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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 令 面
沿 革
신라 때 芼兮縣으로 그 뒤 景德王 16년(757)에 孝令縣(孝令面·
中里面·缶溪郡 一部)으로 부르고 嵩善郡(現 善山郡)에 속하게 되었다. 孝令이란 지명 유래는 朴約之란 사람이 17세 때 부상을 그 후에 모상을 당하여 廬幕에서 각각 3년간 묘를 지키며 효를 정성껏 하던중, 어느날 들불이 일어나 여막에 까지 번지려 하자 約之가 소리쳐 울었더니 불이 저절로 꺼졌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주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孝자와 令자를 따서 孝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孝令은 고려 恭讓王 2년(1390)에 軍威郡으로 편입 되어 1914년에 中里面(현 水 1洞)과 孝令面(현 場基洞)을 합쳐 孝令面으로 호칭하고 면사무소를 中九洞으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沈 燮)
巨 梅 洞
거매(巨梅)§ 洞里의 모양이 매의 모양이고 큰 梅花나무가 있었다고 巨梅라 불려졌다 한다. 마을 뒷편 박태산 꼭대기에 보양사의 절터가 있으며 그 옆에 천당수라는 큰 못이 있어 가물 때 고사를 지내면 뜻이 이루어졌다 한다. 巨梅洞 동편에 윷판 처럼 생긴 넙적한 바위가 있는데 金庾信 장군이 잠깐 동안 윷을 놀고 간 손가락 흔적이 있다 하여 그 바위를 유판지라고 하며 윷을 놀다가 金庾信 장군이 백마를 타고 한번에 뛰어 닿은 곳이 지금의 將軍洞이라 한다. 마을 생성시에는 魯氏·연안 李氏·밀양 朴氏 등이 주성이었으나 지금은 각성 58 가구가 살고 있다.(南實景: 男 86 外 4名)
여림실(如林實)§ 숲이 울창하고 산중 과일이 많아서 如林實이라 하였으며 일설에는 如林池 둑에 큰 과실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여림실은 현재의 巨梅洞과 여림실 입구, 즉 속칭 팔공산천과 가산천의 합류 지점 부근 들녘이었는데 朴先達의 부친이 博陀山 아래 如林池를 만들어 그 곳이 물이 맑고 따뜻하여 일부 집이 현 如林實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전하며, 현재는 巨梅洞 본 마을에서 1㎞ 쯤 떨어진 골에 張氏 등 15가구가 살고 있다.(金昌圭)(殷熙湯 : 男 73 外 4 名)
20高 谷 洞
한실·대곡(大谷)§마을 뒤 계곡이 급하고 높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며, 마을
중간에 缶林 洪氏의 선조 재실이 있다. 골짜기를 중심 하여 서쪽 산맥을 긴재등이라 하고, 동쪽산맥을 壇峯이라 하였는데 단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社倉川은 架山城을 쌓을 때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연유된다. 고곡동은 高岩洞이라 하였는데東高岩·西高岩으로 나뉘고 東高岩은 장기 1.2.3동을 이르고 西高岩은 대곡동(한실)을 일러 이 동리를 합해서 高谷洞이라 한다.(洪載洙: 男60 外 1名)
해핑리·하평리(下坪里)§ 한실(大谷)을 중심으로 아랫들을 下坪, 윗들을 上坪이라 하는데 慶州 李氏가 주성을 이루며 40 가구가 살고 있다.(李年海 :男65外 3名)
마사동(馬司洞)§ 옛날 양반들이 살던 곳으로 말을 맡아 기르던 洪氏 문중 하인들이 살았던 곳에서 연유하며, 10여 가구 가운데 缶林 洪氏와 月城 朴氏가 주성을 이룬다. 이 마을은 세 마을로 나뉘는데 독을 굽던 자리가 있던 곳을 독점, 독을 파는 店이 있던 곳을 점마, 한실에서 넘어오는 언덕 밑 마을을 넘마라고 부른다.(金宣福)
(朴海元: 男54 外 1名)
錦 梅 洞
금매(錦梅)·삽실( 實)·신매(新梅)·금곡(錦谷)§ 조선조 中宗 鄭閱이란 선비가 기묘사화 때에 화를 피하기 위하여 정착하였으며 錦谷과 新梅의 이름을 따서 錦梅라 한다. 금매동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동편에 있는 마을을 錦實이라 하고 새로 생긴 큰 마을을 新錦實이라 한다. 마을에서 북동쪽 1㎞ 정도 떨어진 곳에 기암 괴석이 있고 여름에는 찬물이 솟아 나오는 용솟음 바위가 있고 외가리가 서식 하는 황새 마을이기도 한데 보호조 지정 마을이며 70여 가구에 東來 鄭氏가 주성이다. (鄭圭東 : 男 60 外 4名)
