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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론 / 나는 왜 성경을 우롱하는가?
지금 전통적인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서의 기독교는 위기에 처해 있다.
신도가 썰물 빠지듯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각종 통계치에 나타난 신도수도 매년 줄어 들고있고, 진리라고 믿어왔던 성경이 부정되고
있다.
그토록 오랬동안 기독교가 지배해온 서양에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들이 타락한것일까?
오히려 어떻게 한국의 개신교는 아직도 교세를 유지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 짧은 기간 동안
한국 기독교가 그렇게 기업형 교회들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듣기 위해 한국
목사들이 초빙되어 강연이 열리고 한국 목사들의 책이 출판되고 강연과 토론이 유럽의
기독교계 TV 방송을 탈 정도다.
유럽 개신 기독교계에서는 한국을 배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지금 유럽 교회는 노인회관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토록 기독교 열기가 높을까?
바로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성서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중세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에 빠져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기독교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들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현재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오늘날 서구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자유로이 나도는 서구에서는, 현재 예수를 부처와 같은
인간으로, 혹은 신화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정보만큼은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에서 여러분께 알릴 대부분의 내용들은 목사들도 신학대학에서
이미 다 배운 내용이라는 점이다.
왜 목사들은 그들이 배웠던 내용을 신도들에게 솔직하게 가르쳐주지 못하는가?
기독교는 허위와 기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종교,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하면 전도가 되지
않을 종교, 신자가 떨어져 나갈 종교인가?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서구인들이 버린 중세기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목사의 설교만이 진실인 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사실을 솔직하게 교인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사실상 오늘날의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야기시키는 배타성은 목사들이 솔직하게 신학교에서
배운 진실을 신자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데에 있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가 완벽하고, 성경이 무오하다고 철썩같이 세뇌당한 기독교인들에게
다른종교는 전부 우상숭배요, 미신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본 서의 성경반박은 기독교를 믿지 말라는 것이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종교가 어떤것인지 깊이 성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종교가 어떤것인지를 깨닫게 될때, 남을 함부로 비방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성경에 대한 환상과 착각에서부터 여러분을 깨어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필자의 말이 틀렸는지는 신학사이트나, 신학관련서적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 여러분의 '신앙'과,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얼마나 차이가 큰지, 충격을 받게
될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기독교의 배타성은 성경에서부터
도데체 법이 무서운지도 모르고, 단군상을 파괴하고, 불상을 때려부수고, 절에 불을
지르고,지하철에서 고성방가를 하는 개신교도들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의 보통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잘못믿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에게도 대의명분이 있다.
이방신의 우상을 불살라 버리고, 낫으로 찍어버리고, 제단을 파괴하라고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배타성은 바로 성경과 기독교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이제부터 아주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구약속에서의 이방인들에 대한 저주는 도를
벗어난다.
이방인들은 갓난아기까지 죽이고 임산부의 배까지 갈라 씨를 말려버리라고 여호와가
명령하며, 이방인남자들은 칼날로 쳐죽이고, 이방인 여자들은 강간하고, 이방인들에게 평화를
약속하고 쳐들어가서 노예로 삼으라는 구절까지 나온다.
구약속의 여호와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비기독교인들을 잔혹하게 죽인다 하더라도 성경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성경을 맹신하고 오류라고는 전혀 없는 신의 영감을 받아 씌여진 책이라고 철썩같이 믿도록
쇠뇌당한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성경속의 배타적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광신도화 되어
버렸다. 즉, 성경이 개신교인들의 배타적 교리를 형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뿌리인 셈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단순한 종교경전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류라고는 전혀 없는 무오함의
책이라는 착각속에 빠져있는한 그들의 배타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군에 대해서 그의 역사적 실체를 부정하는 교수들역시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이미 서구에서는 예수 자체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는 마당이다.
단군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정작 서구에서는 예수가 신화적 허구의 인물이라는 설이 힘을
얻어간다는 것은 어찌 모르는가?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은 성경 속에 숨어들어 나오려 하지 않는가?
왜 시선을 돌려 넓은 세상을 보려하지 않고 넓은 세상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여 그 좁은 성경과
인색한 기독교의 여호와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려 하는가?
