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노인 한명이 사라지는 것은 향토 문화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는 노인 한사람이 한 개의 도서관이 보유한 각종 책자와 자료에 버금갈만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데 따르는 비유이다.
울진군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약 1만2천여 명이니, 울진 지역에도 1만개가 넘는 향토 문화 도서관이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노인층이 지닌 향토 문화 도서관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체계적인 구상은 관계 기관도 민간단체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일정 부분 정체되었던 것으로만 보이는 세월 탓은 급속한 도시화를 지향하는 이 시대의 그릇된 발전 화두와 엇박자를 이루기 때문이다.
정체되었던 우리 지역의 지나간 시간과 공간들. 십이령 바지게 길, 싸시랭이 놀이, 화전민들의 생활 형태, 이곳저곳에 얽힌 갖가지 설화들.
우리 고유의 풍습과 놀이의 그 시간들을 우리는 지역의 향토 문화유산이라 부른다. 향토 문화 자산을 기억하고 재현해내는 일은 지역 주민들은 물론 외지인들에게까지 한정된 지역 안에서 생겨나서 전승되어 온 토종 문화를 알리는 일로, 우리 문화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제공한다.
토종이 곧 세계적이란 상투적인 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토종은 지역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하나 된 삶의 공동체로 엮어주고, 나아가서 외지인들과 지역민들을 하나로 얼기설기 엮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겸한다.
토종의 이런 위대한 힘은 거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씨가 살고 있는 서면 전곡리 전내마을>
부모님은 그곳에서 광산 인부들 함바도 하고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을 받아서 직영하는 판매점을 했어요. 광산 인부들에게 밥도 해서 팔고, 술도 팔고 했으니 어머니 고생이야 말도 못했겠지요. 수년전 어평 마을에 갔을 때 아는 할머니에게 들었던 얘기인데, 어느 여름에는 아주 큰 개락이 나서 함바집과 양조장이 다 떠내려가고 그랬다고 해요. 그 할머니 말씀이 그래도 너는 그때 큰 화를 입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오지로 여겨지는 울진 지역에서도 가장 오지마을로 불리는 서면 전곡리로 들어와서 생활한지 16년째가 되는 주보원(75세)씨는 강원도 태백시 어평 마을에 태를 묻었다. “내가 난 자리가 어디냐면, 강원도 태백과 영월의 경계가 되는 어평이라고 부르는 동네지요. 태백의 혈리를 넘어서면 어평 마을이 있어요. 마을 이름이 임금어(御)자에 들평(坪)자인데, 예전에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와서 사약을 마시고 죽고 난 후에 태백산 산신령이 되어 백마를 타고 가다가 잠시 어평 마을에 쉬면서 ‘이곳부터는 내 땅’이라고 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어평 마을에서는 그 전설이 요지부동입니다. 그걸 안 믿는 사람들이 없고, 그런 이유로 무속인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무속인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곳이 태백산 당골입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암자 형태의 굿당을 전부 다 한곳에 모아 놓은 것이지요. 태백산은 원래 완만한 산인데 영월과 정선 쪽으로는 아주 가파르게 형성되어 있어요. 한 십 년 전에 내가 태어난 곳을 찾아서 그 동네를 가본 적이 있어요. 도대체 그곳의 산수가 어떻기에 내가 이 모양으로 사느냐 싶어서요.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에팽이 마을이라고 부르지요. 그때 에팽이 마을에 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았던 얘기들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동네의 할머니 한분이 내가 어릴 때 많이 업고 다녔었다는 할머니였어요. 나는 기억이 없는데 그 할머니는 주보원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더라고요. 참 반가웠지요. 그때 그 마을에 나보다 조금 컸던 언청이가 한명 있었는데, 나를 그렇게 이뻐하면서 많이 업어주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주씨의 아버지 주진황씨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백 어평 마을의 술도가(양주장)에서 만든 술 직영점을 운영했다. 예전부터 태백시 어평 마을 인근에서는 사금을 많이 채취했는데, 어평 부근의 금광굴인 혈리굴(穴里窟)은 혈리라는 동네 지명으로 연결됐다.
어평 마을의 어평재에서 하류로 내려오는 하천수가 지하 동굴로 스며들었다가 이 혈리굴로 나오는데, 굴 안쪽 진흙뻘에서 사금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전해진다. “어평 마을은 아주 험한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금광이 아주 성행했었어요. 아버님은 진자 황자를 사용하셨습니다. 부모님은 그곳에서 광산 인부들 함바(공사 현장의 식당)도 하고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을 받아서 직영하는 판매점을 했어요. 광산 인부들에게 밥도 해서 팔고, 술도 팔고 했으니 어머니 고생이야 말도 못했겠지요. 수년전 어평 마을에 갔을 때 아는 할머니에게 들었던 얘기인데, 어느 여름에는 아주 큰 개락이 나서 함바집과 양조장이 다 떠내려가고 그랬다고 해요. 그 할머니 말씀이 그래도 너는 그때 큰 화를 입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는 3남매지요. 위로 해원이라는 형님이 있는데 나하고는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졌어요. 벌써 돌아가셨지요. 그리고 다음이 누님인데 금낭이라고 지금은 성주 딸네 집에 가계시지요. 누나하고도 나와는 12년 차이가 나요.”
