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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自由를 찾은 저녁식사
성욱: 주인장! 우리가 고기를 잡아왔으니 이 고기로 회와 매운탕을 만들어 주세요. 소주 몇 병은 먼저 주시고요.
주인장: 예! 잠시만 기다리시면 맛있게 만들어 드릴께요.
성욱: 감사합니다. 드디어 眞理를 찾아서 떠나온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준범: 지난 육일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했네.
경숙: 이 여행이 정말 유익했어. 마음은 많이 평온해졌고, 머리는 아주 맑아졌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
성욱: 유토피아는 있을까?
예름: 당연이 있지. 지금이 유토피아지.
성욱: 하하하. 그런데 철학자나 지식인들은 유토피아는 없다고 말하지. 그러나 옷을 모두 벗고 저 드넓은 백사장을 온몸으로 걸어봐. 저 숲 속을 마음껏 걸어봐. 이 드넓은 自然 속에서 무한한 自由를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것이 유토피아 아니겠어?
예름: 自然은 유토피아이다. 내가 自然이 되면 나는 유토피아에 사는 것이다.
성욱: 그렇지!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가 곧 유토피아이고 천국 아니겠어?
준범: 自我(ego)를 버리면 그곳이 곧 천국이고, 유토피아이다.
성욱: 그렇지! 우리 자신이 인간의 本質을 알아 性으로 살면 이 세상은 나에게 천국이고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지. 그 동안 다른 사람들과 빚어왔던 모든 문제와 갈등이 사라지고 평온만이 존재하는.
경숙: 이제 그런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성욱: 이해하지 말고 온몸으로 느껴. 인간이 언어를 만듦으로써 이룩한 이 위대한 문명도 넓게 보면 自然이야. 세상이 온통 自然인 것이지. 自然에는 아무런 모순도 문제도 존재하지 않아. 自然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모순과 문제도 있을 수가 없지. 自然과 人爲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어. 내가 모든 것을 自然으로 살면, 즉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살면 그것이 곧 천국이고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야.
예름: 삶은 나 자신의 문제이지, 타인의 문제가 아니다. 나와 타인 사이에서 삶의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답을 나 자신 안에서 찾으면 나와 타인 사이에 있었던 문제도 사라져 버린다.
성욱: 와우! 멋지다. 그러한 自然, 天國 그리고 유토피아를 완전한 자유라는 측면으로 살펴보자.
준범: 완전한 자유! 완전한 삶! 완전한 나!
성욱: 자유는 얻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야. 자유를 외부에서 얻으려고 한다면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지. 내가 감옥에 있어도 난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어.
경숙: 그래도 감옥에 있으면 불편할 것 같은데?
성욱: 전혀! 완전한 자유를 찾은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그 삶 자체가 자유야. 완전한 자유라는 의미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따라서 내가 감옥에 있어도 나의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평온하며, 또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지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이야? 그러나 감옥에 있는 사람이 자유를 찾겠다고 감옥을 벗어나려고 하면 자신도 다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게 되지. 그런 것은 자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찾겠다는 방종의 마음일 뿐이지. 그런 사람은 설상 탈옥에 성공해서 감옥을 빠져 나왔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해. 몸은 비록 자유로울 수 있어도 여전히 마음은 감옥에 갇힌 地獄의 삶일 뿐이지.
예름: 그래도 감옥에 갇혀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못하잖아?
성욱: 넌 뭐가 하고 싶은데?
예름: 그림 그리는 것.
성욱: 그림은 감옥에서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잖아? 김중섭화가가 담배 포장지에 그림을 그렸듯이 너도 종이에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잖아?
예름: 그렇긴 하네.
성욱: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이 아주 많지. 여행도 가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고, 게임도 하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등등. 그러나 그것은 위안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이야. 진정한 자유를 찾은 眞理의 삶에서는 그런 하고 싶은 마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매 순간 무엇을 하던 그 누구를 만나던 모든 것이 기쁨일 뿐이야.
준범: 깨달음을 얻으면 혼자 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으니 고요하고 평온할 뿐이며, 누구와 같이 있을 때는 지극한 어울림(和)만을 만들고, 무엇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과 신나게 논다.
성욱: Exactly. 바로 그것이지. 혼자 있건, 누구와 함께 있건, 무엇을 하건 매 순간이 기쁨이니 따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 없게 되지.
준범: 성욱아! 영체(spiritual body) 위의 두 가지 신체에 대하여도 이야기해 줘야지.
