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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제80호 진도 운림산방을 찾아서....
-소재지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지정번호 : 명승 제80호
-지정일 : 2011년08월08
-답사일 : 2019년03월06
필자가 운림산방을 탐방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습니다.
카테고리에 ‘명승을 소개합니다.’라는 코너를 만들고 한 달에 한 곳의 국가명승을 올리고는 했는데 명승 제49호 계립령에서 하염없이 쉬고 있었습니다.
남의 글이나 사진을 빌려서 쓰기보다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직접 다녀와서 올린다고 미룬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 나머지 명승을 다시 소개하기로 합니다.
운림산방은 진도에 있는 명승으로 먼 곳 진도에 있는 명승 하나만 보고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필자의 경우 진도에 있는 동석산과 첨찰산을 찾기 위해 1박2일 예정으로 진도로 내려와 첫째 날 동석산을 산행하고 둘째 날 첨찰산을 오르기 위해 쌍계사를 찾았는데 운림산방이 쌍계사 입구에 있었으니 큰 행운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산행 후 서울로 가는 막차 시간이 부족하지만 운림산방 때문에 진도를 일부러 내려올 수 없는 입장으로 30여분 짬을 내서 운림산방을 돌아보았습니다.
운림산방(雲林山房)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후기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痴->이 아호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직접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허련(許鍊, 1808~1893)이 기거한 곳이며 5대가 대를 이어오며 화실로 이용하기도 한 곳으로 소치기년관을 들어서면 영상과 5대에 걸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운림산방 소치기념관을 들어서면 소치선생이 스승 추사를 그린 초상화와 5대를
이은 운림산방화맥이 있는데 완당선생의 초상화에 대해서는 후미에 별도로 글을 싣겠습니다.>
허련은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뛰어 났지만 정통적으로 스승을 두고 공부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뛰어난 그림 솜씨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조금 늦은 20대 후반에 지인의 소개로 해남의 두륜산 대흥사의 초의선사의 제자가 되어 그림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초의선사는 소치의 재능이 초야에 묻히기는 아깝다고 생각하고 1840년 33세 때 추사 김정희에게 보내므로 추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으므로 타고난 재질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한 삼절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소치는 허유(許維)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운림산방 부로우셔에는 어릴 때 쓰던 이름을 후에 허련(許鍊)으로 개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명승기행에는 중국 당나라의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명명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승기행 글에서 당대의 명사였던 석파 이하응(흥선대원군), 민영익, 신관호, 권돈인, 정학연 등 권문세가의 고위 관리들과 교유한 그는 장안에 명성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추사 김정희에게 서화수업을 받은 제자였으므로 친분이 두터웠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1856년(철종 7) 허련은 그의 스승 추사 김정희가 죽은 후 49세가 되던 다음 해에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하며 이곳의 이름을 처음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하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고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이곳에서 1893년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는데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나 허련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허형이 진도를 떠나면서 운림산방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고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피폐된 이곳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다시 사들였고 또 다른 아들 허건이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러한 운림산방을 2011년8월8일 국가명승으로 지정하였는데 운림산방의 제4대 작가 임전 허문선생이 운림산방과 다수의 그림 등을 2012년 1월 진도군에 기증하게 되니 현재 진도군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위 글은 우리명승기행의 내용을 일부 편집한 부분과 직접 답사하고 영상을 통해 들은 부분과 전시관에서 보고 설명한 부분을 기록했습니다.)
운림산방의 사진기행
매표소앞입니다.
입장료는 2.000원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매표원에게 어디부터 관람하느냐? 물으니 기념관을 말해줍니다.
운림산방으로 들어서 잔디밭 중간으로 난 길을 따라 소치기념관으로 갑니다.
길가 좌측으로 오래 된 감나무, 동백나무 등이 운치를 더해 줍니다.
한옥에 팔작지붕으로 단장한 소치기념관으로 접근합니다.
<클릭하면 원본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면서 우측에는 낯익은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가 걸려있는데 세한도에 얽힌 내력은 익히 아는바로 제주도 유배시절과 제자 이상적의 인간성, 의리를 겨울철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면에는 절친들이 유배된 추사를 헌신짝 버리듯 한 우정을 빗대어 비판하는 그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세한도에 얽힌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 그림이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진도 출신 손재형 선생께서 고국으로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원자폭탄 투하로 이 지구상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T'자 형태인 전시실은 들어서며 좌측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이 상태에서 좌측은 출입문, 뒤로는 세한도, 우측은 영상실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 들어온 방향을 본 사진입니다.