<젊은 시절의 주보원씨>
철암공립초등학교 3학년 여름에 해방이 됐어요. 해방이 될 때 동네 앞쪽에 기찻길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열차가 지나갈 때 만세 만세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발음이 잘 안돼서 일본 말로 반사이 반사이 하고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당시에는 그곳까지 은어가 올라왔었고, 봄가을에는 새총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새를 쫓아다니고, 지금도 꿈속에 가끔 나타나는 곳이 철암입니다.
주씨는 아버지가 함마집과 술 직영점을 하면서 일정 부분 금광일도 함께 겸했었다고 전한다. “술 직영점 때부터인지 술 직영점을 그만두고 난 후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는 금 광산의 하청을 받아서 인부들을 데리고 직접 도급일도 했어요.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태백 어평 일대는 광산이 아주 번성했던 모양입니다. 영월 상동과 봉화 춘양 접경 지역에는 우구치라는 광산이 있었는데 아주 유명했어요. 우구치재를 넘어가는 산골짜기의 모양이 소의 입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 모양인데, 흔히 우구치 금 광산으로 불리던 금정광산이 있었지요. 우구치 일원도 전부 광산이었지요. 상동은 또 상동대로 중석 같은 광물질이 많이 나왔고요. 아버지는 어릴 때 일본으로 잠깐 건너갔다 와서 일본어도 꽤 유창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보니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하던 광산의 도급 일을 하면서 인부들 간주(일당 등을 받는 일)도 해주고 그랬습니다. 나는 그때 워낙 어렸을 때니 세세하게는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평 마을에서 광산과 관련된 함바집, 술 직영점, 광산 도급 일을 하던 주씨의 부모는 해방을 몇 년 앞둔 시점에 태백시 철암으로 집을 옮긴다. “태백을 넘어가면 쇠바우라는 동네인 철암동이 있어요. 나는 유년시절 대부분을 거기서 자랐는데 철암공립초등학교 3학년 여름에 해방이 됐어요. 해방이 될 때 동네 앞쪽에 기찻길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열차가 지나갈 때 만세 만세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발음이 잘 안돼서 일본 말로 반사이 반사이 하고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철암이라는 동네는 참 아름답습니다. 학교도 가찹고(가깝고), 어릴 때 해가 져서 깜깜해질 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서 요렇게 조그맣게 생긴 공도 차고 그랬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는 배고픈 것조차 잊어버리고 또래 친구들과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즐겁게 놀고 그랬는데, 어느새 아득히 먼 얘기가 되고 말았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던 것이 좋았던지.”
주보원씨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던 철암이라는 동네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로 기억한다. “산 좋고 물 좋았던 철암에서 내 유년시절의 전부를 보냈던 그때가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입니다. 그곳이 낙동강 상류지요. 당시에는 그곳까지 은어가 올라왔었고, 봄가을에는 새총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새를 쫓아다니고, 지금도 꿈속에 가끔 나타나는 곳이 철암입니다. 형님이 그때 도계에 계셔서 내가 3학년 때 도계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됩니다. 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큰아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으니 도계로 이사를 했지만, 형님과는 따로 떨어져서 살았었고요. 그런데 그때 도계국민학교에서 철봉놀이를 하다가 부딪치면서 옆구리를 다쳤는데, 그냥 두었다가 염증이 생기면서 늑막염으로 발전해서 근 1년 정도 병원에 누워서 보내게 됐어요. 그리고 다시 학교를 다녀서 1950년도 봄에 졸업을 했어요. 1년 동안 병원신세를 지는 바람에 또래들보다는 1년 늦게 졸업을 하게 된 거지요. 1년 늦게 원래는 후배였던 아이들과 함께 졸업하게 되면서 친구들의 폭도 넓어졌고, 그러다보니 도계국민학교 전교 어린이회장도 하고 그랬습니다. 졸업식 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6.25전쟁을 앞두고 어수선할 때 졸업하면서 우등상장을 받았는데 상품을 못 받았어요. 전쟁이 난다는 소문이 흉흉할 때여서 상품을 쉽게 구할 길이 없으니 상품이 들지 않은 빈 봉투에 교장선생님이 직접 한글사전 한권이라고 글씨만 써서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보원씨의 책상 앞에 걸려있는 나옹선사의 선시(禪時) ‘청산은 나를 보고’>
