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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기♧
<무안공항에서>
광활한 토지, 거대한 인구를 가진 나라,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대륙을 호령하였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나라가 생성되고 소멸하면서 위대한 문명을 꽃 피웠던 나라, 중국.
인구의 90%가 한족이면서도 많은 세월을 외세 민족의 지배를 받았고 근대에 이르러 서구세력의 침략에 한동안 잠들었던 나라 이었으나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전 세계를 향하여 咆哮하려하고 있다.
모처럼 각박한 현실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 거대한 나라에서 그들이 남기고 간 역사의 흔적을 , 그리고 광활한 대륙의 자연 정취를 보기 위해서 우리부부가 무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10시가 채 안된 시간 이였다.
무안공항은 주변 환경을 볼 때 공항이 들어설 자리가 아님에도 실권을 가진 위정자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항 이라고 한다.
하루에 몇 대 뜨지 않는 비행기, 아직 비행기 타는 시간이 이른지 우리 일행들만이 넓은 대합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졸린 눈으로 근무하는 환전은행 직원, 비행탑승 수속 창구, 극히 초라하기 그지없는 면세점, 달랑 한 개 있는 커피 편의점는 아직도 문을 열지 않았다.
공항이라기보다 시골의 한적한 기차역사 같은 분위기가 드는 곳이다.
이곳에 공항을 만든 위정자들은 매년 수백억의 적자로 허덕이는 현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1시가 넘어서야 중국소속 동방항공에 몸을 실었다.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 창밖으로 한얀 솜털 같은 구름이 아름답게 펼쳐져있었다.
이거대한 물체가 하늘을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경이롭고, 새삼 인간의 위대함을 느낀다.
인간이 하느님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하늘, 감히 가 볼 수 없어 항상 상상으로 그렸던 곳, 궁금증 많은 인간은 그 하늘을 지금 날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태초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훔쳐 먹는 이래, 수없이 하느님의 영역을 넘보며 사는 위험한 동물 이였다.
인간은 에덴을 쫓겨났지만 지금도 수없이 하늘에 도전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도, 인간은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여왔다.
<상해>
무안공항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중국상해 포동공항에 도착했을 때 뿌연 안개로 뒤덮인 도시가 칙칙하게 나타났다
근대 중국의 가장 화려한 도시였고,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독립지사의 들의 근거지 가된 곳으로 숱한 낭만과 환락이 깃든 도시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 일정상 그곳은 관광하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인 태원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하여 버스에 올라.홍교공황으로향해야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깨끗한 도로 양옆으로 잘 가꾸어진 나무들의 신록이 반갑다 .
어린 잎사귀사이로 잔바람이 지날 때 은빛으로 반짝이며 흔들리는 나뭇잎이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고, 신록의 잎사귀 사이로 이름 모른 하얀 꽃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기가 해맑게 웃는 것 같아 정겹다.
淸朝 시대 옛거리
홍교공항을 가는 도중 약간의 짬을 이용하여 중국 청조때 옛거리를 관람하였다.
화려한 상해 시내와는 극히 대조된다. 꼭 우리나라 시장 저작거리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다.
좁은 길에 먹거리만 양쪽에 즐비하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였다.
주로 밑바닥 서민들이 밑바닥 서민을 상대로 때 묻는 화폐를 주고받으며 잡초처럼 명맥을 이어왔던 삶의 터전이다.
항상 이런 곳에 오면 사람들의 땀 냄새가나고, 삶의 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소설 모순에서는 이처럼 잡초같이 사는 삶들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 한다.
배고픔의 서러움을 모른 귀족들, 상류사회, 괴테의 말처럼 눈물 젖은 빵을 씹어보지 않는 사람들, 항상 시간이 남아돌아 고상한 시나 음악, 예술을 즐기며, 화려하게 꾸며놓은 래스토랑에서 이곳보다 수십 배 비싼 음식으로 우아함 모습으로 식사하며 서민들의 삶을 벌래보듯 하는 사람들이 사는 삶들은 이 소설에서는 가치 없는 삶이라 한다.
