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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3)
59장 제사장들의 음모
537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나사로가 살아난 소식은 곧 그 도시에 퍼졌다. 이적을 목격한 스파이를 통하여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곧 그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하여 곧 산헤드린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죽음과 무덤을 지배하실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셨다.
그 능력 있는 이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최고의 증거였다. 이것은 이성과 밝은 양심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신적인 능력의 증거가 되었다.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제사장들의 증오심은 더욱 격렬하게 되었다. 제사장들은 일찍이 그분의 신성에 대한 보다 작은 증거들을 모두 거절해 왔다. 그들은 이 새로운 이적에 격노할 뿐이었다.
죽은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군중 앞에서 백주에 살아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증거를 교묘히 설명하여 넘길 만한 재간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제사장들의 적개심은 더욱더 필사적이 되었다. 그들은 전보다 한층 더 그리스도의 사업을 중지시키려고 결심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비록 그리스도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심한 악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의 증오심은 그처럼 격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철두철미하게 경계하게 되었다.
538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소위 과학이란 것을 만들어,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몸에 생명을 넣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몇 말씀에 의하여 그들의 이론은 무너지고 말았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 이 두 면에서 사두개인들의 무식함이 드러났다. 그들은 이적을 통하여 백성들이 받은 인상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무덤에서 죽은 사람을 탈취해내는 데 성공한 그분으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거짓 소문들이 유포되었으나 이적을 부인할 수 없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 영향을 제거시켜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지금까지는 사두개인들이 그리스도를 잡아 죽일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 후에 그들은 그분의 죽음만이 그들에 대한 그분의 담대한 탄핵을 중지시킬 수 있으리라고 결정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으며 이 이적은 메시야가 저희 가운데 계시다는 증거라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업을 반대해 왔다.
처음부터 바리새인들은 그분께서 저희의 위선적인 허식을 폭로시켰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하였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도덕적 결함을 감추어 둔 엄격한 의식의 가면을 벗기셨다. 그분께서 가르치신 순결한 종교는 그들의 거짓된 경건의 공언을 정죄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날카로운 비난에 복수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들은 그분을 정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올 말이나 행동을 하도록 그분을 자극시키려고 애썼다. 그들이 여러 번 그분을 돌로 치려고 했지만 그분은 조용히 물러가셨으므로 그들은 그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분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이적들은 모두가 고통당하는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신 일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서 정죄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헤롯 당원들로 그분을 반대하여 분기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분께서 경쟁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고 설명하고 어떻게 예수를 죽일 것인가를 그들과 의논하였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흥분시켜 그분을 대적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저들의 권위를 뒤집어엎으시려고 하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들은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그분께서 백성들을 감화시키지 못하도록 애썼다. 그러나 이제껏 저들의 기도(企圖)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분의 자비로운 사업을 목격하고, 순결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들은 군중들은 이것이 안식일을 ~ 1 ~
범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의 말이나 행실이 아님을 알았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관원들까지도 그분의 말씀에 감화를 받아 그분을 잡을 수 없었다. 마침내 자포자기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공언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출교시키는 포고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므로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장로들이 의논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에 모든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는 그런 기이한 일을 행하신 그분을 침묵시키자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결심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거의 연합할 만큼 가까워졌다.
지금까지는 서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반대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539 니고데모와 요셉은 전번의 공회에서 예수님을 정죄하는 일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이번 공회에는 소집되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는 다른 유력 인사도 공회에 참석했으나 그들의 감화는 악한 바리새인들의 영향을 누르지 못했다. 그러나 공회 의원들 모두가 합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시간에 산헤드린은 법적으로 회집할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한 일은 묵인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어떤 의원들은 그리스도를 죽음에 처하게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지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그들은 이 일로 백성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나도록 하여 로마인들이 모든 성직자들이 가진 큰 특권을 박탈하고 저들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세력을 빼앗을 것을 염려하였다. 사두개인들도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일에 저들과 연합하였으나 로마인들이 저희의 높은 지위를 빼앗을 것을 염려하여 신중히 행동하였다.
그리스도를 죽일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소집된 이 회의에는 느부갓네살의 자랑하는 말을 듣고, 벨사살의 우상숭배적인 잔치를 목격하고 나사렛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선언하셨을 때에 참석했던 증인(성령)이 참석하셨다. 이 증인은 이제 지배자들에게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이 그들 앞에 분명하게 떠올라서 그들을 경고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열두 살 난 아이였을 때 성전에서 학식 있는 율법 박사들 앞에 서서 질문함으로 박사들을 놀라게 했던 장면을 회상하였다.
예수께서 방금 행하신 이적은 그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 하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 성경의 기록의 참된 의미가 저희 마음에 번개처럼 떠올랐다.
괴로움과 번민에 싸인 관원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랴”고 부르짖었다. 공회에 분열이 생겼다. 성령의 감화 아래에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확신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회의가 극도로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일어섰다. 가야바는 거만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으며 오만하고 마음이 좁은 사람이었다.
사두개파에 속한 가야바의 가족들은 거만하고 대담하고 무모하고 야망과 잔인함이 가득 찬 죄악들을 거짓된 의의 가면 아래 감추고 있었다. 가야바는 예언들을 연구하였으며 비록 그 예언의 참뜻을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큰 권위와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540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이 비록 무죄하다 할지라도 그분을 처치해야 한다고 대제사장은 주장하였다. 그분은 백성들을 자기에게로 이끌며 지배자들의 권위를 멸시하는 성가신 존재였다. 그런 존재는 예수님 밖에 없었다. 지배자들의 권위가 약화되는 것보다 그분이 죽는 편이 나았다.
만일 저희 지배자들이 백성의 신임을 잃게 되면 국가의 세력이 훼손될 것이다. 가야바는 이 이적 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쉬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때에는 로마인들이 와서 성전 문을 폐쇄하고 율법을 폐지하고 우리 민족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갈릴리 사람의 생명은 민족의 생명과 비교할 때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 그가 이스라엘의 복리를 방해한다면 그를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이 아닌가? 온 민족의 망함보다 한 사람의 죽음이 더 좋다.~ 2 ~
민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어야 된다고 선언함으로써 가야바는 비록 매우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예언들에 관하여 다소의 지식이 있음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 장면을 설명하면서, 예언을 들어 그 말의 넓고 깊은 뜻을 나타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더라.”
얼마나 맹목적으로 이 거만한 가야바는 구주의 사명을 인정하였던가!
이 가장 귀중한 진리는 가야바의 입술에서 거짓말로 변하였다. 그가 옹호한 정책은 이교에서 빌려온 정책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방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이 인류를 위하여 죽게 되어 있다는 어렴풋한 의식이 마침내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가야바는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드려 그들이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 있도록 죄 많은 민족을 죄악으로부터가 아니라, 죄 가운데서 구원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논법으로 예수님에게서 아직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담대히 말할지도 모를 사람들의 항의를 침묵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명시키셨다.
그러나 사단도 그들을 지배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단은 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고생당한 불평스러운 일을 주목하도록 충동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의를 얼마나 적게 존경하셨던가. 그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소유해야 하는 훨씬 더 큰 의를 제시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형식과 예식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죄인들에게 인자하신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서 저희 소원을 아뢰도록 격려하셨다. 그들의 견해로는, 예수께서 그와 같이 하심으로써 제사장 제도를 제거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랍비 학교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제사장들의 악한 행동을 폭로하셨으며, 그들의 감화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손상시키셨다. 그분은 그들이 의문의 율법을 엄격히 시행했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헛되게 하였다고 선언함으로 그들의 금언과 유전의 효과를 해하셨다.
541 사단은 이제 이 모든 것을 그들의 마음속에 상기시켰다. 사단은 권위를 유지하기 위 하여는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이 권고를 따랐다. 그들이 그 당시 행사하고 있었던 권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어떤 결정을 내릴 충분한 이유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감히 저희 마음의 생각을 말하지 않은 몇 사람을 빼놓고는, 산헤드린 회원들은 가야바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공회는 어려움에서 벗어났고 불화는 끝났다. 그들은 가장 유리한 기회에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예수님의 신성의 증거를 거절하고 꿰뚫을 수 없는 어둠 속에 저희 자신들을 가두었다. 그들은 전적으로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영원한 멸망의 낭떠러지 끝으로 나아가도록 그의 재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얼마나 기만당했던지, 스스로 기뻐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민족의 구원을 도모하고 있는 애국자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백성들이 매우 분노하여 그분에게 행하려던 난폭한 행위가 저희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예수님에 대하여 조급한 조치를 취하기를 두려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공회는 그들이 언도한 형벌의 집행을 미뤘다. 구주께서는 제사장들의 음모를 아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갈망하고 있으며 이 목적이 곧 성취될 것을 아셨다. 그러나 위기를 재촉할 필요가 없으므로 제자들을 데리고 그 지방을 떠나셨다. 이와 같이 모본을 보이심으로 예수께서는 또다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을 실행하셨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할 넓은 분야가 있으므로 그분께 대한 충성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 주의 종들은 저희 생명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제 세상을 위하여 삼 년 동안 공중 봉사를 행하셨다. 극기와 사심 없는 자비의 모본이 그들 앞에 있었다. 그분의 순결, 고통, 헌신의 생애는 만민에게 알려졌다. ~ 3 ~
그러나 이 삼 년이란 짧은 기간이 바로 세상이 구속주의 임재를 견딜 수 있었던 전 기간이었다.
그분의 생애는 핍박과 모욕의 일생이었다. 베들레헴에서는 질투심이 강한 왕에게 쫓기고 나사렛에서는 당신의 친 백성에게 거절당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는 까닭 없이 죽음의 선고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낯선 도시에서 임시 피난처를 발견하셨다.
인간의 재난에 동정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벙어리를 말할 수 있게 하고 배고픈 자를 먹이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신 그분은 당신이 구원하려고 힘쓰신 그 백성에게 내쫓겼다.
542 물결치는 바다 위를 걷고 한 마디 말씀으로 노도를 잔잔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 떠날 때에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했으며 죽은 자를 살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지혜의 말씀을 듣게 하신 그분은
편견으로 눈이 멀고 완고하게 빛을 거절하는 자들의 마음은 움직이실 수 없었다.
60장 새 나라의 율법
547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데서 오는 평화가 있었다.
그분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희생당하실 장소를 향해 나아가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상한 느낌과 의심 그리고 공포가 엄습하였다. 구주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당신의 주위에 불러 모으고 전보다 더욱더 명확하게, 당신이 배반당하여 고통 받으실 것을 알리셨다.
예수께서는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그들은 바로 얼마 전만 해도 도처에서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 자신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앉으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백배를 얻고 그분의 나라에도 참여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그리고 그분은 열두 제자에게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그분의 나라의 높고 영광스러운 지위를 특별히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이제까지 그분은 당신에 관하여 예언에 기록된 모든 일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548 그리고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통치하시는 영광을 예언하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들에 비추어 볼 때 배반당하여 핍박과 죽음에 이르리라는 그분의 말씀은 막연하고 희미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어려움이 방해할지라도 그들은 왕국이 곧 건립될 것이라고 믿었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따른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께 봉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린 첫째 무리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그분과 같이 있기 위하여 집과 친구를 즐거이 버렸으며, 그분과 같이 동행하고 담화하였으며 은밀한 가정에서나 공중 회집에서나 늘 그분과 같이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공포심을 진정시키고 위험 중에서 구원하고 고통에서 건지고 슬픔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과 연결될 때까지 인내와 온유로써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침내 그들은 열렬한 사랑으로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과 가장 가까이 있기를 열망하였다. 가능한 한 모든 기회에 요한은 구주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였고 야고보는 구주와 가까운 연결로써 영예를 누리고자 갈망하였다. ~ 4 ~
그들의 어머니도 그리스도의 추종자였으며 물질로써 아낌없이 그리스도를 받들었다. 아들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욕심은 새 나라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지위에 자신의 아들들을 올려놓으려는 탐심을 품게 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요구를 제시하도록 그들을 부추겼다.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예수께 나와 마음에 있는 소원을 허락해 주실 것을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셨다.
이에 어머니는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옵소서”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동료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구하는 그들의 이기심을 책망하지 않고 그들을 부드럽게 대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당신께 대한 그들의 애정의 깊이를 아신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인간의 애정만은 아니다. 비록 이 사랑이 인간이란 통로를 통하여 세속적인 요소로 더러워졌지만 그것은 그분의 구속하시는 사랑의 샘에서 넘쳐 나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책망하지 않고 심화시키고 정결케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시련과 고통을 표시하는 그분의 신비스러운 말씀이 회상되었지만 자신 있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주께 닥쳐올 모든 일을 같이 당함으로 그들의 충성을 증명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을 침례를 받으려니와”라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분 앞에는 보좌 대신에 십자가가 있을 것인데, 그분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두 악인이 같이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549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과 같이 고통을 나누어야 했으며 야고보는 형제들 중에 첫째로 칼에 죽을 것이었고 요한은 고통과 비난과 핍박을 형제들 중 가장 오래 받을 것이었다. 그분은 계속해서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위는 정실(情實)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획득하는 것도 아니요 독단적인 증여를 통하여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품성의 결과이다. 면류관과 보좌는 달성된 상태의 증거이며 이것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아를 극복한 증거이다.
오랜 후에 제자 요한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를 동정하게 되었을 때에 주께서는 요한에게서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과 가까워지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21, 12)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딤후 4:6~8)고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에게 가장 가까이 설 사람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사랑 즉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고전 13:4, 5)하는 사랑, 마치 우리 주님을 움직였듯이 제자들로 하여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모든 것을 주고 생애하고 수고하고 희생하게 한 사랑의 정신을 가장 깊이 체득할 자들이 될 것이다.
이 정신이 바울의 생애 가운데 명백히 나타났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 ~ 5 ~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죽음 그 자체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었으며 영혼들을 그에게로 모을 것이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 히 되게 하려”(빌 1:21, 20) 한다고 말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를 듣고 열 제자들은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야말로 모두가 구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두 제자가 그들보다 앞서 유리하게 보이는 자리를 얻었다고 분노하였다.
550 가장 크고자 하는 투쟁이 재연될 것처럼 보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분개한 제자들을 불러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
세상 나라에서 지위는 자아의 확대를 의미한다. 백성들은 지배 계급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게 마련이었다. 세력과 부와 교육은 지도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군중을 억압하는 많은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상류 계급은 생각하고 결정하고 향락하고 지배하게 되어 있었으며, 하류 계급은 복종하고 섬기게 되어 있었다.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종교도 권력에 좌우되었다.
백성은 저희 상전의 지시대로 믿고 행하도록 요청되었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는 전적으로 부인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는 다른 원칙하에 국가를 건설하고 계셨다.
그분은 사람들을 권력으로가 아닌 봉사로 부르셔서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도록 하셨다.