신문배달을 시작했지요. 자전거도 하나 주더라고요. 새벽에 열차시간에 맞추어 역전으로 나가면 기차 승무원이 열차에서 바닥으로 신문을 던져요. 그 신문을 받아 일일이 접어서 집집마다 열심히 배달했지요.···추운 겨울에 집집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배달하는 곳이 역전 다방이었어요. 그곳에 들어가면 학생이라고 맨날 우유만 주었어요. 추운 겨울에 신문을 돌리고 나서 맡는 커피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6.25전쟁이 발발하던 해 봄에 도계국민학교를 졸업한 주보원씨는 인근 태백중학교에 입학한다. “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도계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가까운 태백으로 가서 중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중학교에 잠시 다니다가 도계 집으로 오니까 동해방면에서 인민군들이 막 밀려오잖아요? 그래서 태백 쪽 골짜기로 피난을 다니고 그랬지요. 하루는 낮에 눈을 피해서 도계 집으로 왔더니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학생 모자까지 다 가지고 가고 없더라고요. 그때는 그랬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집은 형편이 없이 돼 버렸지요. 그때 아버지는 이미 연세가 많아서 일을 해서 돈을 벌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또 아버지는 원체 막일은 하지 않았던 분이기도 했고요. 집안이 어려우니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다시 태백중학교에 들어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그러고 있는데, 그 당시에 도계에도 중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고등공민학교를 세워서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곳이 생겼어요. 그 얘기를 듣고 그곳에 입학을 했지요. 그 학교에 아주 훌륭한 선생님이 한분 계셨는데, 그 선생님에게 ‘나는 집안 형편이 이렇습니다’하고 소상하게 말씀드렸지요. 김광술 선생님이라고, 그 선생님은 강릉 옥계에 가서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우체국장도 했었고, 글씨도 잘 썼고, 교육에 대한 열의가 상당했던 분이지요. 그 선생님이 직접 고등공민학교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그때 그 분이 경향, 동아, 조선일보 같은 신문을 취급하는 지국을 운영하고 계셨어요. 그분의 도움으로 신문배달을 시작했지요. 자전거도 하나 주더라고요. 새벽에 열차시간에 맞추어서 역전으로 나가면 기차 승무원이 열차에서 바닥으로 신문을 던져요. 그 신문을 받아 일일이 접어서 집집마다 열심히 배달했지요.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새벽마다 신문을 돌리는 일이 귀찮거나 힘들지 않고 그렇게 신날수가 없었지요. 나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어요. 그렇게 신문을 돌리기 시작한 일이 고등학교 때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도계중학교를 졸업한 주보원씨는 묵호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당연히 학비를 대줄 형편도 아니었고요. 내손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으니 더욱 힘들었지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서울로 도망을 갔어요. 좁은 도계 바닥보다 서울로 올라가면 무엇인가 내가 할 일도 많고 학교도 쉽게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당시 서울 성균관대학교 앞에 유도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유도회 본부장이 삼척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총위원장까지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가신 분이었는데, 우리 외삼촌의 선배였습니다.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거지요. 그 당시에 성균관 유도회 건물을 지었는데, 석축을 쌓으면서 중간 중간에 시멘트를 채우는 일을 했지요. 나는 시멘트 양성을 위해 매일 수십 차례씩 물을 뿌리는 일을 했고요. 잠은 그 양반이 자는 침대 옆에 모포 한 장 깔고 덮고 잤어요. 그런데 그 고생을 하는 나를 보기가 딱했던지 외삼촌의 선배가 외삼촌에게 연락해서 결국 다시 잡혀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지요. 그렇게 도망가서 서울서 살았던 시간이 한 달도 채 못됐을 겁니다. 외삼촌은 당시에 삼척 시멘트공장의 노동위원장으로 계셨는데, 삼척 일원에서는 그 입김이 굉장히 셌어요. 도계 집으로 돌아와서 중학교 당시의 선생님을 다시 찾아가서 상의를 했지요.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그러자 신문은 수입금 배분이 지국과 신문 돌리는 사람이 4 6제로 나누는데 배달료를 그대로 지급하면서, 추가로 4개 신문 중에 2개 신문의 이익금을 나에게 줄 테니 열심히 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대신 수금이나 잘해주고, 부지런히 배달을 잘해달라면서요. 광산촌이다 보니 신문 배달 부수는 많았어요.”
