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근세와 현대역사 [4-1] 1. 근세 종합역사(1500-1700) [1] 르네상스 (1)원인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는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에서 왔고 1855년 프랑스사람 J. 미슐레가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를 '문예부흥'이라 한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학문, 예술에서 재생, 부활, 창조, 부흥시키려는 의미이며, 유럽은 천년동안 로마 교황과 종교 제약의 틀 안에서 인간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기 속에 있었다. 교황의 주도로 시작한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 교황의 권위가 곤두박질했으며,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의 무역이 확대 되어 몇 개의 도시는 번영과 시민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이 도시들은 도시국가로 발전하여 경제력이 커져 교황으로부터 경제와 통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으며, 로마 카톨릭이 도시국가인 플로렌스 궁정엔 돈을 빌리려 온 마차가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르네상스를 앞장 선 사람은 플로렌스의 단테(1265-1321)로 그는 신생과 신곡을 발표해 인간이 존귀하다는 '인문주의' 사상을 심었고, 1350년 복카치오의 '데카메론(10일 간의 이야기)'은 휴머니즘 선구자가 되었다. 그리스나 로마의 자유롭고 인간적인 문화를 재 발견하여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휴머니즘사상을 부흥시키려 운동이 일반인에게 나타났으며, 종교계에도 로마교황에 대해 나타난 것이 종교개혁이다. 개혁자들은 오직 성서에만 의존하는 신앙을 주장하였고, 문예 부흥이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한 것은 고대 로마로부터 축적된 문화와 회교 및 비잔틴문화를 접하여 서유럽에 전하는 중심지이었다. 또 상업과 도시의 번영으로 부가 추적되어 이 도시들이 로마교황 권에 들지 않았으며, 또한 가문에서 교황이 배출하기도 하여 교황의 권한까지 가지게 된 것이 원인이다. 르네상스는 *베네치아와 플로렌스가 중심으로 도시국가(도시자치제)가 기반이 되었고, 동로마의 멸망으로 로마인이 가지고 온 돔과 회교형식 비잔틴문화는 르네상스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최성기는 1490-1530년 40년간으로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활동한 시기이기도 하며, 이 시기는 동시에 많은 유명한 예술가의 거장들이 나온 이유는 무엇 일가? 한가지 분명한 이유는 재정의 뒤 바침이 된 플로렌스 *메데치가(코스모)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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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역사 베네치아 지역은 이탈리아 북동부에서 슬로베니아에 걸쳐 있는 지역에 있던 공화국으로 AD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 12개의 섬에 부락이 형성되어 리알토 섬이 그 중심이 되었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역활을 하였으며, 7세기 비잔틴제국 지배를 받다가 8세기 지리적 도움으로 사실상 독립했다. 9세기 아드리아해에서 동서무역을 독점하여 부를 쌓았고, 십자군과 결탁하여 달마치야와 동지중해의 여러 곳을 획득했으며, 1204년 4회 십자군원정 때 그들을 원조하여 라틴제국에서 큰 세력을 얻었다. 이 때부터 제노바와 대립을 하다가 14세기 제노바를 물리치고 유럽의 제 1의 해상세력을 구축하였고, 여러 도시 중에 안정된 세력을 구축하여 르네상스 중심지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는 도시국가로 도제(총독)가 다스리는 공화국으로 발전하였고, 대(大)상인이 도시 귀족으로 세력이 강대했으며, 마르코 폴로(1254-1324)는 달마치야에서 태어나 동방을 경험하고 돌아와 동방견문록을 남겼다. 14세기부터 지중해의 진출을 개시하면서 오스만제국과 충돌하여 위협을 받았으며, 베네치아는 더욱 영토를 확대하여 밀라노 및 기타 도시와 싸웠고, 베네치아의 강대함으로 향료무역을 독점했다. 이것이 새로운 항로 개척의 원인이 되었고, 1508년 교황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와 스페인간에 동맹을 맺어 대항했으며, 15-16세기 에게해 펠로폰네소스반도와 키프로스 등 식민지를 오스만제국에 빼앗겼다. 17세기경 유럽강국에 하나였으나 1797년 나폴레옹에게 정복되었다가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1848-49년 공화국이 재건되었으나 비트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통일로 이탈리아에 흡수되었다. <베네치아의 마르코 광장>
