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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꼬리 나사’(尾栓)의 비밀
화승총 총신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비센’(尾栓)이었다. 총신의 약실 뒷부분(총구의 반대편 끝)을 틀어막아 압력을 견디게 한 숫(雄)나사였다.
당시 흑색화약은 폭발시 완전연소가 이뤄지지 않았고 또 발사과정에서 탄환이 고열에 녹아 총열내부에 일부가 들러붙는 등 찌꺼기가 생겼다. 꼬질대로는 아무리 청소해도 제거가 안 되는 찌꺼기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신 꼬리부분을 나사식으로 조이고 풀어서 수시로 청소가 가능한 '비센'을 달았던 것이다. 화약과 실탄을 총부리 쪽에서 장전하는 소위 전장식(前裝式)의 초창기 화약무기는 총이건 대포건 어김없이 '꼬리나사'를 달았다.
대포의 경우 한참 뒤에 포탄을 포신 뒤쪽에서 장전하는 '후장식'(後裝式)이 개발되자 꼬리나사 대신 기계장치로 열고 닫는 '폐쇄기'(閉鎖機)가 발명됐지만, 지금도 옛날 버릇이 남아 폐쇄기를 '꼬리나사'라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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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화승총을 만들라"는
지엄한 도주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키요사다는 결국 셋부쿠(切腹; 할복자살)를 결행하기에 이른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직후, 다행히 키요사다의 딸 와카사(若狭)가 발견,
응급조치를 했고 목숨만은 건졌다.
효녀 와카사(당시 만16세)는 그때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접했다.
오사카 사카이시(堺; 오사카 泉北地域)출신으로 아버지 밑에서 뎃포 제작기술을 배우던
야마타사부로(橘屋又三郎)가 "지금 섬에 머물고 있는 포르투갈인 핀토가 화승총을 소지하고 있는데,
꼬리나사 제작비밀을 가르쳐줄 지도 모른다" 귀띔을 해 준 것이다.
와카사는 곧바로
핀토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와카사의 효심에 감동한 핀토는 자신이 소지했던 호신용 뎃포를 건네주어 '꼬리 나사'부분을 분해해
제작원리를 이해하게 도와주었고, 할복으로 중상을 입은 아버지의 상처까지 수술해주었다.
키요사다의 딸 와카사는 포르투갈사람(何番人)이 자기 아버지를 위해
따뜻한 인간적 배려를 베푸는 것에 감동, 핀토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와카사와 핀토의 지극간병으로 키요사다는 몸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때 핀토는 키요사다에게 넌즈시 "당신의 딸을 나에게 주면, 뎃포제작 기술 모두를 전수하겠다"고
제안했고, 키요사다는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후 몇번의 난관을 겪었지만, 끝내 화승총의 '꼬리나사' 제작에 성공했다.
그때 키요사다의 '꼬리나사' 제작방법은
수나사의 골진 부분을 사포(砂布)로 일일이 갈아서 만들어냈다.
완성된 수나사는 총신 뒷부분에 밀어넣고, 그 접합부분을 불에 녹이고 두들겨서
수나사의 홈에 "꼭 들어맞는" 암나사 부분을 완성했다.
일본 대장장이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망치질이었다.
완성된 화승총으로,
드디어 도주를 모시고 실제사격 테스트를 하는 날이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핀토가 고국인 포르투갈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딸 와카사는 이미 핀토의 아이를 임신한 처지였고 "핀토와 함께 포르투갈로 가겠다"고
아버지 와카사에게 매달려 간청했다.
그러나 아버지 키요사다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총기제작 기술하나를 전수받으려고 사랑하는 딸을 이방인에게 내주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그 딸이 포르투갈로 떠날 경우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미개인취급' 받으며
수모를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와사는 워낙이 강한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쳐 끝내 포르투갈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핀토가 홀로 떠나자 키요사다는 와카사의 친구 슈(種)를 설득하여 와카사가
임신한 핀토의 태아를 유산시키려 약까지 만들었으나, 핀토를 그리워하는
딸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그것 만은 차마 먹이지 못했다.
얼마후 와카사는 아들 와카우미(若海)를 낳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카와사가 포르투갈행 배가 떠나는 중국의 닝보항까지는 핀토와 동행했으나,
다시 타네가시마로 돌아와 섬에 정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승총제작 성공소식은
오사카의 쇼군 오다노부나(識田信長)에게 까지 알려져 키요사다는 사카이시(堺)에 초대받기도 했다.
키요사다에게서 뎃포제조를 배웠던 야마타사부로(橘屋又三郎)의 주선으로 그곳에서 닛뽄도 장인들에게
뎃포제조 기술도 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코죠(向上)가 화약폭발로 불이 붙은 흔적을 추적하던 중
타네가시마 섬에서 분실했던 첫번째 완성 뎃포를 아마타사부로의 집에서 발견하게 됐다.
제자로 여겨 뎃포기술을 전수해 준 야마타의 정체를 그제서야 알게 된 키요사다는
곧 바로 고향인 타네가시마 섬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포르투갈로 혼자 떠났던 핀토는 다음해 봄, 와카사를 데리러 다시 타네가시마에 왔다.
그러나 핀토를 기다린 것은 핏덩이 아들 와카우미를 껴 안고 해안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한 와카사의 유골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핀토는
"이 유골 위에다 와카우미의 뼈도 올려 달라"고 했다.