물론, 성경에는 고린도 전서13장(사랑에 대한 이야기)같이 훌륭한 구절도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의 한쪽편에는 여성을 비하하는 구절도 함께 공존한다.
성경에는 훌륭한 말씀과 함께, 한쪽구석에는 배타성과 인종차별, 성차별등과 수많은 사악한
것들이 함께 공존한다.
목사들은 그중에서 그럴듯한 구절들만을 끄집어내서 설교를 할뿐이다.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경을 파헤치지 않는한 그들의 광신행위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광신자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성경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주지 않으면 않된다.
교회에서는 아직까지도 모세5경이 모세에 의해 씌여졌다고 가르쳐주는 마당이니, 우리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어야만한다.
이제, 기독교인들에게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함께 손잡고 공존할수 있는 여유, 오류를
개선할 용기, 진실을 구별할 줄 아는 지식과, 진실 아님을 고발할 배짱이 요구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기독교는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받아들여질 것으로 필자는
믿는다.
▶ 의심하는 인간이 되자
안티기독교인들의 성경비판 글들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냐고 물어본 기독교인도 있었다.
다시말해 한국 개신교의 부패와 배타성만 지적하면 되었지, 성경비판이 무슨가치가 있냐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성경비판은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점에 가치가 있다. 또한 무조건적인
맹신은 배타를 유발시키는 것은 물론, 발전을 저해한다.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서 무릎꿇게 만든것도 바로 성경이었다.
의심하는 정신, 그것은 인간으로써, 그리고 민주시민으로써 당연히 거쳐가야 할 과정이다.
그 과정을 무시하고 억제시킨 결과는 우매한 광신자를 만들뿐이며, 민주주의의 다원성도
인정하지 않는 꽉막힌 배타적 인간만을 양산할 뿐이며, 과학마져도 부정하면서 인간이
걸어가야할 발전을 퇴보시킨다.
의문을 갖는 것은 본능적인 인간의 본성이지만 기독교에서는 그 본성을 억압한다.
사단이니 마귀니 시험에 든다느니 죄악시 한다.
어째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지적 호기심을 원천봉쇄하는 것인가?
왜 기독교의 신은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지 한 번 역으로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오히려 어떤 종교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물음을 찾으라고도 한다.
기독교의 신은 무지몽매한 인간들만 좋아하는것은 아닌가?
기독교의 출발부터 오류에서 비롯된 때문은 아닌가?
기독교는 결코 보이고 싶지 많은 비밀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기독교 내에서 믿음과 의심은 정녕 병립할 수 없는 것인가?
특히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무조건적인 믿음의 강요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무시와
비난,의심과 회의를 원천 봉쇄함으로서 인간을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의 폐해는 필연적으로 무지한 기독교와, 허약한 신앙과, 배타적 신앙을 낳게 된다.
회유와 협박, 불안과 공포, 물질적 축복의 갈구 등을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들은(어쩌면
거의 대다수이지만), 진리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자신의 부족분을 채우는 것으로만 만족하기
쉽다.
불안한 사람은 평화로우면 그만이고, 몸이아픈 사람은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 그만이고, 빈궁한
자신의 신에게 부를 가져다 달라고 기도를 드리며 위안을 얻으면서 더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로, 거기에서 안주하고 마는 것이다.
안주하고 만족하는 순간, 치열한 과정을 통해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의심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의심 자체가 불필요한 상태에 머물게 되어버린다.
이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의심하지 않는 신앙, 의심 없는 믿음....... 언뜻 강고한 신앙인의 자세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복제품일 따름이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보아도 도대체 의심 없이 믿음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맹신이 아니지 않는가!
한참 지적인 활동이 왕성할 청소년들에게 반복적인 찬양을 시키면서, 사고하고 의심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교회교육이다.
사회를 개혁하고 이웃을 섬기는 복잡하고 불편한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회의해야 할 성인들에게, 단순하기 짝이 없는 교회 포스터 쪼가리 따위로 "그대는
구원받았다!"며 마취시키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기본 패턴인것이다.