권력과 지위와 재능과 교육은 동료들에게 봉사할 큰 의무를 감당하도록 그 소유자들에게 주어졌다.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고후 4:15)이라는 말씀이 주어졌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스도는 제자들 중에서 모든 면에서 돌보는 사람이었으며 짐 지는 사람이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과 빈곤을 나누셨고 제자들을 위하여 극기하셨으며 더욱 어려운 곳을 평탄하게 하기 위하여 저들보다 앞서 가시고 미구에 당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지상에서 당신의 사업을 마치실 것이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원칙은 당신의 몸 된 교회의 교인들이 행해야 할 원칙이다.
구원의 계획과 기초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그분께서 끼치신 모본을 따르고 그분의 양 무리의 목자로 일하는 사람이다.
바울의 말은 참 그리스도인 생애의 존귀와 영광을 나타낸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고전 9:19, 10:33).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 심령이 속박을 받아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여 그를 판단하거나 그의 의무를 규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영혼에게 생각할 자유와 그가 깨달은 대로 행할 자유를 주신다.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자신의 개성을 다른 사람의 개성과 합칠 권리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든 문제에는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 할지니라”(롬 14:12, 5)는 원칙이 내포되어 있다. ~ 6 ~
그리스도의 나라에는 오만한 압제도, 행동의 강제도 없다.
하늘의 천사들은 지배하고 충성을 강요하려고 세상에 내려온 것이 아니요 은혜의 사자로서 인류를 향상시키는 일에 사람들과 협력하려고 내려오는 것이다.
551 구주께서 가르치신 원칙과 모든 말씀이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사랑하는 제자의 기억에 간직되었다. 그의 생애의 만년에 요한이 교회들에게 보낸 증언의 요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1, 16)는 말씀이었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 충만한 정신이었다. 성령의 부어 주심을 받은 후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행 4:32, 34, 33)었다.
61장 삭개오
552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요단강에서 몇 킬로 떨어진, 평야가 뻗어 있는 골짜기의 서쪽 끝에 아름답게 우거진 열대성 초목들 사이에 도시가 있었다. 종려나무들과 비옥한 정원들은 생수의 샘에서 물을 공급 받고 있었으며 그 샘들은 석회암의 구릉(丘陵)들과 예루살렘과 그 평원의 도시 사이에 끼어 있는 황량한 계곡에 박힌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있었다.
많은 대상(隊商)들은 절기를 지키러 가는 도중에 여리고를 통과하였다. 대상들은 언제나 축제의 절기에 도착하였는데 이번에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백성들을 움직였다. 최근에 나사로를 살리신 갈릴리의 랍비가 무리 가운데 계심이 알려졌으며 제사장들이 음모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군중들은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여리고는 옛날에 제사장들을 위하여 구별된 도성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 당시에도 많은 제사장들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이 도성의 주민들은 매우 다른 성격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교통의 대중심지였으며 로마의 관원들과 군졸들과 다른 지방에서 온 나그네들이 있었고 또한 관세 징수는 이곳을 많은 세리들의 본거지가 되게 하였다 세리장 삭개오는 유대인이었는데 그는 동포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의 계급과 재산은 그들이 미워한 직업을 통하여 얻은 보수였으며 그것은 부정과 강탈이란 다른 이름으로 여겨졌다.
553 그러나 부자인 세무 관리는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전적으로 마음이 굳은 사람은 아니었다. 세속적이고 교만한 외모 속에는 거룩한 감화를 받기 쉬운 마음이 있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있었다. 배척받는 계급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시는 분이란 소식이 멀리 퍼졌다.
이 세리장의 마음속에도 보다 나은 생애를 살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났다. 여리고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되지 않는 요단강에서 전에 침례 요한이 전도하였으므로 삭개오는 그 회개하라는 초청을 들었다.
“정한 세 외 에는 늑징하지 말라”(눅 3:13)는 세리들에 대한 교훈을 비록 겉으로는 무시하였으나 마음속에는 감명을 받았다. 삭개오는 성경 말씀을 알았으며 그의 행습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제 그는 크신 선생의 말씀을 듣자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느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말 때문에 그의 마음속은 희망으로 불타올랐다. 회개 즉 생애의 개혁은 그에게도 가능한 것이었다. 새 선생의 가장 신임 받는 제자들 중의 한 사람도 세리가 아닌가? 삭개오는 깨달은 확신을 따라서 즉시 그가 약탈한 것을 피해자에게 반환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마을에 들어오신다는 소식이 온 여리고에 퍼졌을 때는 이미 삭개오가 그의 발걸음을 되돌리기 시작한 후였다. 삭개오는 그분을 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쓰며 잘못된 방향에서 돌아서려고 하는 자들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기 시작하였다. ~ 7 ~
오해를 받으며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의심과 불신임을 받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리장은 그의 마음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던 그런 말씀을 하신 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길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기 때문에 키가 작은 삭개오는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길을 비켜 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군중들을 헤치고 얼마쯤 앞으로 달려 나가서 가지를 길가에 넓게 드리운 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거기서 이 부자인 세금 징수원은 나무 아래로 지나가는 행렬을 바라볼 수 있는 나뭇가지 사이에 기어 올라가 앉았다. 군중이 가까이 와서 지나갈 때에 삭개오는 그가 보기를 갈망했던 분의 모습을 찾아내려고 열망하는 눈으로 살펴보았다.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불평 소리와 군중의 외치는 환영 소리를 넘어서 세리장의 말로 표현되지 않은 소원은 예수님의 마음에 호소하였다. 갑자기 무화과나무 바로 아래서 한 무리가 멈추어 서자 앞뒤의 군중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영혼을 읽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선으로 한 분이 위를 쳐다보셨다.
554 나무 위에 있던 그 사람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을 귀를 의심하면서 들었다. 군중들은 길을 비키고 삭개오는 꿈속에서처럼 걸어서 자기의 집 쪽으로 길을 인도하였다. 그러나 랍비들은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면서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불만과 조소하는 태도로 수군거렸다.
삭개오는 매우 가치 없는 그에게 몸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양을 보자 감동되고 놀라서 침묵하였다. 이제 새로 발견한 주님에게 사랑과 충성을 나타내려고 그는 입술을 열었다. 삭개오는 자복과 회개를 공표할 것이다.
555 군중들 앞에서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 오되 주여 보시 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에게서 돌아설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놀랐었다.
그들은 서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며 놀라서 부르짖었다. 이제 제자들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예증을 보았다(막 10:24, 26; 눅 18:27). 제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부자가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았다. 삭개오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기 전에 그를 참된 참회자로 분명히 보여 준 사업을 시작했다.
사람에게 고소당하기 전에 그는 죄를 자복하였다.
삭개오는 성령의 깨우치심에 복종하였으며 우리들과 또 고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록하신 말씀의 가르침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주께서 오래 전에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레 25:35~37, 1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구름기둥에 둘러싸인 가운데 친히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삭개오의 첫 응답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동정하는 데서 나타났다.
세리들 사이에는 동맹이 되어 있어서 저들은 백성들을 압박할 수 있었고 사기 행위를 하는 데 공조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토색하는 일에도 그들은 거의 일반화된 관습을 따르고 있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세리들을 경멸하는 제사장들과 랍비들까지도 신성한 사명을 받았다는 구실 하에 부정직한 행동으로 치부하는 죄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삭개오는 성령의 감화에 복종하자마자 성실에 위배되는 모든 행위를 버렸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외투가 아니다. ~ 8 ~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556 그리스도인은 사업에서 우리 주께서 기업을 관장하실 때 취하실 태도를 세상에 나타내어야 한다. 모든 거래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그의 스승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께 성결”이란 말은 부기장과 장부와 증서와 영수증과 환어음에 기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불의한 행동을 하는 자들은 거룩하고 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는 것이다.
회개한 모든 영혼은 삭개오와 같이 그의 생애에 오점을 찍은 불의한 행동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들어오셨음을 뚜렷이 나타낼 것이다.
세리장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손해를 배상함으로 그의 성실함을 증거 할 것이다.
“전당 물을 도로 주며 억탈 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겔 33:15, 16)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만일 우리가 불의한 상거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속였거나 매매에서 사취하거나 어떤 사람에게라도 사기를 했으면 비록 이 일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을지라도 우리는 잘못을 자복하고 힘이 미치는 한 배상하여야 한다. 우리가 탈취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 바르고 현명하게 사용했더라면 축적되었을 모든 것을 변상하는 것이 바른 일이다.
구주께서는 삭개오 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삭개오 자신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온 식구도 복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 에게 진리의 교훈을 주고 그의 가족에게 하늘나라의 사물을 가르치고자 그의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은 랍비와 예배 자들의 멸시를 받고 회당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온 여리고 에서 가장 친한 사람들을 저희 가정으로 모아 거룩한 교사의 주위에 앉게 하여 다 같이 생명의 말씀을 들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서 영접할 때 구원이 그 영혼에게 이른다. 삭개오는 그리스도를 그저 지나가는 손님처럼 그의 집에 영접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성전에 거하시는 분으로 영접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비난하였고 그리스도가 그의 손님이 되는 것을 불평하였으나 주께서는 그를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셨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갈 3:7)이기 때문이다.
62장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
557 베다니에 사는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의 추종자들과 연합한 소수의 바리새인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예수님을 교사로 알았고 그분께서 메시야가 되셨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분을 구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의 품성은 변화되지 않았으며, 생애의 원칙도 변하지 않았다. 시몬은 문둥병이 나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께 이끌려갔다. 그는 감사를 표하고자 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베다니를 방문하셨을 때에 그는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에는 많은 유대인들도 같이 참석하였다. 이때에 예루살렘은 크게 흥분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주목을 끌게 되었다. 잔치에 나온 사람들은 그분의 동향을 면밀히 살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적의가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주께서는 유월절을 엿새밖에 남겨 놓지 않은 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는데, 그분은 관습대로 나사로의 집에서 휴식처를 찾으셨다. 마을을 지나가던 여행자의 무리들은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며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보내시리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백성들은 열광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베다니에 모였는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호감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을 보려는 호기심에서 모여왔다. ~ 9 ~
많은 사람들은 나사로에게서 죽은 후에 목격한 경이로운 장면에 대하여 듣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사로가 그것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으므로 놀랐다.
558 그는 이 일에 대하여 말할 것이 없었다. 영감의 말씀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전 9:5, 6)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에 대하여 놀라운 증언을 하였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하여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었다.
그는 확신과 능력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였다.
베다니를 방문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그 소식을 전하였으므로 흥분은 더욱 고조되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기를 열망하였다. 나사로가 그분과 동행하여 예루살렘에 갈 것인지, 유월절에 그 선지자가 왕위에 앉으실 것인지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질문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힘이 더욱 약해지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더욱더 격렬하게 되었다.
그들은 저들의 길에서 그분을 영원히 제거해 버릴 기회를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결국 그분이 예루살렘에 오지 않을까봐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분이 얼마나 자주 저들의 살해 계획을 좌절시켰는가를 기억하면서 이제 그분이 당신을 대적하는 저들의 목적을 알고 오지 않을까봐 매우 염려하였다. 그들은 염려를 감출 수가 없어서 서로 질문하기를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나오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였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나사로가 살아난 이후 그리스도에 대한 동정심이 매우 고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공공연하게 체포하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국자들은 그분을 비밀리에 체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심문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분의 유죄 선고가 알려질 때에 변하기 쉬운 대중의 여론의 물결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제의하였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나사로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이 안전하지 않음을 알았다. 무덤에서 나흘 동안 있다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으로 다시 살아난 바로 그 사람의 존재가 조만간에 반발을 일으킬 것이었다. 백성들은 그와 같은 이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의 생명을 취한 저희 지도자들에게 복수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헤드린은 나사로도 역시 죽여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증오와 편견은 그들의 노예들을 이런 지경에까지 이끌고 왔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증오와 불신은 무한한 능력이 무덤에서 살려낸 자의 생명까지라도 취하려고 할 만큼 커졌다.
이러한 음모들이 예루살렘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은 시몬의 잔치에 초대되었다. 식탁에서 구주는 시몬과 나사로와 같이 앉으셨는데, 한편에는 흉악한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시몬이 앉았고 다른 편에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앉아 있었다.
마르다는 식탁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예수께서 은혜로써 그녀의 죄를 용서하고 또한 오라비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므로 마리아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 있었다.
559 마리아는 예수께로부터 그분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을 듣자 깊은 사랑과 슬픔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기를 원하였다. 개인적으로 크게 희생하여 그녀는 그분의 몸에 부을 “값진 향유” 한 옥합을 샀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은 그분께서 왕이 되시려고 한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마리아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였으며 그녀는 제일 먼저 주께 영광 돌리기를 열망하였다.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다. 그리고 울면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써 발을 적시고 길게 물결치는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씻었다. ~ 10 ~
마리아는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녀의 동작은 타인의 주목을 끌지 않도록 진행되었으나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으므로 그녀의 행위는 마침내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유다는 이와 같은 행위를 매우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어떻게 말씀하실지 들으려고 기다리는 대신에 그는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런 낭비를 묵인하신다고 비난하며 불평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활하게도 불평을 일으키기 십상인 암시를 하였다. 제자들을 위한 회계였던 유다는 그들의 얼마 되지 않는 저축금에서 자기 자신이 쓰기 위하여 비밀히 얼마를 떼어 두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의 재원(財源)은 줄어들었다. 그는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모든 것을 주머니에 넣기를 열망하였다. 주머니 속에 있는 재물은 가끔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유다의 생각에 필요하지 않는 어떤 것을 샀을 경우 그는 “왜 이것을 낭비하느냐 왜 이 돈을 내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가지고 다니는 이 주머니 속에 넣지 않았느냐”고 말하곤 하였다.
지금 마리아의 행위는 수치를 느껴야 할 그의 이기심과는 매우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전 관례대로 그는 그 여자의 선물에 대한 자기의 반대에 어떤 가치 있는 동기를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제자들을 돌아보며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 유다는 가난한 자를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만일 마리아의 향유를 팔아서 그 수입을 유다의 재산에 넣었다면 가난한 자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유다는 자신의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재정 관리인으로서 그는 동료 제자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으며, 그는 제자들도 그를 그와 같은 견해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들에게 신임을 받았으며 그들 중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가난한 자를 동정한다는 말로 그는 그들을 속였다. 그의 교활한 암시는 그들로 하여금 마리아의 헌신을 불신하게 하였다.
560 식탁 주위에는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 줄 수 있었겠도
다.” 하는 불평이 돌았다. 마리아는 비평하는 말을 들었다. 그녀의 가슴은 떨렸다. 그녀는 언니가 낭비한다고 책망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주님 역시 아낄 줄 모른다고 생각하실지 모른다. 사과나 변명도 없이 마리아가 피하려고 할 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그분께서는 그녀가 당황하고 어려움에 빠진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와 같은 봉사를 통하여 그녀가 사죄함을 받은 데 대한 감사를 표시한 것임을 알고 그녀의 마음에 위안을 주셨다.
비난의 수군거림보다 더욱 높은 음성으로 그분께서는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구주의 시신에 아낌없이 부으려고 했던 향기로운 선물을 마리아는 그분의 산 몸 에 부었다. 장사 때에 이 향기는 무덤에만 가득할 뿐이지만, 지금 이 향기는 그녀의 믿음과 사랑의 보증으로서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저희의 사랑의 선물을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바치지 않았다. 그들은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의 차디차고 의식 없는 몸을 위하여 값진 향료를 가져왔다.