중학교 은사의 도움으로 묵호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주보원씨는 도계에서 묵호까지 열차를 이용해서 통학했다.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묵호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열차를 타고 도계에서 묵호까지 통학했지요. 내가 그때는 공짜 열차를 가만히(몰래) 타는 걸 잘했어요. 그때만 해도 어른들이 도계 묵호 간을 이틀 동안 왔다 갔다 하는 열차비만 있으면 학생들은 한 달 동안 통학할 수 있었지요. 학생들 기차비가 정말 쌌지요. 그래도 내 손으로 벌어서 학교를 다니려니 당장 그 돈도 아까운데 어떡합니까? 공짜 기차를 참 많이 탔지요. 먼저 탄 친구들에게 가방을 맡기고 열차가 막 출발하려고 할 때쯤에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추어서 기차에 뛰어 올랐어요. 그렇게 승차권 없이 공짜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내릴 때도 잘 내려야 했어요. 역무원들의 눈을 피해서 내려야 했는데, 나는 훈련이 원체 잘 돼 있었거든요. 당시에 역무원들이 기차에 매달려 가는 것보다 우리들 몇 명이 기차에 훨씬 잘 뛰어 올랐다가 내렸어요. 묵호 학교에 갔다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열차가 저녁 7시 열차였거든요. 7시에 도계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여름이면 그래도 좀 수월한데 겨울에 7시면 이미 깜깜해지잖아요? 도계 지방이 겨울이면 또 눈은 얼마나 많이 오는 지역입니까?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날은 자전거를 타지도 못하고 일일이 뛰어다니면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추운 겨울에 집집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배달하는 곳이 역전 다방이었어요. 그곳에 들어가면 학생이라고 맨날(만날) 우유만 주었어요. 그런데 추운 겨울에 신문을 돌리고 나서 맡는 커피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에게 우유 대신 따뜻한 커피를 달라고 부탁해서 얻어먹고 난 다음부터 이날 이때껏 커피를 즐겨 마시고는 하지요.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신 커피만 해도 어마할겁니다. 그렇게 피곤한 나날을 보내다보니 어떤 날은 학교도 가지 못하고 결석하는 날도 있었고요. 그때는 지금 학생들과 비교하면 순 엉터리로 공부를 한 거지요. 그래도 집에 돌아오면 아무리 피곤해도 책을 한 줄이라도 읽고 나서 자는 좋은 습관은 있었어요. 그 습관은 평생 그대로 유지가 됐고, 지금도 한가한 시간이 나면 그냥 있지 않고 이것저것 책도 읽고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자료도 뒤적이고 그러지요. 젊은 날의 그런 습관은 굉장히 오래 가고 쉬 없어지지가 않아요. 젊은 시절 고달프게 학교를 다니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해병대에서 PX 주보원으로 근무할 당시>
부모님이 계시는 울진으로 돌아와서 성류굴 앞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상호가 굴집이라는 식당을 했는데 도저히 생리에 안 맞더라고요. 나름대로 장사는 잘됐어요. 관광회사를 많이 알고 있어서 우리 집으로 오는 기사들에게 수고비도 떼어주고 그렇게 장사를 했지요. 식당 예약도 그때는 요즘처럼 전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보로 했습니다.
묵호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주보원씨는 군에 입대한다. “해병대를 갔어요. 경남 진해에서 고된 훈련을 받고 서부전선에서 근무했습니다. 훈련을 받고 각 부대로 배치가 될 때 빽있는 동료들은 이리저리 다 빠져나가는데, 나야 무슨 빽이 있습니까? 사방이 깜깜할 때 호야불과 후레쉬 불로 마중을 나오는 전방 부대로 배치가 됐어요. 그때야 무엇보다 군에 가면 항상 배가 고팠어요. 자대로 배치를 받아 갔는데, ‘고등학교 이상 되는 놈 나와’ 그러더라고요. 대여섯 명이 불려 나갔는데, 주산을 하나씩 주더니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나야 상업고등학교를 나왔으니 주산은 자신이 있었지요. 더하기 빼기를 정확히 계산하고 나니까 ‘너, 나와’ 그랬어요. 그 자리에서 부대 주보원(PX 매점 근무병)으로 차출이 됐지요. 한 달 동안 매점에서 선임자에게 교육을 받고 주보의 원이 된 거지요. 내 이름이 주보원이잖아요? 당시에는 군부대의 PX 매점을 주보라고 했어요. 그러니 주보의 근무자인 원이 된 겁니다. 내 이름과 똑같은 보직으로 군 근무를 한 거지요. 온갖 계급을 단 부대원들이 주보를 들락거리다보니 수병 계급장 대신 하사관 계급장을 붙이고 군 생활을 했어요. 대대장이 직접 그렇게 지시했지요. 어느 날 상급부대에서 감사를 왔어요. 매점 옆에는 ‘주보원 외 출입금지’라고 붙어 있었어요. 장교들 몇 명이 감사를 나왔기에 경례를 붙였더니 대뜸 ‘너 이름 뭐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주보원입니다’ 했더니, ‘이 짜식이, 주보원 말고 니 본명이 뭐야?’ 그랬어요. 다시 연거푸 두어 번 이름을 반복했더니 옆에서 대대장이 웃다 말고 ‘얘 이름이 원래 주보원’이라고 대신 대답하더라고요. 그랬더니 감사를 나온 장교들이 ‘야 이 짜식, 주보원 팔자네’ 그랬어요. 그러면서 다들 한바탕 웃었지요. 주보원으로 근무하면서 3년 동안의 군 생활을 마쳤어요.”