신학대학의 많은 학생들 뿐 아니라 일반 교회의 많은 신자들도 조금만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 기독교를 접하고 당연히 회의를 갖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이 종래 어떻게 변해가는가?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회의하는 지성과 자의식을
잠재웠다.
그래서 구심, 회의, 지적 호기심을 죄악시 하기위해 "성령을 의심하지 마라"라고 주장하지
않앗던가? 자신들의 하나님의 전지 전능이 부족해 결국 마귀나 사탄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거의 세뇌의 기술이라고 밖에는 볼수없다.
반복적인 행위와 반복적인 억압, 동류의식 그리고 죄의식의 주입해서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신의 뜻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니 그냥 믿어버려라."라는 주장을
흔히 한다.
정녕 믿음이 그런것인가?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것인가?
그것이 확신인가? 그것이 신앙인가? 믿음으로 얻는 진리, 그것이 무슨 구구단인가?
그렇다면, 무당이 섬기는 신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니 그냥 믿어버리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치열하고 처절한 의심의 터널에서 헤메보지 않고서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진리따위가
있겠는가? 있다 한들, 혹시 광신자의 싸구려 진리가 아니겠는가?
종교와 학문을 착각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철저하게 믿음의 복종만
강요하는 한국 기독교는 비난받아야만 한다.
기독교에 뭐 대단한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사기만 치지 말라는 거다.
목사들 자신역시 신학교에서 여러분들이 알고있는 것과는 딴판인 신학을 배웠다.
기독교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 죄악이라면, 신학따위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왜 신학생들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워야 하는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기위함이다.
만약 목사의 조건으로 믿음이 우선이라면, 광신자를 목사로 세우는 것이 낫다.
그러나, 그런 광신자의 관점으로는 신자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낼수가 없다.
그런데,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제대로 된 신학을 배우고서는, 주일날 강단에 서서는 신도들에게
엉뚱한 설교를 하는 것이다.
한국의 목사들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신학을 배우고서도 신자들에게 맹신과 광신을
요구하고 있다.
제발 거짓을 가르키지 말자.
믿기지 않아도 믿으면 알 수 있다고 사기치면서 사람 바보 만들지 말라.
그리고 의심하는 자에게 질문을 허락하라!
손 붙잡고 시험에 들었다는 둥, 기도하자는 둥, 의심을 가지게 된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바보로
끌어내리지 마라.
기독교인 되기 쉽다고 한다. 일단 믿으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무조건 믿는 자세, 즉 맹신하는 믿음은 어린이들의 태도에 불과 할뿐이다.
하기야 기독교인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최고로 평가한다. 이러니 말이 통하는가?
어쨌든, 그 믿음, 혹은 믿는다는 착각, 혹은 진실에 대한 외면 속에서 스스로 도취되어가고
자기방어 집단합리화 끊임없는 동어반복!
신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든 적이 없다.
상식과 지식과 몸과 영혼을 모두 내던져 부딪히면서 치열하게 자연에게 도전하면서 삶의
난제들에 대한 숨은 해답을 찾아가는, 그런 의심 많은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길
기대한다.
필자는 그러한 점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재조명해 보도록 자료를 올린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조금의 의구심이라도 생긴다면 필자는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 성경은 모순 투성이이다
성경이 진리라고 기독교인들은 귀가아프게 말한다.
진리는 이렇게 구호형이 아니어도 진리이다.
독재자가 민주주의를 더 크게 외치듯 성경도 외친다.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고 말이다.
수차례의 개정을 통해 수세기에 걸쳐 왜곡과 첨가와 누락과 변형이 가해져 오늘에 이른 성경이
우주를 창조한 자의 말씀이고 진리인가?
성경을 누가 만들었는가?
성경이 만들어진 역사를 보라. 그리고 성경에 속했다가 버려진 외경들을 찾아 비교해 보라.
가장 오래된 사본들과 오늘날의 성경을 비교해보라.
그리고 성경에 원본은 없다. 모두다 모사본뿐일 뿐이다.
수천 종류를 넘는 모사본들은 역시 모사를 거듭한 모사본인데다가 내용 또한 똑같은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 성경은, 신학자들이 수많은 사본들을 비교하고 검토해서 만든
것이다.
