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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조천초등학교 학부모가 만든 올렛길
학부모가 만든 올렛길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데…….
조천초학부모에서는 문화유적 스토리텔링 길을 개발하였다. 전 학부모회장(김정민)의 추천으로 시작된 문화유적길은 조천초 학구에 산재해 있는 유적지 따라 가족이 함께 동네를 거닐며 못 다한 대화와 고향의 자긍심을 느끼게 하기 위해 현 학부모회장(정연희)이 유적지 유래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가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학교에 기증하였다는데…….
그 길을 따라가 보자.
1. 학교 출발/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2. 우마늪/소와 말을 도축하던 장소이다.
3. 궤물1/수운교 앞 웅덩이/도로 확장 사업으로 물이 마르고 있다.
4. 궤물2/ 죽도산방 옆 웅덩이(죽도삼방물)/예전에는 물이 펑펑 쏟아 졌다.
5. 대섬(대섬코지)/무말랭이(생길이) 말리는 곳으로 유명하다(적당히 짠물이 들어 따로 소금을 뿌릴 필요가 없음). 예전에 조천리가 번창한 때 바다를 넓게 차지하고 있었으나 가끔 바다에서 조난당한 배에서 시체가 떠내려 오므로 이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신촌리에 바다를 내주어 시체를 처리하게 했다는데…….
6. 그물대/원담을 끼고 그물을 손질하던 곳으로 조천 청년들이 탑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7. 고관사(절) 터/지금은 일반인 집으로 집 뒤로 물이 흐른다. 6.25 전쟁시 관 일을 고관사를 읍사무소 자리로 옮겨 일을 보다가 지금 자리로 옮겨 왔다가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8. 절간물/지금도 용출수를 뿜고 있다.
9. 큰수룩물(넉드리는 물)/금남의 물, 식수 야채 목욕 빨래를 했던 곳으로 지금도 상당량의 용출수를 내 뿜고 있다.
10. 남자 엉물/여자 출입을 금지 하던 곳으로 야외에서 남자들이 목욕하던 곳이다.
11. 수암정 옆 물/보통 야채 씻었던 곳이다.
12. 남자 엉물/남자들이 목욕하는 곳으로 세 군데 있는데 첫 번째 통에서 목욕하다 물이 들어 짜면 두 번째 물로 옮겨 목욕을 하고 두 번째 물도 짜면 세 번째 물 통으로 옮겨 목욕을 하였다. 현재 세 번째 물통은 막혀 물이 없다.
13. 여자 엉물/여자들이 목욕하고 윗물은 식수로 썼다. 남자 물통과 경계선을 돌로 쌓았다.
14. 제주자리물/ 조천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천수로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 좁은 길로 들어서야 보이며 바다 간운데 있어서 불턱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물을 먹기도 학고 목욕하고 놀기도 하며 낚시를 하다가 쉬기도 하는 곳이다.
15. 새물/학교 후문 물로 세군데 있데 집 옆 물은 조금씩 흐르고 시인의 집 옆은 그나마 보존이 양호한 편이다. 대물 사이의 물도 상당히 차가운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16. 대물/파란 집을 지은 곳으로 지금은 매립 되었으나 예전에는 물이 커다랗다 하여 대물이라 이름을 붙였다.
17. 초가집/제주도 초가집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18. 양진사(절)/1970년대에는 많은 스님들이 참선하면서 공부하던 곳이다. [양진선원을 건립하고 주지 스님으로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주지 스님은 몇 사람만 모여 있어도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발개져 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그래도 낙성식이 두 달 정도 남았기에 미리 준비를 하여 외운 것이 원근각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오신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외우고 드디어 낙성식, 주지 스님이 정작 낙성식이 시작되고 사람들 앞에 서고 보니 눈앞이 막히고 가슴이 떨렸으나 다행히 미리 외웠던 원근각처라는 말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인사말을 하는데 원근각처라는 말을 8번이나 했다한다.]
19. 두말치 여탕/옆에 치수비가 있다.
20. 두말치 남탕/제주시는 제주의 전통가옥인 초가와 기와집은 물론 현대 건축물 가운데 국내외 유명 건축가가 설계하거나 건축 상을 받은 우수한 건축물을 소재로 제주의 건축문화를 체험하는 여행코스를 개발하였는데 이 길이 연북정 가는 길이다.
