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원(鄕原)의 의미와 그로 인한 국가적 피해와 대책.
KISTI Reseat Program 전문연구위원/국방대학교 명예교수 김 충 영
1. 서론
옛날부터 국가적 위험 인물은 남의 집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이 아니라 고위직에 있으면서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사욕을 채우는 사람으로 보았다. 도적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개인적 범죄 범위에 불과하지만, 고위직에 있으면서 자기 직위에 해당하는 책임을 망각하고 권한을 최대로 활용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채운다면, 그 범죄 행위는 국가 전체에 영향을 주며 그 파급효과는 전 국민에게 미친다. 고위공직자뿐 아니라 사회 정신적 지도 그룹도 그 지도적 위치를 이용하여, 겉으로 정의를 구현하고 불의를 규탄하는 척하면서 그 이면으로 사리사욕을 챙길 경우에 그러한 행위는 사회에 악영향을 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가 소속한 조직을 어렵게 만들고 조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배반하고 결국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게 된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향원(響原)이라고 하여, 향원은 덕을 도덕질(德之賊)하는 사람이라고 경계했다. 맹자(孟子)는 향원은 덕(德)을 어지럽히는 자라고 하여 두려운 존재로 보았다. 순자(荀子)는 더 나아가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법무장관 직위이면서 수상직을 겸하게(攝相) 되자. 곧 바로 노나라 대표적인 향원인 소정묘(少正卯)을 죽였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위험함은 나라를 뒤엎을 정도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여기서 향원의 의미를 공자(孔子)가 설파한 내용에서 출발하여 더듬어 보고, 역사적으로 중국과 우리 나라의 향원들이 누구였나를 밝혀 본다. 그리고 그들로 인하여 나라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오늘날 산업화 및 정보화 시대에 향원의 성격을 정의해보고 고위직에 보임(補任)하는 사람은 향원 아닌 사람을 가려 뽑아야 하며, 국민들도 선거 때 피선거인들 중에 향원이 없는가를 점검하여 피선거인을 선출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 정기가 바로 설 수 있고 국가는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읍을 밝힌다.
2. 향원(響原)의 의미와 역사적 고찰.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공자(孔子)는 향원은 덕(德)을 도둑질하는 사람이라(鄕原 德之賊也)1) 라고 말했다. 공자는 양화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 양화는 똑똑하여 노(魯)나라 세도가 계손씨(叔孫氏)에 발탁되어 세력을 잡은 후 난을 일으키다 실각하여 제나라로 도주했다. 그래서 향원이라는 말을 공자의 제자들이 양화편(陽貨篇)에 기록하여 두었다.
뒤를 이어 맹자(孟子)는 향원에 관해 진심하편(盡心下篇)에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맹자의 제자 만장(萬章)이 어떤 사람이 향원이냐고 물었다. 맹자는 설명하기를 「이상이 높아서 행위가 말이나 뜻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광(狂)이라고 하고 창피하고 더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람은 견(?)이다」라고 정의하고, 「향원(鄕原)은 광(狂)한 사람을 보고 저렇게 뜻만 높고 큰소리만 치니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다고 하고 견(?)한 사람을 보고 따로 떨어져 고독하고 맹하다고 비웃으며 이왕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 세상 흐르는 데로 잘 어루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음흉스럽게 시세에 아첨하는 자들로 바로 위선자들이다」2)라고 했다.
이에 맹자의 제자 만장(萬章)이 맹자에게 향원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맹자는 「향원의 비행은 들추어내기 어렵고 그들의 결점을 공격하기도 어렵다(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그들은 시세에 동조하고 더러운 속세에 잘 맞추어 산다(同乎流俗 合乎汙世). 표면은 충신인척 꾸미고(居之似忠信) 청렴한 듯 행동한다(居之似廉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을 바로 세우는데 큰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들을 덕을 도둑질하는 자라고 경계했다.」3) 고 말했다.
