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이라도 돕고자 했던 고등학생의 죽음-
증언자 : 문재학(남)/ 김길자(어머니)
생년월일 : 1964. 6. 1(당시 나이 16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고교 1년생이던 문재학 씨가 도청 상황실에서 잔일을 거들던 것과 사망까지의 경위, 사후에 그 식구들이 유족회 활동을 하며 진상규명에 힘쓰는 내용의 증언.
나는 심부름이라도 하겠다
우리 가족은 1968년에 전남 영암의 고향에서 자녀들 교육과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전답을 팔고 광주로 이사했다. 광주시 학동에서 7, 8년 정도를 구멍가게를 하며 생활했는데, 장사가 신통치 않아 1975년에 가게를 정리하고 남편이 직장(대한 통운 하역 인부)을 다니기 시작했다(현재는 전매청 하역 인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슬하에 2남 1녀를 둔 우리 다섯 식구는 그런대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죽은 재학이는 평소 성격이 차분하고 착한 아이였다.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 었으나 가끔씩 공책을 들춰보면 깨끗하게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밖에 나갔던 재학이가 집으로 전화했다.
"여기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백림약국 앞이에요. 계엄군들이 쫙 깔려 있는데 혼자 다니면 잡아가니 엄마가 좀 나와서 데려가주세요."
내가 가는 동안 재학이는 광호라는 친구 집에 있겠다고 그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재학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19일부터는 휴교령이 내려서 재학이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단속했는데, 21일에는 친구집에 간다면서 나갔다. 다음날 하룻밤을 밖에서 자고 돌아온 재학이는 전날 시민군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고 하였는데 목이 쉬어 있었다.
"김대중 씨가 구속되었대요.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전두환이 보고 물러가라고 외치고 다녀요."
전날 보고 들은 얘기를 식구들에게 해주었다. 그날 밤 재학이 형 재관이가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나가지 마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23일 점심 먹은 후 식구들 몰래 나가버렸다. 그날부터는 집에 들어오지 않더니 24일 집으로 전화가 왔다.
"여기는 도청 상황실인데, 국민학교 동창인 양창근이가 총에 맞아 죽었고, 또 사람들도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나는 여기서 심부름이라도 하면서 지내겠어요."
집으로 오라고 하니까 가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날 할 수 없이 내가 도청으로 찾아갔다. 만나서 타일러도 재학이는 나만 집으로 돌려보내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26일에 다시 갔으나 도청 입구에서 통행을 금지시키면서 안에 못 들어가게 하는 바람에 재학이가 도청 상황실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데려오질 못했다. 그런데 27일 새벽 2, 3시에 도청 쪽에서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가슴을 조이며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아침 8시쯤 아들의 소재를 확인하러 집을 나섰다. 도청 앞으로 가니 "시민은 나오지 말고 공무원만 나오라!"는 확성기 소리가들렸다. 나는 우리 재학이가 죽었다는 생각은 못 하고 계엄사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엄사로 갔다. 당시에 외숙 친구가 31사단 장교로 있어서 재학이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아보았다. 그 사람이 재학이가 계엄사에 있다고 했다. 그런 줄만 알고 집으로 돌아와 재학이를 기다리는데 며칠이 지나도 재학이가 오지 않았다.
아들은 망월동에 가매장되어 있어
6월 4일 계엄사로 다시 찾아갔다. 계엄사에는 문재학이란 사람이 3명이나 잡혀 있었다. 그러나 보호자도 달랐으며 나이도 우리 재학보다 훨씬 많거나 적었다.
다시 재학이를 찾아 헤매던 중 6월 6일쯤에 재학이 담임선생님인 김복길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남일보에서 사망자 명단을 보았는데 꼭 재학이 같다고 했다.
"17세 가량 고교생, 교련복 차림, 계엄사 4-3, 묘지번호 104, 관번호 94번."이라고 신문에 났다는 것이었다.