향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은 예수께서 이미 부활하신 뒤였기 때문에 저희의 수고가 헛된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께서 그녀의 헌신을 의식하실 때에 구주께 자신의 사랑을 쏟으므로 그분의 장사를 위하여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이 받으실 큰 시련의 어둠으로 내려가실 때에 당신이 구속하신 자들에게서 받게 될 열렬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그 행위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가셨다. ~ 11 ~
귀중한 선물들을 죽은 자를 위하여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차디차고 말없는 시체 주위에 둘러서서 거리낌 없이 사랑의 말들을 한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비와 감사와 애착 등의 말들을 아낌없이 쏟아 놓는다. 피로한 심령이 그것들을 매우 필요로 할 때에, 귀가 들을 수 있고 마음이 느낄 수 있을 때에 이와 같은 말을 하였더라면 그 언행의 향기는 얼마나 값진 것이 되었을까!
마리아는 자신의 사랑의 행위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다. 그녀는 비난 자들의 말에 답변할 수가 없었다. 왜 그녀가 예수님에게 기름을 붓기 위하여 그러한 기회를 선택하였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성령께서 그녀를 위하여 계획하셨으며 그녀는 성령의 강권하심에 순종하였던 것뿐이다.
영감은 우리에게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으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정신과 마음에 말씀하시고 마음을 움직여서 행동하게 한다.
이것이 이 일 자체의 명분을 세우는 주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 그녀의 행동의 의미를 말씀하셨으며 이로써 그분이 받으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마리아에게 주셨다.
563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옥합이 깨질 때에 향기가 온 집에 가득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고 그분의 몸은 훼손될 것이나 그분은 다시 무덤에서 일어나시고 그분의 생명의 향기는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선언하셨다. 장래를 내다보면서 구주께서는 당신의 복음에 관하여 확실히 말씀하셨다. 이 일은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었다.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에서든지 마리아의 선물은 그 향기를 발할 것이며 그녀의 꾸밈없는 행동을 통하여 심령들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라들은 일어나고 또 넘어질 것이며 군주들과 정복자들의 이름은 잊힐 것이나 이 여인의 행동은 거룩한 역사의 페이지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그 깨진 옥합은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이야기를 말해 줄 것이다.
마리아의 행위는 유다가 취하려고 하는 행동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비평의 종자를 떨어뜨리고 제자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일으키려고 한 자에게 예수께서는 얼마나 날카로운 교훈을 주실 수 있으셨던가! 비난 자가 얼마나 정당하게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가!
모든 마음의 동기를 알고 모든 행동을 이해하시는 그분께서는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 유다의 경험 가운데서 어두운 장면들을 공개하실 수도 있었다. 변역 자가 내세우는 말의 공허한 가면도 적나라하게 폭로될 수 있었다. 그 까닭은, 그는 가난한 자를 동정하기는커녕 구제에 요구되는 돈을 훔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과부와 고아와 고용인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분노가 격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가면을 벗기셨더라면 이것이 주를 배반한 이유로 주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적이라는 책망을 받을지라도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까지도 동정을 받게 될 것이었다. 구주께서는 그를 질책하지 않으셨다. 그와 같이 하여 그에게 배반할 구실을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유다에게 던지신 시선은 구주께서 그의 위선을 통찰하고 천하고 비열한 성격을 아신다는 사실을 유다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매우 혹독하게 정죄 받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심으로 유다를 책망하셨다. 이 일 전에는 구주께서 결코 그를 직접 책망하신 일이 없으셨다.
564 이제 그 질책은 그의 마음에 사무쳤다. 그는 복수하기로 결심하였다. 만찬 석을 떠나서 유다는 직접 대제사장의 궁궐에 들어가 그 곳에서 회의가 소집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제사장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돈도 없고 값도 없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일 기회가 제공되었다. ~ 12 ~
그러나 그들은 사랑으로 강권하는 가장 부드러운 정신으로 그들에게 제공된 귀중한 선물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금보다 더욱 귀중한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저희 주를 은 삼십에 샀다.
유다는 그의 품성의 모든 아름다운 특성이 탐욕에 압도당하기까지 그것을 품어 왔다. 그는 예수께 드리는 헌납 물을 탐냈다. 그의 마음은 구주께서 세상 군주들에게나 해당하는 선물을 받으시자 질투심에 불탔다.
그러므로 그 향유의 옥합 값보다도 훨씬 적은 금액에 그는 주님을 팔았다.
제자들은 유다와 같지 않았다. 그들은 구주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고결한 품성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았다. 만일 제자들이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깨달았다면, 그분께 바쳐진 어떤 것도 낭비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던 동방의 박사들은 그분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예에 대하여 참된 평가를 하였다. 박사들은 구주께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와서 구유에 누운 아기에 불과한 그분 앞에서 경의를 표하여 경배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손한 행동을 가치 있게 여기신다. 누구든지 그분에게 하늘의 공손으로써 후의를 베풀었을 때 그분은 그 행위자에게 축복하셨다. 그분께서는 어린아이의 손으로 꺾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꽃이라도 사랑으로 드려졌을 때에는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린이들의 선물을 받으시고, 선물을 준 아이들을 축복하시며 저희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셨다. 성경에는 예수께 기름 부은 마리아를 다른 마리아들과 구별해서 말한다. 예수님을 위한 사랑과 존경의 행동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의 증거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여인의 충성의 증거를 이렇게 언급하신다.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자라”(딤전 5:10).
주의 뜻을 행하려는 마리아의 열렬한 소원을 그리스도께서는 기뻐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고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은 그 순결한 사랑의 재물을 받으셨다. 마리아가 주께 이러한 봉사를 드리려던 갈망은 세상에 있는 어떤 귀중한 향료보다도 그리스도께 값진 것이었다.
그 까닭은 이것이 세상의 구주에 대한 그녀의 바른 평가를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를 강권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비할 데 없이 탁월한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 여자의 심령에 충만하였다. 그 향유는 그것을 드리는 자의 마음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넘쳐흐르기까지 하늘의 시냇물에서 공급된 사랑의 외부적인 증거였다.
565 마리아가 행한 일은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는 교훈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가장 귀중한 분이셨으나 그들은 오래지 않아 그분을 빼앗기게 되고 저들이 그분의 크신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늘의 궁전을 버리고 인간으로서 생애하신 그리스도의 고독에 대하여 제자들은 응당 이해했어야 하지만 전혀 이해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었다.
제자들에게서 받았어야 할 것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때때로 슬퍼하셨다. 만일 제자들이 당신을 옹위하고 있던 하늘 천사들의 감화 아래 있었더라면 그들 역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령한 사랑을 표시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헌물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임을 그분께서는 아셨다.
예수께서 저들과 가까이 계셨을 당시에 제자들이 저희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분께 행했어야 할 많은 일들의 참뜻을 깨닫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예수께서 이제 더 이상 그들과 같이 계실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은 참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얼마나 정성을 다해야 했던가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마리아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을 책망하였다. 오, 만일 제자들이 저희 비난의 말을 철회할 수 있었다면, 가난한 자들이 그리스도보다 더 선물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제시한 ~ 13 ~
그들의 잘못을 철회할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은 십자가에서 주님의 상하신 몸을 보았을 때에 더욱 심한 가책을 느꼈다.
이와 같은 부족함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베푸신 것을 완전히 다 깨닫는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하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마리아의 큰 사랑이 그들에 의하여 표현되었을 것이며 기름 부음은 서슴없이 행해졌을 것이다. 값진 향유를 낭비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드리기에는 너무 값진 것이라고 생각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요, 아무리 큰 극기와 자아 희생이라도 그분을 위하여 바치기에 너무 크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노하여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라고 한 말은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화목 제물로서 자신을 선물로 드릴 최고의 희생을 그리스도 앞에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였다. 주께서는 당신의 인간 가족에게 지극히 관대하셨으므로 그 이상 더 하실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566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선물로 주심으로 온 하늘을 주셨다.
인간의 견해로 볼 때 이와 같은 희생은 큰 낭비로 생각되었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구원의 계획이 자비와 재원의 낭비로 보인다. 극기와 성심성의의 희생은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 하늘 천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 한없는 사랑으로 향상되고 부요해지기를 거절하는 인간 가족을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당하다. 왜 이처럼 큰 낭비를 하는가 하고 그들이 부르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잃어버린 세상을 위한 속죄는 충분하고 풍성하고 완전하여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영혼에게 미치기에 풍족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큰 선물이신 분을 받아들일 사람의 수효를 초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제한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구속의 경륜의 관유(寬裕)함이 준비한 모든 것을 성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속의 경륜이 헛된 것은 아니다. 구속의 경륜은 여유가 있어야 한다.
주인 시몬은 마리아의 선물에 대한 유다의 비평에 마음이 움직였으며, 그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고 놀랐다. 그의 바리새인적 자존심은 상하였다. 그는 많은 손님들이 불신과 불쾌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 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말하였다.
시몬을 문둥병에서 고쳐 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살았으나 죽음만도 못했던 처지에서 그를 구원하셨다. 그러나 지금 시몬은 구주께서 선지자이신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을 당신에게 접근하도록 허락하신 까닭에,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는 그 여인에게 분노하여 물리치지 않으신 까닭에, 그 여인이 타락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시몬은 그리스도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았다.
시몬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녀가 감정의 표시를 매우 자유스럽게 한다는 것 외에는 이 여인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시몬의 무지가 그로 하여금 그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과 온유와 자비로써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셔야 함을 깨닫지 못하였다. 시몬의 방법은 마리아의 참회하는 봉사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행위는 그의 완고한 마음에 울분을 터뜨리게 하였다. 시몬은 만일 그리스도가 선지자시라면 죄인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견책하시리라고 생각하였다.
말로 드러내지 않은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구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 14 ~
나단이 다윗에게 행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급소를 찌르는 책망을 비유의 베일 속에 감추셨다. 그분은 주인인 시몬이 스스로 자신에게 죄를 선고하도록 하셨다. 시몬은 그가 지금 멸시하는 여인을 죄 가운데로 유인하였다. 그 여자는 그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했다.
비유 가운데 빚진 두 사람은 시몬과 여인을 각각 대표하였다. 예수께서는 두 사람이 느껴야 할 의무의 정도의 차이를 가르치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둘 다 결코 되갚을 수 없는 감사의 빚을 졌기 때문이다.
567 그러나 시몬은 자기가 마리아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의 죄가 참으로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기를 원하셨다. 오백 데나리온의 빚이 오십 데나리온의 빚보다 많은 것처럼, 그의 죄가 그 여자의 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그에게 보이기를 원하셨다.
이제 시몬은 새로운 빛 가운데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리아가 선지자보다 더 큰 이로부터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를 알았으며 그리스도께서 예리한 예언자의 안목으로 그 여자의 사랑과 헌신적인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시는 것을 알았다. 그는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자기보다 훨씬 높은 분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마리아는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의 눈물로써 내 발을 적시었고 그 머리털로 씻어 주었다.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대가 멸시하는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이 주께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일 수 있었던 기회들과 그를 위하여 당신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그의 평가를 자세히 말씀하셨다.
분명하고도 공손한 말로써 구주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사랑의 말과 행실로써 당신께 감사하기를 게을리 할 때에 그분은 마음으로 슬퍼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실히 말씀하셨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마리아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이끈 동기를 아셨고 또한 시몬으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한 정신을 아셨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는 죄인이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구주께 대한 시몬의 냉정함과 태만은 그가 받은 자비를 얼마나 가볍게 평가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함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의 상태 그대로를 보았다. 시몬이 그의 손님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의 손님은 그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는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판단이 얼마나 참된지를 알았다.
그의 종교는 바리새주의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동정을 멸시하였다. 그는 그분을 하나님의 대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용서받은 죄인인 반면에 그는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다. 그가 그 여자를 정죄하도록 한 그 공의의 엄정한 율법은 그를 정죄하였다.
시몬은 손님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자기를 책망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친절로 인하여 감동되었다. 그는 마리아가 받게 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대접받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서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사실을 진실하게 말함으로 그의 마음에 죄를 깨닫게 하고 동정어린 친절로써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호한 책망은 시몬의 마음을 굳게 하여 회개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지만, 참을성 있는 훈계가 그로 하여금 그의 잘못을 깨닫도록 하였다. 시몬은 주께 진 빚의 크기를 보았다.
568 회개함으로 그의 교만은 겸손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거만한 바리새인은 겸손하고 자아를 희생하는 제자가 되었다. 마리아는 큰 죄인처럼 주목을 받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생애를 꼴 지어 온 환경들을 아셨다. 그분은 마리아의 영혼 속에 있는 모든 희망의 불꽃을 끄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 15 ~
절망과 파멸에서 마리아를 건져 주신 분은 그분이셨다. 마리아는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사귀들을 일곱 번이나 책망하시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자신을 위하여 아버지께 힘써 탄원하시던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그분의 흠 없는 순결에 비하여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임을 알고 그분의 능력을 통하여 승리하였다.
인간의 안목으로 그 여자의 경우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선의 가능성을 발견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녀의 품성의 보다 나은 특성을 보셨다. 구속의 경륜은 큰 가능성을 가지고 인간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마리아에게서 이 가능성이 실현되어야 했다.
그분의 은혜로 그녀는 거룩한 품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타락하여 그 심령이 사귀의 거처가 되었던 자가 구주와 매우 가까이 교제하고 또한 봉사하는 자가 되었다. 그분의 발아래 앉아서 그분에게 배운 사람은 마리아였다. 그분의 머리에 귀중한 기름을 붓고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은 사람은 바로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십자가 곁에 섰으며 무덤까지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의 부활 후에 무덤에 제일 먼저 나타난 사람은 마리아였다. 부활하신 구주를 처음으로 선포한 사람도 마리아였다.
예수께서는 모든 영혼의 환경을 아신다. 그대는 나는 매우 죄가 많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대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악하면 악할수록 더욱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분은 울면서 참회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떨고 있는 모든 영혼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명하신다.
당신께 나아와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모든 사람을 그분은 즐거이 용서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명하여 하나님께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찬 자 들을 멸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당신의 진노의 잔을 쏟게 할 수 있으시다.
그분은 우주에서 이 흑점을 일소해 버릴 수도 있으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그분께서는 향단 곁에 서서 당신의 도움을 바라는 자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계신다.
당신께 피난처를 구하는 영혼들을 예수께서는 참소 자들과 구설의 다툼으로부터 높이 쳐들어 올리신다.
어떤 인간이나 악한 천사도 이 영혼들을 참소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과 인성에 그들을 연합시키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빛 가운데서 죄 짐을 지신 위대하신 분 곁에 선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 시니라”(롬 8:33, 34).
63장 “네 왕이 임하나니”
56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 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오백 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의 오심을 이와 같이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이제 성취될 것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왕의 영광을 거절해 오셨던 분께서 이제 다윗의 보좌의 약속된 후계자로서 예루살렘에 임하신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은 주일 중 첫째 날이었다. 그분을 보려고 베다니에 모였던 군중들이 이제 그분이 받으실 환영을 보려는 열망으로 그분과 동행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도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는데 이들도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던 군중들과 합세하였다.
