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책임감이란 것이 그런 것인가. 학생부장단 26명을 이끌고 인천공항을 출발하던 날, 다른 단원들의 마음은 마냥 신나고 좋았을지 몰라도, 연수단장으로서 4박 6일의 일정 속에서 아무런 사고없이 무사히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야 한다는 중압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일선학교에서 생활지도하느라 고생하는 학생부장들을 대상으로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현지 연수를 통해 재충전의 기회 부여할 목적으로 추진된 이번 연수는 교육청에서 일괄적으로 주도하던 종래의 운영방식을 개선해서, 학생부장들 스스로 연수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부합하는 여행사를 선정토록하는 등 운영 전반의 질적 개선과 향상을 이룩한 연수였기에 크게 염려할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방식 또한 천차만별이어서,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단체연수에서 우려되는 소소한 문제들이 낯선 이국 땅에서 어떻게 드러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나 교육청에서 연수경비의 70%를 부담하고 나머지 30%를 자비부담으로 해서 핵생부장들의 자율적 참여 희망을 받아 모두의 동의하에 성사된 것이기에 잘못될래야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교육청 주관 해외연수를 소중한 국가예산을 낭비해가며 그냥 먹고 놀다오는 식의 관광성 행사인 양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일부의 비판적 시각 또한 여전해서 얼마나 몸조심을 했는지 모른다.
여행의 중심지였던 곤명이 꽃의 도시라 해서 사계절 봄의 낭만이 넘치는 고장이라는 했지만 낮시간 대 내리쬐는 한여름의 태양은 견디기 힘들었다. 썬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채양이 긴 모자를 눌러썼지만 목덜미를 거쳐 가슴팍 사이로 흐르는 땀, 땀을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차의 에어컨은 시원찮고, 그들 말로는 '쬐끔되는 거리'라고 하지만 우리 느낌으로로는 서울에서 부산갔다 다시 대구 돌아오는 정도의 시간을 날마다 이동하는데 허비할 수 밖에 없는 여행 일정은 참으로 부담이었다.
도심을 벗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나타나는, 참으로 못먹고 못입던 우리나라 1960년대식의 낙후된 산악 농촌지역을 '차마고도' 고개 넘듯 지나야 했고, 그것도 덜커덩 거리는 시골의 비포장길을 대여섯시간씩 달려야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보니 날이 갈수록 누적되는 피로감을 어떤 날은 발맛사지로 풀고 어떤 날은 몇 잔의 소주로 풀었지만 오십 중반을 넘긴 나이에 도보가 중심이 되는 여행-동굴 하나 구경하는 데 두시간을 걷고, 석림 구경하는 데 역시 두시간을 걷고, 용문에 올라 곤명호를 구경하는데 또 두시간여를 터벅거려야 하는-강행군은 참으로 인내심을 요구하였다.
눕자마자 코를 골며 깊이 떨어진 잠의 바다에서 모닝콜을 받고 눈을 뜨면 새벽 여섯시. 조식이라 해서 호텔 식당에 들어서면 하나같이 느끼하기만한 음식들. 그래도 밥을 한술 먹어보려고 주걱질을 해보지만 솜털처럼 가벼운 밥알은 접시위에서 풀풀 날리고, 입맛에 맞는 것은 겨우 삶은 계란 한두개 정도와 잼을 바른 빵, 그리고 새콤달콤한 발효 우유 정도. 그래도 어쩔 것인가. 아니 먹으면 힘이 없어 구경을 못할 판이니 꾸역꾸역 밀어넣을 수밖에. 그래 연수 마지막날 한인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소주와 함께 먹는 맛이란 기가 막혔다.
규모가 감히 가늠조차 어려운 13억 인구에, 남한 면적의 96배나 되는 거대한 땅. 한족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가운데 차이나메리카-세계 보스의 자리를 탐내는 중국. 누가 그랬던가. 태평양을 동서로 갈라 동쪽은 미국이 지배하고 서쪽은 중국이 지배하는 것이 현재 중국이 꿈꾸는 욕망의 실체라고. 그 거침없는 욕망을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나라가 중국이고, 그 빈부격차를 중심으로 그 경제 사회적 제도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중국은 참으로 위태위태한 나라이기도 했다.
어쨌든 참으로 볼거리가 많은 나라, 그래서 느낄 것도 많은 나라. 낯설고 신기한 중국 땅의 풍경과 실상 앞에서 이구동성으로 쏟아내던 감탄과 경이. 중국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난해의 땅, 미지의 땅, 신비의 대륙이었다. 북경을 들렀을 때도 그러했고 상해를 들렀을 때도 그러했지만, 이번 운남성 일대의 연수도 보는 사람을 단숨에 압도해 버리는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자연경관의 규모 앞에서 입이 쩍쩍 벌어지고 오금이 저려오는 느낌을 가졌던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도 따라가지 못할, 장대함과 웅장함, 복잡함과 불가사의로 대변되는 대륙적 기질, 그리고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중화사상,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역사적 우월의식은 부럽고 또 부러웠다. 하지만 국민소득 2만불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은 고작 6000만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우리나라 7,80년대 농업과 산업이 공존하던 시대의 궁핍과 혼돈이 교차하는 중국.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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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정 속에서도 연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들렀던 두 개의 학교. 운남대부속중학교와 옥룡제1중학교는 때마침여름방학 중이어서 학생들이나 교사들을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학교 측의 배려로 교사 건물 주변과 내부, 운동장 등을 둘러볼수 있었으며 두 학교 모두 그 지역의 중심학교로서, 학교 규모와 교육과정을 통해 중국 전체의 중등교육의 실상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중국의 의무교육은 6세부터 15세까지인데 초등, 중학교는 적령기의 외국학생이 입학하는 것을 허가한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학생을 허가하며, 부모가 중국에 거주하지 않는 외국학생은 반드시 외국학생의 부모가 정식으로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혹은 중국인을 외국학생의 보호자로 위탁하여야 한다.
