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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사랑연제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부산 갈매기
연제구의 역사
1. 선사시대
부산의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연제지역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주민들이 영도구의 동삼동, 강서구의 범방동, 낙동강변의 금곡동 등의 경우처럼 주로 바닷가나 강가 주변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연제지역은 지리적 특성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주민이 살았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한편, 이들 지역의 신석기 문화인들은 청동기 문화를 수용하여 점차 거주지역을 수렵과 어로 중심의 경제활동에서 정착중심의 농경에 적합한 하천의 구릉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부산지역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구서동․온천동의 금강공원․장전동․금사동․거제동․사직동․양정동․수영동․부곡동․수민동․대신동․괴정동․감천동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연제지역에서도 청동기인들의 생활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청동기 문화인들은 점차 철기문화를 수용하였는데, 동래지역에도 철기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래의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야철터(冶鐵地)는 이 지방이 선사시대 철생산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야철 시설은 부근에 있는 사철을 채집하여 제련한 것으로, 여기서 만들어진 철은 멀리 낙랑․대방까지 수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삼한․삼국시대
삼한 및 삼국의 초기에 연제지역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을까? 이는 연산동에 존재하는 고분군과 일정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연산동고분군은 배산(盃山)의 구릉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입지가 복천동고분군과 유사하다. 고분군에서는 일제시대에 철제갑옷과 투구들이 출토되어 고대의 한․일관계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서 국내외 학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구라허요 고분군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1988년 경성대학교 박물관에서 8호분을,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 박물관에서 4호분을 발굴하였다. 4호분과 8호분에서 수습된 유물을 살펴보면, 토기류로는 고배․기대․대부장경호․원저단경호․뚜껑들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신라식 토기이다.
철기류는 4호분에서 활살통․대도련․철촉․금동금구편․철도자․철촉․유자이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8호분에서는 주곽에서 철갑․대도편․철촉․철부 등의 무구류와 금동장행엽․등자 등의 무구류 및 유리제의 경옥 등이 주 피장자의 목부분인 남쪽에서 출토되었고, 부곽에서는 다수의 단갑편이 출토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발견된 갑주류와 8호분에서 출토된 철판․판갑 등의 갑주류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의 지배세력은 무장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장악․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연산동고분군의 지배세력은 삼한․삼국시대 초기에 존재했던 이 지역의 지배세력과 일정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먼저《삼국사기》권44, 거도열전(居道列傳)에 의하면, ‘그는 탈해이사금 때 배술하여 간(干)이 되었다. 이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이웃 지경에 끼여 있었는데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거도는 변방 관원이 되어 몰래 이를 병합할 뜻을 품고 있었다. 해마다 한번씩 많은 말을 장토(張吐)의 들판에 모아서 군사들로 하여금 타고 달려 이를 놀이로 삼게 하니, 그때 사람들은 거도를 마숙(馬淑)이라 일컬었다.
두 나라 사람들은 이를 익혀 보고는 신라에서 늘 하는 일이라 하여 괴이히 여기지 않았더니, 이에 군사를 일으켜 그들이 준비하지 않는 기회에 두 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동래지역에는 거칠산국이라는 정치집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거칠산국은 『삼국사기』 권24, 지리지에 의하면, ꡒ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ꡓ라고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조에 의하면 ꡒ옛 장산국(萇山國)이다(혹은 내산국(箂山國)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점유하고는 거칠산국(居漆山郡)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ꡓ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지』 「위지(魏地) 동이전(東荑專)」 변진(弁辰)조에는 삼한시대 24개의 국명 중에 ꡒ독로국(瀆盧國)ꡓ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동래라고 한다. 따라서 연제지역의 옛 명칭은 거칠산국․장산국․내산국․독로국 등과 일정한 관련을 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래지역에 존재했던 지배세력인 거칠산국은 신라에 정복당한 이후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다. 동래지역은 하나의 독립된 세력에서 신라의 지방군현으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에 따라 거칠산국(居漆山郡) 태수(太守)의 지배를 받았다. 아울러 연제지역도 삼국시대 거칠산국의 태수(太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울러 연제지역도 삼국시대 거칠산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통일신라는 신문왕 때 9주5소경 제도를 실시하였고, 그리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지방 군현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경덕왕은 지방의 명칭을 모두 중국식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때 동래지역도 거칠산군에서 동래로 변경되었다. 동래는 ‘독로’ 라는 음에서 독로→ 동네→ 동래로 음전되어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 중 거칠산국은 ‘거친 뫼’, 즉 황령산(荒嶺山)에서 따온 것이다. 동래라 함은 동쪽(동해)의 내산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 또는 삼신산(三神山)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통일신라 이후에는 동래라는 표준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고,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동평현(東平縣)과 기장현(機張縣)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3. 고려시대
고려전기에는 동래지역이 『고려사』 권57, 지리2 울주조에 의하면, ꡒ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東萊縣)과 헌양현(巘陽縣)이다ꡓ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 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ꡒ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ꡓ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지역에는 고려 초기에 이르러 주현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고려전기 동래현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으므로써 울주 수령의 감독을 받으면서 이 지역에 존재하는 향리가 실질적인 통치를 하였다. 연제지역도 고려시대 동래의 향리의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현령을 두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한편, 고려전기에는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동래 정씨는 고려조 문종 때 정목(鄭穆)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과 손자인 정항(鄭抗)과 정서(鄭叙) 등이 계속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로 인해 동래 정씨 가문은 문벌귀족 가문으로 성장하였는데, 정서는 인종(1122~1146)의 비 공예대후(恭睿太后)의 여동생과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정서는 의종조 때 대녕후(大寧候) 경(暻)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참소를 입고, 이곳 동래로 유배되었다. 결국 정서는 이곳에서 임금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면서 지었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한다. 옛날 정서가 참외를 심었던 장소를 역사현장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이 추진되어, 비가 세워졌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토곡에서 연산1 동과 8동을 지나는 길을 ‘과정로’ 라고 한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 동래는 1397년(태조 67)에 일본과 대치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 보고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게 되자, 진의 장수인 병마사(兵馬使)가 동래현의 행정관인 판현사(版縣使)를 겸임하였으며, 1423년(세종 5)에는 병마사를 4품관(品官)인 첨절제사(僉節制使)로 개칭하여 판현사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1440년(세종 22)에는 부산포에 일본인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진을 속현인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다시 환진하게 되었는데, 그 후 얼마 가지 아니하여 판현사를 현령으로 고쳐 불렀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연제지역은 동래현 현령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547년(명종 2)에는 동래가 일본사신이 왕래하는 길목임을 고려하여 재상 이기(李芑)의 건의에 의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고 당상의 문무관이 부사(府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일본의 침략으로 동래부가 점령되자 다시 현으로 강등되어 현령이 파견되었다. 선조 32년에 명나라 장수들의 접대를 위하여 다시 도호부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무관을 부사로 임명하고, 부사 아래는 판관을 두었다.
