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합집합⑥
"얘, 미진아, 너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오라셨잖아."
"걱정 말고 네 일이나 잘해."
비질을 하려던 나래가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는 미진이에게 친절하게 말하자 미진은 책가방 속의 책들을 책상 속에 몰아 넣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수업이 모두 끝났는데 책은 왜 책상 속에다 넣으면서 그러니?"
"글쎄, 상관하지 말라니까!"
미진인 기분이 나쁘다는 듯 벌떡 일어서서 교실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정말 모를 아이야."
나래를 기다려주던 정숙이가 미진이의 책상 속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얘들아, 장미진이 지금 화장실에서 뭐하고 있는 줄 아니?"
대걸레를 빨러갔던 한솔이와 현희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해낸 듯 호들갑을 떨며 들어섰다.
"가짜책가방을 털래 털래 내두르며 화장실로 들어오신 미진씨, 남이야 보던 말던 가방 앞쪽 작은 주머니에서 눈썹 그리는 연필이랑 립스틱, 콤팩트 등을 꺼내 놓고 거울 파에서 화장을 하지 뭐니?"
"정말? 설마-."
"안 믿어지면 가서 직접 확인하라고. 봄바람이 제일 먼저 장미진한테 찾아온 게지, 뭐."
현희가 교실 앞부분을 대걸레로 죽죽 문지르며 여유 있게 말을 하자 행여 그 광경을 놓칠세라 진희는 미끄러지듯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후,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싱글거리며 교실로 들어온 진희는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서 패션 모델처럼 꾸미고 님 만나러 가는데 우린 뭐니? 구질구질하게 청소나 하고 있으니-."
"얘, 너야말로 2학년 때 남학생들 노는 거 구경하려다 4층에서 떨어진 장본인 아니냐?"
"하하하하!"
현희의 말에 청소를 하던 아이들이 모두 진희를 바라보며 한바탕 웃었다.
"구경이 아니라 꾀려다 그랬다며? 창가에 서서 오페라를 부르다가-."
정숙이가 진희 옆으로 바짝 다가가서 캘 듯이 물어보자 진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마치 추억이라도 되살리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 때 내가 저 뜰에 있는 살구나무 가지에 걸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하늘나라에 가서 꿈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텐데…. 이 지긋지긋한 학교 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지-."
"얘, 넌 그 덕분에 학교에서 최고로 유명해 졌잖아. '나비 소녀'하면 우리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니?"
"맞아, 그 가벼운 몸으로 공중을 멋지게 날아서 살구나무 가지에도 앉아보고, 다시 날아서 꽃밭에도 앉아보고."
"호호호호!"
말괄량이 합집합⑦
"아마 너 그때 한 달 이상은 결석했었지?"
"응, 엉덩이뼈가 좀 부서졌거든!"
"얘, 그만 웃거라."
아이들은 쓰레기통일랑 비울 생각도 안하고 잡담을 하며 까르르 웃어대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다음날 아침 자습 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제일 먼저 미진을 찾았다.
"아직 안 왔는데요."
"누구 장미진이와 한 동네 사는 사람 없어요?"
아이들은 아예 미진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나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럼, 미진 이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사람 손들어 봐요."
나래는 하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니 현희와 정숙이 그리고 원주도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손을 올렸다.
"너희들 중에서 미진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단 말이니?"
담임 선생님이 보안경 너머로 그 큰 눈을 치켜 뜨자 현희가 대답 했다.
"그 아인 전에도 자습 시간 같은 땐 한번도 참석한 일이 없어요. 청소도 한번 안 하고-."
"뭐라고? 아니 그래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누구셨지?"
"윤금희 선생님이신데 다른 학교로 가셨어요."
담임 선생님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참동안 혼자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로 이어서 첫째 시간이 국어였다
"이런 무법자가 있나? 완전히 먹고 대학생이지-."
선생님이 출석부에 사인을 하고 막 국어 책을 펼치려 할 때였다.
"드르륵!"
빈 가방을 둘러맨 미진 이가 국어 시간인 줄도 모르고 문을 열다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어서 들어와! 이리 앞으로 나와요."
미진 인 발목까지 올라오는 검정구두를 얼른 벗어 정숙이의 발 밑에 몰아넣고 정숙이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정숙인 재빨리 자기 실내화를 벗어 미진 이에게로 밀어 주었다.
선생님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얘, 선생님이 보고 계셔!"
정숙이의 옆짝인 화연이가 정숙이의 무릎을 쿡쿡 찔렀다.
"마정숙! 그게 친구를 돕는 일인가요?"
정숙인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이 빨개진 채로 똑바로 앉았다.
"장미진, 빨리 나와!"
미진은 태연스럽게 걸어나오며 책상 위에 책가방을 넌지시 올려놓았다.
지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말괄량이 합집합
"넌 왜 항상 늦게 오지? 아침 8시까지 교실에 입실해야 하는 것 모르고 있니?
"……."
미진은 고개를 한쪽으로 틀어서 창문가로 시선을 돌리고는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던 간에 자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자세로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좋아, 어젠 교무실에 안들 리고 그냥 갔는데 용서할 테니 오늘 오후엔 꼭 들리도록, 알았지?"