삽실( 實)§ 鄭 閱이란 선비가 조선 中宗 때 마을 안 정골을 개척하여 살다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가래삽을 가지고 골밖으로 나와 정착하였다 하여 삽실이라고 한다. 마을 동북쪽 산기슭(1.2㎞)에 병풍을 펼쳐 놓은 모양을 한 바위를 병암이라 하며 이 바위의 글씨를 쓴 사람이 鄭宅洛이라고 한다. 또 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 고목으로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는데 속부분은 썩어 없어지고 겉부분만 남아 있다. 60여 년전에 이 나무를 기리기 위해 亭閣을 지었으며, 이 나무가 서 있는 앞들 이름도 고목들이라고 불려진다.(鄭極修 : 男 79外 2名)
內 梨 洞
배티·배태·배골(梨谷)·이티(梨峙·梨峴)§지금으로부터 약 250년전 이 마을 안골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 배태라 하였으며, 지금은 內梨洞으로 불려지고 있다. 옛날 이 곳 주민들은 선산군 장천 장을 보아 왔는데, 험준한 뱃고개에서
종종 도둑이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고개를 넘기 위하여 100여 명씩 떼를 지어 도둑의 습격을 막았다고 한다. 현재는 70여 가구에 孫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李英哲: 男65 外 4名)
너믄골§ 배태 마을 입구에서 더 골짜기로 깊숙히 들어간 곳에 자리잡아 붙인
이름이며, 각성들이 7가구가 살고 있다.(金寬鎬 : 男 75 外 4 名)
새뜸§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새뜸이라 불리워 지며 그 당시 사람들이 동네의 무사함과 농사가 뜻대로 되고 걱정없도록 하기 위해 동네 신을 모셨으며, 지금도 그 때 빌었던 돌이 4개 있으며 慶州 孫氏가 많이 살고 있다.(金文鎬 : 男63 外 4名)
수통골§ 골짜기 중에 아주 깊은 골짜기라는 뜻에서 수통골이라 불리워졌으며, 지금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선산군과 경계에는 성황당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돌탑을 쌓으며 자신의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金寬鎬 : 男 75 外 4名)
양지뜸§ 內梨洞에서 가장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양지뜸이라 하며, 내리동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60%이상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孫敬道) (金寬鎬 : 男 75 外 4名)
老 杏 洞
노매실(老梅實)§ 동네 북쪽에 山이 있는데, 산의 봉우리 모양이 梅花 봉오리 같다고 해서 老梅實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매화꽃이 떨어져 이룬 터라는 아름다운 인상의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40여 가구가 살며 孝令 司空氏 및 安東 權氏가 주성이다.(司空桂: 男 76 外 1名)
도장골·도장곡(道場谷)§ 선비들이 수도하기 좋은 곳이라 해서 道場谷이라 하기도 하고, 일설에는 道藏谷이라 해서 軍糧米를 저장하던 곳이라 전하기도 한다. 도장곡 또는 도장골이라 부르기도 한다.(司空桂 : 男76 外 1名)
옹기동(甕器洞)·점촌(店村)§ 朝鮮末까지 옹기 굽던 곳이므로 옹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옹기점이 번창했을 때는 옹기를 거래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老梅實 옹기라는 이름도 있었으나 현재는 한 집도 없다. 전에는 이 마을을 店村이라 부르기도 부르기도 했다.(司空桂 : 男 76 外 1名)
행동(杏洞)§ 옛날 동네 뒷산에 나무가 없어서 벌거숭이 일 때 살구나무가 많아 杏洞이라 불렀다고 하기도 하고 은행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50여 가구가 살며 義城 金氏가 주성이다( 權成萬: 男 74外 1名)
