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혼의 벌판을 배경으로 멋진 돌려차기를 구사하는 스크린 속 터프가이도 아니고 그윽한 눈동자로 소녀의 속살을
탐닉하는 분위기파 꽃미남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그들의 대리만족으로 헤벌레 미소 짓는 아류 또한 절대 아니다. 웬만하면 생긴 대로
놀자는 게 내 특기다. 스스로 ‘거칠고 섬세함의 합종’이라고 규정짓지만 그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결론일 확률이 높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내 안의 나’와 ‘남이 보는 나’가 다름을 깨달은 것은 기실 꽤 오래된 사연이다.
언제부터였나, 80년도쯤부터 툭 하면 소맷자락 잡히는 검문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터미널 부근이나 기차 대합실에서
서성이다 보면 잠바 차림의 사내가 옆구리 찌르며 주민등록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친구들과 빙
둘러앉아 키타줄 팅기고 손뼉 맞추는 상쾌한 자리에서조차 하필 나만 딱 찍어 검문을 해대니 도대체 내 얼굴에서 쏟아지는 카리스마가
얼마나 강렬하다는 얘기인가? 막 키타줄을 팅기려는 순간 잠바 차림의 사내가 컨테이너박스 간이 검문소로 끌고 가려해서 한 바탕
싱갱이를 벌일 뻔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대처 방식이 다르다. 컨디션이 나쁠 때는
“또야?”
하며 적당히 인상을 구겨주지만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제가 도둑놈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운동권처럼 보입니까?”
하고 여유룰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사복형사들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다가 피싯피싯 웃기도 한다. 기실 내 젊은 날의 행적 스타일상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고 단지 네가티브의 전형이었을 뿐이다. 경찰들은 뜨악하니 쳐다보다가.
“기다려 보쇼. 조사하면 나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잠수함 탄 신분이 아니므로 눈꼬리 내리는 분위기 잡으며 일부러 담뱃재를 바닥에 흘리기도 했다. ‘담뱃재 줏어담으쇼’ 하면 욱 하고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형사 한 사람이 나의 스프링 습작노트 겉표지를 보다가.
“혹시 글 쓰시는 분 아닌가요?”
물어보기도 해서 나를 철없이 행복하게 만들기도 했다. 좋아하는 단어를 만난 행복감으로 나는 갑자기 얼굴을 확 펴고 헤벌레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랬다. 한 때 책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남의 글만 죽어라고 읽으면서 자존심의 격을 높인
적도 있었다. 권수를 채우기 위해 헌 책방에서 철 지난 서적 수십 권씩 사재기로 차곡차곡 쌓아놓으면서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다.
책은 최고의 장식품이었고 지적 우월감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남의 집에 가서도 먼저 책이 많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살핀
다음 ‘책에 과연 주인의 손때가 제대로 묻었는가’를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거친 외모에서도 아주 쬐끔씩은 지식인
냄새가 풍긴다고 내 모습을 규정짓기도 했다.
세월은 피도 눈물도 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여고교사를 짤리고 학원강사와 신문사 잡지사를 부평초처럼 전전하던 해직교사
시절도 지났고 다시 복직을 하고도 강단 적응이 어려워 이맛살 찌뿌리던 그 시절이니 인생 중태기 즈음이다. ‘이십대는 피부로
버틴다’는 청춘도 쏜살같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기본 바탕을 믿으며 단 한 번도 남성화장품을 사용한 적이 없다. 머리칼도 빗지
않았고 옷이건 구두건 한번 걸치면 떨어질 때까지 바꾸지 않았다. 풀자루형 뱃살과 속알머리 빠진 머리칼 그리고 새집처럼 벌어진
이빨과 불콰하게 쩔은 얼굴 빛. 그게 나였다. 남들은 과장되게 혀를 내두르기도 했지만 나는 끝까지 그 스타일만 고수했다. 관리자
유형들도 ‘품위를 지키라’고 충고하지만 나는 이게 ‘내 스타일의 품위’라며 고치지 않았다.
