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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918-1392)와 화약무기(3)
■ 화포(육상 및 해상전투용)
▲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포
이름만으로도 확실한 서열을 매겨놓은 이 화포들은, 포 구경 및 포신의
'체급별' 로 분류했는데 이런 방식은 당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존하는 조선 대장군포는
당시 중국의 대장군포를 모방생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고려의 초기 대장군포 역시
중국화포 모방제품이었을 확률이 높다.
고려의 화포서열은
조선시대 우리화포 체급기준이던 ‘천・지・현・황’(千・地・玄・黃)총통 분류방식 및
네이밍(naming; 이름붙이기)원칙에 그대로 적용됐다.
대형화포들의 발사물은 보통 날개달린 '화살포'였는데
화포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대장군포이듯, 가장 큰 화살포가 곧
'대장군전'(大將軍箭)이 되는 그런 작명 방식을 따랐다.
화살포는 근대개념의 화약이 장전된 포탄과는 달리,
돌맹이(石) 처럼 무게감에 의한 순수 운동에너지만으로
적진을 파괴했다.
자욱한 화약연기와 함께 폭발굉음을 울리며 날아가는
화살탄 자체가 매우 위협적이어서, 이를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적의 사기는 꺾이기 일쑤였다.
특히 해전(海戰)에서 대장군전의 위력은 컸다.
당시 목선 전함들은 오늘날의 철선(鐵船)에 비하면 외부충격에
매우 약했으므로, 대장군전 한방 만 선측(船側)에 잘 꽂히면,
순식간에 구멍이 나고 전선은 침몰하고 말았다.
▲ 고려의 대장군포란 이름을 그대로 승계한 조선의 대장군포.
길이 124.5㎝, 구경 11.5㎝이다. 무쇠주물의 조선후기 제작품으로
추정되며, 강력한 화약폭발을 견디기 위해 몸통에는 7개의
죽절(竹節; 마디)이 있다. 약실 쪽 첫 번째 마디와 두 번째 죽절에
포이(砲耳; 대포운반용 고리걸개)를 만들고, 원형 쇠고리를 달아
이동시 손잡이로 사용했다. 고려 말에 만들어진 대장군포의 경우, 죽절이
아예 없었거나 한 두 개에 불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윗 사진의 조선 대장군포는 명나라가 만력(萬曆) 20년(1592년)에
제작한 '천자철포'(天字鐵砲)와 거의 같은 모습이다.
▲ 화살탄 '대장군전'을 장착한 조선의 천자총통 화포거치 예상도.
대장군전은 무게가 30kg이나 되는 헤비급 발사물이었다.
그림은 한국역사연구소 역사복원일러스트연구소 작품이다.
* <알고 지나가기> 고려 화포의 구조
화포는 화약의 순간폭발력을 이용해 발사물을 사격, 적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인마살상 혹은 시설물 파괴를 목적으로 개발됐다. 사람의 힘이나 기구로 돌덩이를 날렸던
시절에 비하면 '엄청난 순간파워' 가 생성돼기 때문에, 그에 따른 '안정성' 문제가 늘 따랐다.
화포의 성능은 "폭발압력의 크기" 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강력한 폭발일수록
포신(砲身) 자체가 파손되기 쉬운 '양날의 칼' 같은 존재였다. 화포의 발전은 결국
▲ 더 강한 폭발력을 구현하는 문제와 ▲ 강한 폭발력을 견디는 화포구조의 개량에 달렸다.
고려의 화포는 폭발압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약실에 화약을 장전한 뒤
나무조각이나 흙으로 '밀폐'시켰는데, 나무마게를 끼운 격목(激木)형과
흙(찱흙)으로 메꿨던 토격(土隔)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포 폭발력의 크기에 따라 ▲ 대형화살탄을 꽂아 발사하고
▲ 자갈이나 마름쇠(표창) ▲ 포구지름에 맞춰 동그랗게 깎은 돌이나 쇠(鐵)탄
▲ 여러 형태의 발사물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도 있었다. 고려의 대형 화포들은 당시 중국화포와
마찬가지로 대형 화살탄을 발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강한 화약폭발력을 견디는 포신(砲身) 주물제작이 또 하나의 화포개발 관건이었다.
청동, 구리제 화포는 비교적 물렀기 때문에 폭발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는 일이 잦았다.
당시 기술수준으로는 강한 내구력의 강철(鋼鐵) 생산과 주물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화통도감의 최무선은 청동화포보다 강한 '구리+주석+아연' 합금을 개발해내기도 했다.
▲ 신포(信砲)
크기나 모양을 알 수는 없으나, 신호만을 위한 용도였기 때문에 비교적 소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시나 평상시 병사들에게 미리 정해놓은 ‘간단한 명령체계’를 전달하는 용도로 쓰였다.
