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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누리며 살자.
히 4: 14-16
필립 얀시라는 작가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첫장에 보면 덴마크 출생인 “카렉 블릭센”이라는 작가가 쓴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어촌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이곳에 수염이 하얀 루터교의 한 분파인 금욕주의 신도들 몇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과 이질되게 까만 옷을 입고 세상을 등지고 묽은 죽과 삶은 대구가 그들의 식사였다. 그들은 현재의 삶은 무시한 채 새 예루살렘만을 바라보며 속히 이땅에 삶이 속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신앙들이었다. 이 늙은 목사에게 예쁜 두 딸이 있는데 첫째는 루터의 이름을 딴 마르틴느이며 루터의 제자인 필립 멜랑히톤의 이름을 딴 필리파다. 그런 마을에 어느날 뜻밖에 손님이 찾아오는데 프랑스에서 쫓겨 도망온 “바베트”라는 영인이다. 이 여인은 프랑스의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사인데 전쟁에 의해 피난을 오게 된 사람이다. 그는 이곳에서 두 자매의 도움을 받으며 12년간 열심히 맘에 안드는 것도 많지만 순종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두자매의 아버지가 100주년째되는 생일잔치를 자신이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바베트는 자신이 복권에 당첨된 만프랑을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고급요리들을 위해 재료를 약 몇주동안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잔칫날 시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또, 자매들은 바베트의 일로 인해 금욕적인 자신들의 신앙에 문제가 될 것 같아 이구동성으로 바베트가 무엇을 하든지 아무말도 해 주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렇게 시작된 잔치에 전쟁 때 자신을 이곳에 피하도록 도움을 준 장군도 초정을 받아왔다. 그전만 해도 주일이면 마을사람들은 와서 거룩하게 찬양을 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집으로 돌아가서는 시기하고 서로 싸우고 하는 어두운 삶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밖에는 하얀 눈이 내리며 평화로운 풍경속에 음식을 대하기 시작한다. 바베트가 초청한 장군은 자신에게 대접하는 음식에 대해 연신 감탄을 자아내며 맛있게 먹지만 다른이들은 그저 약속대로 침묵을 지키며 먹고 있었다. 그러나 잔치는 사나운 시골사람들에게 신기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옛날 목사가 살아 있었던 얘기, 크리스마스이야기, 사업 계약때 사기를 쳤던 사람이 사과하는 장면 원수같이 지내던 두 노인들이 화해하는 장면들, 한 할머니가 트림을 하자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할렐루야”로 받아들이는 풍경들, 그것은 그들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그 어떤 모습보다도 행복한 풍경들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눈이 내리는 하늘을 보라보며 자신들의 신앙의 찬양을 힘차게 부른다. 한여인이 자신의 큰 돈을 드려 베푸는 희생을 통해 그 마을에 평화와 행복이 맴도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처럼 우리의 마음들이 우울한 상태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고 그것을 누릴수 있는 길들은 많은데 우린 때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신앙의 참된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신앙의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상실해 버릴때가 참 많습니다.
성경에서 한 단어만 뺀다면 우리는 삭막한, 아니 지옥과 같은 세상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속에 은혜라는 단어는 290개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은혜라는 단어가 사라진다면 우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설교를 통해 많이 듣습니다. 은혜안에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 또한 은혜속에 살아야 함을 압니다. 그런데 그럼 무슨 은혜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어쩌면 당연한 답을 가지고 묻는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른 은혜의 삶을 깨달아 우리의 신앙이 더욱 풍성해지며 견고해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말씀을 전합니다.
그럼 먼저 은혜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은혜란?
