 1세기를 넘어서고 반외세투쟁의 줄거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반외세투쟁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민주화의 참다운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반제투쟁은 좌경·용공으로 몰리는 형편이었으머로 반제투쟁을 하기 위한 여건조성을 먼저 해야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도하고 사회민주화를 성취하는 것을 선결과제로 생각했다. 그래서 ≪민투≫도 발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60, 70년대 변혁운동에 깊숙이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운동을 단순히 반독재민주화운동이었다고 파악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규정이다.
남민전의 실제 투쟁은 유신체제 타도와 초점이 맞춰졌지만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명칭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재문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발전을 위해서는 미·일 외세를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변혁운동의 성격을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했다.
남민전 발기회의 직후인 4월 15일 이재문은 오랜 동지인 안재구를 만난다. 이재문은 ≪박정권을 타도하는 데 있어서는 학생시위를 대중시위로 전환시키고 대중조직을 조직적으로 운영하는 전위조직이 필요하며, 혁명운동의 사령부인 당이 결성되기 전에 각계각층의 투사가 하나의 조직으로 단결된 통일전선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가입을 제의했다. 몇 번의 만남과 토론 속에서 안재구는 이러한 제안을 받아 들였다. 이후 안재구는 중앙위원과 조직원교양을 맡아 조직원의 사상 수준을 높이고 단일화하는 남민전의 중요한 한 축이 된다. 일명 전선기로 불리는 남민전기를 도안하고 전 조직원이 생활원칙으로 삼았던 ≪전사 생활규범 10조≫를 만든 사람도 바로 안재구이다.
전선기 : 당시 재판기록에는 위쪽의 붉은색으로 해방된 북한, 아래쪽은 파란색으로 미해방된 남한을 말한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붉은색과 파란색은 ≪한민족≫을 표한하려는 의도로 썼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풍습, 즉 관혼상제 등에서 항상 붉고 파란 옷이나 깃발을 쓰기 때문에 이 색깔을 썼다는 것이다. 중앙 원의 흰색은 백의민족의 순결함을, 그중앙의 붉은 별은 희망, 미래를 뜻한다. 이 전선기는 인혁당사건 관련으로 처형당한 ≪8열사≫의 속옵을 가족에게서 수집해 만들었다.
≪전사 생활규범 10조≫
1. 주체사상 확립하자
2. 근면하고 성실하자
3. 사생활을 공생활에 집중시키자
4. 민중을 신뢰하고 민중에 봉사하며 대중에게 배우고 대중을 가르치자
5. 조직을 수호하고 강화하자
6. 마음을 다하여 규율에 복종하자
7. 동지를 제몸같이 사랑하자
8. 비판과 자기비판을 통일시키자
9. 끊임없이 학습하고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키자
10. 험난에 대비하여 심신을 단련하자
이재문은 남민전이 남한출신 인사의 자주적 혁명조직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과 조직적 관계를 형성 여부와 북한의 지도사상이자 혁명론을 기본바탕인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든 명확히 취해야만 했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당시 지도부와 조직원 사이에서 일정하게 ≪수용≫으로 같았다고 판단된다. 이는 전사 생활규점 가운데 첫 번째가 ≪주체사상 확립≫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초기에 그 수용정도는 지도사상으로 공식표방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를 위한 과정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1977년 12월 15일 이재문, 안재구, 신향식 등은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했다. 이 날의 토론에서는 ≪주체사상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고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명제에서 주체사상과 남민전의 노선은 다르지 않다. 우선 중앙위원들이 주체사상을 이해하고 전 조직에 점차 보급한다≫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민투 결성과 ≪1월투쟁≫