자연계도 모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들은 신록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그 꽃들은 대기에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과 기쁨이 백성들에게 활력을 주었다. 새 왕국에 대한 희망이 다시 솟아나고 있었다. ~ 16 ~
예루살렘에 타고 갈 목적으로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어 당신께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셨다. 구주께서는 태어나실 때, 다른 사람들의 환대에 의존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구유는 빌린 안식처였다. 수많은 언덕 위의 가축들이 다 그분의 것이지만 이제 그분께서는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타실 짐승을 다른 사람의 친절에 의존하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을 이 심부름을 위하여 보내면서 주신 상세한 지시 가운데서 까지도 그분의 신성이 다시 드러났다.
570 그분이 예언하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는 간청이 곧 수락되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타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를 쓰기로 결정하셨다. 제자들은 기뻐 열광하며 저희 옷을 짐승 위에 펴고 주님을 그 위에 앉혔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언제나 도보로 여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지금 짐승을 타고 가기로 선택하시자 제자들은 처음에는 놀랐다.
그러나 그분께서 도성에 들어가서 친히 왕임을 선언하고 왕권을 주장하시리라는 즐거운 생각에 그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빛났다. 심부름을 가면서 그들은 저희의 열렬한 기대를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따라서 흥분은 원근에 널리 퍼졌고 백성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입성에 관한 유대인의 풍습을 따르고 계셨다. 그분이 타신 짐승은 이스라엘 왕들이 탔던 것으로 메시야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자마자 승리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군중들은 그분을 저희 왕 메시야로서 환호하였다. 예수께서는 지금, 전에는 결코 허락하신 적이 없었던 존경을 받으셨다. 제자들은 이것을 그분이 보좌에 오르시는 것을 봄으로써 그들의 즐거운 희망은 실현될 것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군중들은 해방될 시간이 이르렀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 가고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독립 국가가 되는 것을 상상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과 흥분에 도취되었고 서로 다투어서 그분께 충성을 바쳤다. 그들은 화려한 행렬과 웅장함으로 장식할 수는 없었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그분께 경배하였다. 그들은 값진 선물을 그분께 선사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가시는 길에 저희 겉옷을 융단처럼 펴놓았고 또한 잎이 무성한 감람나무와 종려나무 가지를 큰길에 깔아 놓았다.
그들은 왕기(王旗)를 가지고 승리의 행렬을 인도할 수는 없었지만 자연계의 승리의 상징인 쭉쭉 뻗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높이 흔들면서 큰 환호성과 호산나를 외쳤다.
그들이 행진하자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행렬에 참가하려고 달려 나온 자들로 말미암아 군중은 계속 불어났다. 구경꾼들은 계속적으로 군중과 섞이면서 이분이 누구시냐, 이 소동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고 그분이 예루살렘에 가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분이 지금까지 당신을 보좌에 앉히려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켰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자 그들은 매우 놀랐다.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고 선언하셨던 분에게 어떻게 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들은 의아해 하였다.
571 저희의 질문들은 승리의 함성으로 묵살되었다. 이 환성은 열광적인 군중으로 말미암아 반복되었다. 그것은 백성들에 의해 멀리 전달되었으며 주위의 산과 골짜기들로부터 메아리쳐 울려 왔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온 무리들이 그 행렬과 합류하였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인 군중 가운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려고 나왔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성가를 부르면서 그분을 환영하였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저녁 제사를 위한 나팔을 불었지만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관원들은 우려하면서 서로 “온 세상이 저를 쫏 는 도다”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상 생애에서 이전에 결코 이런 시위 행렬을 허락하신 적이 없었다. 그분은 그 결과를 훤히 내다보셨다. 이것은 그분을 십자가로 몰고 갈 것이었다. ~ 17 ~
그러나 이와 같이 자신을 구속주로서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다. 그분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당신의 사명의 최후를 장식할 그 희생에 주의를 불러일으키기를 열망하셨다.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들고 있는 동안 원형적(原形的)인 양이신 그분은 자원하여 자신을 제물로 구별하셨다. 이후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분의 교회는 세상 죄를 위한 그분의 죽으심을 깊은 사색과 연구의 제목으로 삼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실증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의 눈이 그분을 주목하고 그분의 큰 희생에 앞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하여 희생 그 자체를 확실히 볼 수 있게 해야 하였다.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수행하던 그런 시위 행렬이 있은 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최후의 장면으로 향하시는 그분의 급박한 행진을 보게 될 것이었다.
승리의 입성과 관계된 사건들은 각 사람의 화제가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을 소개할 것이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에 관련시켜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예언을 연구하고 예수께서 메시야 이심을 확신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나라에서 신앙에 귀의하는 개심자들이 증가될 것이었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지상 생애 중 이 한 번의 개선 장면에서 하늘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나님의 나팔로 선포되는 가운데 나타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시위 행렬은 그분의 사명의 목적과 그분의 생애를 주관했던 법칙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받아들이셨던 비천한 운명에 충실하셨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칠 때까지 그분은 인류의 짐을 지셔야 하였다.
이 기쁨의 장면이 저희 주님의 고통과 죽음의 서곡임을 알았다면 제자들의 생애 중 최고의 날로 보였던 이 날은 침울한 구름이 드리운 그늘진 날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받으실 확실한 희생을 그들에게 여러 번 반복하여 말씀하셨지만 현재의 즐거운 개가 속에서 그들은 그분의 슬픔에 찬 말씀을 잊어버리고 다윗의 보좌에 좌정하여 이루실 그분의 번영된 통치를 내다보았다.
572 행렬에 새로 가담하는 자들이 계속되었으며 거의 예외 없이 거기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은 그 상황에 고무되어 언덕마다 골짜기마다 반복해서 메아리치는 “호산나”를 드높이는 데 한몫을 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부르짖는 환호성은 계속되었다.
세상은 일찍이 그와 같은 승리의 행렬을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세상의 유명한 정복자들의 행렬과 같지 않았다. 왕다운 용맹의 전리품인 신음하는 포로들의 대열도 거기에 없었다.
그러나 구주의 주위에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하여 그분께서 사랑으로 행한 수고의 영광스러운 전리품들이 있었다. 그 곳에는 예수께서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져 주심으로 그 구원을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포로들이 있었다. 그분이 눈을 뜨게 한 소경이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분이 혀를 풀어 주신 벙어리가 가장 큰 소리로 “호산나”를 외쳤다. 그분이 고쳐 주신 절름발이들이 기쁨으로 약동하고 제일 적극적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구주 앞에서 흔들었다.
과부와 고아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그분의 자비의 행위로 인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들이 그들의 깨끗한 옷을 그분의 길에 펴고 그분을 영광의 왕으로 환영하였다.
무리 중에는 그분의 음성이 죽음의 잠에서 깨워낸 자들도 있었다. 그의 몸이 무덤에서 썩고 있었던 나사로는 지금 건장한 남자의 활력으로 기뻐하며 구주께서 타신 짐승을 몰고 있었다.
많은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질투와 악의에 불타올라 민중들의 감정의 흐름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을 행사하여 백성을 침묵시키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간청과 위협은 열심을 더욱 증가시킬 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민중들이 수적 우세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할까봐 두려워하였다. ~ 18 ~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군중들을 헤치고 구주께서 계시는 곳에 나아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 하소서”라는 책망과 위협의 말을 하였다. 이와 같이 시끄러운 시위운동은 불법적이므로 당국에서 허락할 수 없다고 그들은 선언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을 때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승리의 장면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저지하기에는 무력하였다. 만일 사람들이 그분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실패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생명 없는 돌들에게 음성을 주셔서 돌들의 찬양의 환호성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게 하셨을 것이다.
575 침묵당한 자들이 뒤로 물러가자 스가랴의 예언이 많은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행렬이 언덕 마루에 도달하여 막 도성으로 내려가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 발걸음을 정지하셨으며, 따르던 모든 무리들도 발을 멈추었다. 그들 앞에는 기울고 있는 태양의 광선을 담뿍 받아 찬란히 빛나는 예루살렘이 보였다. 모든 사람의 눈이 성전으로 끌렸다.
성전은 장엄하고 웅대한 모습으로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 치솟아, 마치 백성들을 유일하고 참되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인도하려고 하늘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성전은 오랫동안 유대 민족의 자랑이며 영광이었다. 로마인들 역시 성전의 장대함을 그들 스스로 자랑하고 있었다.
로마가 임명한 왕이 유대인과 힘을 합쳐 성전을 재건하고 단장하였다. 로마 황제도 선물을 보내어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성전은 그 견고함, 화려함, 그리고 장대함으로 세계의 경이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해가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가운데, 그 눈부신 영광은 성전 벽의 순백색 대리석을 비추었으며, 금으로 입힌 성전 기둥에서 번쩍거렸다.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서 있는 산등성이에서 볼 때 성전은 횐 눈으로 만든 큰 건물에 황금 첨탑들이 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성전 입구에는 금, 은으로 된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가장 솜씨 좋은 예술가들이 세공하여 만든 푸른 잎사귀와 큰 포도송이들이 달려 있었다. 이 디자인은 번성하는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였다.
금과 은과 생생한 푸른 잎들은 진귀한 아취(雅趣)와 훌륭한 솜씨로 잘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 포도나무는 희고 번쩍이는 기둥을 우아하게 감고 있었다.
그리고 금장식에는 빛나는 덩굴이 매달려 있었는데 기울고 있는 태양의 광채를 받아 마치 하늘에서 빌려온 영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 광경을 응시하시자 수많은 군중들은 외치던 일을 멈추고 갑자기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는다. 그들 스스로 느낀 그 감탄을 구주의 얼굴에서도 찾으려는 기대로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분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그들은 감탄 대신에 슬픔의 구름을 본다.
눈물이 가득한 그분의 눈과 큰 폭풍 앞에 선 나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분의 몸을 보며 한편 마치 상처받은 마음에서 나오는 듯한, 그분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비탄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매우 놀라고 실망한다.
천사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이 고뇌의 눈물을 흘리는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승리의 함성을 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분이 통치하시기를 기쁨으로 희망하면서 영광스러운 도성으로 그분을 호위하던 기쁨의 무리들도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었다.
576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재난을 동정하는 경건한 슬픔에서였다. 그러나 이 갑작스런 슬픔은 어떤 장엄한 승리의 합창에 삽입된 통곡의 곡조와도 같았다.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던 그 기쁨의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조용한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고뇌의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고 계셨다.
군중들은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들의 만세 소리는 잠잠해졌다. ~ 19 ~
이해할 수 없는 슬픔에 동정하여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고통을 예감함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바로 그분 앞에는 겟세마네가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그 곳에서 큰 흑암의 공포가 그분을 뒤덮을 것이었다. 양의 문도 또한 거기서 보였는데 수 세기 동안 이 문을 통하여 희생 제물이 된 짐승들이 들어갔다.
이 문이 원형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곧 열릴 것이었는데 이 모든 희생 제물들은 세상 죄를 위한 그분의 희생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까이에는 다가오고 있는 그분의 고뇌의 장소가 될 갈바리가 있었다. 그러나 구속 주께서 마음의 고통으로 우시고 신음하신 것은 당신이 받으실 참혹한 죽음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의 슬픔은 이기적인 슬픔이 아니었다.
고상하고 자기희생적인 그분의 영혼은 자신이 받을 고통에 대한 생각으로 위협받지 않았다.
예수님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그분의 사랑을 조소하며 그분의 능력 있는 이적을 보고서도 확신하기를 거절하고 그분의 생명을 취하려는 예루살렘의 광경이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그의 구속자를 거절함으로써 어떤 상태에 있는지와, 만일 예루살렘이 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당신을 받아들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어찌 예루살렘을 버릴 수 있으셨겠는가? 이스라엘은 은총 받은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성전을 거처로 삼으셨다. 그것은 “터가 높고 아름다”웠으며 “온 세계”의 “즐거”움이었다(시 48:2). 아버지가 그의 외아들을 품듯이 천 년 이상이나 그리스도께서 보호자의 보살핌과 부드러운 사랑으로 돌보신 기록이 거기 있었다.
이 성전에서 선지자들은 그들의 엄숙한 경고를 발하였다. 그 곳에서 예배 자들의 기도와 합하여 향연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동안 불타는 향로를 흔들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 하는 짐승의 피가 넘쳐흘렀다. 그 곳에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시은소 위에 나타내셨다.
그 곳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렸으며 상징과 예식의 화려한 의식이 각 시대를 통하여 계속해 내려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종말을 고하여야만 하였다.
예수께서는 병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축복하기 위하여 여러 번 드신 그 손을 드시고, 운명 지어진 도성을 향하여 흔드시면서 슬픔과 비탄에 잠긴 어조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라고 부르짖으셨다.
577 구주께서는 여기서 말씀을 멈추시고 만일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주고자 원하셨던 선물인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받아들였더라면 어떤 형편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것인지를 말씀하지 않으신 채 남겨 놓으셨다.
만일 예루살렘이 그의 특권이 무엇임을 알고 하늘에서 보내신 빛에 주의했었더라면, 그 도성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힘입어 자유 한 가운데 열국의 여왕으로서 번영을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문에는 무장한 군사들이 서 있지 않았을 것이며 성벽에는 로마의 깃발이 휘날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일 예루살렘이 구속 주를 받아들였더라면 축복 받았을 뻔했던 그 영광스러운 운명이 하나님의 아들 앞에 나타났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이 당신을 통하여 무서운 질병을 치료받고 속박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강력한 수도로 세워졌을 것을 보셨다. 예루살렘 성벽으로부터 평화의 비둘기가 모든 민족에게 날아갔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세상의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이루어졌어야 했을 빛난 장면이 구주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이제 로마의 속박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입고 그분의 보응의 심판을 받을 운명에 처하게 됨을 깨달으신다. 그분은 비탄으로 끊었던 말씀을 계속하신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고 ~ 20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과 그 자녀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거만, 위선, 질투, 그리고 악의 때문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셨다. 예수께서는 운명 지어진 도성에 임할 무서운 징벌을 아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군대로 에워싸이는 것과 포위된 주민들이 굶주려 죽는 것을 보셨으며, 어머니들은 저희 자녀들의 죽은 시체를 먹으며 부모와 자녀들은 마지막 한 입의 음식까지도 서로 빼앗아 먹는 등 타고난 애정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굶주림의 고통 때문에 깨지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당신의 구원을 거절함으로 확실히 입증된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그들로 하여금 침략군에 대해서도 역시 항복하기를 거절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보셨다. 그분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갈바리 언덕에 삼림의 나무들처럼 빽빽하게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그 가엾은 거민들이 고문대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며, 아름다운 궁전은 파괴되고 성전은 황폐되며 성전의 거대한 벽들은 돌 하나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않고 마치 그 도성이 밭과 같이 파헤쳐질 것을 보셨다. 이 무서운 장면을 보시고 구주께서 고민하며 우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루살렘은 그분이 돌보아 오셨던 자녀였으므로 사랑하는 아버지가 방탕한 아들에 관하여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도성을 보고 우셨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네가 멸망에 빠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네가 불의의 잔을 채우도록 놔두어야 할까? 한 영혼의 가치는 너무도 커서 그것과 비교할 때 온 천하는 하찮게 보인다.