그리고 1601년(선조 34)에 이르러 일본으로부터 적극적인 강화교섭이 오자 외교상의 격식을 고려하여 당상의 문관으로 부사를 삼고 대신 이전에 존재하였던 판관제도는 폐지하였다. 따라서 조선중기 이후 연제지역은 당상관인 동래부사의 지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지역은 다시 있을지도 모를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시설과 방어태세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1655년(효종 6)에는 경상좌병영 관할하의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여러 진(鎭) 중의 하나인 동래진을 경주진관에서 떼어내어 단독진, 즉 독진(獨鎭)이 설치되어 양산군과 기장현 소속의 군사까지도 통합하여 지휘할 수 있게 하였다. 1690년(숙종 16)에는 부사가 종2품의 방어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나, 2년 후에 방어사를 없앴다. 1739년(영조 15)에는 부사 구택규(具宅奎)의 건의에 따라 동래성과 금정산성(金井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을 겸임하여 오다가 갑오경장 때 지방관제의 전면적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동래의 행정구역의 변화는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7개면(읍내면․동면․남촌면․동평면․사천면․서면․북면) 82리 19동의 체제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동래부사례(1868)』에는 사천면을 제외한 읍내면․동면․북면․서면․남촌면․동평면의 이름은 그대로 있는 반면에 부산면․사상면․사하면이 신설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9면 체제는 이미 『동래부읍지(1832)』에 서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32년 이전에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남읍지(1895)』에는 9면(읍내면․동면․북면․서면․남촌면․동평면․부산면․사상면․사하면) 131동리로, 『동래부읍지(1899)』에는 8면(읍내면․동면․북면․서면․남촌면․동평면․부산면․사천면) 101동이고, 『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1904)』에는 12면(읍내면․북면․서상면․서하면․서하면․사상면․사중면․사하면․동평면․남하면․남상면․동하면․동상면) 154동리로 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면리의 변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체제 속에 오늘날의 연제구는 서면(西面)의 거벌리(居伐里)와 남촌면(南村面)의 일부가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5. 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점으로 동래부의 행정명칭이 부산부(釜山府)가 설치되어 동래의 행정구역의 일부가 부산부의 지배를 받았으나,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군(郡)․면(面) 통폐합에 따라 부산부(현 동구, 서구, 중구, 영도구 지역)와 이전의 동래부지역 일부와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이 설치되어, 행정구역이 경상남도 동래군에 속하였다.
이때 『동래부지(1937)』에는 1읍(동래읍) 11면(북면․남면․사상면․사하면․구포면․서면․기장면․철마면․정관면․일광면․장안면) 128리 7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후 계속적으로 동래군의 영역은 축소되어 1936년 4월 1일 1차 행정구연 확장 때 동래군 서면(西面)과 암남리(岩南里)가 부산부에 편입되었고, 1942년 10월 1일 2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동래군의 동래읍 전부와 사하면(沙下面) 등의 지역이 부산부에 편입되면서 연제구의 거제리와 연산리가 부산부에 소속하게 되었다.
6. 광복이후
광복 이후인 1949년 8월 15일 부산부(釜山府)가 부산시(釜山市)로 개칭되고, 1957년 1월 1일(법률 제407호, 1956. 12. 16 공포) 구제(區制)의 실시로 부산시 동래구 거제동으로 편제되었다. 그후 직할시 승격 당시 34개동 이었으나 계속적으로 행정동이 증가하였다. 1976년 4월 9일(시조례 제957호, 1976. 4. 9 공포) 해운대출장소가 시 직할 출장소로 승격으로 분리되었다가, 1980년 4월 1일 동래구에서 분리하여 해운대출소를 해운대구로 승격(대통령령 제9630호, 1979. 9. 26 공포)하였다.
1988년 10월 1일 동래구에서 금정구가 분구(대통령령 12367호, 1987. 12. 31 공포)되었고, 1995년 3월 1일(법률 제4802호, 1994. 12. 22 공포)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구에서 연제구가 분구되었다. 현재 연제구의 관할 법정동은 거제동과 연산동이며, 행정동은 12개동(거제1, 2, 3, 4동과 연산1, 2, 3, 4, 5, 6, 8, 9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대 연산로터리 부근(중앙도로가 중앙로, 아랫쪽 도로 왼쪽이 옛 53사단 지금의 시청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