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San Giovanni della Croce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St. Joannes de Cruce, C. D. E
ST.JOHN of the Cross
24 June 1542 at Fontiveros, Spain
-14 December 1591 at Ubeda
Beatified;25 January 1675 by Pope Clement X
Canonized;27 December 1726 by Pope Benedict XIII
Name Meaning;God is gracious (= John)
신비신학자,시인
요한은 성인이다. 그것은 요한이 그의 이름 앞에 ’십자가의’라는 말을 붙여야 할 만큼
자신의 생활에서 영웅적인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완전히 실현되게 되었다.
"만약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바로 요한의 생애를 표현한 이야기이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파스카의 신비는 개혁자로서,
신비 시인으로서,사제 신학자로서의 요한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1567년, 25세에 갈멜 신부로 서품된 요한은 아빌라의 데레사를 만나
그녀와 마찬가지로 갈멜의 초창기 규칙을 지키기로 허원했다.
데레사의 동료로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뜻으로 요한은 개혁 사업에 뛰어들어 개혁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점점 심해지는 반대와 오해, 박해 그리고 감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기 위해서-어둡고 축축하고 비좁은 감방에서
오직 하느님하고만 몇 달씩 앉아 있으면서 십자가를 뼈저리게 깨닫기에 이른다.
이 무슨 모순인가!
죽음과도 같은 감옥에서 요한은 시를 읊으면서 생명에로 나아 갔다.
세상에는 수많은 신비가가 있고 수많은 시인이 있지만 요한은 감옥이라는 자신의 십자가 안에서 영적 아가로,
하느님과의 신비한 일치에 따르는 황홀 상태를 표현하는 신비 시인으로서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고뇌가 황홀로 인도하듯이 요한은 갈멜 산으로 올라갔다.
한사람의 인간이며 그리스도인이고 갈멜 수도회의 신부로서 그는 자기 자신안에서 정화되는 승화를 체험했다.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 안에서도 그것을 묘사하고 분석했다.
그의 산문 저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대가,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좁은 길,
다시 말해서 엄격한 규율과 자아의 포기,정화를 강조하는 데 뛰어나다.
요한은 단호하고도 힘있게 복음의 모순을 강조한다.
즉 십자가는 부활로 인도하고,고통은 황홀로,어둠은 빛으로,포기는 소유로,
자기부정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너희가 만약 너희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다면 너희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요한은 참으로 ’십자가의’ 사람이었다.그는 짧지만 충만한 인생을 살다가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요한은 그의 생활과 저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말을 한다.
우리는 부유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데로 기울어지며 심지어
자기 부정,절제,정화,금욕,규율 같은 말에 대하여 전율을 느끼기까지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요한의 메시지는 복음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크고 명백하게 들린다.
"너희가 참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래서는 안된다."
토마스 머튼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금욕주의를 신비주의와 분리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성요한에게는 어둠과 빛,고통과 기쁨,희생과 사랑이 너무나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
우리는 그것이 때로는 같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일치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렇게도 맑은 샘은 없기에
티없이 맑고 빛나는
나는 안다네.
그곳에서만 빛인 나온다는 것을
밤이라 하더라도
(십자가의 성요한 어록에서)
세고비아 가르멜 수도원에서의 성인의 신비체험 그림
십자가의 성 요한 (스페인, Juan de la Cruz :1542-1591)
성인, 교회학자, 신비가. 축일은 12월 14일.
아빌라(Avila)의 성녀 예수의 데레사 (Teresa de Jesus)와 함께 가르멜수도회를 개혁한 인물이다.
성인께서 그린 십자가그림(아빌라엔카프나씨온수녀원소장)
[생애]
21년간의 세속에서의 생활, 5년간의 완화가르멜에서의 생활, 23년간의 개혁가르멜에서의 생활로 구분된다.
이 세 시기에 이름의 변화도 함께 이루어진다.