이제는 쓸모없는 개천이 되어버린 운하를 끼고 있는 이곳은 옛 100여 년 전 거리라기보다는 청조시대와 현대를 오가며 사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현대의 저적거리와 잡탕 해 놓은 것 같은 가치 없는 거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태원>
홍교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태원에 도착했을 때 8시가 넘었다
무안에서 태원에 오기까지 거의 한나절을 비행기를 탄 것을 생각하니 비로써 중국이 광활한 영토라는 것이 실감 난다.
태원이란 도시는 삼서성의 성도(수도)이며 인구 450만정도 되는 상당히 큰 도시다.
태항산 서쪽에 위치한 삼서성은내몽고 사막에서 편서풍을 타고 온 모래가 퇴적된 황토고원지대로 태항산맥과 려양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이곳이 고대 부족국가의 발상지며, 최근 이곳이 춘추 전국시절 연나라 수도였다는 사실이 확인 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척박한 땅이 부족국가시대 역사의주역이 되었는지 일반인에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역사의 주역은 항상 척박한 땅에서 살며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질로 승리한 정복자의 역사였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황사의 먼지 그리고 화학공업단지에서 나오는 오염된 공기 때문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텅 빈 것 같은 도시의 아파트에 촌스런 네온사인이 번쩍번쩍 밤하늘을 밝힌다.
중국 최고의 식초공업단지라는 이곳의 공기는 내몽고의 황사와 섞이여 기관지가 약한 나, 그리고 대수술로 인해 면역이 약해진 아내를 괴롭게 했다.
당초 이번 여행에서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감기였고, 그것 때문 이번 여행을 가느냐. 마느냐 갈등 하였는데 우려했던 것이 나타나고 말았다.
우리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 걸들은 중국의 다른 지역보다 키가 작아서 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중학생 정도로 어려 보였다
고사리 같은 연약한 손에 내맡겨진 늙은 발바닥 사이로 간들간들한 말소리, 때 묻지 않는 순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천한 직업을 마다하지 않았던 60년대 우리나라를 연상하며 마사지 하는 동안 뛰어나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그들이 생계의 터전을 잃을까 하는 그 알량한 배려심이였다
11시가 넘어서야 호텔로 돌아왔으나, 탁한 공기는 호텔 구석구석에도 점령군 처럼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이곳 수질마저도 형편이 없었다.
이런 사정 때문 여행사에서 계속 중국산 생수를 공급하였으나, 종이 같은 플라스틱 생수병을 보니 생수 품질까지 의심되었다.
목이 붓고 숨쉬기 곤란하여 태원의 밤을 힘겹게 보내고 또다시 떠오르는 하루의 시작, 이국의 관광은 쓸쓸한 낯빛으로 변하고,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괴로움, 피곤으로 모든 정서와 기대가 살아진 시간이 되었다.
아침에 이곳 삼서성 박물관에 들려 중국고대 문명이 남긴 유품과 생활양식설명을 보았다.
<평요고성>
평요고성은 중국의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 2,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이다.
이성은 서주(西周) 시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성벽과 건축물 대부분 명ㆍ청나라 때 완성되었고, 그 시대의 건축과 문화, 경제, 사회모습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평요고성은 중원문화의 보물창고로 중국의 4대 고성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시민 50만 명이 살고 있는 핑야오시안에 위치한 평요고성은 성벽 둘레 약 6,㎞, 면적은 여의도의 4/5 크기로 인구 1만여 명 정도 거주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장사라면 남들한테 뒤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진상(晉商)들의 후예들이 살고 있단다.
길 양쪽에 형성된 상가에는 옛날 화폐, 차 , 나침판 등 잡화를 팔거나 식당이 대부분이고, 가짜인지 의심되는 골동품 같은 지저분한 물건을 팔고 있는 노점상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거리는 돌을 깔아 비교적 깨끗하였고, 길을 따라가니 고성의 중심지에 목조로 된 시루(市樓)가 있었다.