성욱: 그래. 먼저 영체(spiritual body) 위의 두 가지 신체인 宇宙體(cosmic body)와 涅槃體(nirvanic body)는 우리 같은 보통사람이 알 필요는 없고, 眞理를 닦는 구도자에게 필요한 신체라는 것을 알아둬. 相對世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自我(ego)를 버리면 도달하게 되는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신체인 靈體(spiritual body)라고 했지. 그리고 이 靈體(spiritual body)에 도달하면 ‘I’(自我, ego)는 사리지고 ‘am’(存在)만이 남는다고 했지. 이 상태에서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고, 지복(至福)이 이어진다고 했지. 그리고 예수가 말한 天國의 삶이 바로 이 靈體(spiritual body)에 도달한 삶이지. 그러나 마지막 涅槃體(nirvanic body)에까지 도달하려고 하는 구도자는 靈體(spiritual body)에서 얻어지는 지복(至福)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내면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 인간의 여섯 번째 신체인 宇宙體(cosminc body)에 도달하게 돼. 이 宇宙體(cosmic body)에서는 靈體(spiritual body)에서 존재했던 ‘am’(存在)마저 사라지고 여여(如如)한 實像만이 남게 되지.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 나는 신이다)’라는 신을 체험하는 것이야. 모든 經典이 언급하는 것은 여기까지이고 옴 샨티(aum chanti, 옴 평화!)하면서 마무리를 짓지. 그리고 이 宇宙體(cosmic body)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자신 내면으로 들어가면 결국 인간의 마지막 일곱 번째 신체인 涅槃體(nirvinic body)에 이르게 돼. 이 涅槃體(nirvinic body)에 도달하게 되면 그야말로 無와 空을 경험하게 되지. 너바나(nirvana)라는 뜻은 불꽃의 소멸이라는 뜻이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사그라지는 상태,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또한 빛도 되고 어둠도 되는 그런 상태, 삶이라고 할 수도 있고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또한 삶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죽음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상태, 나도 없고 신도 없는 무형(無形)과 무체(無體)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삶도, 죽음도, 언어와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야.
예름: 그럼 죽은 거야?
성욱: 하하. 살아있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無와 空의 상태!
예름: 난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
성욱: 하하하. 靈體(spiritual body)에서 너의 삶을 멋지게 살다가, 네가 죽을 무렵에 涅槃體(nirvinic body)에 도달하고 죽어. 靈體(spiritual body)에 이른 사람이 여섯 번째 신체인 宇宙體(cosmic body)와 일곱 번째 신체인 涅槃體(nirvinic body)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해. 그러니 우리가 죽을 때 한번 경험하는 것도 괜찮겠지?
준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 문제이고.
성욱: 어쨌든 좋아.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이 眞理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의 목적지는 靈體(spiritual body)에 이르는 것이니까. 이제 완전한 자유의 의미를 알겠어?
준범: 생각과 마음이 그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은 나의 상태. 나 자신이 그 어디에 있어도 고요하고 평온한 나의 상태.
성욱: 좋아.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유롭지가 못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에 묶여 있고, 관계에 속박되어 있고, 관념에 얽매어 있지. 그것들이 모두 虛像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 살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자유를 쟁취하자!’라고 외치면 사람들에게 미친 놈 소리를 듣겠지? 그러나 사람들의 내면은 무엇인가에 많이 속박되어 있지. 따라서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하지 않고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살고 있지. 그리고 그 짐이 너무 무거우면 자살 또는 살인 등 각종 사회적 병폐현상으로 이어지거나 정신분열로 빠지게 되는 거야. 사람들의 그러한 내면의 속박은 다른 사람이 풀어줄 수가 없어. 그의 내면에 문제이기 때문에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것이지. 예수가 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라고 말한 뜻은 예수가 사람들을 편히 쉬게 해 주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내면에 무엇인가에 속박되어 있어 지치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고, 虛像에 불과한 그 속박을 풀어내면, 마음(관념)을 버리면, 自我(ego)를 버리면 저절로 우리는 평온한 천국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야.
예름: 지금이 천국이다. 세상이 천국이다. 세상이 천국이 아닐 이유가 없다.
성욱: 그렇지. 유토피아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이고, 내가 내 안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찾으면 내가 사는 세상도 바로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지. 그것도 완벽한 유토피아!
준범: 내가 찾아 헤매던 유토피아와 천국은 自我(ego)를 버리면 바로 열리는 것이다.
성욱: 빙빙빙고!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은 그것을 깨닫게 돼. 그러나 그 때는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있을 때라는 것이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무슨 自我(ego)가 필요하겠어? 自我(ego)를 다 버리고 깨달음을 얻지만 문제는 바로 죽는다는 것이 문제이지. ‘아! 내가 왜 이렇게 살았지?’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예수는 이 놈들아 제발 살아있을 때 그것을 깨달아라. 天國의 삶이 바로 눈 앞인데 왜 이렇게 地獄의 삶을 살고 있느냐? 아이구 답답해. 이 멍청한 놈들아! 라고 하면서 그렇게 떠들고 다닌 거야.