578 그런데 여기 온 민족이 멸망당하려고 한다. 신속히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태양이 하늘에서 자취를 감출 때 예루살렘의 은혜의 날도 끝날 것이었다. 그 행렬이 감람산 고개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아직도 예루살렘이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은혜의 천사는 공의와 급히 다가오는 심판에 자리를 내어 주려고 그의 날개를 접고 황금 보좌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마음은 아직도 당신의 자비를 조롱하고 당신의 경고를 멸시하며 당신의 피로 저희 손을 더럽히려고 하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간청하였다.
만일 예루살렘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지는 해의 마지막 광선이 성전과 망대와 누각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 어떤 선한 천사가 예루살렘을 구주의 사랑으로 인도하여 그의 멸망의 비운을 돌이키지 않을까?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아름다우나 악한 그 도성은 회개하지 않음으로 속박의 사슬로 스스로를 묶고 있었다. 그 도성에 대한 자비의 날들은 거의 다 지나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말씀하신다.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또 하나의 증언이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증거의 음성이 과거의 예언된 외침에 응답하면서 높이 울려 퍼진다.
만일 예루살렘이 그 부르심을 듣는다면, 만일 그의 문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구주를 받아들인다면 아직도 그 성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백성들의 큰 무리와 함께 도성에 이르고 계시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의 관원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들은 군중들을 분산시키기를 바라면서 두려움 가운데 그분을 만나러 나아간다. 행렬이 감람산을 내려가려고 할 때 관원들의 제지를 받는다.
그들은 떠들썩한 기쁨의 원인을 묻는다. 그들이 “이는 누구냐?” 라고 질문할 때에 제자들은 영감의 영에 충만하여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들은 웅변적인 어조로 그리스도께 관한 예언들을 아래와 같이 반복한다.
아담은 그대들에게, 이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그는 이분이 살렘 왕 멜기세덱이요 평화의 왕이라고 그대들에게 말할 것이다(창 14:18). ~ 21 ~
야곱은 이분이 유다 지파의 “실로” 라고 말할 것이다. 이사야는 “임마누엘”,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 7:14, 9:6)이라고 말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가지요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라고 말할 것이다.
579 다니엘은 그분이 “메시야”라고 말할 것이다.
호세아는 그분이 “만국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5)고 말할 것이다.
침례 요한은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할 것이다.
크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보좌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라고 선언하셨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이분은 예수요 메시야요 생명의 왕이요 세상의 구속 주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어둠의 권세 잡은 왕도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라는 말로 그분을 승인한다.
64장 운명 지어진 백성
580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개선의 입성을 하신 일은 천사들의 환희와 성도들의 기쁨 가운데 능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일의 희미한 전조였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 23:39) 하신 말씀이 그 때에 성취될 것이다.
예언적 이상 가운데서 스가랴는 최후의 승리의 날을 보았으며 그는 또한 초림 때에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들의 운명을 보았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그리스도께서는 그 도성을 바라보고 우셨을 때 이 장면을 미리 보셨다. 예루살렘의 현세적 멸망 가운데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홀린 죄를 범한 백성들의 최후 멸망을 보셨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유대인들의 증오를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될지는 아직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형편을 알지 못하였으며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형벌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의미심장한 한 실물 교훈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공개하셨다.
예루살렘에 대한 마지막 호소도 헛되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이는 누구냐?”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군중들에 의하여 반향 된 과거의 예언적 음성을 들었다.
581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영감의 음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분노와 놀라움으로 백성들을 잠잠하게 하려고 하였다. 군중 가운데는 로마의 관리들도 있었는데 그분의 원수들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반란의 괴수로 고발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전을 점령하여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 하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착한 음성으로 당신은 현세의 통치를 위하여 오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선언하심으로써 그 소란스러운 군중들을 잠시 동안 조용하게 하셨다.
그분은 곧 당신의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이었고 그의 비난 자들은 그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구원받기에는 너무 늦은 그 때에 그분을 인정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슬픔과 비범한 권능으로 이 말씀을 하셨다. 로마의 관리들은 침묵하고 진정되었다.
신령한 감화를 받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감동을 받았다.
침착하고 엄숙한 예수님의 얼굴에서 그들은 사랑과 자비와 조용한 품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는 동정심으로 움직였다. 예수님을 잡는 대신에 그들은 예수께 더욱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분노하고 좌절한 이 지도자들은 저희 불평을 백성들에게 돌리고 저희들끼리 화를 내며 다투었다. ~ 22 ~
그동안 예수께서는 눈에 띄지 않게 성전으로 가셨다. 감람산 위의 광경을 보기 위해 백성들이 몰려갔으므로 그 곳은 모든 것이 조용하였다. 잠시 예수께서는 성전에 머물러서 슬픔에 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셨다.
그 다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돌아오셨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보좌에 앉히려고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아침에 다시 성전에 오셨다. 도중에 그분은 무화과 밭을 지나셨다. 그분은 시장하셔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 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이 때 는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는 무화과가 익을 계절이 아니었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고원에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나신 과원에는 다른 모든 나무보다 일찍 된 나무가 하나 있었다. 이 나무는 벌써 잎사귀들이 무성했다.
잎이 나기 전에 익은 열매가 나오는 것이 무화과나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한 이 나무는 잘 익은 열매가 있음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외모는 기만적이었다. 제일 낮은 가지로부터 제일 높은 가지까지 다 찾아보셨으나 예수께서는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셨다.
582 그것은 가식적인 무성한 잎사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나무에 말라죽게 하는 저주를 발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아침 구주와 제자들이 다시 그 도시로 들어가는 도중에 시든 가지들과 떨어지는 잎들이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
베드로가 말하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였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그리스도의 행위는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그분의 방법과 행위와는 다른 것처럼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당신들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눅 9:56)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분의 놀라운 행위들은 회복을 위한 것이었지 결코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그분을 회복시키는 자, 곧 치료자로만 알았다. 한데 이 행위는 사뭇 달랐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의아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기뻐 하”신다. “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미 7:18; 겔 33:11). 멸망시키는 일과 심판을 통고하시는 일은 그분께 “비상한”(사 28:21) 일이다.
그러나 그분이 미래의 베일을 거두고 사람들에게 죄악의 길의 결과를 나타내심은 자비와 사랑으로 하시는 일이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행동화된 비유였다.
바로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무성한 잎사귀로 의기양양하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상징이었다.
구주께서는 이스라엘의 파멸의 원인과 확실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셨다. 이러한 목적에서 예수께서는 나무에게 도덕적 특성을 부여하여 거룩한 진리의 해설자로 삼으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고백함으로 모든 다른 민족과 구별되었다.
583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총애를 받아왔으며 다른 모든 백성들보다 의로움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이득을 탐함으로 부패하였다. 그들은 지식을 자랑하였으나 하나님의 요구에는 무지하였고 위선으로 충만하였다. 열매 없는 나무와 같이 그들은 거만한 가지들을 높이 뻗고, 외모로는 화려하고 눈에는 아름다웠으나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장엄한 성전과 신성한 제단, 관을 쓴 제사장들, 인상 깊은 의식들을 가진 유대인의 종교는 과연 외모로는 아름다웠으나 겸손과 사랑과 자비는 부족하였다.
무화과 과원에 있던 모든 나무들은 열매가 없었다. 그러나 잎사귀가 없는 나무는 아무런 기대도 일으키지 않으며 실망도 안겨주지 않는다. 이 나무들은 이방인들을 대표하였다. ~ 23 ~
이방인들은 경건한 체하는 유대인들과 같이 열매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공언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하다고 거만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과 방법에 어두웠다. 그들에게는 무화과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광명과 희망을 가져올 날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 선물을 남용한 데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였다. 그들이 자랑하는 특권들은 저희 죄를 증가시킬 뿐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장하셔서 먹을 것을 찾아 무화과나무에 오셨다.
그와 같이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의의 열매를 찾고자 하는 갈급함으로 이스라엘에게 오셨다.
그들이 세상에 축복이 될 수 있는 열매를 맺도록 그분은 저희에게 선물을 아낌없이 주셨다.
모든 기회와 특권이 그들에게 시여되었다.
그 대신에 그분은 당신의 은혜의 사업에서 저희의 동정과 협력을 구하셨다.
그분은 저희에게서 자기희생과 동정과 하나님께 향한 열심과 동료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영혼의 깊은 열망을 보고자 하셨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켰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과 같은 이기심 없는 사업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만심과 자부심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거절함으로 스스로 멸망에 빠졌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진리의 보화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
열매 맺지 않은 나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와 형벌을 읽을 수 있었다. 구주의 저주 아래 말라죽어 시들고 이지러진, 뿌리까지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희에게서 옮겨질 때에 유대 백성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축복을 나누어 주기를 거절함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는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호 13:9)라고 말씀하신다.
584 이 경고는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다.
당신의 능력으로 창조하신 나무를 저주하신 그리스도의 처사는 모든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경고가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자하고 무아적인 생애를 따라서 살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다.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계획하고 연구한다. 그들은 다만 사리(私利)를 위하여 행동한다.
시간이란 그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모을 수 있을 때에만 귀중하다.
모든 인생사에서 이것이 바로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이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요 다만 자신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아적인 봉사를 실행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도록 그들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저희 동료들을 도와주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나 자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들은 그밖에 다른 것은 볼 수 없다.
그들은 인류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들은 잘난 체하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다.
그들은 예배의 형식을 엄수하지만 회개나 믿음은 없다.
그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나 순종은 부족하다.
그들은 말은 하나 행하지는 않는다.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형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허식이 당신의 눈에 얼마나 가증한가를 예증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공언하면서 당신의 영광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자보다는 공공연한 죄인의 죄가 가볍다고 선언하신다. ~ 24 ~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그분이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가르치신 교훈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비유 가운데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위하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라고 과원 지기는 간청하였다.
열매 없는 나무를 좀 더 돌봐주어야만 하였다. 이것은 바로 이익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만일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뽑아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비유 가운데서 과원지기의 수고의 결과는 예언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백성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들은 열매 없는 나무로 대표되었으며 그리고 저희 운명을 결정하는 일은 그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었다.
하늘이 줄 수 있는 모든 유익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증가된 축복들을 통해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그리스도의 행위로 결과가 드러났다.
그들은 스스로 저희 자신들의 멸망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일천 년 이상이나 하나님의 자비를 악용해 왔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들을 거절하고 그분의 선지자들을 죽였다.
그리스도 당시의 백성들도 같은 방향으로 따라감으로써 이러한 죄들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였다.
현재 저희에게 제시된 자비와 경고를 거절함으로써 저희 세대의 죄를 쌓았다. 그 민족이 과거 여러 세기 동안 벼리어 만든 쇠사슬로 그리스도 당시의 백성들은 자기 자신들을 단단히 얽어매고 있었다.
587 각 시대마다 사람들에게 저희 시대의 빛과 특권, 즉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은혜의 기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 은혜에는 제한이 있다.
자비는 여러 해 동안 간청하지만 멸시와 거절을 당한다.
그러나 자비가 마지막 탄원을 할 때가 온다.
마음이 매우 굳어져서 성령의 감화에 응답하기를 그친다.
그 때에 상냥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음성이 죄인에게 더 이상 간청하지 않으며 책망과 경고도 그친다.
그 날이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운명 지어진 도성을 보시고 괴로운 나머지 우셨으나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수는 없으셨다. 그분은 모든 방편을 남김없이 다 쓰셨다. 하나님의 성령의 경고들을 거절한 이스라엘은 도움 받을 유일의 방편까지도 거절하였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해줄 또 다른 능력은 없었다.
유대 민족은 무한한 사랑의 탄원을 경멸하는 각 시대 백성들의 상징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을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눈물은 모든 시대의 죄악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에게 내린 심판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책망과 경고를 거절한 자들은 저희 자신의 죄 됨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불신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대에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의 현현을 목격하였고 성령께서 저희 마음에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불신과 반항에 집착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경고와 책망을 보내셨으나 그들은 저희 잘못을 고백하기를 즐겨 하지 않으며 그분의 기별과 그분의 사자를 거절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신 그 방법이 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된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감추어진 죄악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므로 배도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미워하였다. 아합 이 엘리야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은 선지자가 충실하게 왕의 은밀한 죄악을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그처럼 오늘날도 죄의 책망자인 그리스도의 종은 경멸과 거절을 당한다.
그리스도의 종교인 성경 진리는 도덕적 불결의 강력한 사조와 투쟁한다.
편견은 그리스도 당시보다 더욱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한다. ~ 25 ~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셨다.
그분의 생애는 저희 죄에 대한 책망이었으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
그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사람들의 행습과 저희의 타고난 경향과 조화되지 않으므로 무수한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거절한다.
사단의 충동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그들의 독자적 판단을 따르기로 선택한다.
588 그들은 광명보다 흑암을 선택한다.
그런데 그들은 저희 영혼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트집 잡았던 자들은 트집거리가 계속 증가하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마침내는 진리와 생명 되신 분으로부터 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그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마음이 당신의 진리를 대항하기 위하여 가져 올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겠다고 제의하지 않으신다.
어둠을 환하게 비출 귀중한 광선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이 그런 상태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진리는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걸어가며 저희 앞에 있는 멸망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감람산 위에서 세상과 각 시대를 내려다보셨으므로 그분의 말씀은 거룩한 자비의 간청을 경시하는 모든 영혼에게 적용된다.
그분의 사랑을 조소하는 자인 바로 그대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말씀하신다.
그대의 평화에 관한 일들을 알아야 할 사람은 그대, 바로 그대이다.
자신을 위하여 흘릴 눈물이 없는 그대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바리새인들을 파멸시킨 치명적인 마음의 완고함이 벌써 그대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증거와 모든 신령한 빛의 광선은 영혼을 녹여서 복종하게 하든지 혹은 영혼을 회개하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에 고착시키든지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이 완고하고 회개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을 미리 보셨다. 자비를 거절한 모든 결과인 죄악이 그의 문에 놓일 것이다.
이와 같은 길을 따르고 있는 모든 영혼도 그처럼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호 13:9; 렘 6:19)고 선언하신다.
65장 다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심
589 당신의 봉사 초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지 못한 상거래로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쫓아내셨는데, 그분의 엄격하고 신성한 자태는 교활한 장사꾼들의 마음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였었다. 그분의 사명 말기에 그분은 또다시 성전을 찾아오셨는데 성전이 여전히 더럽혀져 있음을 발견하셨다.
그 형편은 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성전 바깥마당은 마치 큰 가축 시장과 같았다.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동전의 짤랑거리는 날카로운 소리는 상인들의 분노한 언쟁 소리와 뒤섞였으며 그 가운데는 성스러운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음성도 들렸다.