21. 연북정/연북정은 창건당시 쌍벽이라 하였는데, 쌍벽은 청산록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599년(선조 32)에는 성윤문 목사가 그 건물을 중수하고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연북정이라 개칭하였다. [제주로 유배된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유배생활을 끝내줄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22. 조천진성/둘레가 428자, 높이가 9자였으며,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서 동쪽 한 곳으로만 통할 수 있다. 정조5년(1781)에 제주에 순무어사(巡撫御使)로 왔다가 돌아가 복명한 박천형(朴天衡)의 서계(書啓) 내용에는 [진鎭 터가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 있어 배가 출항하는 데에 아주 편리하다. 그러므로 진상 물종을 실은 배는 대부분 이 진에서 출항하고 육지에서 들어오는 선박도 대부분 이곳에 도착하여 정박하므로 섬 안의 요로가 된다. 그러나 성 안에는 우물이 없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도 없어서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 성을 지키기가 어렵다.]
23. 조천포구/조천포구는 기원전 219년 서복 일행이 중국 진나라 진시황 때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조천포구를 통해 들어와 서귀포 정방폭포에 “과불서차”란 마애명을 남겼는데, “과불서차”란 마애명을 새기기 전 조천이란 글을 조천포구 암벽에 새겼기에(지금은 행방불명) 이를 두고 조천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유래를 간직한 당시(조선시대) 제주도 최대의 무역항으로 옛 정취를 뒤돌아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1960년대 조천포구 모습은 포구 뒤로 대다수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육지에 올려놓은 배와 포구에 정박해 있는 배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오른쪽의 성담은 조천진성의 일부 성곽이다. 왼쪽에 배가 왕래하는 길을 제외하고 길게 돌담으로 파도를 막는 방어벽이 설치되어 있다(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 365쪽).
24. 조천관/조천관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 상세히 전해 주는 문헌 기록은 없다. 구전으로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박윤청(朴允淸) 목사 때에 조천관이 세워진 것으로 회자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 본디 조천朝天이란 말은 천자를 배알(알현)한다는 뜻이고 관은 객사를 뜻한다. 관리(官吏)의 주재 및 숙박소인 것이다. 예로부터 조천관은 화북포와 함께 제주도의 관문이었다. 관문이란 국경 또는 요해지에 설치하여 통행인을 감시하는 곳이다(북제주의 문화유적 163∼165쪽). [제주에서 지역이름 뒤에 관이라는 말이 붙은 곳은 조천관과 대정관이 있었다고 한다. 조천관은 터만 남아 있다. 조천관이란 이조 때 관직을 받아 온 진사, 판사, 정헌 정급의 관사들이 생활하던 고사(古舍)로 지금으로부터 약 8백여 년 전의 생활 흔적과 조천 지경의 속칭이나 지물 등으로 고찰하여 볼 때 촌가를 이루어 조천관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명종때 허응당 보우스님이 있었다.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심했던 시절 그래도 문정왕후가 계셨기에 당시 강남 봉은사 주지로 계시면서 허응당 보우스님은 승과제도를 도입하고 불교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을 했다. 그러나 1565년 6월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6월 스님은 제주도로 귀향가야 했고 그해 제주도에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조천 고관사에 허응당 보우스님의 순교비가 있다.](도림스님 건립)
25. 조천리 새콧할망당/쌀을 싣고 오던 배에 구멍이 뚫려 침몰하게 되는 순간 뱀이 나타나 구멍을 막아 무사히 조천포구에 올 수 있었다. 이에 그 뱀을 모셔 뱃고사를 지내는 당이 속칭 고망할망당(새콧할망당)이다. 해녀들이 물질 할 때 무사함을 빌기도 한다(제주신당조사, 2008, 제주특별자치도).
26. 큰물/지붕을 씌워 햇볕을 막은 결과 이끼가 끼어 지붕을 걷어 내었다. 여탕과 남탕으로 구분하였다.
27. 적은 돈짓물/큰물 옆에 있다.
28. 비석거리/조천포구는 교통수단을 해로에만 의존할 당시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포구로 제주 목사나 판관 등 지방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부임 또는 이임하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치적과 석별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비석을 건립하였는데 이 거리를 ‘비석거리’라 하고, 이 비석거리에는 이들의 치적을 기념하는 7기의 비석이 남아 있으나 비석 뒷면이 많이 마멸되어 건립연대 등을 알아볼 수 없다.
29. 조천연대/통신수단이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3-5호(1976년 9월 9일 지정) ‘연디동산’에 위치해 있다. 연대에서 동쪽으로는 신흥리 해안, 서쪽으로는 원당봉 해안까지 바라다 볼 수 있다. 하부 7.5m×6.3m, 상부 6.4m×5.1m, 높이 2.5m이다. 이 연대는 서쪽으로 별도연대(직선거리 6.7㎞), 동쪽으로 왜포연대(직선거리 1.8㎞)와 교신하였다.
30. 환해장성 잔해/고려 관군과 삼별초군이 제주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조천읍 해안가에는 환해장성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이 일대는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공격할 때 주력부대가 상륙했던 곳이다
31. 엉장메코지/설문대여신이 놓다 만 다리로 엄씨, 장씨, 메씨가 살았다하여 엉장메코지라 한다.