맹자는 「사이비를 미워한다(惡似而非者)」고 서두를 꺼내고 사이비를 비유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라지를 미워하는 까닭은 곡식의 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惡莠恐其亂苗也). 간녕을 미워하는 까닭은 대의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惡佞恐其亂義也). 말을 잘 둘러대는 자를 미워하는 까닭은 신의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惡利口 恐其亂信也). 정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까닭(춘추시대 정나라 여인은 음탕하고 음악도 남녀 사랑에 대해 많이 노래했음)은 순수 음악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惡鄭聲 恐其亂樂也). 자주색을 미워하는 까닭은 주홍빛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惡紫恐其亂朱也).」4)
맹자는 정의를 혼란케 하는 어떤 행위도 미워하는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향원(鄕原)을 미워한다 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惡鄕原 恐其亂德也).」5)라고 하여 덕을 혼란스럽게 하는 향원을 공포(恐怖)의 대상으로 보았다. 즉 향원은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의 존립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지도 구룹이 사심 없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을 할 때 백성들은 따르고 사특(邪慝)한 마음도 없어진다고 했다.
고대 중국 전국시대와 한나라시대 사람들은 대표적인 향원으로 소정묘(少正卯)를 들고 있다. 일부 사가들은 소정묘를 노나라 세력가 양화(陽貨)와 삼환(三桓)사이를 이간질하여 양화난을 일으키게 한 원흉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勢家)편에서 「노정공(魯定公) 14년, 공자 나이 56세 때 공자가 노(魯)나라의 사구(司寇: 법무장관)로 있으면서 대부로서 나라 정치를 어지럽히는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고 정공(定公)을 적극적으로 정사에 참여하도록 했다」6)고 기록하고 있다.
소정묘 처형 사건은 논어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순자(荀子)의 저술 내 유자편(宥坐篇)과 유향의 저술 설원(說苑) 중 지무편(指武篇)에 소정묘를 처형한 이유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음미하면 향원이 어떤 부류인가를 알 수 있다. 두 책자의 기록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여 순자의 기록을 여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노나라 사구(司寇)로 있으면서 재상을 겸(攝相)하고 있은 지 7일 만에 소정묘(少正卯)를 주살 했다. 문인들이 놀라 달려와 물었다. 「소정묘는 노나라에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정사를 시작하자마자 그를 죽여서 무슨 덕이 있겠습니까.」공자가 이에 대답하여 말했다. 「거기 앉거라. 내가 너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마. 사람들 중에 나쁜 사람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도둑질하는 자는 이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 그 첫째 유형은 남의 마음을 잘 읽어 마음에 들게 하지만 그 속에는 엉뚱한 흑심을 품고 있는 자(一曰心達而險). 둘째 행실이 편벽하면서 고집만 센 자(二曰行辟而堅), 셋째는 말에 진실성이 없으면서 달변인 자(三曰言僞而辯). 넷째는 하는 목적이 어리석으면서 지식이 많은 자(四曰記醜(志遇)而博). 다섯째는 비리에 순응하면서 자기 이익만 챙기는 자(五曰順非而澤)니라. 」7)
「사람이 이 다섯 가지 중 한가지만 지녀도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운데 소정묘는 다섯 가지를 모두 겸하고 있어서 군중에게 사기성 달변으로 군중을 미혹시킬 수 있고 영향력이 강하여 군중을 자기편으로 모아 정도(正道)에 반하여 족히 홀로 설 수 있으므로 간악한 무리들 중에 소영웅이다. 그래서 죽이지 않을 수 없다.」8)
설원(說苑)에는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소위 꼭 죽여야 할 사람은 낮에 강도질하고 밤에 남의 집 담을 넘나드는 그런 도둑이 아니다. 바로 사회를 문란하게 하고 나아가 나라를 뒤엎는 간사한 무리들이며, 이들은 죽어 마땅하다. 이러한 무리들은 의로운 자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미혹에 빠지게 하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所謂誅之者 非爲其晝則 攻盜暮則穿?也 皆傾覆之徒也. 此固君子之所疑 愚者之所惑也.)」9)
공자(BC552-BC479)가 대사구(大司寇)로 재직할 때가 서기전 499년에서 498년이었고, 맹자(BC370-BC305)가 서기전 318년 제(齊)나라 고문으로 있다가 고향 추(鄒)로 돌아왔을 때가 서기전 308년이었다. 순자(BC298?-BC238?)는 초(楚)나라 재상 춘신군의 추천으로 난능(蘭陵:山東省)의 수령으로 있다가 춘신군이 죽자(BC238) 직책을 그만 두고 문인교육과 저술에 힘썼다. 사마천(司馬遷 : BC145? - BC 86?)은 서기전 108년에 태사령에 임명되었고 서기전 104년에 역사편찬에 착수했다. 그리고 전한(前漢)시대 학자인 유향(劉向: BC77-BC6)은 당시 간절히 느꼈던 점을 옛 기록을 들어 설원(說苑)에 남겼다.