베네치아의 이야기 이곳은 유리공업이 발달하여 1280년경 유리공들에 의해 *안경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고, 18세기 이 도시가 한창 부를 누리고 있을 때 광란의 도시라고 불리 만큼 도덕이 문란했는데 시민들은 도박에 빠졌다. 수녀는 진주 귀고리에 미니 스커트를 입고 교황대사의 정부가 되려고, 경쟁했으며 결혼한 귀부인들은 정부를 두지 않으면 수치로 여겼다고 하고, 당시 창녀는 문학과 예술에 교양을 가지고 있었다. 창녀는 예술가와 토론 대상자이며 화가의 모델 역할도 하였고, 창녀는 소개인이 기교와 미모로 등급을 정해 소개하였고, 창녀들은 동성애를 방지하기 위하여 젖가슴을 내놓아야 하였다. 당시 난봉꾼의 대명사 *카사노바(1725-1798)가 이곳에서 출생지하였고, 이 도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베니스의 상인' 중에 유대인 구두쇠가 생각나는 물의 도시로 곤도라('흔들리다'의 뜻)가 연상된다. 낙천적인 베네치아 사람들이 곤돌라 뱃머리에서 '보∼라레 에 ∼' 하고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를 들은 사람은 지위고하를 망라하고 제 자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보오∼라아∼레에∼'하며 합창을 한다. 이곳 교통수단인 택시는 작은 보트를 말하고 버스는 여객선을 말하며, 소방차는 소방선이 하고, 곤도라가 검은색인 것은 페스트로 죽은 시체를 옮길 때 배 색깔을 검은색으로 한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죽어 색깔을 바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며, 유리공업, 바실리카, 산 마르코 광장과 비둘기, 도제 궁전, 폰테 디 리알토 다리 등이 이 유명하나 그 중에 볼품 없는 탄식의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감옥으로 가는데서 생긴 이름이며, 1756년 이 다리를 건너간 사람 중 카사노바 한 사람만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로 갔다.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을 한 건물에서 볼 수 있으며 화려한 교회와 무덤, 많은 예술 소장품, 음악 등이 있는데 이 중에 어떤 것 하나라도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지금도 이 도시는 바다 속으로 내려가고 있어 이 도시를 구하자는 전세계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있는 탄식의 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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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안경(眼鏡)이란 '눈 거울'이란 뜻으로 원인은 거울의 원리에서 안경이 탄생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거울이 렌즈로 렌즈가 안경으로 변하였는데 안경은 언제부터 누가 발명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문헌에 의해 세계의 최초의 안경을 만든 것은 대략 서기 1280년경 베네치아의 유리공들에 의해 제작 됐음을 추정할 수 있고, 최초로 대못안경은 나무나 동물의 뿔 또는 뼈로 만든 테가 있다. 이 테에 수정이나 유리로 제작된 둥근 렌즈를 끼워넣은 단안경 두 개 를 대못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또 안경은 학자나 수도승에 의해 이탈리아 전역에 보급되었다고 하며, 이것이 중국 원나라에까지 전해져 동양인의 취향에 맞는 디자인으로 개발되어 세계 각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안경의 뿌리를 동양에서는 서양에서 찾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동양에서 안경의 뿌리를 찾고 있는데 1250년 몽골지방을 여행했던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튀브크가 몽골 사람들이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동료 수도사인 영국인 로저 베이컨에게 말하였고, 1268년 로저 베이컨은 베니스의 유리공업 기술과 결합시켜 유리로 볼록 렌즈를 만들어 실용화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유럽에서 안경의 기원으로 삼아 안경의 뿌리를 동양에 두고 있는 이유이며, 중국문헌 '아유만록'에 보면 1300년 전후해 명나라 사람들이 서역 상인들로부터 좋은 말 한 필 값을 주고 안경을 사들였다는 기록있고, 안경은 볼록렌즈의 노안용만 있었으나 16세기 중엽 근시용이 발명되어 17세기 널리 보굽되었다. <대못 안경> [안경의 3대 요소인 렌즈, 안경테, 안경집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1.렌즈 먼저 초기 렌즈의 재료는 유리나 수정이었고, 수정렌즈는 유리렌즈에 비해 온도에 따른 변화가 적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게 해준다고 하여 고급품이었으며, 우리나라는 경주 남산서 캐낸 수정이 유명하다. 남산수정은 다른 수정에 비해 경도가 강하고 모든 제작이 수 작업으로 이루어져 가격도 비싸고 귀해 최고의 안경으로 꼽힌다고 하는데 경주 돌 렌즈는 명성이 남아 있었으나 6.25 이후 서구식 안경이 대량 보급됐다. 가격 경쟁에 떨어지고 또 경주 남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수정 채굴이 불가능해져 지금은 안경의 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경주의 옥돌 안경> 2. 안경테 초기 안경은 장시간 코 위에 올려놓을 수 없는 것이 단점이었고, 가죽 테 안경은 가볍고 잘 흘러내리지 않아 널리 애용되었으며, 프랑스는 한쪽 귀에만 부착하는 외알 안경이 유행하였다. 벼룩서커스를 보기 위한 돋보기도 있었고, 그 외에 가위 안경, 오페라나 승마경기를 볼 때 사용되던 손잡이가 달린 안경도 있으며, 그 외에 가위 안경, 오페라나 승마경기를 볼 때 사용되던 손잡이가 달린 안경도 있다. 