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환승하여 포항까지 가기로 한 우리- 김서령 선생님과 김정숙씨, 나-는 서울역에서 8시 35분에 만났습니다.
간밤에 늦게까지 놀았다고 말씀하시며 피곤하다고 연방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오히려 진회색 잔 줄무늬 정장, 아담한 부츠에 멋진 머플러까지 하고 나오셨습니다. 정숙씨는 이름그대로 단정하고 정숙한 바지 정장차림, 가장 우아해야할(?) 저는 골덴 바지에 손뜨개 니트와 패딩조끼에 방울까지 달린 모자를 쓰고는 분홍 배낭 메고 나타나 분위기 우습게 만들었습니다만 두 분 특유의 친숙함으로 '괜찮아요' 하며 기차를 탔습니다.
동반석이 없어서 세 사람이라 통로 양쪽으로 자리를 나누어 앉은 우리는 '일단 자자'라고 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눈도 못 붙이고 포항까지 갔습니다.
(음.......대구에서 포항까지 가며 아주 잠깐 무겁고 따가운 눈을 붙이긴 했군.)
가는 길에 서울에서 김장하는 친구들에게 문자 보내 소식 알리고, 포항에는 도착 시간도 전하고, 점심 약속도 하고 그럭저럭 하다 12시 5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참 먼 길이었습니다.
역에 마중 나오신 조유현, 박성애님을 만나 진하게 한 번 안아 보았습니다. 함께 간 두 분은 서로들 처음 뵙는데도 아주 금방 친해지셔서 팔짱을 끼고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저는 속으로 놀랬습니다. 김서령 선생님과 정숙씨의 그 친화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시지요?
<어부마을>이란 식당에서 포항의 미녀 신효순 원장님을 만나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포항 대표음식 '물 회'와 '오징어 순대'로. 포철서초등학교 담벼락 옆에 있는 그 식당은 물회를 아주 맛있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15년이나 지났지만 변함없이 아름다우신 원장님은 더 멋있어지셔서 나오셨고요. 함께 점심 먹으며 포항에서도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을 중심으로 시립도서관의 도서관 친구들을 꾸려 볼 계획을 말씀해 주셔서 순간 가슴이 설렜습니다. 새해에는 전국에서 도서관 친구들이 생겨나는 기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원장님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나오셔서 만나시고는, 초등학교 1학년 꼬마의 학예발표회 연극 관람을 위해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준비해 간 선물도 전하고 11월의 책도 배달하고 봄비처럼도 전했습니다. 원장님은 피대기라고 하는 약간 덜 말린 포항 오징어를 선물로 주셨는데 두 뭉치여서 함께 간 두 분께 선물했습니다.
우리는 효자주택단지 가을풍경을 즐기며-아는 사람은 압니다 - 영일대를 돌아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목적지 안강의 자월당으로 갔습니다. 가는 차 안에서 당호인 '자월당'을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 설명을 들었는데 듣고 난 김서령 선생님이 이름의 절반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지었다는 풀이를 하여 '역시!' 하였습니다. 포항 대구 간 국도를 따라 20분쯤 가다 양동마을을 지나 안강 옥산 서원 가는 길로 접어들면 마을까지 가는 길이 하도 쭉 곧은길이어서 들어서는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마음을 단정하게 하는 듯 하였습니다. 길에서 눈을 들면 마을을 품어 안고 있는 산세가 이곳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말해줍니다. 마을 가까이 가면 입구에 큰 소나무 숲이 있는데 마치 한그루 나무처럼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으로 마을을 살짝 가려주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아마 뜻이 있는 조림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보게 하는.
마을 가운데 있는 자월당에 가서 차 한 잔 하고 잠시 집 구경을 하였는데 김서령 선생님은 '어머, 어머' 연방 감탄을 하시며 단숨에 취재사진 찍을 장면을 10개나 손으로 꼽았습니다. 저희들은 그 눈썰미에 또 놀랐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집 대문에는 전에 없던 문패가 하나 예쁘게 걸렸습니다. 그 새, 새 식구가 된 자부님이 두 분 이름을 넣어 만들었다는데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보는 사람을 웃음짓게 하였습니다. 언젠가 책에서 그 장면들을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마당을 둘러보는데 한쪽에 너무 귀여운 당근들이 소복 담겨 있었습니다. 자월당 사모님이 직접 기르신 것. 김선생님이 작품이라고 칭찬한 당근을 서울로 챙겨 갈 수 있게 약조를 하고, 마루에 짐을 두고 우리는 옥산서원으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풀향기 가득한 뒷간에서 황홀한 순간(?)을 만끽하고요.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날씨는 포근하고 따뜻하였습니다. 오래 된 마을이 다 그러하듯 옥산 마을도 세월을 견디고 선 우람한 나무들이 마을을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걸어가며 본 마을길은 이제는 쇠락해가는 우리나라 마을들의 공통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래되고 기품 있는 나무들이 사람들의 애정 어린 눈길 밖에 서서, 혼자 나이 들어가는 사람처럼 조금은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는 마을길을 돌아 서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유현님의 자상하고 멋진 설명이 있었지만 퇴락한 서원의 현실 앞에서 저는 그만 코끝이 찡했습니다. 차마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감싸고 있는 계곡과 산과 물과 나무는 또 얼마나 사무치게 아름다운지요.......