심원(深源)§ 신라시대 深源寺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淸州 韓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옛 절의 이름을 따서 深源이라 불렀다. 산 높고 물 맑은 곳이며 義城과 軍威의 경계 지역이다. 본면 최북단에 위치하며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崔大文)(申江碩 :男 84 外 1名)
22馬 嘶 洞
마시동(馬嘶洞)§약 700 년전 仁同 張氏가 이 곳을 개척 하였고, 마시의 유래는
성진이란 스님이 天馬嘶風(天馬가 우는 형세)의 곳이라 말했다 하여 지리 풍수설 그대로 마시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仁同 張氏 및 각 성이 살며 30가구 쯤 된다.(金鳳吉:男73 外 2名)
덕동(德洞)§ 마을 입구에 德庵寺라는 小庵子가 있는데 덕동의 마을 이름도 덕암사의 德자를 따서 만들어졌으며, 덕암사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이 행군 할 때 마침 이 곳에 다 달으니 말의 발굽이 떨어지지 않으므로, 부하들로 하여금 주위를 정찰하게 한즉 德庵寺의 石佛이 노한 듯 직시하고 있었다. 왜장은 필시 石佛의 조화로 생각하고 칼로 목을 치니 비로소 말굽이 떨어져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930년 경 이곳에 거주하던 여신도 朴氏의 현몽에 의하여 목 없는 석불을 찾고 양회로 머리 부분을 완성하여 절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각 성이 사는 마을로 靑松 沈氏가 주성이다.(沈七根 : 男 76 外 2 名)
한작골·대사동(大寺洞)§ 한작골로 불리다가 인근에 있는 大寺庵의 이름을 따서 大寺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대사암이 없어진 전설은 다음과 같다. 우연히 말 한필이 절에 와서 울고 간 뒤 절 형세가 쇠하기 시작 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빈대가 너무 많아 승려들이 주거할 수 없는 사정이 되어 자연 폐사가 되었다고도 한다. 대사동을 말이 울고 갔다 하여 馬嘶洞이라 불렀다고도 한다.(金春植)(沈南起:男 71外 1名)
梅 谷 洞
상평리(上坪里)§ 옛날부터 매화가 많았다는 설과 골짜기에 동절에 눈이 많이 쌓여 꽃과 같았다는 데서 매곡이라 하였는데 한실(大谷)을 중심으로 윗들을 上坪里라 하는데 洪氏가 주성이며 35가구가 살고 있다.(申俊熙: 男60外 4名)
숫골·수동(壽洞)§ 梅谷村 가운데서 가장 일찍 형성된 동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약46년 전에 缶林 洪氏가 한밤에서 분파되면서 개척된 마을로서 지금도 洪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으나 金海 金氏·恩津 宋氏 몇 가구가 함께 살고 있다.(朴台德 : 男 51外 4名)
독골(陶谷)§ 도자기를 굽던 터가 있었던 데서 연유하며 壽洞에서 약 500m 동쪽에 위치하여 金海 金氏가 현재 반수 이상 살고 있으나 당초에는 각처에서 모여든 도공들로 형성 되었다고 한다.(金秀萬: 男50 外 1名)
불땡이·불땅·불당(佛堂)§ 옛날 佛堂이었던 곳으로 현재 불당은 흔적이 없고 인가 마저 6. 25 동란 이후 없어졌으나 신라 中葉부터 高麗末까지 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朴玖鉉 : 男 54 外 2名)
탑들(塔坪)§ 들 가운데 정자나무 옆에 塔이 있다고 생긴 마을 이름이며 불땡이에서 약200m 동쪽 지점에 자리잡고 있어 불땡이와 함께 옛날 사찰 경내 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洪氏·金氏·申氏가 몇 가구씩 있다.(金宣福)(洪聖欽 : 男 51外 1名)
23 병水洞
간동(澗洞)§ 高麗時代에 큰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社倉川과 渭川이 만나는 함수 지점이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軍馬·兵卒과 일반인의 식수가 충분하다 하여 동명을 澗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역촌으로서 서울·大邱·安東·慶州 等地의 행인 및 군마와 병사의 휴식처가 되었다고 한다.務安 朴氏·全州 李氏를 비롯하여 여러 문중이 산다.