실다리 안경은 빨리 걷거나 뛸 때 사용할 수 있게 다리를 단 안경은 안경사에 획기적인일이었고, 코의 경첩은 놋쇠로 만들어 뒷면에 부착하고 앞판 장식이나 못은 구리로 만들었다. 부러진 안쪽 안경 귀는 놋쇠로 보수되어 있는데 정조임금의 옥(玉)안경은 안경다리는 실로 만들었고, 테는 옥으로 만들어져 매우 동양적인 분위기인데 옥 제품을 왕족만이 사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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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경집 안경집은 안경을 휴대하기 위한 도구로 처음엔 안경을 부끄럽게 여겨 도포 자락에 넣고 다녔으나 점차 끈을 달아 허리춤에 매달기도 하였고, 더 화려해지고 문양이나 재질이 다양해져 안경보다 비싼 것도 생겨났다. 안경집은 부의 상징으로 표현되었고, 우리나라는 피나무, 은행나무, 오동나무 등으로 속을 파낸 다음 다듬어 옻칠이나 기름칠한 것이 대부분이다. 어피 안경집: 어피(魚皮)란 물고기 껍질이지만 정확한 표현은 상어 껍질이다. 채상 안경집: 대나무 껍질을 얇게 벗겨 엮어서 문양을 낸 것이다. 가죽 안경집: 가볍고 질겨서 좋지만 매우 드물다. 종이 안경집: 세계에서 우리 나라 밖에 없었고 종이를 여러 겹 바른 뒤 옻칠을 하거나 종이를 가늘게 잘라 꼬아 엮은 것도 있었으며 종이 안경집은 질겨고 오래 쓸 수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금속 안경집: 튼튼한 반면 무거워서 매우 귀한 편이다. 대모 안경집: 대모(거북등 껍질) 안경집은 인기가 높았다. 노리개 안경집: 장식의 효과를 나타냈다. 불로초 문양을 수놓아 장수를 염원하고, 조금 큰 것은 바늘집 겸용으로 시집가기 전 처녀들이 주로 사용했다. 은칠조 노리개 안경집: 아기 돌 때 달아주어 눈병을 하지마라는 주술적인 것이다. 서양안경집: 호주머니의 발달로 끈이 없고 멋을 부리기보다 휴대하기 간편하게 만들어졌다. 동양안경집: 대부분 끈을 달아 허리춤에 매달았으며 안경집 밑에 매듭을 다는 것이 중국에서 유행되어 전해져 멋을 내고 화려하고 종류가 다양했다. 단, 일본의 안경집은 끈이 없으며 일본 고유의 의복이 허리띠가 넓어 띠 속에 휴대하였다. <고대 안경과 안경집> 4. 우리나라 안경 역사 임진왜란 직전 10 여년 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선조때 학자 김성일의 후손 집에서 김성일이 쓴 것으로 전해진 안경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안경 이 될 것이다. 왜란 전후 사정을 적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임진왜란의 강화를 위해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심유경과 왜승 현소가 둘다 노인이라 작은 글씨를 볼 때 안경을 끼고 읽는 것을 신기한 일로 적고 있다.
이것이 안경에 대한 최초의 기록임을 미루어 볼 때 김성일이 안경을 구입할 수 있었음직 하며, 그후 제주도 정의현감으로 있던 이종덕이 풍랑으로 일본땅 나가사키에 표류하였다. 그곳에서 서양사람이 사는 아란타관을 구경했는데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이'마치 게 눈깔 이나 벌(곤충)의 눈두덩만 같았다'고 적고 있으며, 이 게 눈깔을 쓴 문헌상 최초의 한국인은 남구만이다. 그는 숙종 때 이름난 제상으로 장희빈 사건으로 여러 차례 유배당했는데 '정조실록' 23년(1799) 기록에는 임금님의 시력이 나빠져 책을 읽을 때마다 안경을 끼었다고 한다. 한국 안경의 문헌상 시초는 1600년 전후로 순조 1820년 때 안경가게에는 30여 가지의 다른 안경을 만들어 팔았던 것으로 되어있고, 16세기말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 안경이 대략 20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민간에까지 보급될 만큼 얀경을 꺼리는 습관은 두터웠다고 한다. 5. 안경과 엮인 이야기들 우리 전통 사회에서 윗사람 앞에서 안경을 끼는 것은 결례 정도가 아닌 오만불손한 패륜행위로 헌종 때 일로 임금의 외숙 조병구는 눈에 안질이 나 안경을 끼고 임금 앞을 가로질렀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헌종은 '외숙의 목이라고 칼이 들지 않을꼬'하고 혼자서 말을 하였고, 이 말이 외숙의 귀에 들어가 이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는 이야기와 또는 사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최초의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기수는 주체성이 대단한 외교관으로 그는 일부러 수신사 일행 16명 전원에게 안경을 끼고 입성했으며, 왜인을 접할 때마다 안경 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것은 너희 왜놈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안경은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고귀한 신분과 우월함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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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10세는 라파엘로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면서 눈이 나쁘지 않았도 일부러 안경을 낄만큼 서양에서 안경은 위엄의 상징이었고, 스페인은 큰 안경은 신분이 높고 안경의 크기가 작을수록 계급이 낮았다. 한말 한국 정부에 외부참판(차관)으로 초빙된 독일인 묄렌돌프는 돋보기를 벗으면 한 발짝도 걷지 못하는 근시안이었는데 중국을 떠날 때 그를 추천한 이홍장이 충고를 하였다 . 