시루에 오르면 고성거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하여 5윈안(우리나라 돈 1000원)주고 입장하였다.
그러나 한사람 겨우 통과 할 수 있는 비좁은 목조계단을 올라서니 그게 전부다. 그곳에서 보는 거리는 한길에서도 다 보이는 거리였다. 거리 한번 보는 값으로는 좀 비싼 것 같았다.
그곳 보다는 성곽이나 진상들의 대저택을 한번 구경하고 싶으나 광광코스에는 빠져 있어 섭섭했다.
이지역에서는 또 도삭면이 유명 하다고 한다.
도삭면이란 칼 대신 철반을 이용해 밀가루 반죽을 자라서 만든 면으로, 비교적 쉽게 썰어지는 밀가루를 반죽해 얇게 쳐내 끓는 물에 데쳐낸 면 음식으로 맛도 좋고 시간을 들이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는 면종류의 음식이다.
옛날 칭기즈칸이 중국을 지배할 때 자기들에게 저항했던 한인(漢人)들의 정변이 무서워 모든 백성의 금속도구를 몰수하자 , 얇고 작은 철판을 이용해 음식을 만든 것이 기원이라 한다.
면산입구
평요고성에서 공중도시라 알려져 있는 면산으로 이동하는 반나절이 걸렸다.
입구에 들어서자 엄청 넓은 광장에는 커다란 개자추 동상이 나타난다.
이 공중도시는 민간인이 정부로부터 50년간 임대하여 개발하고 운영하다가 반납하는 조건이란다.
나는 입구에 세워진 동상이 산을 임대하여 개발한 사람 인줄로 알았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면산에 거주했던 일개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입구광장을 대륙의 나라답게 엄청 큰 동상, 엄청 넓게 만들었다.
큰 땅덩어리, 수억의 인구를가진 나라, 역사적으로 대국의 힘 과시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위압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생명력이 없다.
웅장하게만, 크게만 만들었지, 생명력이 없는 돌, 시멘트, 동상들이 대부분이고 살아 숨 쉬는 나무가 없다. 정서적인 면은 없고 딱딱하고 우악스럽고, 삭막함까지 느껴진다.
면산이동로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호텔까지 이동하는데 해발 2000미터의 수직의 바위틈을 따라 건설해 놓은 나선형 버스길을 이용했다.
해발 2000미터의 수직의 바위틈을 따라 건설해 놓은 나선형 버스길이 경이롭다.
차창 아래로 수천길 바위로 된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인다.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난다.
도로 밑에는 수직바위에 걸쳐놓은 것 같은 건물을 지어 이곳을 관장하는 직원 1500명의 숙소로 사용 하고 있다고 한다.
수천 길의 낭떠러지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물새의 집과 같은 사원, 사찰이 멀리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속세와 인연의 끈을 끊고 자연속에 자신을 가두었던 도인들의 신묘한 수행터, 수천년만에 폐쇄된 속세와의 길을 잇었다.
운봉서원(hotel)
우리가 숙소로 정한 운본서원에 도착했을 때, 짙은 옅은 안개가 산들을 회색의 윤각으로 덮고 있었고 어둠이 심연의 골짜기로부터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수직 수천 길의 절벽위에 메달아 놓은 것 같은 호텔은 14층 정도이며, 11층부터 객실이다. 이곳은 객실에서 내다보면 위로 아래도 아찔한 수직 절벽 , 현기증이 난다.
60명만이 숙박 할 수 있는 이 호텔을 예약하기 위해서 무진 노력했다는 가이드의 말이다
공중도시 면산
멀리서 바위위로 세워놓은 것 같은 탑, 사원사당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옛날에 이 험준한 산중턱까지 건축 자재를 어떻게 운반했을까? 가이드 말에 의하면 주로 양을 동원하였고, 양들이 많은 산이라는 의미로 면산이라 했다 한다.
면산은 도교와 불교가 어울려져 더욱 볼거리를 만들었다.
이곳 면산은 불교와 도교의 고승들이 도를 닦는 수행지로 수백 년을 이어 온 곳이다.
