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손꼽히는 광산김씨는 신라왕실의 후예인 김흥광(金興光)이 시조이다. 김흥광은 신라의 비운을 예견하고 경주에서 광주의 서일동(지금의 담양군 평장동)으로 은거함으로써 광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광주의 토호였던 이 성씨는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던 12세 김광세(金光世)와 그의 아들 김경량(金鏡亮)이 대장군(大將軍) 벼슬을 한 경력 덕에 무반(武班)으로 성장했다. 그 뒤 14세 김주정(金周鼎)과 15세 김태현(金台鉉) 숙질(叔姪)이 고관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일약 명문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광산김씨들은 정이품 벼슬인 평장사(平章事)를 8명이나 배출해 고려 왕실이 꺼리던 차령이남에 뿌리를 둔 집안이면서도 그 기반을 잃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시조가 은거한 곳을 평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산김씨는 나라가 교체되는 혼란기에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타 성씨와는 달리 고려의 패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꾸준히 가문의 번영을 누린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 성씨들은 세도가라기 보다는 대대로 석학(碩學)·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했던 집안으로 빛을 냈다. 곧 대학자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가 광산 김씨인 것이다. 이들은 사후 동국18현(東國十八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에 같이 배향되는 영예를 누린다. 역사상 문묘에 배향된 18현 가운데 부자가 함께 배향되기는 이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지금 토금 마을에 살고 있는 광산김씨들은 14세 때 갈라진 문숙공(文肅公) 김주정의 후손들이다. 입향조는 34세손 김복현(金福鉉·1824∼?)이다.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복현은 당시 나라의 정세가 어지러워 분지인 토금 마을을 은신처 삼아 들어왔다고 한다. 또 그의 처가 먼저 입향해 산 전주최씨라 처가를 찾아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이곳에서 서당을 짓고 글을 가르쳐 많은 문인을 배출했는데, 그 문인 중 금영인(金寧人) 김봉선(金鳳善)은 고종조(高宗朝)에 삼품관(三品官)을 지내기도 했다. 이곳을 출입한 문인으로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있다. 복현의 선대는 영암 자지동에서 구례 간전면, 바로 강건너인 토지면으로 이거하는 등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듯 하다. 토금 마을 자생조직인 친선계(1861년 창립)에서는 서당 훈장을 지낸 김복현·김영숙·황담 세 사람의 덕을 기려 매년 제사봉행(祭祀奉行) 한다.
오늘날 토금 마을에서 광산김씨들은 시조로부터 39세손까지 번져산다. 터잡이 김복현의 손자 기수(箕洙)는 1869년 마을 유지들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의 천인정(千o 亭)을 건립하기도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통계 결과 이 성씨는 전국에 174,912가구 750,701명이, 광주·전남에 35,687가구 163,098명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