조선 임금 앞에 가서는 안경을 벗어야 한다는 충고를 받고 그대로 이행하고 나오면서 출구를 못 찾을 정도로 허둥되었다고 하며, 고종황제는 외국인으로서 예의가 바름에 감동하여 묄렌돌프를 신임하고 중용 했다. 그것이 소문이나 묄렌돌프는 '애체덕'이란 별명을 얻게 됐는데 중국서는 안경을 애체라고 하며, '애체덕'은 '안경의 덕'을 본 사람이라는 뜻이고, 1891년 새로 온 일본 오이시 공사가 고종을 알현하였다. 무엄하게도 안경을 쓴 채 대전에 들려 하였고, 윗사람 앞에 안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법도였기에 당시 궁정 통역관이요 후에 한말의 마타하리라는 배정자 남편이 되는 현영운은 안경을 벗고 대전에 들것을 종용했다. 그는 막무가내였고, 이런 일이 있은 후 조정에서는 일본정부에 나라를 얕보고 저지른 임금에 대한 불경으로 공식항의를 하였고, 안경을 벗기지 못했던 현영운을 유배시켰었다. 1896년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고 있던 고종황제를 뵙고 대궐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는데 고종 배알 때 서재필이 안경을 낀 채이었다. 친로파 거두 이범진은 서재필을 음모해 '황제를 배알할 때 안경을 벗지 않음이 역신의 제1조요'라고 말했는데 서재필이 그후 개화작업을 하면서 백성들로부터 협조를 받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임금 앞에서 안경을 꼈다는 그 소문이라고 하며, 서재필은 이 정치문제를 야기 시킨 안경을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의 망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유품전시회에 기증되었다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었다. 1905년 이토는 주한 일본 공사와 함께 일본군을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 조약의 강제로 체결한사람인데 그가 각부 대신과 주한 외교관들이 참석한 잔치를 마치고 돌아갔다. 상에 놓아두었던 이토의 유럽제 금테 안경이 없어졌을 때 이토는 고의로 저질은 것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고, 조정은 범인을 잡아 돌려줄 것을 내부대신과 경무사에 명하여 그날 잔치 심부름하던 하인과 하급 관리들이 불려가 태를 맞고 주리를 틀리었고, 수십 명이 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영국의 할머니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 여사가 한국에 와 고종과 왕세자인 순종을 뵙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세자는 건강에 결함이 있어 보이며, 강도(强度)의 근시안으로 몸을 잘 못 가눌 지경인데도 예법 상 상감 앞에서 안경을 써서 안 된다하니 보기에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였다. 개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수난을 받았던 문물이 바로 안경으로 안경의 수난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한 것으로 신체의 훼손이나 덧붙여서도 안 된다는 삼엄한 유교덕목에 의해 안경은 반도덕적 요물로 취급받은 것이다. 세월은 흘러 안경은 멋 가운데 하나로 안경을 쓰지 않고 들고 다녔는데 유한계급인 한량과 기생 가운데 궁중 출신으로 격이 높음을 과시할 필요가 있던 약방기생은 일종의 신분 과시용이었다. 또 일제하에 소작인을 착취하는 지주의 대명사가 '금테안경'인 것도 눈이 나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안경의 신분과시 사례에 하나인데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이들이 선글라스를 쓴채 바라보거나 인사를 하면 건방지고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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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피렌체를 1434-1537년까지 지배한 메디치 가문) 코시모(1434-1537)의 이름은 메디치 가문의 중심 가계를 창시한 인물로, 메데치 가문의 대공 유래는 1569년 8월 27일 교황 피우스 5세로부터 토스카나 대공 칭호를 받아 코시모 1세로 즉위 한 때를 말한다. 코시모 대공은 코시모 1세(피렌체 공작 2세 1537-74, 토스카나 대공1569-74)로부터 시작하였고, 이 사람은 르네상스를 있게 한 중요한 인물이며, 대공국은 1737년 코시모 3세의 아들이자 계승자였던 잔 가스토네가 죽고 혈통이 단절되어 토스카나 대공국은 로렌 공작 가문의 수중에 들어감으로 끝났다. 코시모 1세는 그리스 학자의 강의로 플라톤 숭배자가 되어 자신의 별장에 옛날 플라톤이 세웠던 아카데미를 되살렸는데 이것이 성 베드로 성당의 라파엘 방에 '아테네 학파'의 그림으로 남게 되었다. 피렌체 대학은 지난 700년간 서구 세계에 전혀 알려진 적이 없는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런 일들은 코시모가 인문주의 운동(르네상스)의 주도자가 되어 이루어졌다. 그는 오스만제국 술탄 메흐메드 2세의 허가를 받아 동방에도 사람들을 보냈어 이들이 수집한 문헌들은 다른 어떤 도서관도 필적할 수 없는 훌륭한 '로렌초 도서관(손자의 이름)'의 핵심이 되었다. 플로렌스의 궁전과 유적은 이 가문이 만든 것이 많으며,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총애를 받아 이 가문을 통해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1534년 이 가문을 떠나 로마로 갔고, 이 가문에 2명의 교황도 나왔다. 