이를 보면 공자가 향원에 대해 언급한 이후 약 100년 후에 맹자가 부연 설명했고 맹자 이후 약 70년 후에 순자는 향원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리고 순자 이후 100년이 되어 사마천이 소정묘 사건을 역사에 기록했고, 곧이어 유향이 인용했다. 순자가 기록한 유좌편(宥坐篇)은 후세 학자들이 기록하여 추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으로 해서 공자가 소정묘를 처형한 기록도 만든 이야기라고 보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순자 이후 사마천과 유향이 인용한 것으로 보면 조작해서 만들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조작되었다 하더라도 당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제후를 등에 업고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내용은 본 내용에 빗나가는 이야기이므로 접어 두고 향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3. 역사적으로 본 대표적인 향원
공자는 향원은 결국 사회에 악영향을 미쳐서 그 피해가 크다고 보고 덕을 도둑질한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향원에 대한 이야기가 왜 양화편에 기록되어 있는가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노나라에는 계손(季孫), 숙손(叔孫), 맹손(孟孫)씨가 세도를 부렸다. 이들을 노(魯) 환공(桓公)의 자손으로 삼환(三桓)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자의 성읍을 갖고 제후처럼 세력을 부렸다.
양호(陽虎)의 자(字)는 화(貨)이다. 그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이마가 넓고 키가 크고 힘도 세고 꾀도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노나라 세도가 계손씨(季孫氏)의 눈에 들어 심복으로 일하다가 세력을 얻자 계손씨를 우습게 보았다. 그리고 계손씨를 딛고 세력을 얻어 국정을 장악히게 되자 대부로서의 할 도리를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았다. 노정공(魯定公) 8년 계손씨의 살림을 도맡아 일해 온 공산불뉴(公山不?)가 계손씨와 사이가 나빠지고 숙손씨(叔孫氏)의 서자 출신 숙손첩(叔孫輒)이 숙손씨에게 불평이 많았고 공산불뉴와 절친한 사이인 것을 알고 이들을 규합하여 노나라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난을 일으켜서 맹손씨 성읍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제(齊)나라로 망명했다.10) 이 때 소정묘는 세력가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화는 제나라에서 다시 송(宋)나라로 갔다. 송(宋)나라가 망명해 온 양호에게 광(匡) 땅을 주고 살게 했을 때 그 주민을 혹독하게 부려먹어 주민의 원한을 샀다. 주민들이 합세하여 양호를 죽이려하자 진(晉)나라로 도주했다. 이 한편의 이야기를 보면 양호는 백성을 위하기보다는 자기 세력을 구축하여 세력 부리는데만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원이란 재주 있고 불평 분자를 끌어 모아 힘을 형성할 수 있으면서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데만 급급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공자가 노나라 공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세하러 다녔다. 먼저 위(衛), 진(陳)나라를 거처서 송나라 광(匡)읍에 이르렀을 때 광읍 사람들은 공자를 양호로 오인하고 잡아 가두었다. 공자의 모양새가 양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호의 잘못은 애꿎은 공자에게까지 미쳐서 5일 동안 갇혀 있다가 겨우 누명을 벗고 위(衛)나라로 갈 수 있었다.11)
그래서 공자가 향원을 도덕을 도적질하는 자라고 간단히 기록했으나 그 의미는 양화 같은 사람을 빗대어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향원은 재주는 있으나 비속하고 어리석은 대중의 인기를 얻어 좋은 평판을 얻고, 파당을 모아 그들의 이익만 취하고 전체적으로 백성들의 삶과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자들의 행위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지적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향원은 당현종(唐玄宗) 때 재상 이임보(李林甫: ?-752)이다. 당현종이 명재상 장구령(張九齡) 밑에 동삼품(同三品)12)으로 있을 때 언제나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했다. 그리고 그는 당현종의 측근인 비빈(妃嬪)과 환관들을 물심양면으로 구워삶아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 황제의 의도와 동정을 살피고 황제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일이 없을 정도로 정보에 밝았다. 그래서 현종이 물으면 서슴치 않고 정확하게 대답하여 황제를 만족하게 했다. 그래서 현종은 장구령을 폐하고 이임보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재상이 되자 음험하고 교활한 본성을 들어냈다. 먼저 혹리(酷吏)를 부려 세금징수를 잘하여 궁중 생활을 풍부하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이임보는 주위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경들은 궁문을 호위하는 말들을 보오. 잠자코 온순하게 있으면 괜찮지만 건방지게 한번이라도 울음소리를 내면 행렬에서 물러나오.」 이렇게 하여 반대세력을 황제 주위에서 제거했다. 자주 큰 옥사를 일으켜 안록산도 이임보의 동정을 살피기 바빴고, 황태자까지도 이임보를 두려워했다. 황제는 궁중 생활이 풍족한데 만족하고 국가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13)
이임보는 문벌 좋은 사람이 절도사가 되어 자기를 밀치고 재상이 되는 것이 두려워 호인(胡人)들을 절도사로 내보내고 그들로부터 전리품과 금품을 끌어 모았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재산을 끌어 모아 재상직을 유지하는 데 재산을 물 쓰듯이 썼다. 그래서 개원(開元)의 치(治)(현종이 좋은 정치를 베푼 시대)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몸을 도사리고 지방으로 물러났다.