그러나 수행 장소는 많지만 그 당시 건축물은 아니다,
후세 사람들에게 의해서 만들진 건물로 대부분으로 그분들을 기리는 사당, 사원이지, 소림사처럼 오늘날 까지 이어온 수행의 터전은 아니다.
도교사원이 그렇고, 12분의 등신불이 있다는 정과사도 그렇고, 개봉사(개자추 사당)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절들 대부분이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수행 터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생명의 유적지이나 이곳을 죽은 혼들이 모시는 집으로 생명력은 없다.
공중도시의 아침이 시작 되었다.
황사인지 모른 연한 잿빛사이로 펴지는 햇빛이 골짜기의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호텔 앞에서 보이는 앞산의 앞산등성이 형태가 와불(누워있는 부처) 모습 같다고해서 보니 영락없는 와불의 현상이다.
천교
아침에 정과사를 보기 위해서 정과사를 잇는 천교계단을 올라야 했다.보기만 해도 아찔한 이 계단은 아파트 공사하면 건자재를 운반하기 위햐여 임시로 설치하는 을자형계단을 수천 길 수직의 의 바위에 붙인 것 같다.
면산은 불교와 도교의 고승들이 도를 닦는 수행지로 수백 년을 이어 온 곳으로 그 당시 이곳은 신비스러운 곳 이었다. 하늘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버린 사당을 보기 위해서 수천길의 바위를 휘어 감는 신묘한 길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오르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수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 만 같다
이 신묘한 계단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건 작업을 했을까?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정과사>
정과사는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중국정토종의 시조인 담란스님 등 천년이상을 된 12명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6년간의 고행 끝에 생로병사의 고통의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난 석가를 닮고 싶었던 고승들의 미라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생각났다
인간의 번뇌를 燒身공양으로 극복한 소설속의 주인공 만적, 소설 속 등신불은 온갖 일그러진 고통의 표정이었으나 이곳 등신불은 하나같이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같은 평온한 표정이다.역대 수많은 왕들이 미라가 된 등신불에 흙을 발라 실제 미라보다 상당히 비대해졌단다.
온화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등신불, 금방이라도 일어나 웃음을 지으며 설법 할 것 같은 등신불, 세월 속에 몇 군데 발라놓은 흙사이로 옷가지가 나온 것도 있었다.
그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등신불(1800년 전 등신불)은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연꽃을 들고 있는 석가를 보고 빙그레 웃었던 가섭의 표정이 생각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본능적인 5욕7정을 억제하며, 자기의 일생을 바쳐 참선과 고행으로 살다가 , 숨지기 전에 깨달은 사후의 세계가 무엇 이였을까?
사후세계, 극락 종토의 세계, 영생, 그 수많은 숱한 세월을 고통과 고뇌의 세월동안 수행하여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 희로애락, 즉 삶의 진정한 맛을 억제하며 살았던 자기의 삶이 죽기 전에 보니 말짱 도로에 불과했다고 깨달으며 헛헛하고 웃는 것 같이 보였다.
어차피 인간은 공수래공수거,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아웅다웅하면서 살다가 한줌의 흙으로 살아지는 것.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다른동물처럼 살아있는 동안 생존경쟁에 시달리다 간다.
영혼이 있는지 모르지만 육신은 한줌으로 돌아가는 인생, 아무런 감각이 없는 영혼이 있다해도, 그 영혼이 느끼는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후세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스님, 위대하십니다.
스님의 껍질을 관리하는 사람을 위하여 나는 20위안을 놓고 나왔다.
인간이란 살면서 사소한 일에 너무나 집착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모파상의 목걸이에서는 잠깐 동안 빌렸다가 잃어버린 가짜 목거리를 변상하기 위해서 수많은 세월을 모진 고생을 하다가 가짜인줄 알았을 때 웃었던 여주인공의허탈한 웃음이, 이 같은 웃음이 아니었을까?