레오 10세(1513-21)와 클레멘스(클레멘트)7세 (1523-34)이며, 이 가문은 은행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피렌체가 우리와 첫 인연은 임진왜란(1592년) 때 납치해 간 한국인을 일본 나가사키의 노예 시장에서 매매를 했다고 하는데 이때 피렌체의 상인 카르레티가 한국소년 다섯 명을 헐값으로 샀다. 그들을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도시인 고아로 데리고 갔으며, 이 중 한 명만 피렌체로 데려갔는데 이 아이가 서양 꼬레아성(姓)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코시모 대공> *카사노바(1725-1798) 그는 어머니는 여배우이며 할머니 밑에서 성장하였고, 17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명석하였고, 그는 자칭 ‘생갈트의 기사'라고 했으며 처음엔 성직자, 군인, 바이올리니스트 등으로 입신하려 했다. 그러나 여자문제로 투옥되었다가 1756년 탈옥한 후 약 30년을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데 소비하였고. 재치와 폭넓은 교양으로 외교관, 재무관, 스파이 등 여러 직업을 갖기도 하였다. 그동안 귀족, 문학가, 과학자, 예술가, 희극배우, 귀부인, 천민, 사기꾼, 방탕아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 사귀어 계몽주의 사상에도 접하여 감옥에 투옥당하는 등 그의 삶은 변화무쌍하였다. 그는 어떤 장소이던 어느누구와도 어떤 체위로로도 가능했다고 하나 40세가 되기 전 발기부전으로 보헤미아 둑스 성에서 발트슈타인 백작의 사서로 죽을 때까지 여자에게 접근조차 못하였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레몬에 들어 있는 산성을 이용해 레몬 즙을 질 입구에 넣어 피임을 했다고도 전하며, 그는 도박을 강박적으로 좋아하여 한 때는 프랑스의 복권제도를 총지휘하였다고 한다. 그는 호머의 일리아드를 번역한 번역학자이며 또 많은 여성의 편력을 자서전(회상록) 12권으로 남기기도 한 저술가인데 그의 자서전은 18세기 유럽의 사회 ·풍속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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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우라 몬탈바니 이야기 코스모대공 당시 플로렌스에 가장미인 로자우라 몬탈바니에 얽힌 이야기를 옮겨 보면 좀 믿기 힘든 이야기로 아름다움의 도가 지나쳐 비극이 됐는데 그녀를 보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로 마차가 지나가지 못했다. 그녀가 산 물건은 상점에서 값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성당에서 전부 그녀를 향하여 시선이 집중되어 예배에 방해가 되었으며 어부는 아르노 강에서 그녀 때문에 자살한 젊은이들의 시체를 건져야 했다. 파수꾼들은 그녀에게 퇴짜 맞아 칼로 자결하는 시체를 만나야 하였고, 자식들의 고통에 격분한 아버지들이 그녀를 3번이나 고소하였으나 판사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녀 때문에 시의 재무 담당관이 자기에 맡겨진 돈을 다 낭비하고 자살한 죄로 그녀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나 아무도 형을 집행하려고 하지 않아 풀려났고, 그녀를 사랑한 공작이 환상(幻像)에 이끌려 성당의 그림 중 천사나 마리아의 얼굴을 전부 그녀의 얼굴로 바꾸었다고 하며, 그녀는 다시 판사 앞에 서게 되었다. 이번엔 얼굴에 가면을 씌우고 섰으며, 형은 가면을 벗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과 함께 종신형을 받아 독방에 갇혔고, 이 후로 39년 지난 뒤 코시모(코시모 1세) 대공이 즉위했다. 즉위 행사로 죄수들을 사면하기로 하였고, 죄목을 보다가 자유롭게 살기에는 너무 아름다워 종신형을 선고 받은 그녀의 문서를 보았으며, 대공은 그녀를 소환하여 가면을 벗기고 관찰하였다. 그리고는 '이 여인이 아름답다고?'라며 실망하였는데 이미 그녀의 아름다움은 가면 속으로 사라지고 죽음의 모습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많이 과장된 것 같다. <피렌체의 아르노강과 폰테 베키오(오래된)다리> (2)건축과 예술 건축은 돔형과 화려한 코린트식이 도입되었고, 베드로 대성당(1506-1626년, 120년간)과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바실리카 등이 대표적이며, 율리우스 2세는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시작했다. 그는 떨어진 교황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성 베드로 성당 바실리카의 초석을 놓았으며, 레오 10세는 비용이 모자라 면죄부를 판 것이 도리어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어 교황권위가 더욱 추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술로는 조각과 미술이 많았는데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삐에타(신실한 믿음)상, 모세 상 등이다. 미술은 보티첼리의 비너스탄생, *라파엘의 성 모자 상 및 시스틴 성당의 라파엘 방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시스틴성당 천장그림인 '최후의 심판'은 명작이고, 또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 그림도 빼놓을 수가 없으며, 미켈란젤로, 라파엘, 다빈치 등 같은 시대에 나왔다. 