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4호선 오이도행 전철을 타고 상록수역에서 내려 남서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상록수공원을 만난다. 안산시는 상록수역에서 상록수공원에 이르는 길을 최용신(崔容信)의 삶을 이야기 하는 형태로 한 테마거리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가면 어느새 공원에 도달한다.
아파트촌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공원 안에는 일제시대의 농촌계몽가로 널리 알려진 최용신의 생애를 기억하게 하는 기념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의 농촌활동의 기반 역할를 한 샘골교회(천곡교회)의 샘골 강습소터(천곡학원), 최용신기념관과 그의 묘역, 샘골강습소의 주춧돌 15개와 건축당시 심었던 향나무 몇그루, 그리고 심훈문학기념비와 표석 등이 눈에 띈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증축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초기 교회의 흔적을 찿아 보기 힘들다. 교회를 마주보고 있는 최용신 기념관은 2007년 최용신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지하1층, 지상1층의 한옥 형태로 신축한 건물이다.
지하층에는 전시실과 영상실이 있고 지상층에는 교육실과 사무실이 있다. 전시실에는 옛날 샘골 강습소의 풍경을 재현한 디오라마, 당시 사용하던 교가 악보와 국어교재, 심훈의 <상록수> 초판본 등과 생존한 제자의 인터뷰등을 담은 영상물이 구비되어 있다.
최용신은 함경도 원산에 위치한 루씨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여자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교)에 다니다가 1931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YWCA)에 의해 농촌계몽가로 샘골에 파견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샘골교회 건물을 빌려 가르쳤지만 늘어나는 학생들로 인해 공간이 비좁아지자 1933년 마을 사람들과 YWCA 의 지원으로 샘골학습소(천곡학원)을 신축하였다.
1934년 새로운 지식를 배우기위해 고베여자신학교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였지만 건강이 좋치 않아 귀국 하였다가 다음 해 수원도립병원에서 장중첩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학교의 종소리가 들리는 부근(일리 공동묘지, 현 일동 118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되였다. 1955년정부는 그의 공훈을 가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향토유적 18호로 지정된 그의 무덤 옆에는 약혼자였던 김학준(金學俊)의 묘가 나란히 있다.
◎ 답사일 : 2017. 8.15
◎ 글 출처 : 믿음의 흔적을 찾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