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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씨 대덕종친회
 
 
 
카페 게시글
유적지 스크랩 퇴계종택
아녜스 추천 0 조회 51 06.07.06 19: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5세기 후반에 처음 생겨난 종가宗家는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그 의미와 조건도 조금씩 변천되었다. 문중의 터전인 종택과, 불천위不遷位 조상을 모신 사당, 또 이들을 지켜나가는 종손이 있어야 종가라 할 수 있으며 이는 가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작용해 왔다.

퇴락함과 고졸함, 그리고 쓸쓸함만 남긴 채 사라져 가는 종가이지만 그곳에는 분명 특별한 그 무엇이 있다. 근대화와 핵가족의 물결 속에 밀려났던 종가. 시조의 직계 자손들로만 이어지는 종가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푸근한 존재였다.

그러나 고향과 뿌리도 잊은 채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던 개발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다시 뿌리를 찾으려는 사회적인 움직임이 시작됐고, 특히 지난 개발시대를 돌아보게 만든 IMF 상황은 이런 추세를 더욱 부추켰다. 그래서 종가는 이제 더 이상 전통이라는 추억 속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다. 전문가들도 한때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됐던 종가가 오히려 삭막한 현대사회를 훈훈하게 만들 군불이 될 것이라며 종가의 현대적 역할을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유교문화권 개발과 함께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북부지방의 종가를 연재한다.
 


 동시 도산면 토계리. 마을을 관통해 흐르는 토계兎溪를 따라 편안하고 정다운 길이 이어지고, 산과 들을 몇 굽이 돌다보면 오른 편으로 퇴계선생의 종택이 나온다. 퇴계선생의 직계 종손들이 5백년 동안 지켜온 퇴계 종가는 영남학파의 구심체이자 한국의 대표적 명문종가로 빛나는 전통을 이어왔다.  

퇴계종가를 지키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은 종손과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3대. 15대 종손인 이동은옹(95세)과 아들 근필씨(72세) 그리고 손자 치억씨(29세)가 그들이다. 종가중의 종가라는 퇴계종가의 종손으로서 자부심과 전통적인 예법을 존중하는 노종손과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과도기적 삶을 살아가는 근필씨, 그리고 전통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전통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할 치억씨의 모습은 종가의 시대적 변화와 일치한다.

그러나 종부도 없이 지켜온 종가, 1년에 스므번 가까이 지내야 하는 제사, 현대적 삶의 모습과는 도무지 맞지 않을 듯한 삶의 형태, 문중을 책임지고 있다는 부담감... 명문의 후예라는 자부와 긍지의 이면에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전통과 현대사이의 괴리가 상존하고 있었고, 숙명으로 굴레지워진 전통의 무거운 짐은 노종손과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 모두가 짊어져야 하지만, 그 부담의 경중은 대代마다 각기 다를 터이다. 전통사회의 맥을 잇는 최후의 후예들, 그들이 지켜려하고 끝내 부여잡고 가야 할 절대가치는 무엇인가?  

퇴계종가에는 종부가 없다. 종부(노종손의 부인)는 4년전 별세했다. 며느리인 근필씨의 부인은 13년전에 세상을 떠났고, 종부에 대한 문중의 기대가 너무 높아서 재혼을 하지 못했다. 손자 치억씨는 아직 미혼이다. 작은 종가라 해도 종부가 없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닐진대 하물며 퇴계종가임에랴. 종부의 부재는 쓸쓸한 퇴계종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종손은 아흔다섯나이지만 매일 아침, 도포를 입고 사당에 가서 문안인사를 올린다. 아들 근필씨는 나이가 일흔 둘이지만 아직도 노종손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요강을 비우고 노종손이 아침식사를 마칠 때까지 옆에서 자리를 지킨다. 부자父子밖에 없는 종택에서 두 사람은 함께 서예를 하거나 문집을 읽는다. 노종손이 방을 비우면 근필씨는 바로 옆 추월한수정에서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기도 한다.  

 우선 노종손이 생각하는 종손의 기본을 들어보자.