1) 예뻬스의 요한 (Juan de Yepes); 세속에서 (1542-1563)
아빌라 근교 폰띠베로스(Fontiveros)에서, 직조공(織造工)들이었던 곤쌀로 데 예뻬스 (Gonzalo de Yepes)와
까딸리나 알바레쓰 (Catalina Alvarez) 사이에서, 세 아들
-프란씨스꼬(Francisco) 루이스(Luis) 후안(Juan)-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극심한 빈곤을 체험했고, 아버지와 형 루이스가 일찍 죽었다.
성인에게 말씀하신<십자가 지신 예수님> 그림.(세고비아 가르멜수도원 소장)
2) 성 마티아의 요한 (Juan de Santo Matia); 완화가르멜에서 (1563-1568)
1563년 메디나 델 깜뽀 (Medina del Campo)에서 가르멜수도원에 수련자로 들어가
’성 마티아의 요한 수사’ (fray Juan de Santo Matia)라는 이름을 받고 이듬해에 서원을 발했다.
1564년부터 4년간 살라망까 대학 (Universidad de Salamanca)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1567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가르멜회에서의 환경과 생활방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카르투시안(Cartuja) 수도회로 옮겨갈 것을 생각하던 중,
같은 해 여름 예수의 데레사 수녀와 만나 가르멜개혁에 가담하게 되었다.
성인 유해중 정강이뼈(세고비아 가르멜수도원소장)
3) 십자가의 요한 (Juan de la Cruz); 맨발가르멜에서 (1568-1591)
1568년 11월 28일 두루엘로(Duruelo)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데레사적으로 개혁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열렬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과, 인근 마을들에서 사도직을 행했다.
만쎄라 데 아바호 (Mancera de Abajo), 빠스트라나(Pastrana),
알깔라 데 에나레스 (Alcala de Henares)에서 살았고,
1572년에는 예수의 데레사 수녀의 요구에 따라 아빌라의 엔까르나씨온(Encarnacion) 수녀원의
고해신부가 되어 5년간 영적 지도에 전념했다.
1577년 10월 2일 밤에 수도회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가르멜 수사들에 의해 납치되어
똘레도(Toledo)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었고,
1578년 8월까지의 이 10개월의 기간은 그에게 신비적이고 인간적이고 문학적인 성숙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감옥 안에서 그는 ’로망스’들 (los Romances)과 ’내 그 샘을 잘 아노니’ (la Fonte)와
’영혼의 노래’ (Ca- ntico espiritual) 시(詩) 일부를 썼다.
감옥에서 탈출한 후 남부 안달루씨아(Andalucia) 지방으로 옮겨가,
하엔(Jaen)의 엘 깔바리오 (El Calvario), 그라나다(Granada)의 로스 마르띠레스 (Los Martires) 수도원의
원장직과 안달루씨아 관구장직을 역임했고,
그라나다에서는 몇몇 시(詩)들 뿐 아니라 네 권의 주해서들을 체계적으로 집필했다.
1588년 6월에 마드리드(Madrid)에서 소집된 공식적인 첫번째 맨발가르멜 총회에서 제1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맨발가르멜회의 총본부가 된 세고비아(Segovia) 수도원의 원장직을 겸임했다.
1590년부터 그라씨안(Gracian) 신부와 개혁가르멜 수녀들에 반대한 도리아(Doria) 신부의 일련의 조치들에
반대함으로써 갈등이 일어났고,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벗어난 그는 멕시코로 가기로 결정되었으나,
병(病)에 걸려 스페인에 남게 되었다.
9월말에 우베다(Ubeda)에 도착해서 병고(病苦)와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
12월 13일 밤 자정이 막 지난 무렵 (14일) 선종했다.