천보 원년에 현종은 문득 이임보에게 말했다. 「엄정지는 어디에 있지? 그 사람을 다시 썼으면 하는데」. 엄정지는 장구령에게 발탁되어 요직에 있었으나 이임보의 시기를 받아 지방 태수로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엄정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임보는 엄정지가 중앙부서에 보직될까 겁이 났다. 그래서 엄정지 동생 손지(損之)를 불러 이렇게 이야기했다. 「폐하께서 당신 형님을 대단히 좋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한번 폐하를 만날 기회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소 페하께서는 반드시 높은 벼슬을 내리실 것이요. 그러니 먼저 신병치료 차 서울로 올라오고 싶다고 상소를 올리면 좋지 안을까 싶은데 …」
손지는 즉시 이 사실을 형에게 알리고 형 엄정지는 이임보 말대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을 받아 가지고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물으셨는데 엄정지로부터 이 같은 상소문이 왔습니다. 늙고 몸이 약해 직책을 수행하기 힘든 모양이니 서울로 불러들여 한가한 직책을 맡기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현종은 실제 내용도 모르고 「그 것 안됐구먼 할 수 없지」하고 잊어버렸다. 엄정지는 이임보 술책에 넘어가서 태수직을 잃고 서울로 올라 와서야 이 사실을 알고 통분해 하다가 죽고 말았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이임보를 이렇게 평했다. 「어진 사람을 미워하고 재주 있는 사람을 시기하며 자기 보다 나은 사람을 밀어내고 내리 눌렀다. 성질이 음험해서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口有蜜腹有劍).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른 음험한 사람을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했다. 이임보는 19년 동안 재상직에 있다가 죽었다. 그 동안 황제 측근에게 비위를 맞추고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간하는 신하를 막으니 당나라는 내부적으로 어지러워질 원인이 쑥쑥 자라고 있었지만 황제는 이를 몰랐다. 이후 당나라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쇠퇴하게 된 원인은 황제가 양귀비의 사랑에 빠졌기 때문도 아니요, 안록산 난리 때문도 아니다. 이 보다 앞서 이임보가 나라의 질서를 망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조선시대 중기에 대표적인 향원은 유자광, 임사홍, 김안로, 윤원형 등을 들 수 있다. 패관잡기의 기록에 보면, 류자광(柳子光)은 지충추부사 류규(柳規)의 서자로서 남이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예종이 평소 남이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알고 남이 장군을 역적으로 모함하여 무령군이 되었고 성종 7년에 한명회(韓明澮)를 모함하다가 쫓겨났다. 함양군에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현판하게 하였는데 그 뒤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그 현판을 못마땅하게 여겨 떼어버린데 대한 앙심을 품고 있다가 연산군 때 이극돈과 합세하여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문제를 들어 무오사화를 일으켜 많은 인재를 죽이는 역할을 했다.14)
임사홍(任士洪)은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의 사위가 되어 출세하게 되었다. 종실(宗室)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이 성종에게 고모부 임사홍이 간사함을 예를 들어가며 글을 올려 마침내 임사홍이 밖으로 귀양살이를 하였다. 뒤에 연산군 때 류자광,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합심하여 폐비에 관해 연산군에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게 했다. 그리고 심원을 참소하여 죽였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처사(處士) 조광보(趙廣輔)라는 사람이 임사홍이 정권을 농단하는 것을 보다 못해 하루는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 말하기를 “너는 무부(武夫)로서 이런 놈을 목베어 죽이지 못하느냐? 죽이지 않으면 내 너를 죽이겠다.” 하였더니 송이 말하기를 “ 한 역적을 목베어 국가 근심을 푼다면 진실로 달게 여기는 바이지만, 후세 역사가들이 임사홍이 암살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처사가 웃고 말았다.15) 임사홍은 갑자사화의 주모자로 연산군이 선비를 죽이는 일을 부추겨 피해는 더욱 컸다.