성전의 성직자들 자신이 스스로 사고팔고 돈 바꾸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이득을 위한 탐욕에 완전히 지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도적이나 다름없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들이 행하여야 할 일의 엄숙함을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매년 유월절과 장막절에 무수한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 짐승들의 피를 제사장들이 받아서 제단에 ~ 26 ~
쏟았다. 유대인들은 피의 제물에는 익숙하였으나 이 모든 짐승들의 피를 흘릴 필요가 있게 만든 것이 죄라는 사실은 거의 잊어버렸다. 그들은 그것이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흘려져야 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예표 한다는 것과 그 희생 제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 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590 예수께서는 죄 없는 희생 제물을 바라보셨으며 또한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 거대한 집회를 유혈과 잔학으로 물들였는지를 보셨다. 겸손히 죄를 회개하여야 할 장소에서 마치 하나님께서 무정한 봉사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그들은 짐승들의 희생을 증가시켰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저희 마음을 굳게 하였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는 바로 그 상징물을 가지고 그들은 돈 모으는 한 방편으로 삼았다. 이렇게 되어 백성들의 눈에는 제사 의식의 신성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분노가 일어났으며 세상 죄를 위하여 곧 흘리게 될 당신의 피도 그들이 끊임없이 흘리던 짐승의 피처럼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거의 감사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을 그분은 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행습들에 대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셨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사야는 유대인들의 배도를 예언적 계시를 통하여 보면서 저희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관원들에게 말하듯이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 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 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 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 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0~12, 16, 17)고 말하였다.
이 예언들을 주신 분 자신이 이제 마지막 시대를 위하여 경고를 되풀이하셨다. 예언의 성취로 백성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예수께서 저희의 존경을 받으시고 왕의 직분을 받으셨다. 이 신분으로 그분은 행동하셔야 했다.
그분은 부패된 제사장 제도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헛될 것을 아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업은 이루어져야 했으며 믿지 않는 백성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사명의 증거를 보여 주셔야만 하였다.
다시 예수님의 날카로운 시선이 신성성이 더럽혀진 성전의 뜰을 훑어보았다.
591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분에게로 쏠렸다. 제사장과 관원, 바리새인과 이방인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저희 앞에 하늘 왕의 존엄으로 서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빛났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결코 나타내신 일이 없는 그런 존엄과 영광을 입으셨다.
그분 곁에 제일 가까이 섰던 제자들은 군중이 허락하는 한 멀리 물러섰다. 몇몇 제자들을 제외하고 구주께서는 홀로 서 계셨다. 모든 소리가 그쳤다. 깊은 침묵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마치 큰 폭풍우처럼 백성들을 뒤흔드는 능력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의 음성은 나팔 소리처럼 온 성전을 울렸다. 그분의 얼굴에 나타난 불쾌함은 마치 삼키는 불처럼 보였다. 그분은 권위를 가지고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요 2:16)고 명령하셨다.
삼 년 전 성전 치리 자들은 예수님의 명령 앞에서 도주했던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했던 일과 일개 비천한 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한 일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 27 ~
그들은 채신없이 복종하는 일은 다시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592 그러나 지금 그들은 전보다 더욱 무서워서 더 급히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분의 권위에 대하여 감히 물어 본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은 저희 가축들을 몰고 그분 앞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중에 병자들을 데리고 크신 의원을 찾는 군중들을 만났다.
도망하는 사람들의 말 때문에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되돌아갔다. 그들은 표정만으로 제사장들과 관원들을 당신의 면전에서 쫓아내신 그토록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을 만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큰 무리가 허둥지둥하는 군중을 헤치고 저희의 유일한 소망인 그분에게 나아가려고 열심히 전진하였다.
군중들이 성전에서 도망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뒤에 머물러 있었다. 이 사람들은 이제 새로 오는 자들과 연합하였다.
성전 마당은 다시 병자와 죽어 가는 사람으로 가득 찼고 한 번 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봉사하셨다.
얼마 후에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으로 돌아왔다. 공포심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다음 행동이 어떤 것일는지를 알고 근심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윗의 보좌를 취하리라고 예기하였다. 조용히 성전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들은 남녀와 아이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음성을 들었다.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놀라운 장면을 바라보고 못 박힌 듯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그들은 병자가 낫고 소경의 눈이 밝아지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절름발이가 기뻐 뛰는 것을 보았다.
어린이들은 그 즐거워하는 무리의 맨 앞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병들을 고쳐 주셨다. 그분은 그들을 당신의 팔로 껴안으시고, 감사에 넘치는 입맞춤을 받으셨으며 그 중 어떤 아이들은 그분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그분의 품에서 잠들고 있었다. 이제 즐거운 음성으로 아이들이 그분을 찬송하였다.
그들은 전날에 외치던 호산나를 반복하였으며 구주 앞에서 종려나무가지들을 의기양양하게 흔들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시 118:26; 슥 9:9),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는 그들의 외침 소리로 성전은 울리고 또 울렸다.
이 기쁘고 거리낌 없는 음성은 성전을 다스리는 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그들은 이런 시위를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이 어린아이들의 발과 기쁨의 부르짖음으로 모독당하였다고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그들의 말이 백성들에게 감명을 끼치지 못하는 것을 알자 관원들은 그리스도께 호소하였다.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셨다.
593 예언에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선포되어야 할 것을 말했는데 그 말씀은 성취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기를 거절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일을 아이들에게로 옮기셨다. 만일 아이들의 음성이 잠잠 하였더면 성전의 모든 기둥들이 구주를 찬양하는 소리를 발하였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몹시 어리둥절하고 당황하였다. 그들이 위협할 수 없는 분이 명령하고 계셨다. 예수께서 성전의 보호자로서 그분의 지위를 차지하셨다. 그분은 전에 이런 왕의 권위를 주장하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분의 말씀과 행하심이 그처럼 큰 권세를 가졌던 일은 전혀 없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었으나 이와 같이 엄숙하고 감명적인 방법으로 행하신 적은 전혀 없었다. 그분의 놀라운 일을 목격한 백성들 앞에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감히 공공연한 적개심을 그분에게 나타낼 수 없었다.
비록 예수님의 대답으로 분노하고 당황했을지라도 그들은 그 날에 어떤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 산헤드린 회의는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관하여 다시 의논하였다.~ 28 ~
삼 년 전에 그들은 그분이 메시야라는 표적을 요구하였었다. 그 때 이후로 예수께서는 도처에서 능력 있는 일을 이루셨다. 그분은 병자를 고치시고 이적으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거친 바다를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열린 책을 읽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여러 번 읽으셨으며 사귀를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관원들은 그분이 메시야이신 증거를 보았다. 그들은 이제 그분에게 권위의 표적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그분을 정죄할 수 있는 어떤 고백이나 선언을 끌어내기로 결정하였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던 성전으로 모여들면서 그들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질문하였다.
그들은 그분께서 당신의 권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런 주장을 그들은 부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일견 다른 문제에 속하는 듯한 질문으로 그들에게 대응하셨고, 이 질문에 그들이 대답하는 조건 하에 저희에게 대답하기로 하셨다.
그분은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고 물으셨다.
제사장들은 어떤 궤변을 가지고도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그들이 빠진 사실을 알았다.
만일 그들이 요한의 침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모순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
594 요한은“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고 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실 것이었다. 만일 제사장들이 요한의 증언을 믿었다면 어떻게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되심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요한의 봉사가 사람에게서 왔다는 그들의 진정한 소신을 선언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폭풍과 같은 분노를 자초할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까닭이었다.
큰 관심을 가지고 군중들은 결정을 기다렸다. 군중들은 제사장들이 요한의 봉사를 받아들인다고 공언했던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요한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이 의심 없이 승인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비밀리에 다 같이 협의한 후에 제사장들은 언질을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짐짓 알지 못함을 공언하면서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모두 다 잠잠하였다. 당황하고 실망하여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서서 감히 그리스도께 더 질문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겁함과 우유부단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 곁에 서서 이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들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백성들의 존경심을 크게 상실하였다.
그리스도의 이 모든 말씀과 행동은 중요한 것으로, 그 감화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승천하신 후에 계속하여 더욱 증가된 분량으로 느껴질 것이었다.
예수께서 하신 질문의 결과를 근심스럽게 기다렸던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다사(多事)했던 날에 처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이끌려서 마침내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성전 마당에서 일어난 장면은 그들의 마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말을 주고받을 때 예수님과 대제사장 사이의 대조는 너무도 현저했다.
거만한 성전의 성직자는 화려하고 값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머리에 빛나는 관을 쓰고 있었고 그의 자태는 위엄이 있었으며 머리카락과 긴 수염은 연로하여 백발이 되어 있었다. 그의 외모는 보는 자들을 두렵게 하였다.
이 존귀한 사람 앞에 하늘의 폐하(陛下)께서 장식이나 치장 없이 서 계셨다.
그분의 옷은 여행으로 더럽혀졌으며 그분의 얼굴은 창백하고 침착한 비애가 표현되었다.
대제사장의 거만하고 자신 있고 분노한 모습과는 이상하게 대조되는 존귀와 자비심이 보였다.
성전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그 때부터 저희 마음에 그분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모시게 되었다. ~ 29 ~
그러나 민중의 감정이 그분 쪽으로 선회하자 예수께 대한 제사장들의 증오심은 더욱 증가하였다. 예수께서 그분의 발 앞에 설치된 덫을 벗어나신 지혜는 그분의 신성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되었으며 그들의 분노를 부채질하였다.
랍비들과의 논쟁에서 그분의 적들에게 창피를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곤경에 빠진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으셨다.
595 그분에게는 가르칠 중대한 교훈이 있었다. 그들이 그분을 위하여 펴놓은 그물에 스스로 걸리도록 허락하심으로 그분은 원수들을 실망시키셨다. 요한이 베푼 침례의 성격에 관하여 그들이 알지 못한다는 자백이 그분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그분은 그 기회를 잘 이용하여 이미 주어진 많은 경고에 다른 경고를 첨가하여 그들의 참 위치를 그들 앞에 제시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라고 말씀하셨다.
이 돌연한 질문에 청중들은 마음을 놓았다. 그들은 비유를 면밀히 살핀 다음 곧 둘째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눈을 그들에게 똑바로 향하고서 날카롭고도 엄숙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않았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않았도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리스도의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둘째 아들이 좋다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셨다. 이 아들은 바리새인들이 멸시하고 미워하는 세리들로 대표되었다. 세리들은 대체로 부도덕하였다.
그들은 과연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생애로 그분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들은 감사하지 않았으며 거룩하지도 않았다.
주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요청을 받았을 때에 그들은 멸시하는 태도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요한이 와서 회개와 침례를 선포할 때에 세리들은 그의 기별을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다.
첫째 아들은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을 대표하였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회개하고 요한의 침례를 받았으나 지도자들은 그를 하나님에게서 온 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경고와 탄핵이 그들을 개혁시키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 7:30).
그들은 그의 기별을 경멸하는 태도로 대하였다. 요청을 받았을 때에 “아버지여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가지 않은 첫째 아들과 같이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순종하노라고 공언하면서도 불순종하였다.
그들은 경건을 크게 공언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노라고 주장하였으나 거짓된 순종만을 했을 뿐이었다. 세리들은 이교도들이라고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저주를 받았으나 그들은 저희 신앙과 행동으로, 큰 빛을 받고도 행동이 그들이 주장하는 경건과 일치하지 않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596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이 양심에 가책을 주는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이 그분을 되받아 책잡을 수 있는 어떤 말씀을 하시리라는 희망으로 잠잠하였다. 그들은 좀 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 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 30 ~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이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예수께서는 그 곳에 있던 모든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대답하였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새로 줄 지니이다.” 말한 자들은 처음에는 이 비유가 어디에 적용되는지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죄를 선언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 가운데서 집 주인은 하나님을 대표하고 포도원은 유대 민족을, 산울은 그들을 보호하는 거룩한 율법을 대표하였다. 망대는 성전을 상징하였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의 번영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였다.
그는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으랴”(사 5:4)고 말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끈기 있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농부들이 포도원의 실과의 합당한 몫을 주인에게 바쳐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거룩한 특권에 부합하는 생애로써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농부들이 주인이 실과를 받기 위하여 그들에게 보낸 종들을 죽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도록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다. 계속해서 기별 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비유의 적용이 확실한 이상 앞으로 어떤 일이 따르리라는 것 또한 분명한 일이었다.
포도원 주인이 그의 불순종하는 종들에게 최후로 보냈으며, 그들이 잡아서 죽인 그 사랑하는 아들 속에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임박한 운명의 분명한 모습을 보았다.
597 그들은 이미 아버지께서 마지막 호소로서 그들에게 보내신 그분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은혜를 모르는 농부에게 가해진 보응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죽음에 처하게 할 자들의 운명이 묘사되었다.
그들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구주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이 예언을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여러 번 반복해 읽었으며, 그것을 오실 메시야에게 적용시켰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의 제도와 구원의 전 계획의 모퉁잇돌이셨다. 유대의 건축자들인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지금 이 주춧돌을 거절하고 있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위험을 보여 주게 될 예언들에 저희 주목을 이끄셨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온갖 방법을 통해 그들이 하려고 하는 행위의 본질을 그들에게 명백히 보여 주려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는 질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저희가 행한 대로 대답하도록 계획하셨고 스스로를 정죄하도록 의도하셨다.
그분의 경고는 그들을 회개시키지 못한 채 저희 운명에 인을 칠 것이나 그분은 그들이 스스로 멸망을 자취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원하셨다. 이미 시작되었고 또 성전과 도성의 파멸뿐 아니라 민족의 분산으로 끝나게 될, 그들의 민족적 특권을 거두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그들이 보도록 그분은 계획하셨다.
청중들은 그 경고를 깨달았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자신들의 형벌을 스스로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라는 말을 이루려고 하였다.
여론이 그리스도 편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 하”였다.
버림받은 돌에 대한 예언을 인용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 31 ~
말씀하셨다. 이 사건은 처음 성전을 건축할 때와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초림 당시에 특별히 적용되었으며 또한 특별한 능력으로 유대인들에게 호소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또한 우리를 위한 하나의 교훈이 된다.
598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될 때에 벽과 기초를 위하여 사용된 거대한 석재(石材)들은 채석장에서 완전히 준비되어 있어서 그것들이 건축 장소에 옮겨지면 아무런 연장들이 쓰이지 않고 일꾼들이 이것들을 제 위치에 갖다 맞추기만 하면 되었다.
기초에 사용하기 위하여 유별나게 크고 특별한 모양을 한 돌을 가져왔으나 일꾼들이 이 돌을 갖다 맞출 곳을 찾지 못하여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돌은 저희 길에 쓸데없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귀찮은 물건이 되었다. 오랫동안 이 돌은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건축자들은 모퉁이 돌을 놓기 위해 와서는 특수한 장소에 맞으며 그 위에 올려놓을 큰 무게에 견딜 수 있는 충분한 크기와 강도(强度)와 적당한 모양을 갖춘 돌을 오랫동안 찾았다. 만일 그들이 이 중요한 곳을 위하여 현명하게 선택하지 못하면 온 건물의 안전이 위태롭게 될 것이었다.