6월 7일 담임선생님과 같이 계엄사로 가서 알아보니 '4-3'은 망월동에 가매장 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망월동으로 달려가 시체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시청과 경찰서에서 나와야만 시체확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음날 다시 가서 시체확인을 요구해도 전날과 같은 말만 반복하고 확인을 못 하게 했다. 그러자 화가 난 남편이 "삽으로 목을 잘라 죽여버리겠다"고 대들었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자기 송장 아니면 안 가져갈 것인데 왜 못 파게 하느냐"며 거들어주어 묘를 파볼 수 있었다.
우리가 판 묘의 시체는 총알을 두 방 맞은 것 같았다. 총알이 입 속으로 관통했는지 입이 거의 뒤숭그레졌고 목과 머리 뒷부분에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또 왼쪽 가슴에도 큰 구멍이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재학이가 아니라고 우겼으나 담임선생님이 교무수첩과 대조해 가면서 재학이가 틀림없다고 했다. 머리는 뭉텅뭉텅 빠져 있었으며 상당히 부패되어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세 살 적에 다리에서 떨어져 생긴 머리 왼쪽의 쏙 들어간 그 흉터를 찾아보려고 머리를 만졌다. 그러나 머리가 곧 떨어질 것 같아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재학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묘를 덮었다.
담임선생님이 검찰청에 가서 재확인해 보자고 했다. 검찰청에서 '계엄사 4- 3'을 물어보았다. 당시 검사가 1호에서 10호 검사까지 있었는데 8호 검사에게 '4-3'의 사진이 두 장 있었다. 한 장은 총 맞은 그대로의 옷차림으로 국방색 면 티샤쓰에 교련복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었다. 또 한 장은 팬티만 입혀둔 채 총 맞은 부위를 찍은 사진이었다. 재학이는 주민등록증이 없어 지문으로도 알 수 없었다. 그 사진을 본 후 '4-3'이 틀림없이 재학인 것을 확인했다. 가매장된 그대로 장례를 지냈다. 묘지번호는 104번이다.
장례는 광주상고에서 야구선수 차량을 빌려주어서 가족들과 동네분 몇 분을 태우고 망월동으로 가서 치렀다. 그때 교장 선생님만 제외하고 광주상고 선생님 전부와 자기 반 학생들이 왔었다.
정치는 모르지만 진상이 밝혀지는 게 우선이다
아들을 묻고 난 후 망월동에 다니다보니 자연히 다른 유족들과 알게 되었다. 그때는 단지 얼굴만 알고 있었을 뿐 서로가 어디에서 사는지도 몰랐고 연락도 못 했다.
1981년 5월 18일 박찬봉 씨가 유가족협회 초대 회장직을 맡고 1주기 추도식도 하지 못한 채 대회는 무산되었다. 이때 경찰들과 싸우다가 박순례(고 백대환의 어머니) 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 후로는 헤어져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1년 6, 7월경에 우연히 만나게 되어 지금까지 거의 함께 투쟁해 왔다. 유족협 회의 창설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나와 박순례 씨라고 할 수 있다.
1982년 음력으로 4월 6일에 이순자가 방림동 어느 새마을 유아원인가를 방문한다고 해서 유족들이 모이기로 했다. 얼굴이 알려져서 버스는 커녕 택시조차 탈 수 없었다. 경찰들이 붸아다녔으므로 몰래 한전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전 앞에 갔을 때는 경찰들이 있었다. 한바탕 몸싸움을 한 후 경찰서에 연행되어 계획했던 일은 무산되었다.
1983년 2월 전두환이 온다고 해서 '전두환이 물러가라. 내 아들을 돌려달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써서 가슴에 동여매고 남동성당에서 도청까지 행진해 갔다.
1984년 2월에도 전두환이가 온다는 소식이 있자 집 주위에 경찰들이 나와 감시 했다. 나는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도청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했다. 그러자 서울에서 내려온 경호원들이 "저 쌍년들, 죽여버려라"며 입을 틀어막고 도청 차고로 끌고 가더니 전두환이가 돌아가자 그냥 풀어주었다.