1593년 유해는 세고비아로 옮겨졌고, 1675년 교황 끌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
1726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스페인어권의 모든 시인(詩人)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인 유해가 모셔진 금빛 관 (상단.세고비아 가르멜수도원 성당 안)
[작품들]
성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저술가’는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1578년부터 1586년까지 (성인 나이 36세부터 44세까지)의 기간에 저술되었고,
중요한 작품 세 가지는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저술에 대한 열정은 똘레도의 감옥에서 시작되었고,
한 때 동료였던 수도자들에게 배척당하고 ’순명하지 않는 자’로 비난받는 고통스런 9개월의 감금생활 중에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체험’을 어떻게든 표현하려는 노력 안에서
결국 그는 ’시(詩)’라는 표현형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후에 그 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해설’이 주요 저서들이 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일괄하면 다음과 같다:
I. 소품들
1. 《시집(詩集)》(Poesia): 두 편의 ’로망스’, 다섯 편의 시(詩), 다섯 편의 주해(註解)들.
2. 《빛과 사랑의 말씀》(Dichos de luz y amor): 200여편. 절반 가량이 친필로 남아있음.
3. 《경계의 말씀》(Cautelas)과 네 편의 《충고말씀들》(Avisos): 수도공동체생활을 위한 규범.
4. 《서간집(書簡集)》(Epistolario): 33편 정도의 편지들. 어떤 것들은 단편들임.
II. 저서들
5. 《가르멜의 산길》(Subida del Monte Carmelo): 3권. 각 권은 15; 32; 45장으로 구성됨.
6. 《어둔 밤》(Noche oscura): 2권. 각 14장, 25장으로 구성됨.
7. 《영혼의 노래》(Cantico espiritual): (첫째 판과 둘째 판). 각 39절 40절로 구성됨.
8. 《사랑의 산 불꽃》(Llama de amor viva): (첫째 판과 둘째 판). 4절로 구성됨.
성인께서 선종하신 우베다 수도원 성당(현재 모습)
[영성]
네 권의 주요 작품들의 원천인 세 편의 시 -〈어둔 밤〉〈영혼의 노래〉〈사랑의 산 불꽃〉- 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상처입은 영혼이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사랑의 노래"이다.
삶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인은
그 하느님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꿰뚫어보고
이 소명에 충실히 응답할 수 있도록 모든 영혼들을 인도하기 원하는 열망에서 영적인 가르침을 편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合一)에로 불리워진 인간의 소명!
사랑이 인간의 최종적인 소명이고 유일한 소명이라는 사실과,
사랑이 인간 실존에 총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과,
사랑이 인간의 실존을 하느님을 향한 점진적인 여정(旅程)으로 변모시킨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
성인의 작품들이다.
성인의 영성은 한 마디로 사랑 자체이신 분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고,
그 과정에서 대신덕(對神德)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마땅히 하느님께로 향해야만 할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정향(定向)과는 반대되는 인간의 비참함을 지적하고,
자아 재건의 길인 ’어둔 밤의 길’ 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찾고 올바르게 사랑하는 길을 가르친다.
(가르멜수도회홈에서.http://mr.catholic.or.kr/carmelite)
1542년경 스페인 아빌라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가르멜회의 회원으로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권고를 받아 1568년경 자기회에서 최초로 개혁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노역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1591 년 우베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여러 가지 영성 저술들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성덕과 지혜에서 탁월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의 [영적 찬가]에서
(Red. B, str. 36-37, Edit. E. Pacho, S. Juan de la cruz, Obras
completas, Burgos, 1982, pp. 1124-1135)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진 신비의 지식
거룩한 학자들이 발견하고 이 생활 상태에 다다른 영혼들이 알게 된 신비와 경이가 많지만
아직도 그들이 말할 것과 이해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들어가야 할 깊은 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리 깊이 파 들어가도 끝에 도달할 수 없는 풍부한 광산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보화를 매장하고 있는 광맥들이 허다하여 매번 여기저기에서 새 보화와 새 광맥을 찾아냅니다.