비좁은 정사 앞에는 큰 기둥을 용이 휘어 감고 올라가는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전각에서 약간 떨어져 경사80도 가까운 경사로에 나무로 육모탑(영응탑)이 고대의 유럽의 산성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도니 하늘과 맞닿은 도교사원이 나왔다.
해발 2000미터 깍아 지른 듯한 절벽위에 세운 도교사찰 그리고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보기 드문 곳으로 자연과 건축물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오묘하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공중도시라 할 만하다.
이곳에서는 잠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잠시 신선이 되는 기분이다.
일반적으로 도교는 살아서 득도하여 신선이 된다고 알려져 있고 불교는 살아생전 공덕과 수행으로 죽으면 극락 정토에 오르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이곳 도교 사원에는 득도하여 신선이 된 태상노군이이나 옥황상제의 神仙像을 모시고 있었다.
태상노군은 주나라 왕실에서 도서관 책을 관리하던 노자가 득도 후 신격화 한 것이고, 옥황상제는 옛날 광엄묘작국의 왕자로 태어나서 산속에서 수백겁의 세월 속에 도를 닦아 천상으로 올라가 천계를 다스리는 신선이 되였다 한다.
북극오성은 옥황상제와 그 가족들이고, 주변을 옥황상제가 사는 궁궐로 자미궁(紫微宮)이라고 한단다. 작은곰자리를 이루는 북두칠성은 옥황상제를 호위하는 여섯 장군들이라고 한다.
공자는 노자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하며,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 <도덕경>를 저술하였다.
도교의 사상은 "무위자연"으로, 즉 세상의 만물은 자연으로 시작되어서 자연으로 끝난다는 이치와 맥락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깨달음을 얻으면 생로병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정토에 산다는 사상으로 6년 동안 고행,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는 서가모니가 창시자다.
중국에서 불교가 일반인에 전파되면서 도교의 신비적인 요소를 가미 되여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이 도를 닦아 신선이 되면 학을 타고 다녔다고 하여 사당 앞에는 학의 동상이 있었다.
인간은 항시 생로병사의 고통에 살면서도 호의오식하며 사는 것을 갈구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미래 불안에 대한 구원, 현실 삶에 대한 끊임없는 求福, 이를 해결해 줄 전지전능한 신통력이 있어야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런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런 황당무계한 신비로움이 필요했지 않았나 생각된다.
<개봉사>
개봉사는 개자추 사당으로, 바위를 파내 동굴을 만들었다.
엄청난 크기로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 동상을 나란히 있었고, 벽면에는 그의 일생을 입체벽화를 형태로 엄청난 크기로 그렸는데, 재료는 동굴을 팔 때 나온 돌가루를 혼합하여 만들었단다.
개자추 란 인물은 . 진(晉)나라 문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 헌공에게 추방되었을 때, 19년을 섬겼는데 그 후 왕위 오른 문왕은 은공을 망각하고 俸祿을 주지 않으므로 이곳 면산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 후 문공이 개자추의 은덕을 생각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려 하였으나 개자추는 벼슬을 마다하고 면산에 숨어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면산에 불을 질렀다 한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죽고 말았다.
그 뒤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또 타죽은 사람에게 더운밥을 주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 하여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도 하는데 이날이 한식날이 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별로 존경되지 않는 인물을 오늘날 이렇게 거대한 사당을 만들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거의 오후 내내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황폐한산에는 녹화사업을 벌리고 있는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뛴다.
가는 동안 황사의 뿌연 회색빛, 그리고 척박하고 사막화되어가는 땅을 차창을 보는 것으로 피곤한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태항산 대협곡>
태항산맥의 줄기, 산전체가 돌로 된 협곡, 몽고초원아래 삼서성 북부를 시작하여 삼서성과 하북성 경계 남북 600여키로 , 동서 250키로에 이르는 대자연 대 파로라마 산맥이다.
수억 년 동안 유수의 침식으로 홍암석만 씻겨 가면서 골짜기가 형성되었다는 이곳 협곡에는 맑음 물이 흐르는 폭포가 형성되여 연못을 이루고 한폭의 산수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태항산이란 명칭은 커다란 산이 줄지어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흔히 중국의 그랜드 캐년으로 불리고 있다.