주보원씨가 군 생활을 할 당시 주씨의 부모님은 고향인 울진읍 호월리 높은들로 이사를 오고 난 이후였다. “아버지가 태어난 고향은 호월리 높은들입니다. 당시에 높은들은 큰아버지, 사촌들 포함해서 주씨들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었어요. 군을 제대했을 때는 이미 부모님은 고향 호월리로 돌아오신 이후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호월리로 들어간들 농사를 짓겠어요? 뭐하겠어요? 군 제대 후 잠시 도계에서 김광술 선생님이 하던 신문 지국을 직접 맡아서 2년여 동안 운영했어요. 선생님은 그때 신문지국을 나에게 전부 다 넘기고 강릉으로 떠나셨고요. 그런데 신문지국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부업으로는 몰라도 전업으로 하기에는 자기 시간이 하나도 없고,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요. 그때는 지방 신문 지국장이 기자 행세를 같이 할 때였습니다. 어떤 때 내가 직접 신문 기사를 써서 중앙으로 보내도 절대 기사가 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하루는 동해에 나가 오징어를 좀 사서 본사로 올라가서 부탁도 하고 그러면서 기사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지요. 기사를 쓰려면 우선은 지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알아야 했으니까, 이 얘기 저 얘기를 듣기 위해 다방도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그런대로 재미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부모님이 계시는 울진으로 돌아왔는데, 호월리로 들어가는 대신 성류굴 앞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상호가 굴집이라는 식당을 했는데 도저히 내 생리에 안 맞더라고요. 지금 성류굴 상가 들어가다가 중간쯤에 있었는데, 나름대로 장사는 잘됐어요. 관광회사를 많이 알고 있어서 우리 집으로 오는 기사들에게 수고비도 얼마씩 떼어주고 그렇게 장사를 했지요. 식당 예약도 그때는 요즘처럼 편하게 전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보로 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성미에 맞지 않아서 한 이년쯤 식당을 하다가 정리를 하고 대구로 올라갔습니다. 대구에 가더라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김광술 선생님과 절친한 분이 대구에 계셨기에 큰 힘이 됐습니다. 성류굴 있을 때 김광술 선생님의 친구 분이 찾아오기도 했었고요. 그래도 거의 무작정 대구로 올라간 셈이지요. 그때 김광술 선생님의 친구 분이 사진 인쇄공사 회사에 나를 소개해 주었어요.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졸업 앨범을 만드는 회사였어요. 사진들이 쭉 들어오고 편집을 하고 제판을 하고 한창 바쁠 때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으니까 또 슬그머니 회의가 생겼습니다. 한 1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내가 이런 거나 하자고 대구까지 올라왔나 싶었지요. 또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어요. 어차피 전세로 전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으니까,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지요. 서울에 올라가니까 도계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부동산 일에 뛰어들어서 돈도 좀 벌고 했던데,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나를 먹여 살려주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때 부동산 경기가 한창 좋아서 나도 진작 그런 일에 뛰어들었다면 돈을 좀 벌었을 텐데, 원체 나야 가진 게 없었잖아요? 그때 부동산은 잡아놓으면 무조건 돈이 되던 때였는데 말입니다.”
<집 앞에 나란히 선 주보원씨와 부인 조춘자씨>
광산 이름이 현동장석이었어요. 광산 계통도 잘하면 돈도 좀 되고 그렇거든요. 장석도 질이 좋은 건 정말 비싸게 팔립니다. 계약을 하고 이곳으로 내려왔는데 노천광산이었어요. 장석이란 게 원래 노천광산입니다. 이 마을로 올라오기 전에 원곡과 갈라지는 삼거리가 바로 장석을 파먹던 곳입니다. 광산이 끝나고 허전하니까 지금은 길이 돼 있어요.
울진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간 주씨가 먹고 살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닐 무렵 주씨의 부인이 암에 걸린다. “내가 군에 있을 때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는데, 거의 강제로 결혼을 하다시피 했어요. 어머니가 그때 관절이 참 안 좋았는데 형님도 좀 보태고 해서 근근이 살았지요. 서울로 막 올라가서 한창 어렵게 사는데 집사람이 덜컥 암에 걸렸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지요. 집사람 암을 고치지 못하면 나로서는 영원히 일어설 형편이 되지 못하겠다 싶었어요. 수술도 했는데 결국 저 세상으로 떠났어요. 처음 인연을 맺었던 집사람과의 사이에 2남 2녀, 넷을 두었어요.”