병水洞이란 兩合水 지점이라는 데에서 생긴 이름이며 옛날 벼슬아치들이 軍威 병川 合水 구경가자고 할 만큼의 명승지 였다.(李萬鎬: 男 60外 1名)
소골·쉬골§소골 암벽에 새겨진 미륵불에 얽힌 전설이 있다. 소골 건너편 부자집 楊氏 댁엔 언제나 손님이 득실거렸다. 어느 날 중이 왔는데 주부가 많은 시주를 하면서 손님이 오지 않도록 하여 달랬더니 스님이 소골에 미륵이 있는데, 그 이마를 파라 했다.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손님이 발길이 끊어지고 그 집도 망하였다고 한다. 또 지금부터 50년 전쯤 군위 내량에 사는 김맹칠이란 사람이 가난하여 봇짐 행상을 하던 중 미륵불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미륵불이 나타나 집으로 돌아가라기에 집에 오니 일본간 형이 많은 돈을 부쳐와 부자가 되었다 한다. 그 후 그 미륵불에 보답하기 위해 불상 위에 넓은 돌을 덮어 비를 피하게 하고 근처에 소나무도 많이 심었다고 한다.( 朴鍾基 : 男 53 外 2 名)
배방골(梨屛谷)§裵氏가 주성으로 살았는데 퍽 가난 했다. 어느 날 중이 왔는데 주부가 많은 시주를 했더니 스님이 소원이 무엇이냐 하기에 자손을 많이 낳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더니, 스님이 배나무를 많이 심도록 하라고 했다. 그 말대로 많이 심어서 울타리를 이루었는데 여기에 연유해서 梨屛谷으로 부른 것이 배나무 병풍 골짜기라는 뜻에서 배병골로 부르다가 배방골로 변음되었을것이라 한다.(柳次文 :男 72 外 1 名)
뱃골·백학(白鶴)·백곡(白谷)§옛날 백학이라 부르던 것이 지금은 白谷·뱃골이라 부르며, 아마 백학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현재 7가구가 살고 있다.(高仁燮)(柳祈桓 : 男60 外 1名)
不 老 洞
불로동(不老洞)§약 200여 년전 양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不味洞이라 불렀으나 그 뒤 어떤 孝子가 부친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적라산 중턱에 단을 쌓고 밤마다 기원 하던 중 어느날 밤 부처님으로부터 부친의 건강을 약속 받고 귀가하니 정말로 건강이 회복 되었다. 그 후 이계곡을 절골이라 하고 老佛像이 나타났다하여 不老洞이라고도 하였으며, 늙지 않는다 하여 不老洞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幸州 殷氏가 주성이며 70여 가구가 살고 있다.(黃義性)(金文祚: 남56 外 1名)
24城 洞
삼거리(三巨里)§ 바깥쪽 골의 일부이며 大邱·軍威·友保의 세 갈림길이라 하여 삼거리라 불리어지며, 5가구가 살고 있다가 국도 확장 공사로 도로로 들어가게 되어
이주하였다 (李浩: 男45 外 1 名)
바깥짝골·바깥잿골·들마을·외성동(外城洞)§ 500여 년 전 都雲峯公이 참나무숲(祚林)을 개척하여 이룬 마을이라 해서 祚谷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고, 또 지금으로부터 200 년 전에 城嶺山 아래의 바깥쪽에 있다 하여 外城洞이라 불리어 온 것이 지금까지 外城洞이라 불리고 있다. 70가구 중 延安 李氏·幸州 殷氏·孝令 司空氏가 살며 司空氏가 토박이다(司空鑽: 男47 外 1名)
안짝골·안잿골·안말·내성동(內城洞)§짝골 내의 부락이 안과 밖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성동은 짝골 안쪽이라고 안말이라 부르는데 대하여 외성동은 짝골 바깥쪽이라고 들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高麗末에 星州 都氏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살고 있으며, 孝令 司空氏와 星州 都氏가 주성이다. 안짝골 마을 앞에 성이 있었다고 하나 성터만 잡아 놓고 축성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식수 문제였으며 현재 성지라 하는 것은 그 기초인 터를 두고 말하는것이다.(金宗元)(都泰元:男 65 外 1名)
梧 川 洞
오심이(烏深)§옛날 어떤 효자가 시묘 할 때 까마귀가 함께 살았다고 하여 오산이라고 불렀는데 그 뒤부터 烏深이라고 불러 내려왔다. 烏山은 한일 합방 때 梧川이라고 고쳐 불렀으며 임진왜란 전까지는 仁同 張氏가 거주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張士珍이 의병을 일으켜 馬嘶嶺山 아래에서 전사 한 뒤 張氏 일족은 몰락하였으며, 그 후에 文化 柳氏가 입주한 뒤,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文化 柳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柳龍善: 男 67 外 3 名)
핏골(穆洞)§ 임진왜란 때 피란하던 곳이라 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였으므로 밖에서 잘보이지 않는 지형이다. 전란 때 피란민이 와서 살았는데 米穀은 잘안되고 피(穆)를 식량으로 재배하였다. 이로 인하여 생긴 명칭이 핏골이다. 처음 龍宮·全氏가 입향하여 거주하던 곳인데 뒷산에 嘉善大夫水命이란 사람의 묘가 있으며 동네 북쪽 중주골에는 通政大夫 觀永의 묘가 있다.(丁相萬 :男 52 外 2名)
우륵배기§오심이 내의 일부 부락으로 민가가 6가구가 있다. 얼마전까지도 오천양조장이 있어 오천도가가 이 곳 부락 명칭이 되었으나 현재는 友保로 합동되고 없어져 우륵배기라 부르고 있다.(金永燦: 男 64外 2名)
25將 軍 洞