이 때문에 성 바울로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 속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먼저 내외적 고통이라는 작은 문을 통해서 영적 지혜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대로 이 보화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 알게 될 수 있는 것마저 먼저 아는 고통을 당하거나
하느님께로부터 수많은 영적이고 감각적인 은혜를 받거나
또는 많은 영적 수련을 미리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이 모든 은혜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에 다다르기 위한 선결 조건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지혜보다 더 낮은 은혜들입니다.
영혼이 고통에다 위로와 열망을 두지 않거나 또는 여러 겹으로 된 고통의 숲 속을 거치지 않고서는,
여러 겹으로 된 하느님 보화의 울창함과 지혜에 결코 이르지 못함을
우리가 단 한 번 결정적으로 깨달았으면 합니다.
또한 신적 지혜를 참으로 갈망하는 영혼은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십자가의 숲 속에서 고통받는 것을 원해야 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이 때문에 성 바울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환난에서 실망하지 말고 힘을 돋구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
하느님 보화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는 문은 십자가라는 문입니다. 그 문은 좁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들어가고 싶어하는 이들은 적지만
그것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많습니다.
(가톨릭홈에서)
스페인의 카스틸레 지방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난 후안(요한) 데 이페스 (1542-1591년)는
부친과 사별한 후에 메디나 델 캄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563년에 가르멜회에 입회하고, 1567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고향을 찾았을 때 성녀 데레사를 만났다.
이때 그는 가르멜 생활보다 더욱 엄격한 카르투시오 회원이 되려는 의사를 피력하자,
데레사가 그를 설득하여 가르멜 개혁 운동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1568년 요한과 네 명의 동료들이 개혁 수도원을 세웠고, 자신의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소위 맨발의 가르멜회의 시작이다.
그가 개혁 가르멜의 보급에 힘쓰던 중, 가르멜회 총장에 의해 톨레도에서 투옥되었다.
이때 그의 첫번째 시가 기록되었고, 9개월 후에 탈출하면서부터 저술활동에 정열을 쏟았다.
그의 반대자들이 목숨까지 끊임없이 위협하므로 그가 라 페뉴엘라로 피신했지만 열병에 걸려
우베다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성 요한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의 한 분으로 꼽히며,
그의 저서들은 영성 분야의 고전으로 인정받는데 가르멜산의 등반, 영혼의 암야, 사랑의 불꽃, 영적 찬미가는
교회의 본질을 구체적인 인간 존재와 더불어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로 단정한 시각이 크게 돋보인다.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홈에서)
16세기에는 이른 바 종교 개혁자들이 갖가지 이단 사설을 날조해 인심을 현혹시켰으므로
수많은 신앙이 빈약한 자들이 참 종교를 버리게 된 비참한 시대였다.
그 반면에 경사스러운 것은 진정한 종교 개혁자인 성인들이 많이 나왔고,
교회 내부를 쇄신하는 한편 열렬한 전교로 한때 쇠퇴되었던 교세를 즉시 회복시켰다는 일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실로 그 중 뛰어난 성인이며 신비 신학자였다.
그는 1542년 6월 24일 스페인의 카스티야 주 폰티베로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조상은 명문의 귀족이었으나 가세가 몰락해 그가 출생할 당시는 매우 가난했다.
그의 본명이 요한임은 생일이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일과 같아 이름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 주보 성인을 방불케 할만큼 사명을 성취한 일을 보아 이것 역시 우연한 일만이 아니라 생각된다.
아버지는 그가 아직 태중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여러 가지 생활고에 쪼들린 어머니는 마침내 그 마을에 살 수 없어 메디나라는 곳으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요한을 처음엔 목수의 조수, 다음은 양복점에, 또는 조각가의 제자로 보냈으나,
주님의 뜻이 딴곳에 있음인지, 그런 일에는 도무지 보람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후 요한은 메디나 병원 창립자인 독실한 한 재산가의 호의로 그 병원에서 간호인으로 채용되었으며,
매일의 휴무시간을 이용해 예수회가 경영하는 신학교도 통학했다.
이리하여 그 병원 전속 신부가 되려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는 그가 신학교를 마친 후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했다.