1977년 1월 18일 오후 6시 58분 시청 앞. 퇴근을 서두는 시민들로 거리는 한창 붐비고 있었다. 시민들 틈에 섞여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가는 한 청년의 손이 옷 속으로 슬며시 들어갔다. 시청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7시 정각을 가리키고 청년이 지하철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수백장의 종이뭉치가 하늘로 솟았다. 팔랑거리며 떨어진 수백 장의 종이가 낙엽처럼 온통 주변에 깔렸고 청년은 조용히 사라졌다. ≪대체 무슨 광고전단이길래…≫ 반은 놀라고 반은 호기심으로 집어보는 시민들의 눈은 순식간에 흥분과 두려움의 빛깔로 물들었다.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민주혁명을 위한 실질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같은 시간 종로2가와 동대문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드디어 유신체제에 대한 남민전의 정면공격이 개시된 것이다. 이 날의 삐라살포는 남민전의 전술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첫 투쟁으로 계획한 선언투쟁이었다. 중앙위원들은 이를 ≪1월투쟁≫이라 불렀다. 이날 삐라와 함께 ≪모든 국내외 동포는 ≪민투≫를 적극 지원하라≫라는 내용의 성명서도 살포되었다. 따로 성명서를 만든 것은 지하단체의 존재와 세력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삐라는 3조로 나뉜 행동대가 오후 7시를 기해 맡은 장소에서 동시에 살포했다. 성명서는 박카스병에 넣어서 국내 일간지신문사와 외국통신사 서울지국 사무실 근처 휴지통과 출입구에 던져놓았다. 그리고는 공중전화로 2분내에 통화를 끝내고 계속 이동하는 방식으로 각 언론사에 민투의 발족과 성명서를 놓은 위치를 알려주었다. 다음날 일본 ≪마이니찌신문≫, ≪아사히신문≫ 등에는 민투발족 사실이 ≪한국≫발 톱기사로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1월투쟁≫을 성공적으로 끝낸 이재문은 1월 29일 중앙위원회 회의를 개최했다. 이 날 회의에서는 ≪회사≫가 해내외에 공개되고 투쟁이 개시된 상황에서 보위문제와 이후 투쟁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토론내용은 ≪지시1호≫라는 이름의 1월투쟁 평가문으로 작성되어 전 조직원에게 회람되었다. 이재문은 이 평가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공격은 최고의 방비다. 공격은 가장 약한 고리인 급소를 찾아 전광석화처럼 퍼부어 적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아야 하고, 선전선동면에서 심대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 따라서 삐라작전과 실력투쟁이 병행되어야 하고 여론을 환기시키고 민심에 충격을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민중의 존경과 갈채를 받아야 하고 필승불패의 신화를 창조해야 한다.
머슴형의 혁명가
이재문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대개 남을 돕는 것이 생활화된 그의 자세를 꼽는다. 함께 활동했던 안재구 선생이 ≪인정이 너무 많았던 것이 운동가로서 장점이자 단점이었다≫고 말할 만큼 이재문은 자기보다 앞서 동료를 먼저 돌보는 원칙에 충실했다. 한창 때(?)는 여섯 명의 생활비와 열댓 명의 용돈을 다만 몇 푼씩이라도 보태주었을 정도였다. 또 그는 책을 부분에서는 당대의 천재로 자타가 공인했던 이수병 (인혁당재건사건으로 처형)에 비견되곤 했다.
그는 항상 ≪사람에는 ≪머슴형≫과 ≪도련님형≫이 있는데 남한테 대접받기만 원하는 도련님이 되지 말고 남을 위해 일하는 머슴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활동 속에서 철저히 실천했다. 그는 조직에서 유인물을 만들 때면 청년들과 함께 직접 손에 잉크를 묻혀가며 밤을 세워 필경과 등사를 했다. 도심에서의 유인물 살포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참가하여 후배들의 감동을 불어일으키기도 했다.
이재문은 남민전을 이끌면서 조직원들 사이의 사상통일을 맨앞에 놓았지만 조직원들 사이의 인간관계도 못지 않게 중시했다. 그는 ≪동지애가 없는 조직은 풀기 없는 안남미와 같아 밥알이 따로따로 흩어져 밥맛도 없고 끈기도 없다≫면서 조직에 대한 애착과 헌신은 무엇보다도 못만나면 보고 싶어지는 그리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재문은 또 동지들이 희생되는 투쟁은 피했다. ≪일은 크게 터뜨리되 적이 알았을 때는 이미 일이 끝나고 우리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이러한 생각은 실제로 남민전이 독창적 개발한 갖가지 선전방안으로 표현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파라슈트작전≫으로 유명해진 애드벌룬 무인살포방식이다. 애드벌룬을 이용하는 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먼저 애드벌룬 줄에 유인물 뭉치를 매단다. 그리고 쑥으로 만든 담배개비에 불을 붙여 노끈이 끊어져 유인물이 광범한 지역에 살포된다. 이 방식은 1978년 8월 2일 신설동에서 ≪격! 몰아내자 박정희≫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살포하기 위해 처음 적용한 이후 그 실효성이 확인되어 자주 활용했다.
