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 癸 己 壬 건명
酉 酉 酉 子
丙 乙 甲 癸 壬 辛 庚
辰 卯 寅 丑 子 亥
1, 해설논증(解說論證)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서기(西紀) 1852년 8월에 흥선군(興宣君) 이강응(李 應)(후에 대원
군)의 차자(次子)로 태여 났다.
본명(本命)은 이명복(李明福)이다. 십이(十二) 재(才) 계해(癸亥) 1863년 12월에 불과(不過)
십이(十二)세(歲)의 나이로 철종(哲宗)의 뒤를 이여 이조(李朝) 제(第) 이십육대(二十六代)
의 왕위(王位)에 올랐다.
15재(才) 병인(丙寅), 1866년에 민비(閔妃)와 결혼(結婚)하였고 그 병인(丙寅)년인 바로 한
해에 양난(洋亂)이 일어나서 국내(國內)가 씨끄러웠다.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하는 것은 근
세사(近世史)에 있다.
그 후 갑신정변(甲申政變), 갑오경장(甲午更張)난 등이 삽십삼(三十三)세, 사십삼(四十三)세
의 해이다. 그 이듬해인 을미년(乙未年) 1895년 사십사세 時에 민비(閔妃)가 꼭 십이(十二)
년 후인 정미(丁未), 1907년 유월에 강권(强勸)으로 양위(讓位)케 되었으니 그로부터 순종
(純宗)으로서 강희(康熙)연호(年號)가 시작된 것이다.
재론컨대 계해(癸亥)년 십이세에 왕위(王位)에 올라 정미(丁未)년에 양위(讓位)하셨으니 그
해는 오십육세이시다. 그리고 계해(癸亥)년 십이월에 왕위(王位)에 오르고 정미(丁未)년 유
월에 퇴위(退位) 하셨다.
그후 십이년인 지난 기미(己未)년 1919년의 정월에 승하(昇遐) 하셨으니 육십팔세로서 파란
만장(波瀾萬丈)한 군주(君主)로서 일생(一生)을 마쳤다.
2, 해설논평(解說論評)
팔자의 기국(器局)이 금수인수격(金水印綬格)으로 형성(形成)되였다 그러므로 土金水運行을
용(用)해야 하고 목화(木火)는 완전(完全)배제(排除)되여야만 한다.
토(土)는 조토(燥土) 대기(大忌)하고 습토(濕土)는 혹(或) 용(用)이다.
이렇고 보면 금수(金水)운 밖에 용세(用勢)함이 없다고 본다. 환언(換言)한 즉 가득히 찬 못
물 또는 풍부히 유유(流流)자진(自進)하는 강하수(江河水)가 되어야 한다. 수(水)를 금(金)
이 원천(源泉)인 고(故)로 금(金)이대호(大好)와 동시(同時) 수(水)가 병용(竝用)되는 것이
다. 그래서 금(金)의 인수(印綬)를 성격(成格)한 것이다.
기외(其外) 土木火는 모두가 잡(雜?)된 혼탁(混濁) 또는 조한(燥旱)으로 만드는 요인(妖人)
이 되고 마는 것이니 종국(終局)은 파멸(破滅)이 도래(到來)하고 마는 것이다.
본(本) 사주(四柱)줄거리 운세(運勢)를 살펴본즉 출(出) 생년(生年)인 임자(壬子)는 왕족(王
族)가문(家門)을 자랑할 만큼 강하(江河)의 수원(水源)이 풍부(豊富)하여 제왕(帝旺)국(局)
을 이루지 않었는가 그리고 왕위(王位)에 오른 해는 십이세인 계해(癸亥)년이다. 계해(癸亥)
도 임자(壬子)와 더불어 수왕국(水旺局)이다.
이 것을 보더라도 수(水)를 얼마나 큰 희신(喜神)으로 보아 왔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년주(年柱)가 강(江)한 고로 즉(卽) 장상(長上)인 부(父)가 십년(十年)간이나 섭정(攝政)하는 경우(境遇)가 되었을니라.
다음 일지(日支)와 가즈런히 삼유(三酉)이다. 즉(卽) 금(金)인 유(酉)는 지반(地盤)형성(形
成)을 구?(構?) 했으니 일지(日支)는 처위(妻位)인 것이다. 그 처세(妻勢)가 영지총준(怜持聰俊)한 지모(智謀)겸비(兼備)로서 확충(擴充)되여 있다.
그래서 민비(閔妃)인 처위(妻位), 대원군(大院君)인 부위(父位)가 막상막하(莫上莫下)로서
세력(勢力) 다툼을 하며 없치락 덮치락 하는 가운데 자신(自身)은 고(苦)가 극치(極致)에
몰리게 되었고 국내(國內)국외(局外)정세(情勢)에 휘말녀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일대(一代)
를 보내게 되는 운세(運勢)였든 것이다.