김안로(金安老)는 조광조 실각할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 17년에 부제학이 되어 아들 희(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하고부터 권력 남용이 잦아 남곤과 이항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중종 26년에 다시 등용되어 뜻을 같이 하지 않거나 자기에 반대하는 자들은 누구든 관계 않고 축출하거나, 참혹한 형벌을 주거나, 살해하여 백성들이 두려워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발도 마음대로 못 놀리고 의논도 감히 하지 못하였다. 또한 동호(東湖)에 별장을 짓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주위에 전토(田土)를 많이 빼앗고 별장을 보락당(保樂堂)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16) 문정왕후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尹安任)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체포되어 사사되었다. 당시 김안로를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兇)이라 했다.17) 이들은 정유년에 귀양가서 죽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정용(靜容) 임권(任權)이 경연석(經筵席)에서 “김안로가 조정에서 소인의 무리를 이끌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나 전하께서 그들과 어울려 악한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중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그 책망을 면할 길이 없도다.” 하였다.18) 연산군과 중종 이후 조선의 정치는 문란(紊亂)해져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줄 몰랐다.
석담일기에 의하면 윤원형은 이기(李芑), 정순붕(鄭순朋),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과 음모하여 유관, 유인숙 등이 모반하여 계림군(桂林君) 유(瑜)세우려 한다고 모함하여 죽이고 형 윤원로 등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세력을 얻자 권세를 소신껏 휘두르고 뇌물을 받아드리고 백성을 수탈하여 서울에 큰집이 10채나 있었고 재물이 넘쳐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왕에게 갖은 아첨을 하고 우수한 선비들을 제거하여 나라를 어지럽혔다.19)
유자광, 임사홍, 김안로, 유형원 등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정책은 안중에 없고 자기 출세와 사사로운 감정에만 사로 잡혀 국가 인재(人才)을 죽여 나라를 어지럽혔다. 다시 말하면 정권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정권 잡은 후에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유자(儒者)들과 조정대신들은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소인으로 몰아 서로 다투었고 정적을 몰아내는데 관심을 갖고,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적었다. 다시 말하면 논어 맹자의 좁은 해석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학문은 이단으로 몰아 부치거나 잡술이라 하여 도외시했으며 서학(西學)은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사실 공자(孔子)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나라 일을 신중히 다루고, 하는 일 마다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하며 국가 예산을 아껴 쓰고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이 잘 살도록 힘써야 한다(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고 하였으나, 정치하는 유자(儒者)들이나 조정대신들은 이러한 공자 말들을 실제 국사를 다룰 때는 무시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는 실학파 학자들을 박해하여 소외시키거나 귀양살이를 보냈다.