1984년 4월 26일 오후 2시경 YWCA에서 유가족협회 2세들의 청년회 발족을 가지려고 했다. 딸 미경과 함께 구 호남전기에서 모여 YWCA가 있는 유동으로 행진하려 했으나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결국 싸움이 벌어졌다. 돌을 던지며 싸우다가 내가 한 경찰의 귀에 꽂혀 있는 무전기 레시버를 빼어버렸다. 그러자 경찰관이 무전기로 내 머리를 내려쳤다. 머리가 찢어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한국병원에 입원해서 일곱 바늘을 꿰맸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나는 가만히 있지 않고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했다. 그랬더니 또 잡아갔다.
1985년에는 강원도 삼척까지 끌려가서 3박 4일을 보낸 적도 있다. 1986년에는 제주도에 연금된 적도 있다. 그때는 남편도 함께 연금되었는데 갈 때는 여수서 배를 타며 올 때는 비행기를 탔다.
1987년 2월 전국체전 행사 때문에 전두환이가 무등경기장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박순례 씨와 광천공단 입구 삼일아파트에서 플래카드를 가슴에 동여 맨 채 기다리고 있었다. 시에서는 시민들에게 2천 원, 3천 원씩 주고 환영인파를 동원했다. 그 행렬 틈에 끼어 있다가 차가 오는 것이 보이자 도로로 뛰어나가서 플래카드를 펼쳤다. 급히 풀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 때 군중 속에 있던 한 부상자가 "'거꾸로, 거꾸로"하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 랐으나, 알고 보니 급히 꺼낸 플래카드가 거꾸로 뒤집어졌던 것이다. 곧바로 경찰이 와서 나와 박순례 씨를 서부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서부경찰서에는 전두환이 온다고 하여 전경찰이 시내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경찰서가 거의 비어 있었다.
경찰서가 비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연행했어도 지킬 사람이 없었다. 허술한 감시망을 뚫고 우리는 다시 빠져나왔다. 나와 박순례 씨에게는 각각 형사들이 한 명씩 담당되어 있었다. 나는 신형사가 맡았고, 박순례 씨는 차정수라는 형사가 맡았다. 그날 우리가 도망을 해버리자 차정수 형사는 1계급 떨어져버리고 시골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나를 담당한 신형사는 비록 우리를 놓쳤기는 했지만 추적이라도 했다는 구실로 좌천은 면했다. 그날 저녁에 박순례 씨가 일부러 자택으로 들어가질 않고 다른 유족 집에 있는데 박순례씨 집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차형사가 제발 자기 좀 살려주라고 애원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정인지 그날 집으로 들어가 차형사가 밖에서 감시하도록 해주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차정수는 좌천되고 만 것이다. 박순례 씨는 지금도 그 사람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1987년 6·29 선언 이후로 지금까지는 거의 별다른 일이 없다.
1988 고속도로 개통을 한다는 날, 담양에 전두환이가 온다는 말을 듣고 유족 아주머니들만 15명이 광신아파트 전계량 회장 집에 모였다. 그런데 아파트 주위에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생각 끝에 1명씩 밖으로 빠져나갔다. 다른 동네의 한 유족 집을 거점으로 해서 집결장소를 정해 모이기로 했던 것이다. 결국 재집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담양에서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돈 주고 사서 풍선을 불게 했다고 한다. 우리가 저녁에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모여 있었기 때문에, 경찰 쪽에서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개통식을 연기해 버렸다. 그런 것도 모르고 다음날 담양으로 갔는데, 왜 개통식을 연기했냐고 어떤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풍선을 한참 불고 있는데 연기했다며 그만 불고 들어가라 합디다."
그날 저녁 텔레비전에서 개통식을 연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유는 몰랐지만 통쾌했다.
5·18의 원인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진상이 먼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가족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구호를 외쳤으나 그 때마다 연금 또는 구속되는 상황이었다. (조사.정리 서삼미)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