32. 불턱/물적삼과 물소중의를 입은 해녀가 불을 피우며 몸을 말리던 곳이다. 불턱은 해녀들의 쉼터로, 대개 바닷가의 오목한 곳에 돌담으로 사방을 빙 둘러쳐서 만든다. 옷을 갈아입고 불을 쬐어 몸을 말리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장소지만, 동네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사건을 확인하는 정보교환의 장소이자 공동체의식의 수련장이기도 하다.
33. 갯담(원담)/조차를 이용하여 고시를 잡는 어로시설로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썰물 때 빠져 나가지 못하게 돌로 그물을 만들어 바다고기(멸치)를 잡았다.
34. 관곶/조천리가 번창하던 시절, 넓은 바다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가끔 바다에서 조난당한 배에서 시체가 떠내려 오므로 이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신흥리에 바다를 맡겨 시체를 처리하게 했다. 신흥리 바다, 신흥포구와 잇닿은 해안에는 제주섬에서 전남 해남 땅 끝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을 관곶이라 한다. 이는 조천관 시대에 조천포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관곶이라 이름 붙은 곳이다. 제주의 울돌목이라 할 만큼 배가 뒤집어질 정도로 파도가 거세다.
35. 외포연대/조천연대와 직선거리 1.8㎞에 있어 교신하였다. 조천연대와 함덕연대 사이에 위치한 연대로 신흥리의 옛 이름이 잇개/옛개 등으로 불려 왔던 마을로서 한자로는古浦라고도 쓰였던 데서 생긴 이름이다.
36. 신흥리 볼래낭할망당/박씨 할망이 15세 때 바닷가에 파래를 캐러 갔다가 왜선에서 내려온 왜구들이 겁탈하려 하자 이 곳 볼래낭 아래에 와서 죽어 당신이 되었다. 죽은 처녀의 원령을 모신 당이기에 금남당이다(제주신당조사, 2008, 제주특별자치도).
37. 신흥포구/60년대 선착장에 배 한두 척이 들어갈 형편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포구를 개라고 부른다. 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다. 개는 미세기를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 수 있게 바닷가에 인공을 가미해 만든 시설이다.
38. 신흥 포구 방사탑/선인들은 큰 재앙을 막기 위해 방사 탑을 쌓았다. 그런데 이곳의 방사 탑은 바닷속에 있었다. 이는 밀물 때면 잠기게 되게 만든 것으로 풍수지리상 신흥리는 바다 쪽이 허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남쪽 포구에 있는 탑이 큰개탑, 북서쪽 바닷가에 자리한 탑은 오다리 탑이라 부른다. 상단부 안쪽이 50㎝ 패여 있는 큰개 탑은 음을 뜻하고, 상단부에 길쭉한 돌을 세워놓은 오다리 탑은 양을 나타낸다. 바다에 세운 방사 탑에도 음양의 조화를 불어넣어 포구의 멋을 더해준다.
39. 새물깍/신흥리 포구 쪽으로 단물이 흐르는 내를 말하는데 바위구멍에서 물이 솟아나 예전에는 식수로 사용하였다. 가뭄이 들어 해안변 용천수가 거의 말라도 이 물은 마르지 않았다 한다.
40. 다문화가정센터(구 신흥분교)/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이 2012년 4월 6일 제주다문화교육센터(조천읍 신흥리 소재, 구 조천초등학교신흥분교장)를 개원하였다. 제주다문화교육센터 시설은 1만343㎡ 부지에 건축연면적 5,606㎡규모로 기존의 학교시설을 리모델링했다. 센터 내에는 다문화정보실, 상담을 하는 나눔방, 다문화체험실, 요리체험실, 멀티미디어실, 다목적실, 강의실, 세계 전통춤을 체험할 수 있는 동아리방 등을 갖추고 있다
41. 신흥리 본향 대방황수당/4.3사건시 볼래낭 할망당으로 모셔 갔다(원래 남하르방 당). 지금은 패당이 되었다. 수령 290년이 되는 보호수 팽나무가 있다(제주신당조사, 2008, 제주특별자치도).
42. 신흥공회당자리/예전에 학생들이 공부를 하였던 자리이다.
43. 만세동산/일제 강점기에 치열하게 펼쳐졌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역화 사업으로 만들어 졌다. 일대 5만8천582㎡에 기념탑과조형물, 항일기념관, 야외광장, 추모탑 등을 조성하였다. 만세동산은 전국적으로 3.1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졌던 시기인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에 걸쳐 만세동산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항일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제주항일 기념관에는 조천만세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 특징, 영향 등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디오라마(diorama.영화촬영용 축소세트)와 만세운동을 하다 구속됐던 인사들의 옥중생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고문도구 복제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