조선 말기에 속칭 명문 세도가들이 할거(割據)하였으나 이들 대부분이 세상 돌아가는 정보에 눈이 어두웠고, 나라와 백성들을 생각하기보다는 정권 유지에만 관심을 두는 향원들이었다. 이러한 실정이니 나라를 생각하는 참신한 인재는 등용할 길이 막혔다. 그래서 결국 조선은 망하게 되었다
4. 朝鮮 名儒들의 국가 봉사에 대한 의견
퇴계(退溪) 이황(李晃)은 「벼슬이란 진실로 남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율곡 이이(李珥)는 「벼슬이란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한 것이겠는가?」라고 했다.20) 이들 학자는 「도(道)로써 국가를 위해 힘쓰다가 되지 않으면 그만 두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는 일없이 국가 녹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또한 이이는 정치는 백성을 보호하는데 주안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21) 선조는 「재리(財利)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을 속이지 못하나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을 속이기를 잘하니 그 폐단이 크다.」22)라고 했다. 이황과 이이는 국가 공무원은 국익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선조가 명예를 좋아한다는 것은 국가 이익보다 자기 명예를 좋아한다는 의미이므로 바로 향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쉬광(李睟光)은 지봉유세(芝峯類說)에서 「바른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조정이 편안하고, 국가가 잘 다스려져서 모두가 태평하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문득 조정은 불안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이것은 한 사람이 간사한 짓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간사한 사람에게 호응하는 아랫사람이 많아져서 윗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기 때문에 윗사람은 여러 가지 불미로운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간사한지 바른지 알려면, 오직 조정이 편안하지 위태로운지 그리고 조정 일이 잘 다스려지는지 어지러운지를 밝혀 보면 알 수 있다.」23)하여 향원을 분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수광이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 때 박숭원(朴崇元)이 강원감사로 임명되자, 대간(臺諫)이 그를 옹졸한 인물이니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간교한데 숭원이만 홀로 옹졸하다면, 이는 취할만한 점이 있다’ 고 하면서 대간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24) 이쉬광은 융통성을 부리는 간교한 사람25) 보다 옹졸한 사람이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쉬광이 말하는 융통성을 부리는 간교한 사람이 바로 향원이다.
조선 말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나라에 인재가 부족하여 전국에 모든 인재를 두루 섭렵하여 등용하더라도 부족한 실정인데도 불구하고, 평민, 천민, 중인은 버림받고 북쪽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도 버림받고 서얼(庶孼)자손도 버림받고있으며 북인과 남인도 일부 등용되고 있으나 버림받고 있는 실정이니 오직 버림받지 않는 자들은 명문 벌족이라고 일컫는 수십 가문에 지나지 않는다」26)고 개탄했다.
다른 한편 정약용은 인제책(人才策)에서 「공평한 정책을 발전시켜서 편협하고 지역적인 인재 선발방법을 결정적으로 개혁해야만 나라의 인재를 빠짐없이 등용할 수 있을 것이며, 나라의 복락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습니까?」27) 정약용은 우수한 인재를 활용하는 것을 국가 중대사로 곱았다. 그러나 조선조 대신들은 자기 직위를 유지하기에 급급하여 다산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5. 향원(響原)의 현대적 의미
오늘날 세상흐름이 향원들로 얼룩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향원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현재 돌아가는 사회 형태를 보면, 중앙유지 또는 지방유지들 가운데 조그만 선심을 베풀어 지역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국회의원 또는 지방의원으로 당선된 후에는 국가 이익과 국민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사리사욕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의원향원이다. 대통령이나 장관 등 고위직 인사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여 친분을 두텁게 하여, 신임을 얻은 후 국익(國益)은 뒷전으로 하고 그저 사리에만 급급한 실세들은 실세향원이다. 실세에게 금품 또는 귀중한 물품을 선사하여 귀여움을 받은 후 그로부터 고위직을 얻어 조직의 발전과 이익을 무시하고 실세에 충성하면서 개인 욕심을 채우는 인사들은 고위직향원이다. 국가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태의 흐름과 세력가의 눈치만 보면서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예산을 낭비하는 사람은 국가예산향원이다. 국가 정책에 귀를 기울여서 국가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탕진하거나 자기 개인 재산으로 빼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재벌 기업 융자금, 중소기업, 벤처기업 지원금을 받아 기업을 망치고 기업 자금을 개인 재산으로 은닉하는 사람, 농촌 및 어촌 지원금을 받아 농사 짓고 어업하는 시늉만 하고 착복하는 사람, 토지 수용지역 전매자 등은 국가지원금향원들이다. 민주 및 국민 운동을 가장하여 민주화 운동, 환경운동, 소비자 운동, 노동운동 등을 하여 겉으로 국민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 개인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과 종교 활동을 가장하여 서민의 돈을 갈취하는 사이비 종교가 등은 도덕향원들이다. 끝으로 민족통일을 외치면서 북한 주민의 자유와 행복을 무시한 채 북한 정권을 찬양하고 북한을 마치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로 착각하여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유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안보향원들이다.