키요사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후 핀토가 탄 배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 배가 사라지고 나서도, 언덕 위에는 꼼짝도 않고 지켜보는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픽션화'하여 멜로드라마 처럼 살을 붙인 부분도 있지만,
키요사다와 딸 와카사, 그리고 핀토와의 섬씽 등 '골격부분'은 사실이다)
키요사다의 처절했던 삶은
1606년, 제16대 타네가시마 도주(島主)이자 무장(武將)이던 히사도키(久時)에 의해
‘뎃포기’(鐵砲記)란 책으로 만들어졌다. 히사도키는 14대 도주 토키다카(時堯)의 아들로,
아버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유생승려(儒僧)인 난포분시(南浦文之)에 집필을 의뢰해 집필했다.
'뎃포기'는 일본에 뎃포가 전래된 사실을 기록한 유일한 책자다.
일본 타네가시마섬 개발종합센터(種子島開発総合センター)에는 지금도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화승총(県지정문화재)과 함께 키요사다가 제작한 일본국산 1호 화승총(市지정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타네가시마(種子島)는 ‘일본뎃포’의 고향
1955년 가을, 타네가시마 섬 히로타(広田; 南種子町)해변의 산 한 귀퉁이를 태풍22호가 훑고 가면서 흙속에 묻혀있던 사람뼈(人骨), 토기조각(土器片), 조개조각품 (貝製品)등이 드러났다. 이 유물들은 야요이시대(弥生時代; 기원전 10세기전반-서기 3세기중반. 논란이 많지만 일본은 그렇게 우긴다) 유적이다.
유물과 함께 철(鐵)제품 2점이 출토됐으며, 야요이 패총(貝塚)에서도 철제품 1점이 더 발굴됐다. 이로 미루어 타네가시마 섬은 오래전부터 제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추정케 했다. 타네가시마 섬 해변에는 지금도 사철(沙鐵; 모래형태의 철광석)이 널려 있는데, 어쩌면 섬 전체가 사철로 덮혀 있는지도 모른다.
풍부한 철광석(沙鐵) 때문에 일본 전국시대의 타네가시마는 제철작업이 성했다. 철이 생산되면서 자연스럽게 닛뽄도 등을 만드는 장인 공방(工房)이 몰려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산 뎃포1호를 만들었던 키요사다(清定)도 한 무리의 대장장이를 이끌던 이름난 닛뽄도 장인(惣鍛冶)이었다.
타네가시마에는 쿠로야마(黑山)라 불리는 평야지역 서쪽에 50채의 대장꾼이 모여사는 마을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총신과 작동 기관부(からくり), 목공(木工) 등을 분업했다고 하나 조금 부풀려진 숫자일 것으로 여겨진다. 키요사다가 이끈 대장장이 들이 뎃포를 만들었던 곳도 이 마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544년, 이 자그만 섬의 장인들이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뎃포생산에 성공하자 그 소식은 본토에까지 널리 알려져 졸지에 타네가시마는 '뎃포의 고향'이 됐다.
1590년에는 2년 뒤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타네가시마 장인들에게 탄환무게 20몸매(二十匁玉, 약 75g)짜리 뎃포 200정을 제작해 헌납하라는 명을 내렸다.
보통 화승총의 탄환무게는 ‘10몸매’(37.5g)내외, 총구경이 10-13mm 정도다. 그에 비하면 20몸매짜리 실탄은 총구경이 20-30mm에 달하는 '대구경'에 속한다.
▲ 뎃포의 화력은 총신구경과 탄환의 크기(무게)에 따라 결정된다. 개인화기 뎃포의 경우 탄환무게 3몸매(11.25g)의 '미니뎃포'에서 20몸매짜리 '중(重) 뎃포'까지 만들었다. 20몸매 뎃포는 에도(江戶) 때 많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탄환무게가 몸매(112.5g)를 넘기면 개인화기가 아닌 대포(大砲)류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타네가시마 대장장이들은 불과 몇 개월만에 그 총을 만들어냈다. 그만한 뎃포를 만들려면, 자체 제철(製鐵)능력 구비는 물론이고 용광로를 달굴 엄청난 분량의 목탄(木炭)도 충당해야 한다.
자그만 섬 안에서 그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로 말미암아 타네가시마는 일약 뎃포명산지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그러나, 타네가시마 뎃포의 명성도 세월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메이지(明治, 1868-1912)시대에 이르러 탄환을 총구 뒤에서 장전하는 후장식 (後裝式 = 元込め式), 뇌관충격식(雷管打ちの銃, percussion) 등 서구의 신식 총이 쏟아지자 타네가시마 뎃포장인들은 순식간에 직업을 잃고 말았다.
19명의 장인들은 새로 건설된 공장식 무기제조창(造幣廠)의 기술자로 스카웃 됐지만, 나머지는 대장장이의 전통을 살려 손으로 두들겨 만드는(手打) '타네가시마 가위'를 만들면서 옛 대장장이 장인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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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관점에서 기술한 '뎃포'의 역사(4) 끝.
<참고자료, 문헌>
- 塚本学 ‘鉄砲’(日本史大事典 4, 平凡社, 1993年)
- 保谷徹 ‘鉄砲(小銃)’ (歴史学事典 7, 弘文堂, 1999年) ISBN 4-335-21037-X)
- ‘ポルトガル人の日本初来航と東アジア海域交易’(中島楽章)
- 일본 타네가시마(種子島) 홈페이지 등 관련사이트 20여곳 서치.
- 일본판 위키백과(Wikipedia)등 온라인 사서류 10여곳 서치.
* 본문내용은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의 소중한 지적재산입니다.
동호인회의 사전허가없는 전재나 복사를 엄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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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보니까 화승총 불발시에도 뒤쪽 꼬리나사를 풀어서 해결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거 읽어보고 질문드렸으면 했는데. 이것도 링크로 달아주세요. 사진을 보니까 훨씬 이해가 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