1976년 닻을 올린 이후 1977~78년을 거치면서 남민전은 성장을 거듭했다. 조직 교양체계도 갈수록 정연해졌고 지방까지 확대되었으며 ≪민중의 소리≫라는 지하신문도 발행되었다. 조직원 교양은 통일전선론, 항일무장투쟁사, 정치경제학, 조직론 등이 기본이었으며 때론 김일성방송대학 노작해설, 철학강좌 등을 녹취해서 교양자료로 쓰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교양서전선동부에서는 조직원의 ≪1일 1시간 독서, 1일 1시간 방송청취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조직의 규모가 확대되자 점차 자금문제로 큰 애로를 겪게 되었다. 안전가옥을 구하고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많은 조직원들이 가산을 처분해 조직사업에 썼다. 이재문도 위험을 무릅쓰고 5년간에 걸친 수배기간에 내내 집 앞에 경찰이 보초를 서고 있던 형을 비밀리에 만나 ≪집한 채 말련할 만한 돈≫을 얻어 활동자금에 보태곤 했다. 형을 통해 부인도 돈을 보냈다. 당시 부인 김재원은 돈을 보내며 ≪이 돈은 절대 다른 데 쓰지 말고 은신처를 구해 숨어 있으라≫고 말을 전했지만 이재문이 그 말에 따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만인의 승리를 바라며 쓰러지기까지
1979년 10월 4일, 궁정동의 총성 속에 유신정권이 종말을 고하기 불과 이십 일 전이었다. 새벽 1시나 되었을까,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는 권총으로 무장한 수사요원들이 긴장된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목표는 서울 잠실 시영아파트 11동 408호 바로 이재문이 살고 있던 남민전 아지트였다. 이곳은 ≪불온전단≫ 살포사건에 연루된 정신여중 교사 이수일이 추적당하면서 그만 포착되었다. 아파트에는 이재문과 김남주 등 다섯 명의 조직원이 살고 있었으며 며칠 전 이재문이 희미해진 기억을 추스려 새로 작성해놓은 남민전의 조직원명단 등 특급 기밀문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1시 반,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한 경찰이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파트경비원을 가장한 경찰이 문을 두드렸다. 깜박 속은 이수일이 문을 여는 순간 곧바로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뛰쳐나온 조직원들과 경찰 사이에 일대 격투가 벌여졌다. 그 틈에 이재문은 서류보따리를 창 밖으로 던지고 칼로 할복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양쪽 가슴에 깊은 자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이것이 수사당국에서 발표한 이재문의 체포과정이다. 그러나 당시의 체포상황에 대해서는 남민전 관련자들 사이에서도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0월 9일, 당시 내무장관이던 구자춘이 기자들 앞에 섰다. 그는 ≪폭력혁명에 의해 적화통일을 기도해온 대규모 반국가조직체인 이른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적발, 일당 74명 중 총책 이재문 등 20명을 검거하고 나머지 54명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구자춘은 일주일 뒤에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수사진형 상황을 브리핑했는데 이때 ≪이재문이 입을 열지 않아 가명을 사용한 17명은 신분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재문이 체포되면서 남민전은 빠르게 무너졌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맞설 수 있는 치밀한 조직건설이라는 면에서 남민전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김남주는 이를 뒤에 ≪마지막 인사≫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역사의 변혁에서 최고의 덕목은 열정이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된 것은 아니네 지혜가 있어야 하네
지혜와 열정의 통일 이것이 승리의 별자리를 점시해준다네
한마디 더 하고 싶네 적을 공격하기에 앞서
반격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공격을 삼가게 패배에서 맛본 피의 교훈이네
남민전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재문으로서는 조직의 종말은 곧 삶의 종말을 뜻했다. 1980년 12월 23일 가족들의 간절한 구명운동도 보람없이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형선고를 받기 전에 이미 유문협착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었다. 경찰은 체포한 후 대학병원에서 이미 병세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았다. 가혹한 심문과 차디찬 감방 속에서 그의 몸은 점점 쇄약해져갔다. 몸이 약해지자 마음을 강하게 추스리기 위해서였을까, 당시 이재문은 다음과 같은 전봉준의 옥중시를 즐겨 읊었다고 한다.