그들을 햇빛과 서리와 큰 폭풍에 견딜 수 있는 돌을 찾아야만 하였다. 여러 돌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선택되었으나 거대한 무게의 압력에 그것들은 쪼개졌다. 다른 것들도 갑작스런 대기의 변화에 따른 시험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매우 오랫동안 버려둔 돌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것은 공기와 햇빛과 폭풍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아주 작은 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건축자들은 이 돌을 검사하였다. 이것은 한 가지 외에는 모든 시험을 견디었다. 만일 이것이 엄청난 압력의 시험을 견딜 수 있다면 그들은 이것을 모퉁잇돌로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시험한 후에 이 돌을 채택하여 배정한 장소에 가져가니 꼭 들어맞는 것을 발견하였다. 예언적 계시를 통하여 이사야는 이 돌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임을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선지자는 예언적 계시 가운데 초림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께서 솔로몬 성전의 큰 모퉁잇돌 취급에서 상징된 시련과 시험을 견디어야 된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8:13∼15, 28:16).
무한하신 지혜로써 하나님께서는 초석을 택하시고 친히 이것을 놓으셨다. 그분은 이것을 “견고한 기초돌” 이라고 부르셨다. 온 세계가 이 돌 위에 걱정과 근심의 짐을 놓을지라도 이것은 그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있다.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게 그 위에 지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시험한 돌”이시다.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그분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시험을 견디셨다. 그분은 아담과 그 후손들의 죄의 무게를 견디셨으며 악의 세력의 정복자 이상의 일을 성취하셨다.
599 그분은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이 그분에게 맡기는 죄의 짐을 지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지은 심령이 구원을 찾았다. 그분은 견고한 기초 돌이시다. 그분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은 완전한 안전을 얻는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그리스도는 견고한 기초 돌과 거치는 돌이라고 선언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하면서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기초 돌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반석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 32 ~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 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도다.”(벧전 2:3∼8).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견고한 기초 돌이 되신다. 이들은 반석에 떨어져 깨지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과 그분께 대한 믿음이 이곳에 나타나 있다.
반석에 떨어져 깨지는 것은 우리의 독선(獨善)을 버리고 어린아이의 겸손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기초이신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역시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산 돌 위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 다 같이 지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안전하게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이며, 모든 사람에게 충분할 만큼 넓고 온 세상 사람의 무게와 짐을 질 만큼 강하다. 산 돌 이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모든 사람은 산 돌 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르고 닦고 아름답게 하지만 그들이 산 돌 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연결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 없이 우리는 유혹의 폭풍을 물리칠 수 없다. 우리의 영원한 안전은 견고한 기초 위에 우리 집을 짓는 데 달려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시험해 보지 않은 기초 위에 집을 짓고 있다.
비가 내리고 폭풍이 휘몰아치고 홍수가 올 때에 저희 집은 무너질 것인데 그 까닭은 그것이 영원한 반석 곧 큰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600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거치는 반석이시다. 그러나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버림받은 돌처럼 그분의 지상 사명의 생애에서 그리스도는 무시와 능욕을 참으셨다.
그분은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그러나 예수께서 영광 받으실 시간이 가까웠다.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분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받으실 것이었다(롬 1:4). 재림하실 때에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로서 나타나실 것이다. 지금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는 자들이 그분의 위대하심을 깨달을 것이다.
우주 앞에서 이 버림받은 돌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그리스도를 거절한 백성들은 저희 도성과 민족이 곧 멸망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깨져서 바람 앞의 먼지처럼 흩어질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유대인들을 멸망시켰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 위에 집을 지었다면 그들의 안전이 되었을 그 반석이었다. 그것은 멸시당한 하나님의 선하심이었고 경멸당한 의요 무시된 은혜였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반대하였으므로 그들의 구원이 되었을 모든 것이 멸망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생명에 이르는 것이 되도록 제정하신 모든 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음을 발견하였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에 예루살렘의 멸망이 수반되었다.
갈바리 에서 흘린 피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 대해 그들을 멸망에 빠지게 할 무게가 있었다. 최후의 큰 날, 곧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이 내리게 될 때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의 거치는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보복하는 산처럼 그들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 33 ~
의로운 자에게 생명이 되는 그분의 얼굴의 영광이 악한 자에게는 소멸시키는 불이 될 것이다.
사랑을 거절하고 은혜를 멸시한 까닭에 죄인이 멸망을 당할 것이다.
여러 가지 예증과 경고를 거듭하심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에게 어떤 결과가 이르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이 말씀들로써 당신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각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모든 경고는 그들을 위한 것이다. 신성성이 더럽혀진 성전, 불순종한 아들, 거짓 농부들, 거만한 건축자들의 모습을 모든 죄인의 경험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이 교훈들이 예표 한 운명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66장 논쟁
601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리스도의 날카로운 질책을 잠잠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그분의 책망을 논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층 더 단호하게 결심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하여” 정탐꾼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끔 만나신 일이 있는 나이 든 바리새인들을 보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아시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열심 있는 젊은 바리새인을 보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심문할 때에 그분에 대하여 적대적인 증언을 하려고 하는 어떤 헤롯 당원들이 이들과 동행하였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서로 큰 원수였지만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인들의 가혹한 과세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세금을 바치는 일은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된다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예수께 올무를 놓을 기회를 잡았다.
정탐꾼들이 예수께 와서 겉으로는 신실한 체하며 그들의 의무를 알기를 원하는 것처럼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나이다. 우리가 가이사 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602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라고 한 말은, 그들이 진실 되었더라면 경이로운 고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속이기 위하여 말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저들은 그들 자신의 증언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 이 질문을 한 자들은 저희가 저희 목적을 충분히 위장하였다고 생각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저희 마음을 펼친 책처럼 읽으시고 저희 위선을 경고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은 그들이 감추고 있는 목적을 읽고 계심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이 요구하지 않은 표적을 주셨다.
예수께서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을 때에 그들은 더욱더 당황하였다. 그들은 동전을 가져왔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동전에 새겨진 형상을 가리키면서 예수께서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 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정탐꾼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질문에 이쪽 혹은 저쪽이라고 직접 대답할 것을 기대하였다. 만일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부당하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분은 로마의 관원에게 보고되어 반란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실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정당하다고 선언하실 경우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반대한다고 그분을 백성들에게 고발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저희의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느꼈다.
그들의 계획들은 혼란되었다. 요점(要點)을 답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질문이 대답되었기 때문에 ~ 34 ~
그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회피가 아니라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이었다. 가이사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진 로마의 돈을 손에 들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로마의 권세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이상 그들은 이 권세를 유지하기에 요구되는 것만큼 세금을 바칠 것이며,
이것이 더욱 높은 의무와 상충되지 않는 한 그렇게 하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국가의 율법에 온화하게 복종하는 반면에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먼저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구주의 말씀은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들에게 한 혹독한 책망이었다.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충실히 실행하였더라면 그들의 국가가 분열되고 외국의 권세에 복종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깃발이 예루살렘에 휘날리지 않았을 것이며 로마의 보초병이 저희의 문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요 로마의 총독이 저희의 성안에서 다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대 민족은 그 당시 하나님을 배반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대답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603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위선과 무례를 책망하셨으며 이 일을 행하심으로 세상 정부에 대한 사람의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한 위대한 원칙을 선언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결말이 나지 않았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그 때 이후로 그들은 올바른 원칙을 굳게 고수하였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은 채 떠나갔지만 그들은 그 질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원칙이 분명히 제시된 것을 보았고 또 그리스도의 선견지명이 있는 분별력에 놀랐다.
바리새인들이 침묵을 당하게 되자마자 사두개인들이 교활한 질문을 들고 나왔다. 두 교파는 서로 크게 대적하는 입장에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하게 유전(遺傳)을 고수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외형적 의식에 엄격하였고 씻고 금식하고 긴 기도를 드리는 데 부지런하였으며 구제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헛되게 한다고 선언하셨다.
한 계급으로서 그들은 완강하고 위선적이었지만 저희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가 된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의 대부분을 믿으며, 이것을 행위의 법칙으로 삼는다고 공언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자들이며 유물론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교리와 또 그 보상과 형벌을 부인하였다. 이 모든 점에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았다. 부활은 특별히 이 두 교파 사이의 논쟁의 주제였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굳게 믿고 있었으나 이 논의에서 미래의 상태에 관한 그들의 견해는 혼란되었다. 죽음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되었다.
604 사두개인들의 논증에 맞설 수 없는 그들의 무능함은 계속적인 노여움을 일으켰다. 두 교파 사이의 논의는 대체로 성난 언쟁을 초래했으며, 그들을 전보다 더 멀어지게 하였다. 수효에 있어서는 사두개인들이 상대측보다 훨씬 적었으며 일반 백성들을 굳게 장악하지 못했으나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부자였으며 그들은 부가 주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 계층에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대제사장은 흔히 그들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들의 회의적 견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명백한 약정 하에 그렇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수효가 많고 인망이 있는 까닭에, 사두개인들은 어떤 제사장 직분이든지 유지할 때는 외형적으로 바리새인들의 교리를 용인할 필요가 있었으나, 그와 같은 직분에 적격이라는 바로 그 사실이 그들의 오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거절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 35 ~
그와 같이 스스로 드러나는 어떤 정신에 의해 고무되셨다.
하나님과 내세에 관한 그분의 가르치심은 그들의 교리에 반대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류보다 높으신 유일의 존재자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하는 섭리와 하나님의 예지는 인류에게서 자유로운 도덕적 기능을 빼앗아 사람을 노예의 위치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류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더욱 큰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살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였다.
그들은 인류가 스스로의 생애를 지배하고 세상의 사건들을 계획할 자유가 있으며 인류의 운명은 사람 자신의 손에 놓여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의 힘과 자연의 법칙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능력을 적당하게 활용함으로 인류는 향상하고 계몽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엄격한 강요를 통하여 그의 생애가 순결하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개념이 그들 자신의 품성을 꼴 지었다.
그들의 견해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들도 상호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들 가운데 연합이란 거의 없었다.
인간의 행동에 끼치는 성령의 감화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저희 생애에는 그분의 능력이 부족하였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생득권(生得權)과 율법의 요구를 엄격하게 지키는 일을 크게 자랑하였으나 그들에게 율법의 참 정신과 아브라함의 믿음과 자비심은 없었다.
자연적인 동정심은 좁은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었다.
605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생애의 위안과 축복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저희 마음은 다른 사람의 궁핍과 고통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위로써 초자연적 결과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과 현세 저편의 내세와 인간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항상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와 동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나타내셨는데 이것이 사두개인들의 이기적 배타심을 질책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현세적 유익과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마음을 움직이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품성의 변화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루려는 과오를 보여 주셨다.
사두개인들은 이 가르침을 믿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님과 논쟁하면 그들은 그분을 정죄할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평판을 떨어뜨릴 자신이 있다고 느꼈다. 부활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기로 선택한 문제였다.
만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동의하신다면 그분은 바리새인들을 더욱 크게 화나게 할 것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반대하신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조롱하기로 그들은 계획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만일 몸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처럼 불멸의 상태에서도 동일한 물질의 분자(分子)로 구성되었다면 죽음에서 살아났을 때에도 살과 피 가 있어야 하며 지상에서 중단된 생명이 영원한 세계에서 계속되어야 한다고 추론하였다.
그럴 경우 세상에서의 관계가 계속될 것이며 남편과 아내는 다시 연합되어 부부 생활이 계속되고 모든 일이 죽기 전과 똑같이 되어 나가고 금생의 약점과 격정이 내세에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심으로 예수께서는 내세를 가린 베일을 거두셨다. ~ 36 ~
예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두개인들의 신조가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셨다. 그들의 전제는 잘못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라고 부언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것처럼 위선 때문이 아니라 신조의 오류에 대하여 그들을 책망하셨다.
사두개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가장 굳게 고수한다고 자랑해 왔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 말씀의 참뜻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 지식은 성령의 비침으로 마음에 깊이 확신되어야 한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그들의 무지가 믿음의 혼란과 심령의 어둠을 가져온 요인이라고 예수께서는 선언하셨다.
606 그들은 그들의 유한한 추리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해력을 넓혀 주고 힘 있게 할 이 거룩한 진리에 저희 심령을 열도록 초청하셨다.
그들의 유한한 지력으로써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능력의 경이로운 현시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그와 같은 능력의 증거를 거절하며 그것을 그들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자연 작용에 돌린다.
우리 주위에 있는 신비를 여는 유일의 열쇠는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임재와 능력을 승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사를 명하시고 집행하시는 우주의 창조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넓은 견해와 그분의 섭리의 신비를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저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성경이 쓸데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선언하셨다. 그분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 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간주하신다.
그분은 시작부터 끝을 아시며 사업의 결과를 그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처럼 보신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맨 마지막에 죽을 성도에 이르기까지 죽은 고귀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와 불멸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부활한 성도들은 친밀하고 부드러운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그분의 목적 가운데 예기되어 있는 이 형편을 그분은 이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보신다.
죽은 자가 그분에게는 산 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두개인들은 침묵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답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정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백성들의 멸시밖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책잡는 데 사용할 말을 하도록 그분을 추궁하는 일을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학식 있는 서기관을 설복시켜 율법의 열 가지 교훈 가운데 가장 크고 중대한 것이 어느 것인지 예수께 질문하도록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창조주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지적한 첫 네 계명을 그의 이웃 사람에게 대한 사람의 의무로 밝힌 나머지 여섯 계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높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실제적 경건을 이루는 데 크게 실패하였다. 예수께서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큰 결점을 보이신 다음에 그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선한 행실의 필요를 가르치셨다. ~ 37 ~
607 이런 이유로 그분은 나머지 여섯 계명을 처음 네 계명 이상으로 높인다는 비난을 받으셨다.
율법사는 예수께 접근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 이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직접적이며 힘이 있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예수께서는 둘째도 첫째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것이 첫째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의 큰 계명으로 요약된다. 나머지 여섯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른 계명 가운데 포함된다. 이 두 계명이 다 사랑의 원칙의 표현이다.
둘째 계명을 범하면서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첫째 부분을 범하면서 둘째 부분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보좌에 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때에 우리 이웃에게도 바른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때만 우리 이웃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다.
모든 계명이 사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어 있으므로 이 원칙을 범하지 않고는 한 계명도 깨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것은 크게 중요하고 다른 어떤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지라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그렇게 많이 분리된 계율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가르치셨다. 우리 주님은 처음 네 계명이나 나머지 여섯 계명을 다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로 나타내시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께 질문한 서기관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는 예수께서 그처럼 심오하고 완전한 성경 지식을 나타내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 거룩한 계명들의 근간이 되는 원칙에 대하여 넓은 식견을 얻었다. 모인 제사장들과 관원들 앞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바로 해석하셨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 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608 그리스도의 지혜로운 대답은 서기관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였다. 서기관은 유대인의 종교가 내적 경건보다는 외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죄를 속하는 데에 단순한 제의(祭儀)적인 제물과 신앙심 없는 피 흘림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람에게 이기심 없이 대하는 것이 이 모든 의식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스도의 논증의 올바름을 인정한 이 사람의 신속성과 백성들 앞에서 보여 준 그의 결정적이며 기민한 대답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을 나타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사장들의 찌푸린 얼굴과 관원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담대히 마음의 확신을 말한 이 정직한 서기관을 동정하였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하셨다. 이 서기관은 번제물과 제물보다 의의 행위가 하나님께 더욱 받으실 만한 것임을 깨달았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 38 ~
믿음을 통하여 의의 사업을 행할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 한 의식적인 희생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심지어 도덕적 율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주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율법에는 단지 권위적인 명령 이상의 더 깊은 무엇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주셨다.