이런 훌륭한 예술가가 한꺼번에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새로운 자유로운 창작의 존중과 풍족한 생활과 높은 지위의 제공이라고 할 수 있다. * 라파엘(로)(1483-1520) 그는 무명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기초를 닦았으며, 11살에 아버지가 죽었고 17세에 '대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도제 아래서 일했는데 하루는 큰아들을 옆에 데리고 어린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용하게 노래하는 여인을 목격한 후 깊은 인상을 받아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다. 옆에 있는 술병 둥근 밑바탕에 그림을 그린 것이 걸작품에 중에 하나인 '세디아(에스테헤)의 마돈나'로 그는 이 그림을 음식값(25센트 정도)으로 주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백만 달러로도 살수가 없다고 한다. 그의 마돈나 연작은 1480년부터 회화 분야에 커다란 혁신을 이룩하였고, 마돈나는 '나의 부인'의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르친다. <라파엘로의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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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최초로 인간을 소재로 하여 그렸기에 더욱 유명하였는데 이 그림을 그가 죽을 때까지 간직한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을 소재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또는 자신의 초상화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빈치가 죽은 뒤 16세기 중반에 피렌체 부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부인 엘리자베타를 그린 초상화’라고 한 ‘바사리’의 주장을 정설로 여가며, 1495년 엘리자베타는 조콘다의 3번째 부인으로 16세에 결혼했다. 초상화는 24-27세 때의 일이며, 1528년 49세로 페스트에 걸려 죽었고, 다빈치는 이 그림을 4년(1503~06경) 동안 그렸지만 끝내 완성을 못한 것을 이유는 모르나 그가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지니고 다녔다. 다빈치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지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도 그를 무척 좋아했으며, 다빈치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남부의 퐁텐블로 성을 내어주며, 원하는 모든 물품은 공급했다. 이곳에서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리라고 배려해 주었고, 다빈치는 64세에 이성에 들어와 67세로 죽을 때까지 있었는데 그가 임종 때 ‘모나리자 그림을 프랑수아 1세에 선물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이 그림은 퐁텐블로 성에 걸려 있다가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었는데 모나리자는 루브르박물관의 수많은 소장품 중 하나에 불과하였으나 오늘날과 같이 유명하게 된 동기가 잇다. 그것은 1911년 8월 20일 일어난 도난사건으로 그림을 훔친 범인 ‘페루자’는 이탈리아계 프랑스 노동자인데 그는 바로 모나리자 그림이 도난당하지 않도록 보안장치를 설치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노동자 속에 들어가 보안장치가 동작하지 않도록 훔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며, 불과 40분 만에 빼돌릴 수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엉뚱하게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라고 한다. 그 이유는 기욤의 비서관이 루브르박물관의 소장품을 빼돌려 피카소와 뒷거래를 했던 전력 때문에 두 사람은 프랑스 검찰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며칠 후에 둘은 무혐의로 풀려나왔다. 하지만 피카소는 외국인이었던 탓에 한동안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고 하며, 이 사건으로 가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마리 로랑생(1883-1956년) 의 추억을 담은 시 '미라보 다리'가 유명하다. 참고로 이탈리아어로 모나는 유부녀의 경칭이고, 리자는 엘리자베타(Elisabetta)의 약칭으로 모나리자는 ‘리자부인’의 뜻인데 엘리자베타는 성경에 나오는 엘리사벳이다. (3)과학의 발전 1)르네상스의 3대 발명 1. 나침반: 항해를 안전하게 하여 신대륙과 세계일주에 공헌하였다. 2. 독일의 흑색화약: 아라비아인이 '그리스 불(화염방사기 일종)'을 사용하였으나 흑색화약이 발명되어 대포나 총에 사용되면서 지금까지의 창, 칼, 견고한 성이 필요 없게 되었다. 3. 독일의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책의 대량생산으로 싼값의 책 구입과 성직자의 지식독점도 없어지고 책과 성서가 일반인에게 보급되어 종교개혁에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화약 이야기 화약의 역사는 길며, 중국은 '불노장생'의 약으로 개발되었고, 후에 인도에 전하준 것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어 실용성 있게 만들어 졌으며, 화약의 원료인 니트로 글리세린은 불안전하였다. 