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 최현배(崔鉉培)선생은 일제가 우리말과 글을 없애려고 할 때 국어 사랑이야말로 나라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울산 출신의 선각자다. 1950년대 중학시절을 보내었던 사람들은 그가 지은 <중등말본>을 배웠기 때문에 외솔이 비교적 친근한 이름일 것이다.
▲ 외솔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내었던 병영동에 세워진 외솔기념관. 2010년 건립된 이 기념관에는 그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품들이 많아 국어 사랑을 통한 그의 나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외솔은 1894년 10월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현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서 최병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때 17살이었고 해방이 되었던 1945년 52살이었기 때문에 그의 젊은 시절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에 걸쳐져 있다. 따라서 그는 이 땅의 선각자로 그만큼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14살 때 병영에 세워진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어릴 때부터 수학을 좋아하고 바둑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또 17살 때는 서울로 가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고)에 입학했다.
그의 가슴에 애국 사상이 싹튼 것은 경성고보 때다. 그는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어 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과 말본을 배웠다. 한글을 공부하는 동안 우리말과 글 속에 우리민족의 혼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때부터 국어 사랑을 통해 나라 사랑을 하게 된다.
일본으로 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것이 22살 때다. 당시 일본에는 고등사범학교가 동경고등사범학교와 히로시마사범학교 둘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이 관립인 히로시마사범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도 이 학교에 합격한 것을 보면 중학시절 공부를 대단히 잘 했던 것 같다.
▲ 외솔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외솔 최현배 동상의 모습.
당시 일제는 고등사범을 졸업한 학생들은 반드시 교사로 관공립 학교에서 봉직하도록 했다. 그러나 외솔은 일제 치하에서 교사로 봉직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해 병을 핑계 삼아 울산에 와 쉬다가 1920년 27살 때 경남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일본으로 다시 들어가 교토대학(京都大學)에 입학한 후 이 학교를 졸업한 것이 1925년이다. 교토대학은 그 때나 지금이나 수재들이 모이기 때문에 입학이 어렵다. 그런데 그가 이때 교토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은 그 만큼 실력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서울로 와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전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런데 1938년 일본이 ‘흥업구락부사건’을 일으켜 외솔은 연희전문학교를 떠나게 된다. ‘흥업구락부사건’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는 일제가 사회불안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한국 지식인들을 사전에 검거한 사건으로 외솔은 이 때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 경찰서에서 악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외솔은 학교를 쉬는 동안 한글에 대한 모든 지식이 담겨 있는 <한글 갈>을 만들었다.
비록 그는 교직을 떠났지만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일에 힘을 쏟았고 또 젊은이들을 상대로 우리글을 가르쳤다.
1942년 10월1일 일어난 ‘조선어학회사건’은 민족말살정책을 폈던 일제가 한글을 연구하는 조선 학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양시킨다는 죄목으로 투옥한 사건이다.이 사건에서 외솔은 이희승과 정인승 등 다른 한글 학자들과 함께 투옥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외솔은 4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해방과 함께 옥에서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그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한글전용추진회 회장, 한글학회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고 한글 가로쓰기 법을 창안하는 등 한글 사랑에 온 몸을 바쳤다. 그는 틈틈이 시조도 썼는데 ‘방어음풍(方魚吟風)’과 ‘염포피서(鹽浦避署)’ ‘고향생각’ ‘삼일사(三一祠)노래’에는 울산이 자주 등장해 그의 울산 사랑을 보여준다. 그의 시조에는 우리들이 잘 아는 ‘한글노래’도 있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다/한글은 우리자랑 문화의 터전/이 글로 이 나라 힘을 기르자
오늘날 50~70대 사람들은 어릴 때 이 노래를 모두 한 번씩 불러 보았을 것인데 이 노래의 작사자가 외솔이다.
외솔의 고향 사랑과 한글 사랑은 그의 도서기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울산문화원이 개원된 후 박영출 원장과 문화원 이사들이 출향인사들을 대상으로 도서를 기증 받은 적이 있다. 이 때 박 원장과 문화원 이사들이 서울 외솔 집을 방문했는데 외솔은 자신의 장남 영해가 경영하고 있었던 정음사에서 발간한 책 300권을 기증했다.
이때 문화원 사람들이 외솔에게 명함을 주었는데 명함의 직책과 이름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왜 명함의 글을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썼느냐”면서 나무랬다고 한다.
외솔이 국어사랑을 떠나 외도를 한 것은 1950년 5월에 있었던 5대 총선 때다. 당시 울산은 갑을구로 나누어 선거를 치렀는데 외솔은 을구에서 출마했다. 외솔과 함께 출마한 사람으로는 김홍조의 아들 김택천, 청년운동가 박태륜, 수산업 거부 백만술이 있었다. 이외에도 김두헌, 오영출, 조용진, 임용길, 박명준, 고기철, 변동조, 박곤수가 출마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외솔은 부친의 후광을 입었던 김택천에 뒤져 차점으로 의회 입성에 실패했다. 외솔은 당시 56세로 울산군민의 추앙을 받아 군민들이 선거자금까지 마련해 주었으나 김택천이 8800여표를 얻은데 반해 그는 6300여표를 얻는데 그쳤다. 당시 선거유세를 구경했던 사람들은 외솔이 명성과 학식에 비해 연설이 뒤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울산이 낳은 대학자요 교육자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인 외솔에 대해 울산 사람들이 오랫동안 걸맞은 대접을 못했다. 울산시가 외솔의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울산시는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이야 말로 우리의 자존인 한글을 연구 보급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외솔의 뜻을 기리고 외솔의 높은 뜻을 이어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민간 주도의 외솔 기념사업추진위원회도 만들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다행히 병영에는 외솔이 출생해 유년기를 보내었던 집터와 돌담이 남아 있어 전시관을 짓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생가에 진입로와 주차장 시설이 없어 이웃 토지를 매입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전시관이 개장된 것은 그가 타계한지 40년만인 2010년 3월이었다. 현재 전시장에는 외솔의 일생을 볼 수 있는 전시관과 영상실, 한글교실, 체험실, 외솔마당이 있고 2층에는 옛집을 복원해 놓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방문객들에게 외솔의 삶을 알리기 위해 울산시 소속 문화해설사도 항상 기다리고 있다. 방문객들이 가면 문화해설사가 외솔의 업적과 삶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런데 외솔에 대한 전문 해설가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울산시 소속 해설사들이 돌아가면서 설명을 하다 보니 외솔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해 외솔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전시관의 특징을 살려 외솔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문화해설사를 고정 배치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