그림이 많아 소치선생 작품만 일부 사진으로 옮겨봅니다.
아래 소치 선생님 작품은 클릭하면 원본 사진으로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소치기념관 안에서 유서 깊은 그림을 보고 나와 우측에 있는 진도 역사관은 생략하고 운린지쪽으로 이동합니다.
운림지 우측 3채의 건물이 있는데 초가는 소치선생께서 기거했던 가옥이고 영정실과 제각이 있습니다.
이곳은 그림공부를 하곤 했던 소치화실입니다.
이 화실 앞에 인위적으로 만든 연못인 운림지가 있습니다.
운림지입니다.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데 선 가운데는 소치선생께서 심었다는 목백일혼, 배롱나무가 있는데 계절이 꽃 필 시절이 아니라 목백일홍 꽃은 볼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사각의 못에 둥근 섬이 있는 형태를 천원지방을 따라 지은 형태라고 하는데 서울 궁궐에 가면 궁궐의 못은 대부분 이와 흡사한데 예전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운림지 를 벗어나면 오래된 향나무 옆에 정자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비옷을 입고 등산화 끈도 조르며 우중산행 채비를 했습니다.
운림산방을 나서며 마지막 운림지와 소치화실을 본 풍경입니다.
소치의「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소치의 「완당선생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
종이에 담채, 51× 24㎝,19세기,아모레 퍼시픽 미술관 소장
(위 사진은 석야님에게서 모셔왔습니다.)
소치의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은 운림산방을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아는 그림이며 추사 김정희와 소치와는 사제의 연을 맺은 사이로 소치 허련이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이라는 그림은 추사가 소동파를 흠모하는 것처럼 소치가 추사를 흠모함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소치 허련이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 있을 당시 그린 그림인데 이 그림 속에는 많은 사연과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소치는 김정희가 아끼는 제자 중 한사람으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대정마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목숨을 걸고 제주도를 3차례나 다녀갔다고 하는데 이때 귀양살이 하는 스승의 모습을 그린 것이 ‘완당선생해천일립상’으로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상을 한 것이 아니며 이 그림의 모티브는 추사 김정희가 그림 ‘동파입극도’에 얼굴만 달리 그린 그림인데 왜 이 그림에 얼굴만 바꾸어 그렸을까?
(위 그림은 추사 김정희가 그린 '동파입극도'로 석야님에서게 모셔왔습니다.)
추사가 그린 ‘동파입극도’는 1864년 오역이 그린 「동파립극도(東坡笠屐圖)」를 얻어 직접 모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추사는 24세 때 생부 호조참판 김노경을 따라 2달 남짓 북경을 다녀왔는데 사행길에서 두 사람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되는데 중국 옹방강과 완원입니다.
추사는 옹방강으로부터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완원으로 부터는 완당이라는 아호를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청의 대학자 옹방강은 소동파의 상 3폭을 그의 서재인 보소재(寶蘇齋,소동파를 보배처럼 받드는 서재)에 봉안하고 동파의 생일에는 동파서첩 등을 진설하고 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3폭의 동파상은 송의 이용안이 그린 「동파금산상(東坡金山像)」, 송의 조자고가 그린 「동파연배립극소상(東坡研背笠屐小像)」, 명대의 당인이 그린 「소문충공립극도(蘇文忠公笠屐圖)」로 추사는 보소재에서 크게 감명을 받고 후에 1864년 오역이 그린 「동파립극도(東坡笠屐圖)」를 얻어 직접 모사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동파입극도」라고 합니다.
소동파는 당대 최고 시인으로 높은 벼슬까지 올랐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해남도에 유배되었다고 하는데 추사 김정희는 정치적인 음모로 제주도에서 유배된 자신의 처지가 말년의 소동파와 닮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연을 알고 있는 소치는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고 스승이 그린 동파입극도에 소동파의 얼굴 대신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얼굴만 바꾸어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바로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이라고 합니다.