나실(羅室)·나곡(羅谷)§羅氏 夫人이 이 동네에 맨먼저 와서 거주하였다고 羅室 또는 羅谷이라 부르고, 陽地羅室이라 하기도 한다.(司空琯: 男 45 外 4名)
장군동(將軍洞)·구효령(舊孝令)§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당시 金庾信 장군이 당나라 蘇定方과 합세하여 백제를 치던 중 이곳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는데, 그 후 고려 말엽 이 곳 주민들이 옛일을 추모하기 위하여 장군당을 짓고 金庾信·李茂·蘇定方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3월초에 향사를 지낸다. 3장군이 쉬어갔다 해서 뒷산에 孝令祠를 짓고 이 산을 堂집산, 마을을 將軍洞이라 부르는데 舊孝令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랫장군댕이(將軍洞)는 孝令 司空氏 선조가 살아온 곳이며, 웃장군댕이는 將軍洞 뒷산 밑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동네이다(崔敬癸:男 68 外 4名)
녹동(鹿洞)§골이 깊고 오목하여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마을이라 옛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란을 하였다고 한다.(太昌熙)(司空坤: 男74 外 5名)
場 基 洞
장터·장기동(場基洞)·내동동(乃東洞)·음지나실(陰地羅室)§將軍洞의 陽地羅室과 마주 보고 있으므로 陰地羅室이라 하며, 신라 경순왕 때에는 乃東이라 부르다가 韓日合邦 뒤에 옛 孝令 시장터라 하여 場基洞이라 부른다.(李英均: 男57 外 4名)
고지바아·고지바우·고암동(高岩洞)§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다 하여 高岩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그 자리엔 과수원이 조성되어 있다.(朴斗碩: 男 67 外 5名)
금산동(錦山洞)§1780년경 마을로 개척되었으며 산림이 우거지고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인심이 좋으며 토지가 비옥하다 하여 비단 錦자와 뫼山자를 따서 錦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17가구의 작은 부락으로 洪氏를 비롯한 각성이 살고 있다.(李 柱)(洪禹功: 男73 外 5名)
中 九 洞
중리(中里)§300여 년 전 제일 먼저 정착한 吉氏 집안에서 마을 터를 닦을 때
대나무가 많아서 竹里라 불렀으며, 그 뒤 대나무가 없어져 현재는 몇 집 정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竹里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孝令面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하여 지금은 中里로 불려지고 있다. 처음 정착한 吉氏 집안이 마을을 떠나고 약 270여년전 연안 李氏가 12대에 걸쳐 이곳에 살며 주성을 이룬다.(李琫和:男73 外 4名)
원골·원꼴·원곡(院谷)§약 200년 전 처음 마을을 개척한 뒤, 院이 생겨 원곡 또는 원꼴이라 부르며 마을 개척 당시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이 2가구이나 현재 孝令面 행정 중심지이며 마을 위치가 뒷골에 있어서 안마을 이라고도 한다.(金瑞東)
(金寬鎬: 男 75 外 4 名)
26花 溪 洞
소계·쥐계·화계(花溪)§옛날 한양을 내왕하는 역이 있었으며, 약400년전
密陽 孫氏가 이곳을 개척하였고, 현재는 각성 70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 앞쪽에 馬堂山이란 산이 있는데 역촌 당시 말 먹이를 채취 또는 쌓아둔 곳이라 하여 馬堂山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소계·쥐계 등으로 불리다가 1914년 花溪洞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때 나환자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곳 물을 마시고 몸을 씻었더니 병이
완치되어 그 뒤로 慶州 약수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召溪약수터라고도 한다(孫鍾燮 : 男 67 外 1 名)
시너리(新月)§약 200 년전 全貴鉉이라는 선비가 大邱에서 義興 고을로 이주
하다 이 곳을 지나며 잠시 쉬고 있을 때 연못에 초생달이 비추고 주위 경치가 너무 좋아 이 곳에 정착하고 마을 이름을 新月이라 칭하게 되었고, 현재 후손인 旌善 全氏가 주성을 이룬 마을로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全江水: 男 72 外 1 名)
안홍골·홍골·안홈골(內桶洞)·홈골(桶谷)§朝鮮時代 金斗喆이라는 선비가 정착하여 桶谷書堂이라는 글방을 세워 한문 수학에 전념했다고 하나 광복 당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지세가 큰 홈(桶)을 판 것 같다하여 홈골 또는 홍골로 불리워졌고 후손인 慶州 金氏가 주성을 이루며 각성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또 이 곳에는 용락골·용나기라는 곳이 있는데 산등의 일부가 오목하게 갈라지고 깊게 파여 용이 승천한 곳이라고 한다.(金春植)(金星俊: 男73 外 1 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