신호는 화포의 특성을 이용해 폭발음, 발사물 형태, 발사회수, 화염색깔 등으로 구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육화석포(六火石砲)
공성전(攻城戰; 성곽진지 공격전) 등에 성벽파괴용으로 쓴 '돌 포탄발사' 화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의 육화석포는 조선에서 개량돼 위력을 발휘한 ‘대완구’(大碗口)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완구는 커다란 돌맹이 탄이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사한 화포로, 육상전은 물론
특히 왜선(倭船)과 벌인 해상전에서 많은 배들을 깨부순 전과를 올렸다.
▲ 고려 육화석포가 개량된 조선의 대완구. 커다란 발사물을
장전할 수 있게 포구가 나팔모양으로 퍼져 있다. 그 모양이
마치 밥주발(碗)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의 대완구에
장전된 돌은 단석(團石; 화강암 등으로 둥글게 깎았다)이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질려포(蒺藜砲)
고려 화약무기가운데 가장 이색적인 형태와 용도의 화약무기다.
질려(蒺藜)란 원래 약초이름으로 씨앗에 날카로운 뿔 모양의 침이 세 가닥 있다. 이 형태를
본 따서 만든 재래무기 '철질려'(鐵蒺藜)는 마름쇠(표창)처럼 생긴 쇳조각 5개를 노끈으로 묶어
적이 왕래하는 길에 뿌렸는데, 적군이 이를 밟으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다.
고려 질려포는 이런 철질려를 투척용 화약무기로 개량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로 만든 통 속에 화약을 담은 종이상자(地火筒)와 불을 지피는 발화통(發火筒),
그리고 날카로운 쇳조각(질려)이 마른 쑥과 함께 들어 있었다.
질려포는 내부 발화통에 연결된 도화선에 불을 붙여 수류탄처럼 투척하는데,
화약이 폭발함과 동시에 쇠 표창이 핑핑 날고 독한 쑥 냄새가 퍼져 적진을 교란시켰다.
질려포는 육상전투에도 쓰였지만 주로 해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적선에 다가가서 투척해 폭발시키면, 좁은 배 안에서 갈데없는
적군의 타격은 엄청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질려포는 원형그대로 조선에 승계됐지만, 그 기능과 성능이
업그레이드 돼 ‘비격진천뢰’로 발전했다는 주장도 있다.
▲ 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 박사가 고증을 통해 복원한 질려포통.
고려 질려포는 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 사진 속의 질려포통은 조선초기 발행된
병기도설(兵器圖說)과 조선중기의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등
문헌기록을 토대로 1970년대 후반에 복원한 것이다.
현재 고양시 행주산성 유물전시관에 보관중이다.
▲ 대중소 질려포통과 그 속의 마름쇠(표창)
▲ 각종 발사물
- 화살류; 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고려 화포는 대부분 화살을 발사물로 썼다. 철령,피령,천산오룡전 가운데
철령전은 화살날개가 쇠붙이로 만들어졌고, 피령전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쇠와 가죽날개가 화살탄의 성능에서 어떤 차이가 나는지는 알 수 없다.
'천산오룡전'의 경우, 실물이 전하지않아 애매한 부분이 많다.
이 화살들은 이름까지 그대로 당대의 중국제를 모방제작했을 확률이 높다.
오룡전은 긴 막대기 윗부분에 화약통을 달고 그 속에 로켓화살인 주화를 5개 넣어서
발사한 무기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 성능이나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천산오룡'이란 단어는 중국 풍수지리 이론에 등장하는 ‘천산72용’(穿山七二龍) 셈법 가운데 하나로,
주술(呪術)적 의미가 포함된다.
또 '천산'이란 지명은 실제로 중국 광서성의 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계림(桂林)에 있는
'촨산'(穿山)이기도 해서, 고려가 자체개발한 화약무기 이름으로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 쇠붙이류; 철탄자(鐵彈子)
화포의 부리에 화살대신 장전한 각종 쇳조각, 쇠구슬 혹은 마름쇠 조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탄자는 조선시대 화포 발사물로도 그대로 승계됐다.
▲ 기타 화전(火箭); 유화(流火)·촉천화(觸天火)
유화와 촉천화는 고려의 불화살(화전) 화약무기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진에 날린 방화(放火)용 화약 불화살이란 점에서는 화전과 동일하나, 화전처럼 일정시간 후에
화염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불이 붙은 채 발사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유화(流火; 유성처럼 흐르는 불)나
촉천화(觸天火; 하늘가득 밝힌 불)란 이름으로 미루어 그렇게 짐작된다.
■ 전선(戰船)과 화포의 결합,
'최무선화포'와 해상 대첩(大捷)
반도국가인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대륙 쪽으로 국경을 접한 중국(中國)과는 물론 바다 아래쪽에 위치한
섬나라 일본(日本)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대부분의 침략전쟁은 그들이 먼저 시도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치욕적인 패배와 함께 전 국토와 온 백성이 참화를 입었다.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는 중국의 속국(屬國)으로 살아야했고,
20세기초반에는 우리보다 먼저 산업화하고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에게
한반도 전역이 식민지로 강점 당하는 굴욕을 경험했다.