태항산은 태고의 숨결을 고이 간직한 채 자연의 웅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는 나이 90세가 넘은 우공(愚公)이 태항산의 흙을 파서 발해만 까지 한번 운반하는데 1년이 걸렸는데, 둘레 700리가 넘는 태항산을 옮기겠다고 자자손손 대대로 이 일을 계속하고있었는데, 옥황상제가 이에 감동하여 산을 옮겨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태항산은 멋진 풍경만큼이나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다.
대협곡의 웅장함에 정신을 빼앗기며 수천길 되는 바위로 형성된 대협곡 사이를 돌고 돌며 숙소에 도착했을 때 어둠이 완전히 덮여 있었다.
이튿날 아침, 고단한 몸으로 눈을 떴을 때 비가나리고 있었다.
몇 천 원하는 값싼 비옷을 걸치고 무릉도원 같은 선경을 보기 위해 나섰지만 짙은 농무를 동반한 비로 인하여 마음이 무겁고, 주위는 음산한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골짝 저 골짝이 짙은 비를 동반한 음산한 연무(煙霧)가 장엄한 경관을 보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마음까지 꿀꿀하게 만들었다.
<도화곡 >
엄동설한에도 복숭아가 핀다는 곳이라 해서 이곳을 도화곡이란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나오는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을 말하게 아닌가?
그림 같은 면경지수, 도화담(桃花潭), 요염한 폭포, 그리고 절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긴 명주 천을 걸어놓은 듯 한 구룡폭포, 도화꽃 만발한 별천지, 이런 仙境속에 바둑을 두고 있는 두 신선이 그려지는 곳이다. 그러나 비가 오는 지금 면경지수도, 도화꽃도, 상상속의 신선도 없다.
<환산선도로 >
수천 년 동안 잘 다듬어진 넓다란 바위, 골짜기를 따라 바위사이를 끼고 돌면서 환산도로에 오르니 눈을 의심할 정도의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운해가 잔잔히 깔려있는 대협곡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표현하려해도 딱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이 웅장한 전경 앞에 감탄사만 연발하게 될 뿐이다.
골짜기 저 멀리에 왕상 암이 운해속해 환상적으로 보인다.
왕상암(王相岩) 풍경구는 석판암(石板岩) 이라는 마을을 시작으로 전망대까지 대략 800m의 산길이 뻗어 있다고 한다.
왕상암이란 기원전 3,300여년 전의 태고의 왕조 은나라 무정(武丁)과 노예신분으로 재상까지 지낸 부열(傅說)의 고사가 서려있는 곳이다. 무정과 부열 즉 왕과 재상이 이곳에서 함께 거주했다고 해서 얻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역사서 고기에 의하면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재위에 올랐으며, 우 그리고 하의 시대를 지나 상나라 향년 1천48년, 무정 8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고조선이 무정시대에 멸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정은 자신의 덕과 능력이 선왕들에 비해 부족함을 알고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줄 현명한 신하를 찾던 중 거지같이 살고 있는 부열을 재상으로 맞이하여 상나라의 대부흥기를 만든 인물이다.
해발700m의 절벽과 협곡사이로 버스길, 아찔하기만 하다.
군데군데 다랭이 밭이 있다. 그 옛날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이곳에 숨어서 살면서 이 다랭이 밭을 가꾸었단다.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자연의 신선한 향기, 자연의 정취가 좋아서 일까? 아니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도피였을까?
그리움 하나 가슴속에 키우며
살아온 세월이기에
삶이 아름답고 향기로웠는데…….
이제
세월이 남긴 흔적이 짙어가고 있는
내모 습에서
가슴에 흐르는 감성이 죽고
따듯함과 아늑함이 살아져 갈 때
수많은 세월 품고 살았던
그리움조차 떠나가네.
꿈이여! 그리움이여! 모두모두 떠나라
세월이 더 지나가기 전에
hyunsoo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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