병인(丙寅)년은 화목(火木)유년(流年)으로 식신(食神)상관(傷官)이 정재(正財)를 생(生)해주
는 해이니 민비(閔妃)와 결혼(結婚)은 했으나 그 해 양요(洋擾)로서 국내(國內)가 어수선하
기 그지 없이 많은 사람, 국민(國民)이 희생(犧牲)되였다.
다음 신미(辛未)년 또 양요(洋擾)대란(大亂)이 있었다. 화목토(火木土)를 기신(忌神)으로 보
는 증좌(證左)이다.
삼십삼세 갑신정변(甲申政變)도 목(木)을 인용(引用)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경술(庚
戌) 신해(辛亥), 임자(壬子) 공히 금수(金水)대운행으로 일관(一貫) 되었기에 대액(大厄)은
없었다고 하겠으나 삼십칠세 후 축운(丑運)으로부터 국운(國運)은 점쇠(漸衰) 되었고 갑인
(甲寅), 을묘(乙卯), 병진(丙辰)의 운행(運行)은 완전(完全) 파국(破局) 멸격(滅格)이 되고 만 것이다.
사십삼세 갑오(甲午)년에 동학(東學)난으로 인(因)하여 말 못할 위기(危機)가 가시기 전에
사십사세 을미(乙未)년에 왕비(王妃)요 민비(閔妃)인 처(妻)가 살해(殺害) 된 것이다. 이
것이 갑인(甲寅)대운(大運)이 시작(始作)되면서이다.
그로부터 꼭 십이년 후인 정미(丁未)년인 오십육세에 강제적(强制的)으로 외세(外勢)탄압(彈
壓)으로 왕위(王位)를 양위(讓位)하였으니 이 또한 을묘(乙卯)대운(大運) 중 정미(丁未)년이
다. 그 후 또 십이년이 지난 육십팔세인 기미(己未)년에 승하(昇遐) 하셨으니 이 또한 병진
(丙辰)운행(運行)이 였다.
그리고 대액(大厄)월은 축월(丑月)에 오른 왕위(王位)를 미월(未月)에 탈위(奪位)당했고 왕
비(王妃)를 오월(午月)에 상배(喪配)하고 자신(自身)은 인월(寅月)에 붕(崩) 했으니 이 또한
목화(木火)연유(緣由)이고 미년(未年)은 위년(危年)으로 빠짐이 없었으니 신미(辛未)양난
(洋亂)으로 이십(二十)세시(歲時)였고 삽십이세 계미(癸未)년은 그 이듬해 갑신정변(甲申政
變)을 놓고 물론(勿論) 어수선한 해 였을니라. 다음 사십사세 을미(乙未)년은 왕비(王妃) 민
비(閔妃)살해사건(殺害事件)의 큰 충격(衝擊)이 있었고 정미(丁未)년인 오십육세에 탈위(奪
位) 그 것도 미월(未月)이다. 그리고 육십팔세인 기미(己未)년에 붕(崩)하셨으니 본(本) 사
주(四柱)는 미년(未年)과는 대악(大惡)연유(緣由)가 있었든 것으로 본다.
요(要)는 금수(金水)국(局)인 인수(印綬)격(格)은 미(未) 중(中) 정을기(丁乙己)의 火木土
藏干은 餘地없이 濁水를 만들어 파격(破格) 멸국(滅局)케 하였든 것이다.
대략(大略) 이상(以上)과 같은 같은 논평(論評)은 추려 보았거니와 본국(本局)은 엇지 왕위
(王位)의 판국(板局)으로 추정(推定)하겠는냐에 일언(一言)을 가(加)해 둔다.
인수격(印綬格)은 상기(上記)와 한 바이고 팔자(八字)가 일단(一團)으로 금수(金水)로서 풍
천성호국(豊泉成湖局)이 였기 때문이였다. 그 것이 화(火)]로서 건조(乾燥)한 한발(旱魃)로
서 풍부(豊富)하던 원천(源泉)을 척단( 斷)하였고 목(木)으로서 호저(湖底)
를 뚫버 그 혈(穴)로서 많은 호수(湖水)는 날이 갈수록 줄어 드렀고 토(土)는 자자든 호수
(湖水)를 송두리째 덮어 버렸으니 파국(破局)멸격(滅格)이 되고 마른 것이 아니겠는가
미(未)는 장간(藏干)에 정을기(丁乙己) 삼자(三字)가 공존(共存)했고 갑인(甲寅), 을묘(乙
卯), 병진(丙辰)의 운행(運行)으로서 엮어 가면서 파동(波動)을 야기(惹起)시켜 국운(國運)
과 더불어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생애(生涯)를 마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