보학(족보공부)은 기본이고 관혼상제와 관련된 예법은 물론 서예와 문집공부에 이르기까지 종손이 배워야 할 종손학의 과목들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종손이라면 시조로부터 돌아가신 부친에 이르는 윗대 조상들의 호와 함자, 생몰 년도, 생애와 이력, 업적들은 눈감고도 줄줄이 욀 정도가 돼야 한다. 여기에 할머니들의 본관과 성,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도 알아야 종손의 체면이 선다. 게다가 통혼한 집의 내력은 물론 다른 문중과의 관계에 얽힌 소위 세의歲議도 비교적 소상하게 알아야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4대조에 대한 제사, 봄·가을에 있는 시제(보통 음력 시월에 5대 이상의 조상 산소에 가서 지내는 제사)를 위해 지난 500년간 돌아가신 직계 14대조 조상들의 기일忌日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조상 묘소의 위치와 풍수 등도 제대로 알아두어야 한다. 심지어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할 때 알았던 기생 두향이의 묘소벌초도 잊지 않고 챙겨야 한다.

대종손으로서 종중의 각종 대소 행사에도 참석해야 한고, 때로는 각 문중간의 모임에도 나가야 한다. 문중 모임에서 그는 늘 가장 상석에 앉는다.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숱한 제자가 배출됐으니 그 제자들의 문중으로 보면 퇴계종가는 종가중의 종가라 할 만하다.

퇴계종가의 면모는 통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노종손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맏딸 위증씨는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운악종가로 출가했다. 재령이씨의 큰 종가인 운악종가의 종손은 삼보컴퓨터 이용태회장이다. 바로 밑 장남이 근필씨다. 근필씨 역시 우복(정경세선생)종가의 종녀를 부인으로 맞았다. 3녀 점숙씨는 학봉(김성일선생)종택 종손의 맏아들 종길씨와 결혼했다. 이같은 명문세가와의 통혼은 선대에서도 이루어졌을 터이다. 종손은 적어도 퇴계종가와 통혼한 집의 내력은 알고 있어야 한다.  

노종손이야 90평생을 이런 일들에 매달려왔으니 웬만한 일쯤은 이제 노련하게 처리한다. 전국에서 이른바 세의를 내세워 달려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대접하는 데도 부족함이나 예의에 어긋남이 없다. 영남학파 문인들의 후손에서부터 고봉(기대승선생)종가에서도 손님이 온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과거공부보다도 어려울듯한 일이지만, 노종손은 당연한 일이라 한다.  
 


 그렇다면 노종손이 타계하면 다음 종손이 될 근필씨는 어떨까?

근필씨는 생애의 대부분을 퇴계종택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안동에서 마친 뒤, 대구로 나가 대학을 마쳤고, 대학을 졸업한 뒤 교편을 잡다가 사업을 해야겠다 싶어 교직을 떠났다. 그러다 그의 나이 40세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연유가 재미있다. 당시 경상북도 교육감이던 김판영씨가 근필씨를 온혜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내 버린 것. 이후로 근필씨는 도산초등학교와 온혜초등학교를 오가면서 27년 반 동안 교장을 했다. 항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도교육감에게 지시했다는 풍문도 있지만, 근필씨는 이같은 배경에 대통령이 작용했는 지는 정확하게 모른다고 했다.

퇴계종가의 제사는 기제사(기일제사)만 17위다. 가을에 묘소를 찾아서 올리는 시제는 묘소가 너무 많아서 현대식으로 개선했다. 매년 10월 3번째 일요일에 전가족이 모여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묘소는 참배하는 것으로 끝낸다. 종가의 제사는 어마어마하리라는 세간의 통념과는 달리 매우 간소하다. 복설은 없고, 대개 단설로 제물을 차린다. 제사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선대의 가르침때문이다.  
 