미진은 선생님의 잔소리가 비교적 짧다고 생각해서인지 얼굴에 웃음까지 띄우며 자리에 와 앉았다.
"자, 책을 펴요. 오늘은 '생활의 기쁨' 들어갈 차례죠? 누구 책을 읽을 사람? 오늘이 3월 21일이지? 21번 읽으세요/"
"네-."
소연 이가 일어서서 낭낭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책을 읽었다.
"그만, 41번!"
정숙이는 생김새처럼 책 읽는 소리도 사내와 같이 우렁차고 박력이 넘쳤다.
"좋아요. 다음은 31번!"
수원이는 옆사람과 떠들고 있다가 별안간 자기 번호가 불려지자 놀란 토끼 같이 두리번거리며 일어섰다.
"여기야, 어서 읽어!"
호숙이가 읽어야 할 자리를 알려주자 수원인 얼마동안 망설이다가 책을 읽었다. 아이들이 여기 저기서 키익킥 웃어댔다. 수원인 문장에서 처음 시작하는 글자를 읽을 때마다 꼭 한 박자씩 늦추어 더듬거린 뒤 되풀이해서 읽었기 때문이다.
"잘 읽었어요. 다음부턴 보다 자신 있게 천천히 읽도록!"
수원인 자기 주제도 모르고 아이들에게 손가락으로 V 표시를 하면서 만족한 듯이 자리에 앉았다.
"여러분들, 방금 책에서 읽은 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생활에 쏟는 관심과 애정이에요. 관심과 애정은 곧 사랑이니까요. 그래서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여기 창가의 화분만 하더라도 계속 물을 주지 않고 햇볕에 놓아두면 결국 말라죽고 말지요. 겨울철엔 얼어죽고-, 여러분들 부모나 선생님들이 매일매일 하시는 잔소리는 모두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무관심하다면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아요?"
담임 선생님은 의미 있게 말하며 미진 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미진은 벌써부터 책상에 엎드려 쿨쿨 자고 있었다. 나래가 미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냥, 놔두렴. 무슨 사연이 있겠지."
선생님은 생각보다 부드럽게 말하고는 다시 수업을 계속하였다.
"생텍쥐테리의 '어린 왕자'를 읽어본 사람?"
제법 손이 많이 올라갔다.
선생님은 칠판에 검정모자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고는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구렁이 보아'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말괄량이 합집합⑨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들어주시겠어요?"
'어린 왕자'에 대해서 고집스런 자기 견해를 펼치고 있는 국어 선생님 아니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중간에 딱자르며 일어선 아이가 있었다,
학과 성적도 전교에서 1, 2등을 맡아하면서 책은 언제 또 그렇게 많이 읽었는지 어느 시간이든 간에 책에 관한 말만 나오면 꼭 나서서 선생님들과 1 대 1 토론을 펼치려드는 화연이다.
"도대체 그 책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글쎄-."
갑작스런 질문에 선생님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자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라, 또 잘난 체!"
"누가 책벌레 아니랄까봐."
"다른 책은 몰라도 왕년에 그 책 안 읽어 본 사람 어디 있니?"
"선생님, 그냥 넘어가요!"
"그래, '어린 왕자'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도 되겠지만 그보다 어른들을 위해 쓴 생각하는 동화, 말하자면 철학이 담긴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지-."
"예? 철학이요? 마이 다링 권영길 선생님, 보고 싶어요!"
순발력이 뛰어나서인지 기억력이 좋아서인지 철학이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정숙이가 권 선생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잠깐이나마 사색적이려던 교실의 분위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으하하하!"
"마정숙! 방금 누가보고 싶다고 했지?"
"아니에요. 선생님!"
정숙이가 조금 미안한 듯 얼버무리자 현희가 대신 대답을 했다.
"권영일 선생님이라고, 철학을 하신다는 분이 계셨는데, 이미 D 외고로 떠나셨어요. 특히 강나래가 사모하는-."
"뭐라고?"
금방 얼굴이 빨갛게 된 나래가 현희를 향해 눈을 하얗게 뜨고 흘겨보았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돌아다니며 점심을 먹는 사람들은 조상이 의심스러워!"
담임 선생님의 훈계를 들을 때뿐이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친한 친구들을 찾아 자리를 옮기고 의자를 뒤로 돌려 앉는 등 난장판이다.
정숙이는 어느 새 나래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서 도시락을 펼쳤다.
나래가 보온 도시락 통의 밥을 꺼내자마자 지선 이가 달려들었다.
"너, 도시락 안 가져 왔니?"
"아니, 난 벌써 둘째 시간이 끝나자 마자 먹어 치웠거든!"
"그러면 됐지 왜 남의 밥은 빼앗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거니?"
정숙이가 지선이 하는 짓이 못마땅하다는 듯 툭 쏘아 붙였다.
"빼앗아 먹는 게 아니고 얻어 먹는 거다. 세상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라더라."
"그런 문구는 어디서 얻어들었니?"
지선은 대답 대신 나래의 밥을 한술 떠서 입에 물고는 저만큼 물러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