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독락당으로 가는 길은 더욱 처참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곳에 식당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싶은 곳에 지어졌다가 이제는 폐가가 된 가든들.......기억하고 싶지 않은 풍경은 옮기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넉넉하고 깊은 골짜기에 맑고 그윽한 가을 물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너럭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에 서서 한참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띄엄띄엄 가는 듯 마는 듯 걸어 신라시대 선덕여왕이 가끔 찾았다지만 이제는 13층 석탑만 남아 있는 절터로 갔습니다. 해는 지고 바람은 조금씩 차가워졌습니다. 신라시대 탑으로는 아주 독특한 모양의 아담한 탑이 넉넉한 터에 의젓하게 서 있었습니다. 퇴락한 서원과 독락당과는 대조적으로.
자월당 사모님 상상력을 빌려 옮겨 보면,
당나라에서 벼슬하던 한 남자가-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음- 신라로 귀화하여 신라조정에서도 큰 벼슬을 하였다고 합니다. 때가 되자 벼슬을 내려놓고 바로 그곳 옥산 절의 주지가 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로 선덕여왕께서 친히 이 절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각자 생각에 잠겼습니다. 누구는 아주 멋진 남자를, 누구는 궁궐을 떠나 문득 산사에 앉은 선덕여왕을........
어느 새 길에 산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없어 큰 길을 통째로 차지하며 걸어 '청정'이란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자월당에 온 손님에게 특별히 내놓으시는 참 풍성하고 정갈한 저녁상을 받고 숭늉까지 챙겨 먹고 구월 그믐, 달도 없는 깜깜한 길을 걸어 자월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유현님은 그새 먼저 오셔서 작은 방 아궁이에 불을 넣고 계셨습니다. 불 때는 거 서로 보겠다고 좁은 아궁이 앞에 서성이는데 사모님은 서울 가져 갈 배추를 뽑으러 가자고 부르십니다. '여선생, 갑시다'
대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앞에 이어져 있는 텃밭에 소복소복 탐스럽던 배추를 뽑아 보자기에 싸고 작품(?)이라던 당근도 넣고 피대기도 넣어 한 보따리씩 챙기고 방에 들어가, 낮에 불 때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아랫목에 누웠습니다. 꼭 한 번 누워 보고 싶었던 곳. 아랫목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자근히 펴 주는 곳.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첫댓글 여희숙 선생님~~글을 잘 쓰시는 줄은 알았지만--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글을 쓰시네요...** 쌤글을 읽으면 아름답지 않는 것은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그사실이 진실인가요???) 우리딸은 떨어지는 제비역을 얼마나 잘 소화해내던지--항상 잘 까불고 잘 넘어지니--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명(**)을 거역하고 "함민식쌤"께 안부를 전해드려버렸지요!!(호호호~~)
떨어지는 제비역이라 너무 재미있네요. 칭찬이 자자할만 합니다. 신나네님 딸이니까......아이들 연극하는 거 나는 너무 좋아하는데.....다시 학교 가면 맨날 연극하고 책 읽어주고 안아주고 업어주고 그럴 것 같은데. ....에고 왜 몰라주는거야 글쎄.....근데 함샘께 혼나겠다. 신나네님 뒤에 숨어야지. 제일 무서운 것이 학부모니까.
우리 함선생님은 학부모를 무서워하지 않으시는데...나도~~그런데~~하지만 여쌤은 숨겨드릴수 있을 것같고요...사실 함선생님이 얼마나 반가워하셨는데요..그리고 제가 직장을 사직하는 일이 뜻대로 안될 것 같아요.. 오호~~지구수비대처럼 우리교실수비대로 그냥 평생 있게될지도 몰라요. 왜 새로운 선생님이 우리교실에 오지 않냐고요? 제가~~흑흑~~이렇게 열약한 조건으로 근무를 하고 있음을 요즘 느끼고 있습니다.ㅋㅋ
하긴 직장 사직 아무나 하는 거 아니지요. 헤헤 . 그냥 하세요. 신샘 안 계시는 우리교실 상상이 안돼요. 그리고 이렇게 나와 떠돌이 겸 백조가 어디 남보기나 좋지 본인도 좋은 줄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