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1. 현대 종합역사(199-현재) 1]노벨(1833.10.21-1896.12.10)과 노벨상제정 1857년 노벨의 나이 24살 때 액체폭약을 생산하는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었으나 파산하였고, 1863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았을 때 '니트로 글리세린'라는 당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폭약을 소개받았다. 1864년 당시 사용하던 액체폭약 '니트로 글리세린'은 조그만 충격에도 잘 폭발해 수시로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1864년 동생도 희생되었다. 1867년 니트로 글리세린을 기차에서 내리는 작업 중 액이 새어나와 주위의 규조토에 스며들어 굳어지는 것을 보았고, 규조토에 흡수된 '니트로 글리세린'은 망치로 두드려도 터지지 않을 만큼 안전했다. 이런 견고한 고형 폭약을 완성해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고, 1887년 니트로글리세린과 콜로디온면 (綿)에 장뇌(樟腦)의 혼합물인 혼합 무연화약(無煙火藥)을 완성하였다. 마침 수에즈운하는 폭발물로 큰 웅덩이를 만들어 연결하여 만드는 방식으로 많은 폭약이 필요하였고, 알프스 산맥의 터널을 뚫는 등 대공사가 많아서 '다이너마이트'의 수요가 급증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또한 형 로베르트와 루트비히에게 함께 투자한 카스피해의 유전개발에 성공해 대규모 정유소를 건설했으며, 1876년 세계 최초로 파이프라인을 채택하였고, 1877년 세계 최초의 유조선 '조로아스타호'를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많은 부를 축적해 노벨 집안은 유럽 최대 부호가 되었고, 노벨상이 탄생하게 된 동기는 알프레드 노벨의 형이 죽었을 때, 한 신문이 실수로 형의 사망 기사 대신 노벨의 사망 기사를 실었다. 그 신문은 노벨을 '수많은 사람들을 서로 죽이게 함으로써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노벨은 이러한 평가에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인류에게 유익을 끼칠 업적들을 기리는데 사용하기로 결심하여 노벨상을 만들게 되었으며, 평화상은 이웃 국가인 노르웨이에게 정하도록 하였다. 노벨 유언에 따라 3개는 스웨덴에서 시상하고, 1개는 노르웨이 기구가 해마다 시상하며, 재단은 후보 심사나 수상자 결정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그 업무는 4개 기구가 전담한다. 수상자는 금메달, 상장, 상금을 받게 되는데 상금은 재단의 수입에 따라 액수가 달라지며, 첫 노벨상 수상은 사망 5주기인 1901년 12월 10일부터 상을 주기 시작했고, 노벨상으로 주는 금메달의 금속의 가치는 2,000 달러 정도이고, 수집가의 가치로는 1976년 거래된 15,000달러이었다고 한다. 4개 기구는 1. 물리, 화학, 경제학: 스톡홀름에 있는 왕립과학 아카데미 2. 생리학과 의학: 스톡홀름에 있는 왕립캐럴라인 의학연구소 3. 문학: 스웨덴 아카데미 4. 평화: 노르웨이의 오슬로 노벨 위원회 상을 주는 기관은 11월 15일까지 결정을 내야하며, 심사와 표결의 과정은 비밀에 붙여지고, 평화상은 단체에 줄 수도 있지만 다른 상은 개인에게만 주어지며, 죽은 사람은 지명될 수 없다. 하지만 추천 이유가 정당하면 받을 수 있고, 수상 결정에 번복을 요청할 수 없으며, 수상자가 2명 이상이면 상금을 나누어 지급하는데 현재까지 3명 이상의 수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연속하여 2년간 수상자를 내지 못하면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도며, 같은 부문에서 지난해에 연기된 상과 그해 상을 동시에 수여하는 때도 있고, 수상을 사양, 거부할 경우 이름은 노벨 수상자 명단에는 올라간다.
하지만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되나 거부의 동기가 외부의 압력 때문에 거부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거부했던 사람이라도 이유를 설명하고, 수상을 신청하면 메달과 상장을 받을 수 있다. 상금은 이미 기금으로 환수된 뒤이므로 받지 못하며, 후보자가 없거나 세계대전 때처럼 정상적으로 정보를 수집할 수 없을 때는 수상이 보류되고, 국적, 인종, 종교, 이념에 관계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다. 한 사람이 1번 이상 받을 수도 있으며, 2000년 노벨 평화상은 우리나라 최초로 김대중 대통령이 받았으나... <노벨 얼굴이 새겨진 메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