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서구 월성동 구석기 유물(출처: 위 - 연합뉴스 2006.7.26, 아래 - 국립대구박물관 2014.3.9)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 출토된 유물은 1,200여점으로 좀돌날과 좀돌날 몸돌 등 대부분 석기류이다. '좀돌날'은 날카로운 단면을 가진 돌조각으로, 요즘의 '커트 칼'과 비슷한 도구이다. 나무껍질을 벗기거나 짐승 가죽과 살을 분리할 때, 물고기를 손질할 때, 옷감을 재단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 수성구 파동 바위그늘 유적(2014.1.3)
‘바위그늘(岩陰)’은 신천에서 약 30m 떨어진 산기슭에 있으며, 구석기인들이 비바람을 피하며 살았던 주거지로 추정되며, 장안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약 80m 지점에 위치한다.
신석기 시대 거주지 유적으로는 빗살무늬 토기와 움집터 등이 발굴된 수성구 상동과 중구 대봉동, 북구 서변동 일대가 대표적이다. 상동 지석묘 유적은 신천의 자연 제방이며, 서변동 유적은 동화천의 범람원 충적지에 해당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대구분지의 소하천 충적지나 자연 제방을 무대로 어로와 채집 및 농경을 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시대의 삶터는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대구에 남아있는 고인돌은 상동, 진천동, 대봉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상동은 신천의 자연 제방과 배후 습지로 이루어진 수성들을, 그리고 진천동은 진천천 유역의 선상지를 농경의 주요 터전으로 삼았던 것 같다. 이어지는 초기 철기 시대의 삶터는 연암산과 침산의 구릉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생활 유적은 평지에, 무덤 유적은 대체로 구릉지에 분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렇게 볼 때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는 하천의 충적지인 선상지와 자연 제방 등이 주요한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달성공원(달성토성)
▲ 불로동 고분군(2013.11.23.)
1세기 이후의 초기 국가와 삼국시대에 대구인의 삶터는 종래 하천에 인접한 충적지에서 점차 구릉지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변한 12국의 하나인 달구벌국은 달성토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달성토성 주변의 비산동과 내당동, 평리동에 분포하는 고분군이 규모도 크고 그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토성과 연계된 고분군으로는 용두토성 주변의 대명동 고분군, 검단토성 주변의 복현동 고분군, 봉무토성 주변의 봉무동과 불로동 고분군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토성과 고분군의 유적을 통하여 당시 대구분지에는 달성토성의 주변 지역 외에도 대구천과 신천, 금호강 등의 하천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범람의 위험이 적은 구릉지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집단적인 삶터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출처 : 삶터, 대구의 이해(오성고 최희만,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