십자가의 요한은 수도명으로 착복식 때 붙인 이름이며
실로 그로부터의 그의 생활은 골고타의 길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가르멜 수도회도 퇴폐한 시대사조의 악영향을 받아 수도자들도 완덕에 대한 열망이 없고
원내 풍기도 매우 어지러운 경향이었다.
이를 염려한 예수의 성녀 데례자는 우선 자기 소속인 가르멜 수녀회의 개혁에 착수하며
십자가의 요한의 높은 덕을 받들어 그의 지도를 청하는 한편 그에게 남자 수도회의 개혁을 권유했다.
이에 요한은 뜻을 같이한 안토니라는 수사를 동반해 극히 가난한 수도원에서
오로지 엄격한 금욕 극기와 교행의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의 비좁은 방은 앉아서 다리를 마음대로 펼 수 없는 정도였으며, 서있기도 힘들만큼 천정이 낮았다.
더욱이 눈, 비가 새 들어오는 형편이었으나, 조금도 싫어함 없이 항상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지냈으며
맨발로 마을로 내려와 부락을 돌아다니며
요한 세례자같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고하고 죄악을 사정없이 규탄했다.
그는 성스러운 일상 생활과 수덕에 대한 열의에 탄복한 이들은 그들을 찾아와
그 복음적 생활을 같이 할 것을 원했으며, 그 지원자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요한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 손수 그 수련을 담당하고 수도 생활의 중심인 기도와 희생의 정신을 고취했다.
한편 냉랭하고 타성에 젖은 가르멜회 수사들은 요한의 이러한 일거일동이 그들의 양심에 심한 가책만을
일으키므로, 자신들의 잘못이나 비행은 우선 덮어놓고 원한을 품어 갖은 수단으로 그를 괴롭혔다.
요한이 저술한 신비서 “가르멜 산에 오름(갈멜의 산길)”과 “영혼의 암흑(어둔밤)” 중에서
그는 그런 외부에서 오는 고통을 비롯해 하느님의 안배로 받는 영적 시련,
즉 하느님과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는 듯한 끝없는 고독감에 관해 기록했는데,
그 같은 괴로움은 그가 걸은 가시밭길의 불과 한 걸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가르멜회 총회가 열리자 그를 오해한 총장은 톨레도 수도원의 동굴 같은 지하실에 감금시키도록 엄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것을 묵묵히 감내하며, 무정한 형제들에게 일언반구도 항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덕을 쌓게 하는 은인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탁월한 성덕이 오했동안 숨겨질 리가 만무했다.
곧 요한의 결백함이 드러나게 되어 교황 비오 5세 및 그레고리오 13세는 그의 이상을 받들어
수도에 전념하는 제자들의 회를 특수한 가르멜회로 공인 비준했다. 그에 대한 모든 오해는 해소되었다.
그 수도회가 아무 지장 없이 발전 융성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실로 이때부터였다.
어디까지나 겸손한 요한은 많은 이들의 간곡한 요망에도 불구하고 그 회의 총장직을 끝내 사양하고,
1579년부터 2년간은 바에사 신학교 교장으로, 다음은 그라나다 수도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엄하고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는 관대함으로 대했으며,
한편 병자를 방문해 손수 간호하며 죄인들의 가련한 영혼 상태를 간파해 회개시킨 것이 얼마인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되자 세인의 그에 대한 신망은 보통이 아니었고 그의 지도를 바라는 이들의 줄이 끊일 사이도 없었으며
그가 은수 생활을 동경해 심산에 피신해도 곧 발견되어, 충고, 전구, 위로, 격려를 바라는 이가
무수히 따라오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요한의 골고타의 길은 아주 끝난 것이 아니었다.
1588년에 열린 가르멜회 총회 석상에서 회원 중의 어느 수사가 개혁 이후의 회칙이
너무 엄격하다는 이유로 다소 완화된 회칙을 계획하고 다른 이를 선동하고 있었다.