時來天地動力 運去英不自
愛民正義我無 愛國心有知
때가 오면 하늘과 땅이 모두 힘을 합하는데
운명이 다한 영웅은 혼자 도모할 힘이 없네
민중을 사랑하고 의를 세우는 데서 잃을 것이 무어냐
나라를 근심하는 붉은 마음 뉘 있어 아는가
원래부터가 담대했던 이재문은 옥중생활에서도 가족을 면회하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재판과정에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담당검사가 남민전이 인민민주주의혁명을 도모했다며 나쁘게 표현하자, 이재문은 ≪당신이 인민민주주의를 알고나 하는 소리냐? 검사 노릇하려면 공부나 좀 할 것이지≫라며 오히려 면박을 주기도 했다.
남을 걱정하며 사는 사람은 죽을 운명에 처해서도 남 걱정만 하다가 가는 것일까. 이재문은 옥중에서 부인과 아들, 딸에게 보낸 70여 통의 편지를 보면 사형수의 체취를 도무지 느낄 수 없다. 당시 중학생이던 자식들에게는 독서와 공부의 방향이라든가 세상를 사는 지혜에 대해 차분하고 꾸준하게 이야기하듯 편지를 남겼고 부인에게는 미안한 마음만 앞서는 절절한 편지를 남겼다.
오늘 당신이 처한 그 괴로움, 그 쓰라림을 말로 위로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것 같소. 그러나 쓰라림과 괴로움에 부대껴 주저앉으면 그 뒷일은 어떻게 되겠소. 한숨과 눈물을 씻어버리고 굳세고 힘차게 일어나야 하고. 아직도 심장에 고동치는 핏기가 있고 누구도 뺏아갈 수 없는 넋이 살아 있는 한 결코 좌절해서는 안되오. 우리는 사랑하는 경실, 원준 두 남매가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이상 결코 절망이란 있을 수 없소. …내 문제는 지난 번 얘기한 대로 너무 신경 쓸 거 없소. 다만 나로 인해서 짊어지게 된 어처구니없는 당신의 짐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굳세게 씩씩하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오. (1980. 9 13 옥중서신)
병으로 기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완전히 힘이 빠져 필체마다 달라진 편지를 끝으로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질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981년 11월 22일 4?19에서 유신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20년을 정면으로 가로질렀던 이재문은 차가운 감옥병실에서 영원한 안식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마다 기일이 되면 인천 백석동 천추교 묘역에는 가족과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이 모여 그를 추모한다. 그와 한 살 터울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안재구 선생도 그날이면 가슴이 젖는다. 그는 말한다.
그는 참말로 뜨거운 정열을 담은 활동가이면서도 차가운 이성을 소유한 지식인이었다. … 그는 갔으나 투쟁은 이어지고 있다. 그의 민족해방투쟁은 청년학생들이 계승하여 자주?민주?통일의 기치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그의 죽음은 이들에게서 부활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인간을 위한 투쟁에서 죽음까지 불사했던 이재문. 그는 과연 무엇이 되었을까? 만인의 승리가 실현되면 진정 그 이름은 별이 되어 지상에서 다시 살아날는지.
[참고문헌]
검찰청, ≪좌익사건실록≫ 제12권.
안병용, ≪남민전≫, ≪역사비평≫ 1990년 가을호.
조유식, ≪남민전과 이재문≫, ≪월간 말≫, 1992년 8월호.
조희연, ≪현대사회운동과 조직≫, 1993,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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