해마다 삼월이면, 신입생들이 모여 있다가 얼핏.
“아저씨. 유리창좀 바꿔주세요.”
하고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면.
“내가 아저씨 중에서 가장 유리창을 잘 끼우는 왕초 아저씨인 줄 어떻게 알았지? 짜샤.”
실제로 박치기 한 번 넣어준 다음 실제로 유리창 몇 장 끼워주기도 했다. 교육실습 나온 대학생들도 석별의 술자리에서.
“왜 출석부를 끼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실토하면 나는 재미있다는 듯 비시식 웃는다. 그리고 속으로 ‘남루한 외모 속에 늦가을 배추처럼 속이 꽉 찬 선생님입니다’ 속으로 옹물며 자아도취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 스타일로 봐줬던 경찰관의 말도 그냥 슬쩍 던져준 건빵조각이었음을 안다. 도서관 경비 아저씨가 '이상과 현실의
고리리'를 확실히 증명해주었다. 국립대 도서관을 들어가는데 경비아저씨가 힐끗 쳐다보더니 줄레줄레 따라온다. 출입구 자동막대기
시스템을 지나치려던 순간이다. 하필 아내도 옆에 있던 자리다.
“왜요?”
아내에게만큼은 그런 행색 보이기가 싫었던 터라 눈동자에 불빛을 번뜩이며 경비 아저씨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경비아저씨는 잠깐 훑어보더니 ‘어라, 생김새보다는 얼굴이 쬐끔 낫네’ 하는 표정을 짓다가.
“아니요?”
뒤로 몸을 뺀다. 나는 되받아치고 싶은 심술로 부글부글 속을 끓인다.
“저는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안됩니까?”
‘도서관에서조처 글 쓰는 사람으로 안 보이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봄날의 햇살이 너무 화사해서 잠깐 숨을 크게 뿜었을 뿐이다.
비 오는 봄날의 아침.
시내버스를 타기도 거시기해서 모처럼 택시를 잡았던 날이다. 소도시 시내버스 노선은 순환도로가 아니라 완전 지그재그식이라
승용차 10분 거리가 버스로 50분씩 걸리기도 한다. 정류장부터 학교까지 질퍽거리기가 싫은 것도 이유였다.
“여중(女中)갑시다.”
그런데 박정희식 선글라스를 낀 택시 기사가 백밀러로 힐끗힐끗 곁눈질하며 갸우뚱거린다. 봄비 내리는 건너편 강변으로
는개가 피어오르는 장면이 영락없는 수채화의 한 폭이라고 감동하는 중이었다. 나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제목만 듣고도 가슴을 설레는 센티멘털리스트다. 그렇다. 비가 내리면 온갖 새싹들이 우쑥불쑥 대궁을 세워서 순식간에 초록빛
대지를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초록빛 물감을 쏟아부었거나 초록빛 보자기를 덮어씌운 게 틀림없다. 신록의 오월이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소도시의 건물 행렬이 비안개에 파묻혀 형체가 흐려지면서 초록과 잿빛이 버무려지는 것 같다. 아, 진짜로
아름답다. 그런데.
“그 학교 교장이 그리 못됐나요?”
“엣?”
택시기사의 뜽금없는 불평에 나는 어리둥절한다.
“그 학교는 비 오는 날 왜 공사를 시키냔 말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저씨 여중에서 공사하는 사람 아뉴?”
윽, 급소를 찔린 것처럼 배를 싸안고 엎어질 뻔했다. 아주 짧은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정지되었던 것 같다. 나는 차마 그 학교 국어선생이라고 고백하지 못한 채 슬그머니 자세를 다듬는다.
“제가 힘이 젖나게 세게 보입니까?”
그런데도 택시기사는 ‘비 오는 날은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말만 재삼 강조한다. 봄비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