주보원씨는 서울에서 생활할 당시에 서면 전곡리에 장석(長石) 광산을 소유하고 있던 한 업자를 만나서 전곡리로 내려온다. “서울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을 알게 됐는데, 자기가 울진에 장석광산을 가지고 있는데 대신 맡아서 해주겠느냐고 그러더라고요. 광산 이름이 현동장석이었어요. 광산 계통도 잘하면 돈도 좀 되고 그렇거든요. 장석도 질이 좋은 건 정말 비싸게 팔립니다. 장석도 장석 나름이지만 월장석 같은 건 희다 못해 파란 빛이 나는데, 그런 건 진짜 비싸게 팔리거든요. 덜컥 계약을 하고 이곳으로 내려왔는데 노천광산이었어요. 장석이란 게 원래 노천광산입니다. 이 마을로 올라오기 전에 원곡과 갈라지는 삼거리가 바로 장석을 파먹던 곳입니다. 광산이 끝나고 허전하니까 지금은 길이 돼 있어요. 원래는 옆쪽으로 빙 돌아서 다녔거든요. 1975년도에 이곳에 들어왔다가 78년쯤에 다시 떠났습니다. 광산 수입이 점점 줄어들었거든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고급 장석은 도자기와 유리, 법랑철기를 만드는 유약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곳 전곡리에서 생산되는 장석은 질이 떨어져서 고급 도자기 원료로는 사용하지 못하고 싸구려 타일이나 전선 애자, 용접봉의 융착 결합제 등으로 사용됐어요. 전곡리에서 생산되는 장석은 산화철이 많이 섞여 있어서 가격이 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산에서 장석을 파낼 당시에 대여섯 명의 인부들을 데리고 곡괭이질을 해서 산을 넘기고, 그걸 야마 넘긴다고 해요. 인부들이 곡괭이로 일일이 장석을 파내야 했는데, 장석 광산은 다이너마이트 사용을 못합니다. 장석은 물러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도 그저 흙속에서 픽픽거리고 말거든요. 장석을 파내면 험한 길을 무리 없이 다닐 수 있는 제무시(GMC 화물 자동차)를 이용해서 분천역까지 실어 날랐어요. 열차 고뻬(화물칸)에 실어서 마산항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대만으로 수출됐어요. 그래도 질이 떨어지니 비싸게 팔지는 못했어요. 장석 계통은 내가 많이 알고 있어요. 규석은 차돌을 말하는 건데 장석은 차돌 옆에 붙은 부산물이지요. 차돌이 결정을 이룬 게 수정이고요. 그러니까 차돌 광산 쪽에 수정이 나올 확률이 엄청 높지요. 내가 떠난 다음에도 다른 사람이 계속 광산을 맡아서 운영했는데, 따지고 보면 폐광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장석광산에서 일할 당시에는 한동안 전곡리 새마을 지도자를 맡아서 부지런히 쫓아다니기도 했고요. 새마을 지도자를 할 당시에는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가서 수동식 전화기를 사다가 각 마을 이장 집에 연결했어요. 울진 산골마을에서는 처음으로 각 동네간의 비상 연락망을 갖추었던 거지요.”
장석 광산을 접고 대구로 올라간 주씨는 한동안 협성기업이라는 의료기기 생산업체에 근무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따로 의료기기 업체를 차리게 된다. “전곡리 장석광산을 떠나서 다시 대구로 올라갑니다. 대구 2공단에 있던 협성기업이라고 의료 기기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경영부실로 상당히 어려워져 있었어요. 내가 그 회사의 주주로 참여하게 되었지요. 그전에 회사 업주가 30여명 되는 고용인들을 제대로 대접도 안 해주면서 착취만 하려고 달려들었으니 회사 운영이 잘 될 리가 없었지요. 그때는 노동자들이 갈 곳이 없어서 헤매는 중이었으니 너무 자만했던 거지요. 사정이 그렇다보니 노동자들도 회사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지 않고 그저 시간이나 때우려고 했으니 제품이 잘 만들어질 리가 없었습니다. 문제점이 아주 심각했어요. 사장도 결핵으로 몸이 안 좋은 상태였고요. 내가 들어가서 작업장의 정리정돈부터 노동자들의 생활안정 대책까지 문제가 심각했던 경영 부실들을 바로 잡으면서 점점 회사가 정상화가 되어 갔어요. 그 회사에 들어가서 근무하다가 57살인가 돼서 회사를 나왔으니 근 30년여 근무한 셈이네요. 협성기업을 그만두고 나서 곧장 대영의료기기라는 회사를 차렸어요. 대구 수성구 수성동에 있었는데 주로 약 포장지를 만들었고요. 대영의료기기는 그 전에 협성기업에 있던 김영원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운영했는데 아주 성실했어요. 영덕사람인데 만능 스포츠맨이었고요. 그때 아버지 같다며 잘 따랐는데, 지금도 가끔 술 한잔 먹으면 울면서도 전화하고 그래요. 대영의료기기는 나중에 그 사람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이곳 전곡리로 내려왔지요. 내가 벌었던 돈까지 그 회사에 넣고 나왔어요. 김영원씨는 나중에 필리핀으로 이민을 떠나서 잘 살고 있고요.”