은혜를 구약에서는 “헨”이라는 단어로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호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난”이라는 동사가 있는데 그것은 “은혜롭다, 자비롭다”라는 의미로 궁핍한 처지에 빠진 사람에게 값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사용합니다. 또 “헤세드”로 긍휼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계속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며 계속하여 소망을 주시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카리스”라는 단어로 사용되는데 이것을 “기쁘다, 즐겁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은혜로 인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속에서 말하는 은혜란, 사랑의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생들을 향하여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어 그것을 받는 사람은 기쁨을 얻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은혜라고 정리할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크신 은혜란 무엇인가?(16)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은혜의 보좌” 에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즉 은혜가 시작되는 근원이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시작된 곳, 그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 9절에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디도서 2장 11절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은혜의 내용들은 많은 부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선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서론에서 말한 바베트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만프랑의 재산을 시골마을 사람들에게 성대하게 잔치를 베푼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인생전부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성육신 사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옷을 입고 제약을 받으시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의 대가로 십자가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 제일 두려운 죽음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또한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무의식적으로 넘어가는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인간의 몸을 입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추장스러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우리의 육체또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몸을 입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자체도 진정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거대한 은혜의 선물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즉 우리가 믿음으로 이렇게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냉정하게 신앙이 성장하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은혜속에 살아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사복음서에서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이 은혜라는 말을 단지 8회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3권의 성경에서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초대교회 당시 어렵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그래도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늘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큰 은혜를 받고 있음에 늘 감사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은혜속에 살아라, 은혜속에 살아라 라고 외치지만 정작 우리가 피부로 느끼며 사는 것은 매일 매일 예수님의 구속사건만을 묵상하고 그 은혜만을 얻으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지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알겠는데, 우리의 감정은 늘 기복이 심해 어느때는 많이 느끼다가도 어느 때는 황량한 사막같은 우리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론 고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세상사람들과 똑 같은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청년들이 밤에 수박밭에 들어와 수박 서리하는 것이 괘씸해서 농부가 푯말을 하나 써 놓았습니다. “이 수박밭 수박 한 통에 농약이 주사돼 있다-주인 백.” 그 후 누구도 그 수박밭에서 수박 서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주 뒤 또 하나의 푯말이 세워졌습니다. “이 수박밭에 있는 수박 두 통에 농약이 주사돼 있다. 한 통은 주인이 주사했고 한 통은 우리가 주사했다-도적 백.” 그 날로 수박밭 주인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수박을 한 통도 팔 수 없었고 청년들도 한 통의 수박도 따먹을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 우스운 이야기는 요즘 세대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들 잘되는 것 못보고 자신들의 이익만 채우려는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너도 나도 모두 제대로 유익을 얻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은혜속에 살 땐 남에게 배려도 하고 온전하게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은혜를 잊으면,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는 성품을 보게 됩니다.
기도원에 올라가 많은 은혜를 받고 온 분들에게 대체적으로 따라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누군가 꼭 시험을 해서 일명 은혜 충만했던 것을 다 날리게 하는 사건들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은혜에 대한 지식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면 그 눈으로, 그 귀로, 그 입으로, 그 행실로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순간의 감정으로 날라가고 들어오는 그런 값산 것을 은혜라고 표현하기에는 어거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내가 기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은혜를 주시고 내가 금식을 한다고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보물을 발견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그것이 은혜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배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4. 즉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이 흔들리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무언가 부흥회를 하거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은혜를 받아야만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꼭 내마음에 은혜가 풍성히 거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하면 일주일 정도로 약효는 끝나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속에 계속 은혜가 머물며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큰 은혜의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은혜의 보좌 앞에 우리는 나아갔고 그것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바로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일까요? 교회에서는 말씀을 듣고 무언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데 교회 문을 나서면 다른 사람의 모습이 되는 것 왜 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된 생각으로 인해 인간중심적인 생각으로 인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3장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식물이란 헬라어 “브로마신”이라는 단어로서 “먹을 것, 양식, 밥, 식물” 등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육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즉 육체적인 것을 따라 찾으려 할 때 우리의 영적인 부분은 둔하여져서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하심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기사에서도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첫째 날 빛, 둘째날 궁창, 셋째 날 풀과 채소 과일, 넷째날 해달별, 다섯째날 새, 물고기 여섯째날 육축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조성하시고 난 다음 사람을 만드셨고 그 속에서 누리며 살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속에서 공급하시는 그 모든 것을 깨닫고 받으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5장 7절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심에 해답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볼 땐 억울하고 화날 수도 있고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만드시고 공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나를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 베푸시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속에 요셉이라는 인물을 알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은혜란 그가 살아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 그리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에 대한 미움과 배신은 사람에게 있어 상처가 될수 있고 평생 한으로 독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요셉을 요셉되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또한 그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베푸신 은혜를 요셉을 믿었고 그래서 요셉은 은혜로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9장 4절에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라고 말씀합니다. 노예인 그가 보디발 장군의 눈에 들어 가정 총무로서 살아갑니다.