미술평론가인 손철주님이 쓴 2012년4월16일 조선일보기사를 인용합니다.
완당 선생이 하늘이 닿은 바다에서 삿갓을 쓴 모습(阮堂先生海天一笠像)
완당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호다.
'하늘이 닿은 바다'는 어딜까. 그가 귀양살이한 제주도다.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에서 8년을 견딘 그다.
'허소치가 그렸다(許小痴筆)'는 글도 보인다.
'소치'는 문인화가 허유(許維·1807~1892)의 호다.
그는 김정희가 아낀 제자다. 스승을 뵈려면 목숨을 하늘에 맡겨야 했는데, 제자는 그 험한 바닷길을 세 차례나 오갔다.이 그림은 제자가 유배지의 스승을 그린 작품이다.
뭣보다 옷거리에 눈이 간다.
귀양 사는 처지에 관복(官服)은 당치 않지만 명색이 고관 출신인데 삿갓과 나막신은 뜻밖이다.
구김이 간 겉옷도 변변찮다.
손시늉은 묘하다. 왼손은 넘실거리는 수염을 붙들고 오른손은 단전에 갖다 댔다. 다만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눈썹과 눈매가 섬약하나 낯빛은 온화하고 웃음이 인자하다.
여전히 생뚱스러운 건 삿갓에 나막신 차림이다.
그림에 사연이 있을 성싶다.스승의 귀양살이를 제 눈으로 본 제자는 가슴이 아렸다.
소동파(蘇東坡)의 옛일이 떠올랐다.
동파가 유배 시절 길 가다 폭우를 만났다. 삿갓과 나막신을 빌린 그가 옷자락을 쥐고 진창에서 뒤뚱거리자 사람들이 보고 웃었다.
천하제일의 문장가인 동파도 딱한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 배소(配所)다.
스승의 동파 사랑은 유난했다. 그걸 아는 제자는 스승을 비 온 날의 동파 옷차림으로 바꿔 그렸다.
소치는 스승을 동파와 같은 반열에 놓고 싶었던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동파립극도(東坡笠屐圖)」는 추사가 옹방강으로부터 크게 감명을 받은 후에 오역의「동파립극도」를 얻어 직접 모사하고 제찬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추사 선생을 사모했던 소치가 또한 그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여 동파상을 그리게 되어 소동파를 찬양하는 여파가 후대 화가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한국사전연구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위글은 석야님의 글을 인용 편집했으며 미술 평론가 손철주님의 글은 조선일보에서 퍼왔습니다.)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중봉(中峰) 혜호(慧皓) 모사,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106.5×31.4cm, 구2249
현재 액자로 되어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그림(이하 입극도(笠屐圖)라 부름)에는 ‘소문충공입극상(蘇文忠公笠屐像)’이라는 화제(畫題)와 함께 서울 봉은사(奉恩寺)의 화승(畵僧)이었던 중봉(中峰) 혜호(慧皓)가 모사했음이 묵서로 남아있어서 작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 위로는 과암(果巖) 홍진유(洪晉裕, 1853~1884이후)가 추사체(秋史體) 행서(行書)로 쓴 다음과 같은 제찬이 있습니다.
“평생에 동파공의 초상화를 접한 것을 헤아려보니 모두 수십 본이다. 광대와 뺨, 수염과 눈썹이 종종 상반되는데 멀리 천 년 전이니 진영을 [하나의 모습으로] 붙잡아둘 수 없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무릇 금(金)같이 정교하고 옥(玉)같이 윤택한 기운에 있어서나 학술과 문장의 뛰어난 자태에 있어서는 서로간의 거리가 멀지는 않다. 이렇게 나는 들었노라. 관세음보살의 천억화신은 각각 청정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구현하고 있으니, 해와 달과 더불어 항상 빛난다고 말이다(生平計得公像 凡爲數十本. 顴頰與鬚眉 種種卽相反 杳杳千載上 無怪乎眞影不可挽. 至夫金精玉潤之氣 經術文章之姿 大都不相遠. 如是我聞 觀世音以千億化身 各具淸淨寶相 與日月常鮮.)”
위 그림같이 추사가 동파립극도를 모사한 것같이 추사의 동파입극도를 모사한 작품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