1866년 노벨은 규조 토에 흡수시켜 안전하게 만들어 '다이너마이트'라고 했고, 노벨은 막대한 돈을 벌었으나 인류의 발달보다 파괴에 쓰이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노벨상을 만들게 되었다. 1899년 무연화약이 총포의 발사약으로 쓰였고, 처음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한 사람은 몽고인으로 유럽원정 때 사용하여 그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나 유럽인들이 몽골제국을 몰아 낼 때에도 화약의 힘이라고 한다. 유럽인이 화약의 사용한 것은 벨기에가 최초라고 한다. 2)천문학 폴란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과 독일 케플러의 망원경으로 행성법칙 제1-3법칙을 발견했으나 신교인이라 구교의 탄압을 받았고, 이탈리아의 갈릴레오는 '천문대화'라는 책을 내었다. 이 책이 지동설을 변호했다고 하여 종교재판을 받은 것은 너무 유명한 사건으로 지동설을 부인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하여 진리는 변할 수 없음을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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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사의 사탑(기울려진 탑의 뜻)'에서 낙하의 실험을 하였으며, 사원의 등이 흔들림을 보고 '진자 법칙'을 발견해 시계를 만드는데 응용되었고, 이런 과학은 영국의 뉴턴(1687)에게 이어졌다. 3)문학, 사상, 예술 문학은 영국 밀턴(1608-74)의 실낙원은 사탄이 하늘 전쟁에서 패하고 지옥을 탈출하여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에덴의 이브를 타락시키는데 천사가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알리자 사탄은 낙원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1516년 T.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를 통하여 당시의 부패한 그리스도교 사회의 개혁과 재생을 정치가와 지식인들에게 호소한 작품으로 제1권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해 공모를 한다. 부자가 만든 국가와 법률을 가진 당시 유럽사회를 비판하였고, 제2권은 악의 근원인 화폐경제와 사유재산제가 없어 시민은 평등하며, 재산공유제가 시행되어 화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를 묘사했다. 유토피아문학 장르의 창시로서 후대 문학에 영향을 주었고, 사상으로는 랑스 몽테스키외(1689-1755)의 '법의 정신'으로 3권 분립을 주장하였으며, 예술로는 독일의 바흐(1685-1750)는 종교음악의 대가였다. 헨델(1685-1759)은 바로크 음악의 걸작을 남겨 현대음악에 기초를 닦았고, 미술로는 다빈치와 함께 최대 회화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1606-1669)가 활동하였다. *유토피아(Utopia)와 샹그릴(렐)라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현재는 이상향(理想鄕)의 대명사로 쓰이는 단어인데 이상향 외에도 별천지, 피난처, 낙원 등의 의미도 있으며, 같은 뜻으로 '샹그릴라'가 있다. '샹그렐라'는 티베트언어로 샹(香, 마음), 그(格, 속), 릴(里, 해), 라(拉, 달) 즉‘마음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으로 이상과 행복은 지상에는 없고, 마음속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의미로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기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 또는 도원향'이 있는데 무릉의 어부가 진나라의 난리를 피해 산 속으로 온 사람들의 자손들이 평화스럽게 살고 있던 곳이다. 유토피아는 가공된 비현실적인 것을 말하지만 무릉도원은 사람이 갈 수 있는 낙원으로 동양사람들이 그리는 이상향으로 유토피아와는 차이가 있다. 샹그릴라와 같은 비경을 지낸 곳이 지상에는 여러 지역이 있는데 그 중에 중국의 운남성의 창족 자치구으로 유네스코는 샹그릴라라고 불러온 이곳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표고가 4000m 되는 곳에 탄산수가 만들어낸 백수대(百水臺)는 파묵칼레와 흡사하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전쟁에 지친 프랭크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메릴랜드주에 지은 대통령 별장을 샹그릴라로 명명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캠프데이비드 별장이다. (4)지리상의 발견 십자군 원정, 몽고의 침입, 동방견문록으로 동서양의 왕래와 교통이 열려 상인, 학자, 성직자가 동양을 자주 방문하였고,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의 후추와 향료 등을 사들이어 많은 이익을 남기였다. 육로의 비단길을 통하여 오는 상품은 오스만투르크가 높은 세금을 부가해 이익이 없어지자 직접 배로 인도나 중국에 가려고 바다 길을 찾으려는 나선 많은 사람 중에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가 유명하다. 엔리케의 노력으로 인도의 서해안 캘리컷에 도착하여 인도항로를 개척해 직접향료를 입수하여 인도네시아의 향료를 독점하였고, 중국의 마카오를 중심으로 무역을 하였다. 국왕들의 탐험 목적은 자국에서 바치는 곡식이나 가축의 세금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상인과 결탁해 식민지로부터 이익을 얻어내려는 정책을 '중상주의'라고 부른다. 