21절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이지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에게 은혜를 받아 살게 하십니다.
40장 14절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감옥안에서 꿈을 해몽해 주면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결국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은혜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을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과 상봉하여서 그들에게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7절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본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은혜로 산 요셉은 자신의 상황속에서 형들에게 도리어 은혜를 베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을 보면 요셉은 복수 할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형들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인정하고 누리며 살았기에 그는 총리가 될 수 있었으며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속에 이루어졌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닮고 싶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참된 신앙의 모습 말입니다.
얼마전 일입니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저 셋이서 E마트에 쇼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따라 아들이 장난이 심해지고 까부는듯한 느낌을 받아서 제 마음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나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그만 내가 뒤에서 끌고 가는 줄 알고 힘차게 달려가다가 돌아가야 할 위치에서 그만 쇼핑카가 속력이 붙어 꺽는다고 꺽은 것이 계산대에서 계산을 기다리던 가족 중 한 여성분의 손목을 치며 거기있는 쇼핑카에 부딪히고는 섰습니다. 그런데 쇼핑카에 부딪힌 여인이 너무 아파서 울고 있고 그의 남편인 사람인 걱정하며 보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속상해 있었습니다. 화도 나고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해서 생긴 일이었으니까요? 아들은 놀래서 울고 있고 여인은 계속 아프다며 흐느끼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괞찮다고 하는데 할수없이 파스를 사서 드리고 연락처를 드리고는 헤어졌습니다.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아이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렸다면 내가 포용해 줄 수도 있는 것을 왜 그랬을까? 너무나 오랜만에 같이 온 아이는 마트를 다니며 너무 좋아했고, 즐거워 했습니다. 가족이라도 늘 저녁에 보거나 늘 같이 할 시간이 없었는데 이렇게 얼굴보며 같이 움직이니 아이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 아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저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면서 저 자신에 대해 속상해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건을 통해 아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잘 해 주려 합니다. 아내에게도 그렇고 모든 것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왜 내가 화를 배거나 분을 표현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발견치 못하고 내 육체적 생각의 중심에 움직이다 보니,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환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것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큰 은혜를 덧입고 살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손길을 실체적으로 피부로 느끼며 사느냐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은혜라는 부분을 무슨 복권에라도 당첨되듯 큰 은혜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을 볼수 있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자 아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제 아내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야 네가 사랑할 거 아니냐?" 라고 하셨습니다.
계속 대화가 진행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아껴줄 거 아니냐?"
"그런데 하나님, 가만히 보면 아내가 좀 ‘맹한’ 데가 있어요. 그건 왜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야 아내가 너같은 것을 사랑할 거 아니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서로 도우며 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고 우리의 삶속에 퍼져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며 계속해서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속에 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생활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의 힘을 얻는 것은 모든 공예배도 중요하지만 Q. T 생활이 중요함을 깨답습니다. 혹 이글을 보신다면 신앙의 리더와 상담하셔서 Q . T 생활을 하시기를 권합니다. 공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매일 매일 묵상의 삶을 통해 우리는 더욱 풍요로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을 발견하며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