그렇게 수많은 피침탈(被侵奪)의 역사를 반복한
우리나라 였지만, 일본의 무력침략만은 우리의 힘으로 '징벌'(懲罰)한
통쾌한 전사(戰史)를 꼭 3번 기록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3번 모두가 해전(海戰)이었고, 그때마다 왜군을 박살낸 주력화기는
고려 화통도감이 개발하고 발전시켜 함선에 설치한 화포(火砲)였다.
최무선의 화포가 이끌었던
우리나라의 3대 ‘화포대첩’은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화포대첩 :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한반도 전체를 농락할 때,
바다에서 왜구(倭寇)를 섬멸한 두 번의 해상 대첩(大捷)이 있었다.
- 1380년(고려우왕 6) ‘진포대첩’(鎭浦大捷)
1380년 8월에 300여척의 전선을 끌고 곡진포(현재의 군산)앞바다 금강입구에 몰려온
왜구 떼가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했다.
그때 고려군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를 비롯해 심덕부(沈德符), 최무선(崔茂宣) 장군이
불과 100여척의 전함으로 왜선 500척 모두를 전소, 괴멸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이때 최무선장군은 자신이 설계한 '누선'(樓船)이란 함선을 포왜선(捕倭船; 왜구전함 사냥배)삼아,
화통도감에서 개발한 국산 화포(火砲)를 배에 싣고 엄청난 화력을 퍼부어 종횡무진 왜선을 부쉈다.
▲ 진포대첩 전투장면 역사기록화. 최무선이 설계한 전함에 화통도감이 개발한 화포를
거치하고, 옹기종기 모여있던 왜선 3백 척에게 '불벼락'을 내리는 고려수군의 모습이다.
이 그림 속의 함포(화포)는 '상상화'이며, 실물이 보존되지 않아서 고증은 불가능하다.
- 1383년(고려우왕 9) 5월의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
진포대첩 때 5백여척의 전함을 잃은 보복으로 1383년 5월 왜구들은 또 다시
120척의 전함을 끌고 합포(合浦; 지금의 경남 마산)를 쳐들어왔다. 그때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 장군이 나주와 목포주둔 전선 47척을 이끌고 급히 경상도로 항진 중, 관음포(지금의 경남 남해)
앞바다에서 대형왜선 20척을 만나 전투를 벌였다. 이 해전에서도 고려수군은 화통도감이 설치한
함포(화포)를 작렬, 17척을 괴멸시켰다. 이에 왜구는 전의를 상실하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 참고할 사항은, 당시 왜구로 불렸던 해적 떼들은 오늘날의 소말리아 해적들처럼
'일본민간인 도적'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1336-1537)는
전형적인 무사 봉건주의식 중앙집권체제로, 쇼군(將軍)아래 다이묘(大名)가 각 지방의
자치정권수반 노릇을 했다. 우리가 '왜구'라 부르는 해적 떼들은 사실 일본 지방자치정권의
정규군으로 육성한 병사들이었다. 특히 진포나 관음포를 침략하여 최무선의 함포에 박살나고 만
왜선과 왜병은 '일본정예 수군(水軍)' 소속이었다.
▲ 두 번째 화포대첩 ‘대마도정벌’(對馬島征伐)
고려 화통도감이 전함에 장착한 함포(火砲)의 뛰어난 전투력이 입증되자, 이에 자신을 얻은
조선 수군은 고려 말에서 조선 세종임금 때까지, 3차례나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해 오금을 저리게 했다.
당시 정벌군 함선에도 자랑스런 국산 화포가 장착, 위력을 발했음은 물론이다.
- 1389년(고려창왕 1) 1월에 고려장군 박위(朴葳)가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고려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싣고 돌아왔다.
- 1396년(조선태조 5)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 1419년(조선세종 1) 6월에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제3차 정벌.
▲ 세 번째 화포대첩 ‘임진왜란’(壬辰倭亂)
임진왜란(1592-1598; 정유재란 포함)은, 고려 말 최무선의 화통도감이 개발하여
조선에서 개량한 함포(火砲)의 위력이, 한 위대한 해군제독 이순신(李舜臣)을 만나면서
“얼마나 화려한 승전(勝戰) 불꽃”을 피웠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쾌거였다.
화승총으로 무장시킨 20만 일본 침략군은 육지에서 파죽지세로 승전을 거듭했지만,
판옥선과 거북선에 거치한 조선화포를 앞 세운 이순신장군의 수군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임진왜란 3대 대첩가운데 하나인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1592.8.14)의 예만 들어도,
56척의 전함으로 출정한 조선수군은 전선 73척의 1만 여 정예 일본수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59척을 함포사격 등으로 침몰시키고(나머지 14척은 나포) 왜군 8,980명을 사살했다.
그에 비해 조선군 전함은 한 척도 피해가 없었으며, 전사 19명에 부상자 114명에 불과했다.
한산도대첩은 ‘살라미스(Salamis; B.C 480년)해전’ ‘칼레(Calais; 1588년)해전’
‘트라팔가(Trapalgar; 1805년)해전’과 함께 "세계 4대해전"으로 꼽히고 있다.
< 우리나라 화약무기 - 고려(3) 끝>
이후 '조선편' 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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