중국학교의 학년도는 9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7월에 끝난다. 학기는 2학기로 나뉘어지며, 각 학기는 9월, 3월에 시작한다.
중국의 교육제도는 6, 3, 3, 4제로서, 9년에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으며, 대략적으로 소학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모든 교육 행정을 중앙정부 교육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교육제와 비슷하였다.
소학교육의 경우 6~11세의 아동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우리나라의 초등교육에 해당한다. 2001년부터 학생의 창의력 개발, 과학적 사고 배양 등의 다양한 형식의 교육개혁이 실시되었으며, 도시 초등학교는 3학년부터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소수 민족 지역 학교는 한어 교육을 실시한다. 초등학교 졸업생의 중학 입시 시험 면제 등의 새로운 정책의 실시로 현재의 과중한 학업 부담이 완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중등교육의 경우 12~17세의 청소년들에게 교육을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지방정부와 중앙의 업무 부문에서 개설하며, 중등교육 기관은 보통중학, 직업중학과 중등전문학교로 나누어진다. 보통중학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중학교에 해당하는 초중과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중으로 나뉘고, 학제는 각 3년씩이다.
초중을 졸업한 일부의 학생은 고중으로 진학하고, 다른 일부분은 직업고중 또는 중등전문학교에 진학하며, 학제는 3~5년으로 되어있다. 중등교육 또한 초등교육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식의 교육 개혁으로 많은 발전을 추구하고 있으며, 특히 지방 특생에 따른 중학 진학의 입시 변화 등으로 다양한 발전을 모색하고 있었다.
재밌는 것은 옥룡 제1중학교에 들렀는데, 학교 게시판에 부정행위자에 대한 '통고'장-성적 0점처리 및 사회봉사와 같은 벌칙 내용이 붙여져 있었고, 학교 성적을 외부에 공개하여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강하게 부추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머리모양, 복장 등과 관련하여 몇 센티미터와 같은 상세한 기준을 제시하여 학생들이 엄격한 규율체제 속에서 순응토록 하고 있었다. 운남대부속중학교의 경우 역사와 전통이 깊은 학교로서 학교의 명예를 빛낸 학생들의 이력을 크게 홍보하고 있었으며 명문학교로서의 정돈되고 깨끗한 학교관리가 돋보였다.
중국 연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곤도라를 타고 올랐던 5400미터 고지의 옥룡설산, 아니면 오묘함과 신비함으로 끝없이 이어지던 깊고 깊은 구향동굴, 아니면 자연의 조화 앞에서 머리 숙이고 싶던 기기묘묘 그 자체이던 석림, 아니면 드넓은 바다처럼 광활해 보이는 곤명호 등등. 물론 그것들도 좋았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함께 했던 연수단원들의 따뜻한 인간미와 향기 넘치는 정이었다.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 서로가 조금씩 챙겨온 김치와 김, 고추장을 끼니때면 서로 권하며 나누어 먹고, 무거운 짐을 싣고 내릴 때 서로 먼저 상대의 짐을 챙겨주고 조금 힘들어보인다 싶으면 가방을 대신 들쳐매주고 뒤쳐지는 동료가 있으면 발걸음을 늦추던 그 마음을 사랑이라 이름붙이지 않으면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배려와 나눔의 소리없는 실천은 우리 연수단 모두의 마음 속 약속이었던 셈이다.
학생부장들은 평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끝임없이 바른생활을 채근하는 사람들이어서인지, 어느새 본인들 스르로가 바른생활의 표본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계획 속에 들어있는 분임토의를 하자며 몇 시까지 세미나실로 모이라하면 늦는 사람 하나가 없었고, 나흘째 되던 날 진행했던 저녁 워크샵은 너무도 분위기가 진지해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다. 현장에서의 학생지도의 고충을 서로에게 얘기하고 좋은 해법을 구하는데 머리를 맞대는 모습은 어느 학회나 연구회도 못따라올 지경이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교원들의 해외연수를 돈이나 쓰고다니는 낭비성 행사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한푼의 낭비도 없이 계획에 따라 너무도 진지하게 이루어지는 이번 연수의 모든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제발 그 경망스런 입을 닥치고 있으라고.
단언컨대 이번 우리 광주시교육청 학생부장연수단의 해외연수는 그 목적과 내용, 추진 방법과 진행과정에서 너무도 떳떳하고 당당한 연수였으며 한 점 부끄럼없는 아름답고 깨끗한 연수였음을 내 진실한 양심의 이름으로 자부한다.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된다면 일선에서 고생하는 학생부장들에게 연수의 기회를 더욱 확대부여하여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줄 것을 당부드리며, 이번 해외연수를 통해 익힌 다양한 체험과 배움의 지혜들이 학생지도의 새로운 활력소 구실을 할 것으로 확신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