주보원씨는 대영의료기기를 하면서 현재의 부인 조춘자씨를 만나게 된다. “대영의료기기를 할 당시 회사에 경리로 근무하던 아가씨의 엄마가 지금 집사람이지요. 그 회사의 경리가 집사람 큰딸이었어요. 그런 인연이 있었어요. 집사람은 조씨 성에 춘자라고 지금 일흔하나 됐지요. 집사람도 전 남편과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어요. 한 번씩 모이면 손자손녀들까지 시끌벅적합니다. 말 그대로 자식부자인 셈이지요. 나는 어린 시절을 궁벽한 산골마을에서 보냈고, 그런 곳에 대한 아련하고 애틋한 기억이 평생 지속되면서 나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했습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꼭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여생을 보내야겠다는 그런 꿈과 향수였지요. 대구의 회사를 정리하고 나서 내 편히 살 둥지를 찾아서 정선과 영월 등지를 이곳저곳 안 돌아다닌 곳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정선에 들어가려고 했었어요. 정선 아우라지 계곡의 구절리 들어가기 전에 자개골이라는 곳을 사 킬로 정도 들어가면 폐교된 학교가 하나 있었어요. 그래서 정선 교육장을 만났거든요. 처음에 나는 폐교된 분교장을 이용해서 정선 자개골의 각종 수생식물과 꽃 등의 표본 등을 이용해서 자연학습장을 만들어서 운영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연학습장 조성과 관리 운영은 내가 하고 운영비는 교육청 예산으로 집행하면 정선의 명물이 되겠다 싶었지요. 자개골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청소년 훈련장과 극기 훈련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지요. 큰 교실 두칸이 있었으니 멋있었어요. 식물 표본을 못 만드는 건 영상으로 보존도 하고요. 그런데 결국 이런 저린 일이 꼬이면서 그 일이 잘 안됐어요. 주변에 축사가 많아서 냄새도 많이 났고요. 특히 우리 애들이 전부 다 대구에 살고 있는데 정선까지 오려면 너무 멀다 싶은 생각도 있었고요. 그래서 젊은 한때 이곳 장석광산에 근무했던 경험도 있었고, 집사람과 함께 이곳 전곡리를 둘러보고 난 다음에 이곳에 마지막 삶의 터를 잡자 결심했지요. 그리고 그때 위의 누님이 이곳에 살고 계셨고요. 매형이 원래 이곳 사람이거든요. 이 마을이 애초에 방씨들 집성촌이었잖아요? 그런 인연도 있고, 전에 장석광산에 근무할 당시에 새마을 지도자로 일했던 경험도 있었으니 낯이 익어서 생소하지 않았습니다.”
<주씨가 현재 살고 있는 화전민 소개집을 개조하기 전 모습과 개조 공사를 할 당시 모습>
엉성했던 화전민 소개 집인 이집을 10만원 주고 샀습니다. 구들장을 완전히 파내고 바깥벽에 한 겹 더 벽돌을 쌓아서 붙이고 그랬어요. 원래 이집은 한 채가 아니라 두채였는데, 그 집을 바로 이어 붙여서 이집을 만들었어요. 죽을 때까지 내 몸 편하고 마음 편하게 살면 되는 것인데, 그래도 이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지요.
주씨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원래 화전민 소개 집이었던 것을 이곳저곳 손보고 다듬은 것이다. “1995년 봄에 이곳으로 이사를 내려와서 터를 잡았어요. 처음에 이집은 엉망이었어요. 그때 이집을 관리하던 사람에게서 이집을 10만원 주고 샀어요. 구들장을 완전히 파내고 바깥벽에 한 겹 더 벽돌을 쌓아서 붙이고 그랬습니다. 냇가의 돌을 주워 와서 벽에 붙이고요. 원래 이집은 한 채가 아니라 두채였는데, 그 집을 바로 이어 붙여서 이집을 만들었어요. 옛날 급하게 지었던 소개 집들이야 다들 얼마나 좁고 엉성하게 지었습니까? 그래도 죽을 때까지 내 몸 편하고 마음 편하게 살면 되는 것인데,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지요. 한 가지 아쉬운 건 이집 땅을 불하 받으면 좋은데, 울진군 소유 땅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언제 불하를 받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네요. 이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얼마 안됐는데 법정스님이 쓴 버리고 떠나기라는 책이 한권 배달돼 왔어요. 그 법정스님이 한때 화전민 소개 집에 살았었나 봅니다. 새소리 물소리 얼마나 좋은지 어쩌고저쩌고 써 놨는데, 어라 이 양반이 내가 쓸 글을 대신 썼네 싶더라고요. 어쩌면 내가 당시에 가졌던 심정과 그리도 닮았던지, 내가 아마 지금 집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을 겁니다. 살아오면서 힘들다보니 스님이 되어야겠다는 그런 꿈을 참 많이 꾸었지요. 저 벽에 걸려있는 족자에 쓰인 글이 나옹선사의 선시(禪時) ‘청산은 나를 보고’입니다. 저 선시에 곡을 붙인 음악도 참 좋아하는데, 이미 법정 스님 이전에 나옹선사가 무소유를 주장했던 거지요. 사랑, 미움, 성냄, 탐욕을 모두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는 것인데, 이미 고려시대에 나옹선사가 무소유를 설파하신 거잖아요? 그러고 보면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나옹선사의 선시를 표절한 것이기도 하겠지요. 그때 생각했지요. 스님들이나 나나 자연 속에 묻히길 원하고 찬미하는 건 다 똑같구나 하고요.”