이러한 향원들은 거의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는데 자기는 정직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거나 대통령 및 고위직에게 충성을 가장하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잘 사귀고 달변이다. 다른 한편 지도력도 있어 이익만 쫓는 무뢰배들을 거느린다. 또한 이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쟁취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서 나라의 고위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가 경영하는 조직은 망하게 되고, 급기야 나라의 발전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이러한 향원들의 피해를 깊이 깨닭고 살피지 않을 수 없다.
6. 결론
1990년 문민정부 이후에 많은 고위직 인사가 언론에서 나쁘게 오르내렸는데 오늘날에 와서 향원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인사를 할 필요가 있다. 즉 대통령, 총리, 장관, 차관, 국장들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것보다 국민, 정부, 조직에 충성하는 인사를 가려서 등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위직 삶들은 자기가 접하는 인물은 제한되어 있고 직분은 많으니 다른 인사의 추천을 참조하여 사람을 직위에 임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무릇 천거를 잘못한 사람은 관직을 파직하고 사정에 따라 고의로 천거한 사람은 임금을 기망한 죄로 다스리고, 현인을 천거한 사람은 표창하도록 하는 제도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28) 유형원은 추천인 책임제도를 주장한 것이다. 공직에서 향원의 발탁을 피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공정한 사람은 비사교적이고 아첨할 줄을 몰라서 자기 능력만 믿는다는 비난을 받거나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평을 듣는다. 그리고 시세를 탈 줄 모르고 업무에만 집착하여 자기 승진에는 관심이 적다. 그래서 업무에서는 상관의 눈에 드나 기타 다른 면에서 상관의 눈에 벗어나는 경우가 하다하다. 그래서 결국 최종적인 발탁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점이 국가적으로 손해이다.
옛날 송나라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에게 어떤 사람을 정승으로 발탁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왕소가 말하기를 “ 오직 환관(宦官)과 궁첩(宮妾)들의 성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등용하면 됩니다.” 하였다.29) 승진을 위해 임금님 가까이 모시는 사람과 접촉하는 사람은 향원임을 간파하고 한 말이다.
옛부터 제왕이 인재를 몰라보고 정치하는 것을 천리마(千里馬)에 빗대어 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즉「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말도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짐수레를 끌면서 늙어 가고 만다.」고 한다. 춘추시대 진목송(秦穆公, 재위 서기전 660-621) 때 손양(孫陽)이라는 사람이 말을 잘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를 백락(伯樂)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손양이 천리마가 다른 말과 같이 소금수레를 끌고 고갯길을 올라오는 것을 마주치게 되었다. 천리마는 고갯길을 접어들자 발길을 멈추고 멍에를 맨채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소리쳐 울었다. 손양도 수레에 내려 “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하다니!”하며 말의 목을 잡고 함께 울었다. 말의 울음소리는 우렁차고 슬퍼 하늘에까지 울러 퍼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을 만나야 천리마가 제구실을 한다(伯樂然後有千里馬)」고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소금수레의 원한(鹽車之憾)이라고 하여 재주 있는 사람이 때를 못 만나 재주를 썩히며 고생하는 것에 비유했다.30) 이는 인재가 알아주지 않아 쓰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우화이지만 생각해 볼만하다
좋은 보석은 땅속 깊이 있고 좋은 진주는 물 속 깊이 있듯이 인재도 두루 살펴 검증을 거쳐서 등용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권한 보다 책임을 중하게 여겨 직책을 맡는데 소극적이다. 퇴계선생이나 율곡선생 같은 분이 바른 길로 정치가 행해지지 않아서 임금에게 이를 건의하여 임금이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 물러난다는 말을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향원들은 책임 보다 권한을 중요시하고 그 권한을 이용하여 사욕을 차리는데 아주 밝다. 그래서 향원들은 이권을 많이 다루는 직책을 좋아하며 이러한 직책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곤 한다. 따라서 정부는 인재를 쓸 때 실적을 중요시하여 직위를 주어야 하고 실적이 신통치 않으면 과감하게 퇴출시켜야 한다. 실적이 없으면 먼저 중요하지 않는 직위를 주어 검증을 한 후에 활용해야 한다. 근래 직위를 얻기 위해 줄을 대는 사람을 위주로 등용하는 체제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부는 향원을 가리는데 주안을 두고 국가 인제를 활용해야한다. 그래야 국가와 국민이 번창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복이 되는 것이다 .
경재풍월 2017년 6월 pp.148-151.
合參, 제22호, 합동참모본부, pp.303-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