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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1년 '난국제집번역판출간기념식'에서 황영주 선생(원안)과 당시 대보문화연구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허준, 김현박, 이병권, 김수열, 김효기, 김재섭, 조배환, 박정순, 전명수, 이순능, 신재화, 최기명씨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제공=임기석 문화원장] | 본관은 장수, 아호는 석곡이다. 1927년 12월 17일 서울 종로에서 부친 황오연과 모친 박씨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친은 천석꾼의 지주였으며, 덕성이 온후하고 선행을 많이 베푼 인물로 전해진다. 석곡 황영주 선생의 생모는 세 번째 부인으로 본 부인이 소생이 없자, 본 부인의 주선으로 정식 결혼을 했다.
종로의 청운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학업성적이 우수했고, 남산신궁 서예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대회에서 필명을 날렸다. 졸업 후 경복중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부친이 창씨개명과 일본인에 의한 신식교육을 거부해 1학년을 중퇴하고 대전으로 내려오게 된다.
선생의 나이 17세때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 헌병의 가택수사를 받게되고 책상 밑 깊은 곳에 숨겨둔 태극기가 발견돼 헌병대에 잡혀가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대덕군 유성면 월평리 박문식 이장의 도움으로 출감을 하게 되고 그 인연으로 박씨의 자녀 중 3녀인 박숙희 여사와 혼인을 하고 해방직후 지금의 화산동 오얏골로 오게 된다.
지역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려 무소속 김영선씨가 당선되자, 선생은 민주당 정부의 재무장관 재직시까지 김영선 장관의 수석 비서관을 맡게된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 민주당이 와해되고, 군부세력에 의해 많은 인사들이 구속되거나 감금되었으며, 선생도 심한 고초를 받고 감시의 눈길로 인해 행동이 자유롭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당시 삼선개헌을 반대하고 유신헌법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보령지역 민주인사 연대활동을 주도했는데 가칭 ‘향토문화연구회’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군사 당국의 심한 감시를 피했다고 한다.
각 읍․면․동리별 책임자를 구성하고 마을별 옛 지명을 조사한다는 구실을 붙여 민주화운동을 펼친 것이다. 이 당시 같이 활동한 분들로는 김현박, 이영우, 최병찬, 조용숙, 임승한, 박성본, 임광순 등 다수가 있다.
본격적인 지역운동의 길로
선생은 이후 1972년 4월 천화회(泉和會) 조직, 1972년 12월 제1회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출마 낙선, 1973년 9월 대천신용협동조합 창립총회 이사장 취임, 1989년 5월 ‘대보신문’발행인으로 지역신문 창간, 1990년 6월 신성문화연구소 활동시작, 1990년 9월 교양문화강좌 개설(매주 금요일 한문 강의)등의 활동을 하게 된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을 맞이해 소작인들에게 농지를 명의 이전해 주었으며, 대천초등학교 운동장 조성시에는 땅을 기증했고, 마을 안길 신설과 확장을 할때는 땅을 희사하는 등 항상 주민들의 편의와 공익을 먼저 생각했다.
해박한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 사유의 자유로움 속에 유불선 및 일본어가지 폭 넓은 강의를 계속하다 지병 악화로 1993년 1월 10일 영면하시고 수많은 시민의 애도 속에 대천천주교회에서 영결식이 엄수됐다.
계․두레를 잇는 신협운동
신협은 조합원들이 서로 출자해 설립한 비영리법인으로 조합원들의 여윳돈을 모아 필요한 다른 조합원에게 빌려 줌으로써 상호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70년대에는 은행 문턱이 높았고 서민을 위한 마땅한 금융기관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금고 형식의 기관이 있었으나 운용부실로 오히려 가난한 서민을 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선생은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와 개개인은 물론 지역공동체로서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협 설립을 주창했다.
당시 신협 설립의 목적에 대해 “이 조합은 조합원의 저축심을 함양하고 조합 자금의 민주적 관리와 활용으로 조합원의 자질 향상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지역신문 창간
지방자치 시대를 맞아 각 시․군 단위로 특성에 맞는 지역신문이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추세에 따라 보령에서도 ‘대보신문’, ‘대천신문’, ‘한내신문’등 3개의 주간 신문이 창간됐다.
대보신문은 대천시에서 ‘대’자를 보령군에서 ‘보’자를 따서 대보신문이라 칭했으며, 2개월의 준비 끝에 선생을 발행인으로 1989년 5월22일 타블로이드판 12면 1만부를 발행했다.
신문은 보령지역의 크고 작은 소식을 자세히 싣고자 했으며, 문화유적, 지명고찰, 전통민속과 전설, 역사적 인물, 출향인사 소개, 개업, 애경사 등 주민들의 관심사를 다루고자 노력했다.
선생은 일생동안 일부 부유층의 타락과 오만을 행동으로 순화시키기 위한 건전한 생활미학을 가꾸기 위해 사회교육을 강조했다. 또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과 존엄함이 자유스러움 속에 형성 될 수 있다고 믿어 공교육적 예의범절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활의 여유와 풍요는 베품의 선업으로 수준 높은 가치관이 완성된다 했고, 자유와 방종을 구별해 논리와 합리적인 사고로 미신적 미혹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 예술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구속없는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 활동하기를 기대했다.
선생의 “일생이란 영겁의 무한한 세월에 비길 때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하므로 만고에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권력 앞에 아부하지 않고 공명을 가벼이 알아야 일시는 적막해도 오랫동안 미명이 있다”는 말씀은 현재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