상업에 의한 이익은 비단과 향료였으나 더 간절히 바란 것은 금과 은이었고, 이것을 얻기 위해 항해를 했으나 후에는 농장에서 노예가 필요하였기에 노예무역이 성행하였다. 미국의 독립 시에는 40만의 노예가 있을 정도로 노예무역이 번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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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에스파냐의 콜롬버스가 아시아 길을 서쪽으로 찾으려 한 것이 신대륙을 발견하게되었고, 1519-21년 *마젤란은 토르데실라스조약의 뒷면을 확인하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 한것이 지구를 일주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를 다스린 카알5세(차알스 1세)는 독일과 식민지 신대륙과 서인도제도, 아프리카의 서해안도 다스려 최대의 영토를 다스렸으나 그후 에스파냐는 식민지 경영을 소홀히 하였다. 에스파냐는 종교개혁을 하지 못해 시민의 경제력도 뒤떨어지고 쇠퇴하여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패권을 내어 주게 되었으며, 18세기 들어 프랑스와 영국이 치열한 식민지 전쟁을 벌었다. 세계 곳곳에서 치른 7년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해상권을 독주하게 되었다. *마젤란(Magellan, Ferdinand, 1480-1521) 포르투갈의 하급귀족 출신으로 마누엘왕에게 등용되어 1504∼1511년 사이 포르투갈령 인도총독부와 동남 아시아에서 일했으며, 아프리카와 인도 항로에 근무했고, 모로코의 무어인과 거래가 왕의 의심을 받았다. 왕의 불신을 받자 스페인으로 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운 후 거상 앙베르의 자금으로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허를 얻었다. 1519년 8월 10일 선박 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했고, 그는 1511년 말레이시아 항구 말라카에서 입수한 몰루카제도 무역의 대한 정보에 따라 그곳으로 향하다가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았다. 1520년 1월 ‘라플라타’는 해협이 아니고 강인 것을 확인했고, 11월 28일 힘든 ‘파타고니아(거인의 뜻) 해협’을 지나 태평한 바다로 진출해 ‘마젤란 해협’과 ‘태평양’ 이름 붙였고, 1521년 3월 6일 괌 섬의 원주민과 싸웠다. 3월 16일 필리핀군도 레이테만(灣) 즈르안 섬에 도착해 세비야에서부터 데려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고, 4월 세부 섬의 왕과 부하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펠레페 2세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여 스페인이 식민지가 되었고, 펠레페가 영어로 필립이라 국명이 필리핀이 되었으나 27일 막 탄 섬의 토벌을 하다가 마젤란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원주민에게 대포의 위력을 자랑하려고 다 쏜 것이 전사의 원인이며, 마리아나 제도 등의 이름도 이때이루어 졌고, 1522년 9월 8일 향료를 만재한 빅토리아호 1척만 돌아왔으며, 생존자는 엘카노 등 18명이었다. <마제란이 세계일주를 시작한 과달키비르 강의 세비야 항구> 제임스 쿡 (James Cook 1728-1779) 그는 영국 해군의 탐험항해자로 요크셔 출생이며, 캡틴 쿡(쿠커)으로 알려졌는데 선원 생활을 하다가 1755년 해군에 들어갔고, 7년전쟁 중 캐나다에서 적군인 프랑스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험한 수심 측량을 감행해 상관에게 인정받았으며 1763-67년 쿡은 캐나다에 이르는 해로와 그 해안을 탐험하였다. 천문학과 기하학 등을 배우고 1769년 엔데버호 함장으로 조사대원들을 이끌고 타히티섬으로 가서 관측을 성공시켰으며, 1763-79년 걸쳐 많은 섬들을 발견하였다. 당시에는 북반구대륙들과의 균형을 위해 남반구에도 같은 크기의 대륙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것을 확인하려 쿡은 항해를 했으나 남반구는 큰 육지로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1768-71년 뉴질랜드를 발견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 남동해안에 도착하여 남극대륙을 발견했고, 1772-75, 통가 섬, 타히티, 이스터 섬의 지도를 제작했으며, 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를 발견했다. 대서양의 사우스샌드위치, 사우스조지아 섬을 발견했고, 1776-79년 남극대륙에서 베링 해협과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까지 탐험하였다. 그는 소형 범선을 훔치려는 하와이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살해되었고, 앵커리지(Anchorage)는 알래스카 쿡 만(灣)의 항구로 쿡선장이 닻을 내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는 항해에 많은 희생자를 냈던 '*비타민' 씨(C)의 부족으로 생기는 괴혈병의 희생자를 한사람도 내지 않은 공적으로 표창도 받았으며, 그는 누구보다도 세계지도를 변경시킨 인물이었다. <항해 일지를 보는 영국의 쿡 선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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