여생을 보낼 마지막 둥지를 찾아서 서면 전곡리에 정착한 주보원씨는 화전민들과 십이령 바지게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막상 어느 정도 나이가 차서 이곳 전곡리에 들어왔지만 별다르게 할 일이 없었어요. 시간이 있는데 멍청하게 집에서 놀 수는 없으니까, 우선 주변에 있는 꽃, 나무 등의 식물 군락지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만들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요 건너편에도 식물 자생포를 하나 만들어 두었는데, 수년전 매미 태풍으로 전부 다 쓸려 내려갔어요. 지금 살고 있는 이집도 전곡리 산골짜기에 흩어져있던 화전민들을 산불 위험 해소와 공비들로부터 소개하기 위해 지었던 소개 집이지만, 울진군에서는 서면 전곡리만큼 화전민들의 삶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마을도 없었어요. 그래서 화전민들에 대한 자료를 이것저것 내 나름대로 빠짐없이 채록해서 1998년도에 울진문화원에서 발간한 울진문화 책자에 게재했습니다.”
주씨가 1998년 울진문화지에 게재한 글에는 서면 전내마을에 살던 화전민들의 생산 활동과 민속 신앙, 생활 용구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당시 화전민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소개집으로 이사를 한 후 어느날>
자연에서 신세를 지고 가는데, 끝내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고 당신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개똥철학일수도 있지요. 난 소나무를 아주 좋아합니다. 나중에 내가 죽고 나면 화장을 해서 소나무 밑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겨 두었지요. 내 한 몸이 수목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자연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될 수 있겠지요.
주씨의 향토사에 대한 관심과 집념은 울진지역과 봉화지역을 오가며 양쪽 지역의 재화와 물화를 연결해주던 십이령 바지게꾼으로 이어진다. “십이령 바지게꾼들의 흔적을 찾아서 한 5년 쫓아 다녔습니다. 직접 이 고개 저고개마다 다녀보고 기록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그런 기록들이 하나 둘 모여서 2010년 가을에 울진문화원에서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라는 제목으로 십이령 바지게 고개를 총망라한 역사문화지가 발간됐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10여명이 관련 전문가들이 저자가 되어 자료와 사진을 모은 책이지요. 나는 그 책에서 ‘십이령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소제목으로 선질꾼을 아버지로 둔 자식들을 인터뷰하고, 십이령길에 얽힌 이런저런 설화를 언급했습니다. 울진 북부 지역과 외부 지역의 유일한 소통로인 십이령길에 얽힌 책이 출간된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고, 특히 내가 책 발간 작업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뜻 깊은 일이었어요.”
주씨가 울진문화원에서 발간한 울진문화 21호에 기고한 ‘싸시랭이’ 놀이는 태백과 봉화의 경계 지역인 석포와 동점 등지에서 즐기던 놀이로, 서면 전곡리도 싸시랭이 놀이가 행해지던 지역이었다.
주씨는 이 글을 통해 지역에 처음으로 싸시랭이 놀이를 소개했는데, 그 놀이는 5명이 한조가 되어 24개의 엽전을 이용하여 즐기는 놀이다.
주보원씨는 사람이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갈 때는 뒷자리를 깨끗이 하고 가야한다고 말하며 웃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을 찬미합니다. 애초에 자연에서 태어났고, 결국 자연으로 돌아갈 것인데, 여기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자연에서 신세를 지고 가는데 끝내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고 당신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개똥철학일수도 있지요. 난 소나무를 아주 좋아합니다. 나중에 내가 죽고 나면 화장을 해서 소나무 밑에다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겨 두었지요. 내 몸이 수목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자연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될 수 있겠지요. 어떤 이들은 화장을 해서 값비싼 도자기에 뼛가루를 담아두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그게 뭐하자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한평생 짧게 살다가 가는데 내 뒷자리 하나는 깨끗하게 하고 가야지요. 자연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살다보니 어쩌다가 야생화연구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그게 어디 돈이 생기는 자리입니까, 큰 명예가 있는 자리입니까? 울진 지역이 보유한 천혜의 자연 환경에서 자생하는 야생화에 관심이 있어서 참여하게 됐는데, 처음부터 둘게 둘게 모여서 먹고 즐기는 모임 같았으면 참여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모임은 당장 그만두어야지요. 물론 아쉬움도 있지요. 야생화 연구회 회장으로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행사에 불려 나갈 때가 있는데, 대체로 일회성인 전시행정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이거 대체 내가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야생화연구회는 아직까지는 재미있게 운영되고 있어요. 다른 이권이 없이 다들 야생화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임이니 서로가 다툴 일이 없지요. 한 번씩 모여서 이산저산으로 다니며 야생화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서로 좋은 의견을 주고받기도 하고요.”
<1997년10월 26일, 주보원씨가 직접 그린 산머루 기록화>
<2009년 서양화가 홍경표 작가가 스케치한 주보원씨>
강원 태백시 어평 마을에서 나서 자랐고, 오랫동안 타지를 떠돌다가 16년 전에 울진지역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주보원씨.
십이령길을 포함하여 싸시랭이 놀이, 토종 야생화 관찰과 기록, 곳곳에 얽힌 설화 발굴과 정리 등 윗대의 안태고향인 울진 지역에 대한 주씨의 향토사랑은 지극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화전민 소개 집을 개조한 주보원씨의 집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고갯마루를 돌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씨는 그렇게 서 있었다.
비탈 길 양지에는 진홍색 진달래꽃이 또 그렇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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