어떤 사본을 토대로 번역을 했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내용이 약간 틀리기도하는데, 일부 과격한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보는 성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탄이 변개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경속의 신화는 철저히 주변국들의 신화를 모방한 것들뿐이다.
천지창조, 노아의방주, 바벨탑, 아브라함, 모세의 출생, 욥기, 잠언, 등등등 모두다 바빌론의
유수때 히브리인들이 수메르신화와 주변국들의 신화를 모방했을 뿐이다.
성경속에서 바라보는 윤리는 어떠한가?
근친상간과, 여성비하, 이방인들에 대한 저주등 온갖 추잡한 것들로 얼룩져 있다.
성경속의 사건들은 전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가?
아니다! 바빌론 유수이전에 존재했던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포함해서 그 이전의 사실은 모두
신화요, 허구이다.
오히려 역사는 성경속의 사실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예수 역시 그와 너무도 비슷한 행적을 보이는, 또 다른 메시아들이 로마제국시대에 예수보다
먼저 등장했었다.
성경은 과학적인가? 아니다. 성경은 철저히 고대관념적이다.
지구를 만들고 난후에, 태양과 달, 별을 만들었다고 창세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뒤에서 더욱 자세히 ㅤㅂㅏㅀ히겠지만, 고대인의 관점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낡은 책일 뿐이다.
그리고도 성경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세뇌당한 성경의 창세기를 과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창조과학회까지 조직했다.
성경자체가 비과학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성경의 기초적 신학적 지식이 전무한
광신자들의 추태라고 할수 있겠다.
목사들은 어찌해서 이 사람들에게 신학교에서 배운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나 성경의 모순을 이야기 하고자 하면 읽기전부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도에서 내팽개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념은 그 벽이 두터워 깨뜨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관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꽁꽁 얽어매어 버리기 때문에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관념을 깨뜨리고 나면 우물속에서만 살던 개구리가 지상으로 뛰어 나오듯이 지금까지
살아온 틈 바구니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끽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상은 지혜로운 세계이며 무지에서 해방되어 인간 본연의 권위를 되찾는 세계이다.
관념을 헐고 타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누리도록 하라.
만약 지금까지 지녀온 관념을 소중하게 여기어 관념을 깨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끝까지 독파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 관념을 사랑할수 있도록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독파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내 팽개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필시 패배자 이거나 낙오자일 뿐이지 결코 승리자라고는 말할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합리적인 이성앞에 무릎을 꿇은 맹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흔히 감성(느낌 또는 영감)으로 읽어야 한다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는 만인이 공유할수 있어야만 진리일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성경은 더욱더 감성으로 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을 감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2천년간이나 기반을 닦은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2천년간 철학과 사색을 통해 기반이 닦인 종교가 기독교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기독교 치하에서 정상적인 비판이 용인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
부터인가?
긴 탄압의 터널을 지나 빛을 보기 시작한 신학의 역사가 얼마나 짧은지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2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서구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만
판을 칠뿐이다.
▶ 여호와는 이스라엘민족의 민족신일뿐!
기독교의 문제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만이 진리이고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전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는 점이고, 그리고 기독교의 신 여호와가 우주를 창조한 절대자라는
착각속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구약속의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추잡하고 저질스러운
저주를 퍼붓는 고대 이스라엘의 추잡한 잡신일뿐이다.
구약성경을 보라! 당신은 결코 구원이 아니라 율법으로 저주를 퍼붓는 중동지방의 한 종족의
신을 추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호와가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라는 것을 증거할수 있는가?
어째서 '하나님'이라는 우리민족의 숭고한 그 이름을, 복수와 저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잡귀신 '야훼'가 빼앗아 가버렸는가?
그리고, 인간 예수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투표에 의해 삼위일체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가?
예수와 여호와가 삼위일체를 이루지 못한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걸 아는가?
그대들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에 대해서 반박할 자료나 갖고
있는가?
이제부터 언급할 사실들은 기독교인들을 시험하는 악마의 속삭임도 아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라.
객관적인 시각에서 여러분의 신을 보라.
그리고 기독교와 성경이 형성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냉담히 보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다면, 그것은 한명의 진정한 인간으로 가기위한 위대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