근필씨는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것보다 절손이 더 큰 불효라고 말한다. 요즘 종손의 후예들은 결혼이 몹시 어렵다. 예전처럼 혼주가 서로 약속해서 자녀들을 강제로 결혼시킬 수도 없고, 연애를 할려고 해도 많은 제사와 고루한 풍습(젊은 세대들이 보기에)을 수용할 여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를 모를 리 없는 근필씨로서는 혼기에 들어선 아들 치억씨의 결혼문제가 큰 고민거리다. 근필씨는 13년전 병석에 누워있던 부인에게 화장火葬을 권했다 한다. 정말 미안한 말이었지만 후손들에게 묘소를 찾는 부담을 줄여주고자 했던 배려였다. 종가집의 맏며느리로서 제사의 부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부인은 흔쾌히 근필씨의 제안에 동의했다고 한다. 종손의 책무와 무거운 짐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근필씨의 계획은 노종손의 반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그래서 근필씨는 노종손의 동의를 얻은 다음 아들 치억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어머니 제사에서 제물은 제관이 모여서 먹을 만큼만 차려라"

종손의 후예로서 숙명같은 제사야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제사에 대한 부담만큼은 줄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제상을 차리느라 며느리의 얼굴이 찡그려져 있으면 아무리 후덕한 조상이라 하더라도 응감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근필씨의 생각이다. 제물의 가지수와 양보다는 정성의 문제라는 것. 근필씨의 이 말에는 봉제사의 무거운 짐을 안고 태어난 종손의 후예로서, 그리고 그런 무거운 짐때문에 아들의 혼사를 걱정해야 하는 힘겨운 세월의 흔적이 배어 나온다.  

손자 치억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군대를 제대한 뒤 지금은 성균관대 유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요즘 이 종가의 최대관심사는 치억씨의 장가보내기에 집중됐다. “성품이 좋아야지.”“대범하고 속도 차고….”“외모에 연연하지 마라.”“노인에게도 잘해야 하는데….”제사를 준비하려 친척들이 모여든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 종가에서는 훗날 종가의 안주인인 종부에 대한 주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근필씨의 입장으로 보면 문중 어른들의 주문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요즘 세상에 종가말만 들어도 여자들이 도망가는 판에 성품 좋고, 대범하고, 속도 차고, 노인에게도 잘하는 그런 여자가 있을까 싶다. 근필씨는 부인을 잃은 후 몇 차례 재혼을 생각한 적도 있지만, 처녀를 종부로 맞아야 한다는 법도때문에 재혼을 포기했다. 근필씨의 눈에도 그렇지만 손자 치억씨는 결혼문제가 난감하기만 하다. 요즘 세상에 종가집에 시집 오려는 여자가 있을지가 의문이지만 그래도 훗날 종손의 책무를 맡아야 하는 만큼 제사를 생활의 일부로 보는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다.
 


근대화과정에서 상당기간동안 몰락의 길을 걸었던 종가는 이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도시생활에서 고향을 잊고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개인화의 과정에서 동류의식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종가는 고향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인식되기 시작했다. 몰락했던 종가가 하나씩 둘씩 복원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교적 정신문화를 되찾자는 목소리와 다르지는 않다.

게다가 정부에서도 2000년대를 문화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조선조의 찬란한 전통문화를 다시 복원해서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가꾸자는 계획을 갖고 있다. 종택의 복원과 잃어버린 유물을 다시 정비하는 일은 외적인 형태의 관광인프라를 갖추는 일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종손이 없는 종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유교문화라는 것이 유형의 문화가 아니라 무형의 정신문화일진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유교문화의 관광자원화라는 것이 허울좋게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퇴계종가같은 큰 종가에서도 종가를 유지하는 일이 큰 숙제가 되어 있다. 모든 종가를 다 복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몇몇 종가만이라도 종손들이 호구지책을 걱정하지 않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전통을 보전해야 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 내팽개치고 싶어도 숙명처럼 많은 짐을 지고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종손들은 어쩌면 시대변화의 희생물인지도 모른다.  

국가와 사회가 과거와 전통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허둥지둥할 때 그들은 최선을 다해 수백년된 유적과 유물을 지켜왔다. 이 과정에서 종손들이 감당해야 할 개인적 희생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종택과 종손은 이제 특정 가문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자랑이요 자존심이다. 향기 가득한 고가古家들은 세상살이에 찌든 우리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는 따뜻한 곳이며, 그 고가를 지키고 있는 노종손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정신문화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귀중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 보호니 관광상품화니 하는 상투적 언사들은 그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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