경숙: 호호호. 예수가 달리 보이네.
성욱: 너는 교회를 다녀서 예수를 신의 아들로 알았지?
경숙: 응.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신!
성욱: 그래서 종교는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신을 찾는데 방해를 주는 것이야. 교회는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찾는 것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막고 있는 것이지. 예수는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신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같이 되어야 할 우리의 친구이고,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일 뿐이야.
경숙: 이제는 알겠어. 그래서 예수가 달리 보인다는 말이야.
성욱: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고 여기면 예수와 인간과의 관계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되어 인간은 예수를 믿고 의지하게 돼. 신이 우리의 외부 어딘가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구원을 바라게 되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무엇인가를 바라지만, 없는 신이 무엇을 해줄 수가 있겠어? 어차피 쓸데없는 헛수고만 하는 셈이지. 이런 종교를 기도의 종교 또는 구원의 종교라고 하는데 이런 종교는 지금 멸망의 길을 가고 있지. 반면에 신이 우리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명상의 종교는 기도가 아닌 명상을 통하여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신을 만나는 것이야. 그 신을 만나는 것을 깨달음, 또는 인간의 다섯 번째 신체인 靈體(spiritual body)에 도달하는 것으로 그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이야.
예름: 예수도 깨달은 사람이라면 예수도 명상을 강조해야 하잖아?
성욱: 당연하지. 그것이 바로 예수가 강조한 바이지. ‘네가 죽으면(自我(ego)가 죽으면) 너는 다시 태어나서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말한 것이 그 깨달음을 말한 것이지.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신의 아들로 신격화하여 기도의 종교, 구원의 종교로 만든 것이야.
준범: 예수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이네.
성욱: 빙빙빙고! 그렇지. 그것이 또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완전한 자유이지.
예름: 완전한 자유는 마음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성욱: 빙빙빙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람들의 몸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마음은 온갖 것에 속박되어 있어서 조금도 자유롭지를 못해. 몸은 天國에 살지만, 마음은 地獄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얽매고 살고 있는 꼴이야.
예름: 세상은 스스로 그러할 뿐이고, 세상은 그저 있는 그대로인데 인간의 마음이 저 혼자 온갖 지랄을 다 떨고 있을 뿐이다.
성욱: 푸하하하! 정답.
경숙: 너 도사 다 됐다.
예름: 호호호.
성욱: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을 인간은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직 본인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을 뿐이야. 어느 유태인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살면서 독일군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너희들이 내 몸을 아무리 가두어도 내 마음까지 가두지는 못한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완전한 자유이겠지?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내가 했던 ‘나의 사랑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 기억나?
경숙: 응. 그 말 너무 멋있었어!
성욱: 그 말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상대방을 절대 속박하지 않고, 상대방 마음 속에서 스스로 속박되어 있는 것까지 풀어주어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갖게 하리라 라는 뜻이야.
경숙: 응. 그것이 또한 완전한 사랑일 것이야.
성욱: 빙빙빙고! 정답이지. 이제 자유와 방종에 대하여 이해하겠지?
준범: 우리 자신이 자유의 상태에 있는 것과 자유로워 지려고 하는 것과의 차이!
경숙: 우리 자신이 아무런 속박이 없는 상태와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과의 차이!
예름: 우리 자신이 사랑의 상태에 있는 것과 사랑하려고 하는 것과의 차이!
성욱: 하하하. 너희들은 이제 眞理에 도달한 것 같다. 멋진데!
경숙〮준범〮예름: 하하하. 호호호.
성욱: 자! 이제 방으로 돌아가서 眞理를 찾아서 떠나온 여행의 마지막 밤을 즐기자. 자고 싶은 사람은 자고,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책을 읽고, 명상을 할 사람은 명상을 하고, 자연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자연과 맘껏 함께하고.
준범: 말로써 생각하지 말고.
예름: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自由
自由를 찾는다.
自由가 무엇인데 自由를 찾는다고 하는 것인가?
세상은 이미 自由이고,
나는 이미 自由인데
그 自由를 어디에서 찾는다고 하는 것인가?
自然
스스로 그러함.
세상이 온통 自然인데
나 혼자만 自然이 아니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그 모순이 괴리감을 만든다.
내가 自然이라면
나에게 무슨 모순이 있을까?
괴리감이 어찌 만들어질 수 있을까?
마음
있으면 모순이고
없으면 自然이다.
束縛
있으면 모순이고
없으면 自然이다.
束縛은 마음이 만드는 것일 뿐
세상 그 무엇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束縛이 없으면 自由이다.
마음이 없으면 自由이다.
세상은 이미 自由이다.
나는 이미 自由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마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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