물론 요한이 그러한 유약한 자를 용인할 리 없었다.
그리하여 그런 무리들의 비난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상부의 명에 의해 미국으로 전임하게 되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 열병에 걸려 우베다라는 마을에 있는 수도원에 머물렀으나, ]
역시 그곳에서도 그 원장으로부터 갖가지 시련을 받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온몸이 종기로 덮이고 고열은 온몸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형언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그가 병마와 싸우기 4개월,
마침내 1591년 12월 14일에 눈물 많은 이 세상을 하직했다.
생전에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걸은 요한은 사루에도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영광을 누렸으니,
그는 1675년에 시복되었고, 1726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그의 신학, 특히 신비 신학의 명저에 나타나는 초자연적 깊은 지식으로
1926년에는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스페인의 카스틸레 지방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난 후안(요한) 데 이페스 (1542-1591년)는 부친과 사별한 후에
메디나 델 캄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563년에 가르멜회에 입회하고, 1567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고향을 찾았을 때 성녀 데레사를 만났다.
이때 그는 가르멜 생활보다 더욱 엄격한 카르투시오 회원이 되려는 의사를 피력하자,
데레사가 그를 설득하여 가르멜 개혁 운동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1568년 요한과 네 명의 동료들이 개혁 수도원을 세웠고, 자신의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소위 맨발의 가르멜회의 시작이다.
그가 개혁 가르멜의 보급에 힘쓰던 중, 가르멜회 총장에 의해 톨레도에서 투옥되었다.
이때 그의 첫번째 시가 기록되었고, 9개월 후에 탈출하면서부터 저술활동에 정열을 쏟았다.
그의 반대자들이 목숨까지 끊임없이 위협하므로 그가 라 페뉴엘라로 피신했지만 열병에 걸려
우베다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성 요한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의 한 분으로 꼽히며, 그의 저서들은 영성 분야의 고전으로 인정받는데
가르멜산의 등반, 영혼의 암야, 사랑의 불꽃, 영적 찬미가는 교회의 본질을 구체적인 인간 존재와 더불어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로 단정한 시각이 크게 돋보인다.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스페인의 옛 까스띨레의 폰띠베로스에서 태어난 후안 데 이페스 이 알바레스는 비단짜는 사람의 막내둥이였다.
그는 부친이 사망한 뒤에 어머니가 정착했던 메디나 델 깜포에서 교육을 받았고,
17세 때에는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메디나 병원장을 위하여 일하기 시작하였다.
1563년, 그는 메디나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후안 데 산토 마시아란 이름을 받고,
살라망까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1567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가 고향집을 찾았을 때 성녀 데레사를 만났는데, 이때 자신은 가르멜 생활보다 더욱 고적하고
깊은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카르투시안이 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자,
그녀는 그를 설득하여 가르멜에 남아 개혁 운동은 함께 하자고 하였다.
1568년 11월 28일, 요한과 4명의 동료들이 두루엘로에 개혁 수도원을 세우고,
요한은 이때 자신의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이라 하였다.
이것이 맨발의 가르멜회의 시작이다.
그는 개혁 가르멜의 보급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던 중,
1577년에 가르멜회의 총장에 의하여 똘레도에서 투옥되었다. 이때 그의 첫본째 시가 쓰여졌다.
9개월 후에 탈출에 6성공한 그는 개혁 가르멜회의 여러 직책을 맡는 한편,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579년, 맨발의 가르멜회는 인정받았고,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가르멜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고, 1582년에는 그라나다의 원장,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의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에 가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어, 그의 반대자들이 수도회에서 쫓아내려고 애썼다.
그는 곧 라 페뉴엘라에 당도하였으나, 열병에 걸려, 우베다 수도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운명하였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의 한분으로 꼽히고,
그의 저서들은 가장 유명한 영성 분야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혼의 암야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비오 11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부산교구홈에서)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것에도 발을 멈추지 말라.
- 십자가의 성 요한 -
성인께서 그리신 <완덕의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