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학의 원조 - 백운학(白雲鶴)
- '제왕그릇 10살 어린이' 예견한 관상가 백운학 -
조선 말기 철종 때의 이야기다. 관상 수업을 마치고 하산한 관상가가 어느 날 한양으로 올라왔다. 우연히 당시 대원군이 살던 운현궁에 들렀다. 마당에서 팽이를 돌리며 놀기에 여념이 없던 영복(고종임금의 어릴 적 이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관상가가 갑자기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하며 “상감마마 절 받으십시오”라고 했다.
아직 열 살이 갓 넘은 어린 아이에게 상감마마라고 큰절을 올렸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하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하고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고 한쪽 눈까지 멀어 볼품없는 관상가를 불러 자초지종을 묻었다.
애꾸눈이 말하기를 “제가 한양에 와서 보니 이곳 운현궁에서 왕기가 뻗쳐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시 전 저기서 팽이를 돌리고 있던 도련님의 관상이 제왕의 상을 타고나 있어서 큰절을 올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원군에게 복채를 요구했다. 대원군이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고 묻자 “하늘이 낸다는 제왕지상(帝王之相)을 보았는데 최소 3만 냥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대로 제왕이 되셨을 때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말이 3만 냥이지 당시 3만 냥이면 엄청난 거금이었다. 잘 알다시피 당시 대원군은 돈이 없었다. 세도가인 안동김씨의 눈치를 살피느라 본인 한 몸 거두기도 힘든 때였다. 턱없는 복채 요구에 농담 반 진담반의 심정으로 없는 복채는 줄 수 없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각서 비슷한 증서 하나를 써주었다.
과연 그로부터 얼마 후 운현궁 앞마당에서 팽이 돌리며 노는데 여념이 없던 영복이라는 이름의 대원군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한다. 그 소식을 들은 애꾸눈은 복채를 받기 위해 대원군이 써준 증서를 가지고 운현궁으로 찾아갔다. 대원군을 찾아갈 때 애꾸눈은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갔다고 한다. 당나귀 4마리는 3만 냥의 엽전 꾸러미를 싣기 위한 용도였음은 물론이다.
애꾸눈은 3만 냥의 복채 외에도 벼슬까지도 요구했다. 결국, 애꾸눈은 복채로 3만 냥과 함께 청도 현감이라는 벼슬까지 받았다. 이 애꾸눈이 바로 관상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백운학 선생이다. 그는 젊었을 때 청도 운문사에 있던 일허 선사에게 관상학을 사사(師事) 받았다. 하루는 일허 선사가 백운학 에게 “너는 한쪽 눈이 없어야 사람들을 정확히 볼 수 있다”고 말하자, 멀쩡했던 한쪽 눈을 담뱃불로 지져 진짜 애꾸눈을 만들었다.
그는 관상으로 전설을 이뤘다. 얼마나 전설적인 인물이었으면 이후 조선팔도에 수많은 백운학을 양산시켰을까.
- 김상회 (사)한국역술인협회 중앙부회장의 글에서 -
[역문과 유충엽 선생의 말]
원조 백운학은 요즘 사람이 아니라 구한말 대원군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역문관 유충엽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백운학은 경북 청도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있던 일허선사(一虛禪師)를 만나 관상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신상전편(神相全篇)을 사사(師事)받았다. 백운학은 일찍이 관상에 소질을 보였던 모양이다. 일허선사는 백운학에게 “너는 애꾸가 되어야 한다.
한쪽 눈이 없는 애꾸가 되어야 사람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충고하였다. 일허선사의 가르침에 따라 백운학은 멀쩡했던 한쪽 눈을 담뱃불로 지져 진짜 애꾸로 만들었다. 그러한 대가를 치르면서 백운학은 관상의 깊은 경지로 들어갔던 것 같다.
청도에서 관상수업을 마친 백운학은 어느날 한양으로 올라온다. 당시 대원군이 살던 운현방(현재 운현궁이 있는 자리)을 찾아가 마당에서 팽이를 치고 있던 13세 소년 명복(命福) 도련님에게 “상감마마 절 받으십시오”하고 땅바닥에서 큰절을 올린다. 열세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임금이라면서 큰절을 올렸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하도 황당해 애꾸눈 백운학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는다.
[무공의 붙임]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왕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친 관상가 백운학의
이야기는 매천야록에도 전해져 올만큼 실제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후 [백운학]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역술가들이 많이 나타났으니 백운학이 신통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이 이름 또는 비슷한 이름으로 활동하는 자가 있는 듯하다.
한 때 광주에서는 한 빌딩에 다섯 곳이나 철학관이 들어서 있었는데 모두 자칭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관상의 대가라고 자처하기에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오리지널 백운학이는 아니었지만, 근대에 와서 백운학이라는 이름으로 삼성 이병철을 도운 역술가가 있었다는 소문은 들은바가 있다. 아마도 백운학이란 이름을 가진 역술인 중에서도 실력이 꽤 높은 분이 있었나 보다.
그 중 청송(靑松) 백운학이란 이름은 젊은 시절 들어본 기억이 있으며, 2001년 처음 발간된[관상보감](민예사)의 저자 역시 또 다른 백운학인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