율법 가운데는 복음에 나타난 바와 같은 원칙이 구현되어 있다.
율법은 사람의 의무를 지적하며 그의 죄를 보여 준다.
사람은 그리스도께 용서와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
예수께서 서기관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가까이 모여 있었다. 이제 예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질문하셨다. 이 질문은 메시야에 관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하여, 즉 그분을 단순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무리들은 음성을 합하여 “다윗의 자손 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메시야에게 예언된 칭호였다. 예수께서 능력 있는 기적들로 당신의 신성을 나타내셨을 때에, 그분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셨을 때에 백성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뇨” 하고 그들 가운데서 서로 물었다.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도움을 청하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라고 부르짖었다.
609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분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라는 즐거운 부르짖음의 만세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날 성전에서는 어린이들이 그 즐거운 찬송을 반향 시켰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대답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의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 하셨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67장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음
610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마지막 날이었다. 예루살렘에 모인 큰 군중들은 그리스도를 주목하였다. 백성들은 성전 마당에 운집하여 진행 중에 있는 논쟁을 주목하면서 그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전에는 이와 같은 장면을 목격한 일이 전혀 없었다.
세상의 명예도 제왕의 휘장(徽章)도 가지지 않은 젊은 갈릴리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분의 주위에는 값진 옷을 입은 제사장들과 그들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의복과 휘장으로 단장한 관원들과 그들이 항상 참고하는 두루마리 책을 손에 든 서기관들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왕의 위엄을 가지고 그들 앞에 조용히 서 계셨다.
하늘의 권위가 부여된 분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거절하고 멸시하며 당신의 생명을 취하려고 애쓰는 대적들을 움츠리지 않고 바라보셨다. 그들은 전에 큰 수효로 그분을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함정에 빠뜨려 그분을 정죄하려던 계획들은 헛수고였다.
도전에 도전을 받으셨으나 그분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오류와는 대조되는 순결하고 빛나는 진리를 제시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지도자들 앞에 그들의 참된 형편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죄악 적 행위를 ~ 39 ~
계속해서 고집하면 분명히 형벌을 받을 것을 보이셨다. 경고는 충실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다른 일이 남아 있었다.
611 성취되어야 할 다른 목적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은 점점 증가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매혹되었으나 또한 크게 당혹하였다.
그들은 지식과 겉모양의 경건을 보고 제사장들과 랍비들을 존경하였다.
모든 종교적 문제에서 그들은 제사장들과 랍비의 권위에 맹종하였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은 공격을 받을 때마다 덕행과 지식이 더욱 밝히 드러난 교사 예수님을 이 사람들이 불신임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비열한 얼굴에서 낭패와 혼란을 보았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이 매우 쉽고 단순한데도 불구하고 관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데 놀랐다.
백성들은 그들 스스로가 어떤 노선을 취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큰 근심으로 저희가 항상 권면을 따르던 자들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목적은 관원들을 경고하는 것과 배우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을 교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더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었다.
유전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과 타락한 제사장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 신앙을 통하여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다.
612 이 사슬들을 그리스도께서는 끊으셔야만 하였다.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바리새인들의 성격을 더욱더 충실히 폭로시켜야만 하셨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한” 다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와 같은 거룩한 권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율법의 해석자요, 백성의 재판관으로서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극도의 순종과 복종을 백성들에게 요구하였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율법에 따라 가르치는 랍비의 교훈은 행할 것이나 랍비의 모본은 따르지 말라고 명하셨다. 랍비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바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과 반대되는 것을 많이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유전에 근거를 둔 많은 규칙들을 지키도록 명하고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했다.
그리고 율법의 어떤 부분을 저희 스스로는 남몰래 무시하면서 백성에게는 순종해야 된다고 설명하고 또 그들의 목적에 맞을 때는 그 율법의 순종에서 저희는 실제로 면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경건함을 과시하는 것이 그들의 계속적인 목표였다. 이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에 관하여 모세에게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신 6:8)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고 실행할 때에 모든 인류는 고상하게 될 것이다.
의롭고 자비롭게 거래함으로 그 손은 마치 도장처럼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들을 드러낼 것이다.
그들은 뇌물과 부패하고 기만적인 모든 일로부터 깨끗함을 유지할 것이다.
그들은 사랑과 동정의 사업에 적극적이 될 것이다.
고상한 목적으로 향한 눈들은 정결하고 진실할 것이다.
표정이 풍부한 얼굴과 생기 있는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의 흠 없는 품성을 증거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분간하지 못하였다. ~ 40 ~
모세에게 주어진 명령은 성경의 교훈을 몸에 부착해야 한다는 지시로 해석되었다. 이 명령은 양피지 조각에 기록되었으며 머리와 손목에 눈에 잘 띄도록 묶여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하여금 정신과 마음을 굳게 붙잡게 하지는 못했다.
이 양피지는 다만 주목을 끌기 위한 휘장으로 차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것들은 착용 자들에게 백성들의 존경을 일으키도록 하는 헌신된 모습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613 예수께서는 이 헛된 가장(假裝)에 일침을 놓으셨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 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라.”
이와 같은 분명한 말씀으로 구주께서는, 마음은 탐욕과 질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거짓된 겸손을 나타내며 지위와 권세를 얻으려는 그들의 이기적 야망을 드러내셨다.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에 손님들은 신분에 따라 좌석에 앉았으며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첫째로 주목되고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이러한 명예를 얻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예수께서는 이런 행습을 견책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랍비나 선생이라는 이름을 탐내는 허영심을 책망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칭호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관원들과 율법의 해석자들과 관리자들은 다 한 하늘 아버지의 자손인 형제들이다.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저희 양심과 신앙을 그가 지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명예로운 칭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백성들의 마음에 새기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지상에 계셔서 레버런드(Reverend:성직자를 높여 부르는 말) 혹은 라이트 레버런드(Right Reverend:대주교의 존칭)의 칭호를 가진 이들에게 둘러싸이신다면 그분은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 하신 그분의 말씀을 반복하지 않으시겠는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라고 선언한다.
이와 같은 칭호가 어떤 인간에게 적합한가? 그 칭호가 가리키는 지혜와 의를 인간은 얼마나 적게 나타내는가! 이 칭호를 받은 자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호와 성품을 잘못 전하고 있는가!
슬프다, 얼마나 자주 세속적 야망과 독재와 가장 비열한 죄악들이 높은 성직자들의 과장된 예복 아래 감추어졌던가!
구주께서는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위대함이란 도덕적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라고 여러 번 반복하여 가르치셨다.
하늘이 평가하는 품성의 위대함은
우리 동료들의 행복을 위하여 살고 사랑과 자비의 사업을 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614 영광의 왕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류의 종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성경을 곡해함으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은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지식 그리고 참된 성결에 긴요한 저 내적인, ~ 41 ~
거룩한 생명을 받아들였을 사람들의 심령을 눈멀게 하였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은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영문 성경 참조).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저희는 이것을 그들 자신의 이익을 얻는 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경건한 과부들의 신임을 얻은 다음 과부들이 저희 재산을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인 것처럼 나타냈다. 과부들의 돈을 장악하게 되자 교활한 음모자들은 이 돈을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들은 부 정직을 감추기 위하여 공중 앞에서 긴 기도를 드리고 경건한 모양을 크게 자랑하였다. 이 위선이 그들에게 더욱 큰 천벌을 가져 올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선언하셨다.
그와 같은 책망이 오늘날 경건하다고 크게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들의 생애가 이기심과 탐욕으로 더럽혀졌을지라도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순결한 것처럼 보이는 예복으로 가려서 한동안은 저희 동료들을 속인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모든 목적을 아시고 모든 사람을 저희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남용을 용서 없이 정죄하셨으나 또한 의무를 줄이지 않도록 주의하셨다. 그분은 과부의 예물을 강요하여 악용한 이기심을 책망하셨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창고에 예물을 가져온 과부를 칭찬하셨다.
사람이 예물을 악용한다고 하여 그 바친 자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연보 궤가 있는 마당에 계셨으며 거기서 저희 예물을 넣으려고 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셨다.
많은 부자들이 매우 자랑하는 태도로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드렸다.
예수께서는 슬픔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으며 그들의 후한 예물에 대하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한 불쌍한 과부가 남들이 보는 것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얼굴은 빛났다.
부요하고 거만한 자들이 그들의 예물을 넣으려고 옷자락을 질질 끌며 지나가는 것을 보자 그 여자는 감히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뒤로 움츠렸다. 그러나 그 여자는 비록 그것이 적을지라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업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자 하였다.
그 여자는 수중에 있는 예물을 보았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예물에 비교하면 매우 적은 것이었으나 이것은 그녀의 소유의 전부였다. 자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 여자는 급히 두 렙돈을 놓고 빨리 돌아갔다.
615 그러나 이 일을 행하는 중에 그 여자는 자기를 주목하여 열심히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쳤다.
구주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과부의 가난함을 주목하도록 명하셨다. 그 때에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 여자의 귀에 들렸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자기의 행동이 이해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느꼈을 때에 그 여자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가득 찼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적은 돈을 보관하여 자신을 위하여 쓰도록 충고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살찐 제사장들의 손에 넣어 주면 연보 궤에 들어온 많은 값진 예물들 가운데서 그것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동기를 아셨다.
그 여자는, 성전 봉사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임을 믿었으며 성전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다.
그 여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였다. 여자의 행동은 언제나 그녀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기념비가 되고 영원히 그녀의 기쁨이 될 것이었다.
여자의 마음은 예물과 함께 바쳐졌다. 그 가치는 그 동전의 가치로서가 아니요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관심으로 평가되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과부에 대하여, 그 여자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 42 ~
부자들은 그들의 풍부한 데서 바쳤으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서 영광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였다. 그들이 드린 큰 예물은 그들의 안락이나 사치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또 아무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과부의 푼돈과는 그 가치에 있어서 비교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행동을 비열하다거나 혹은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정 짓는 것은 그 행위의 동기이다.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찬양하는 큰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한 작은 의무와 남에게 보이지 않게 드린 적은 예물과 인간의 안목에는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이 흔히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귀한 것이 된다.
믿음과 사랑이 있는 마음이 가장 값진 예물보다 하나님께는 더욱 귀중하다.
가난한 과부는 그녀가 한 작은 일을 이루고자 생활비를 바쳤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업에 이 두 푼을 드리기 위하여 자신의 음식을 희생하였다.
그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녀의 큰 필요를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이 일을 행하였다. 구주의 칭찬을 받은 것은 이 이기심 없는 정신과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을 부유한 동포들과 분담하기를 매우 원한다. 이런 영혼들을 거절하지 말 것이다. 그들의 푼돈을 하늘 금고에 넣게 하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충만한 마음으로 바친다면 겉으로는 보잘것없는 적은 금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축복하시는 귀중한 재물, 성별된 예물이 되는 것이다.
616 예수께서는 과부에 대하여 그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 동기에서 뿐 아니라 그녀의 예물의 결과에도 적용되었다. “두 렙돈(헬라동전의 명칭) 곧 한 고드란트(로마동전의 명칭)”는 부요한 유대인들이 바친 헌납 물보다 훨씬 큰 금액을 하나님의 보고(寶庫)에 드린 것이 되었다.
이 적은 예물의 감화는 그 시작은 작으나 각 시대를 통하여 흘러 내려오면서 넓어지고 깊어지는 시냇물과 같았다. 수천 가지 방법으로 이것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공헌하였다.
과부의 자아 희생의 모본은 각 나라에서 각 시대를 통하여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었다.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마음에 호소하였으며, 그들의 헌금은 과부의 예물의 가치를 증대시켰다. 과부의 푼돈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위대한 결과들의 근원이 되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진지한 열망으로 모든 예물을 드리고 모든 행동을 해야 한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선물을 위한 그 결과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
구주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탄핵(彈劾)을 계속하셨다.
“화 있을 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 지라 하는 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전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 지라 하는 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거짓되고 좁은 표준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를 해석하였다. 그들은 어떤 죄들은 가볍게 여기고 다른 죄는 거의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될 듯이 취급하면서 여러 가지 죄의 등급을 만들어 독단적으로 까다로운 구별을 지었다.
그들은 돈을 받고 사람들이 한 맹세를 면제해 주었다. 때때로 그들은 많은 돈을 받고 한층 더 악한 죄들을 용서하여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이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다른 경우에는 사소한 과오에도 엄중한 형벌을 ~ 43 ~
선언하였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는 신성한 의무에 대한 남용을 다시 정죄하신다.
의무 그 자체를 그리스도께서 제거하신 것은 아니다. 십일조 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으며 옛적부터 준수되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의 십일조를 지불하였다. 유대의 관원들은 십일조를 바칠 의무를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무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수행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모든 경우에 독재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617 요구 조항은 아주 복잡하게 되어 있어서 그것들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의무가 언제 끝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는 이 제도가 공정하고 합리적이었으나 제사장들과 랍비들이 이것을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은 중대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인정하셨으나 이것이 다른 의무들을 등한히 할 핑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바리새인들은 박하(薄荷)와 회향(回香)과 근채(芹菜)와 같은 정원의 채소의 십일조를 바치는 데 매우 정확하였다.
이렇게 하는 데는 돈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으로 정확하고 고결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쓸데없는 제한은 백성들을 억눌렀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신성한 제도에 대한 존중심을 파괴하였다. 그들은 하찮은 구별들을 가지고 사람들의 심령을 점령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긴요한 진리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율법의 더욱 중요한 일들 곧 공의와 자비와 진리는 무시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율법들도 랍비들로 말미암아 같은 방법으로 왜곡되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명령에는 부정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피를 불결하게 하여 생명을 단축시킬지도 모를 돼지고기와 다른 특정한 짐승들의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제한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대로 가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까닭 없이 극단에 치우쳤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백성들은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될 수 있는 가장 작은 곤충이라도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모든 물을 거르라는 요구를 받았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사소한 엄밀성과 그들의 실제적인 죄악의 크기를 대비하면서 바리새인들에게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라고 말씀하셨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같은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회칠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무덤이 그 속에 썩고 있는 유해(遺骸)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제사장들과 관원의 외관적인 성결 속에 불의가 감춰져 있었다.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618 죽은 선지자들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보이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열심 은 있었으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유익을 얻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책망에 주의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대하여 미신적인 관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무덤을 장식하기 위하여 막대한 돈을 낭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였다. 죽은 자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나타냄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 44 ~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지도 않고 그들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와 같은 우상숭배는 오늘날도 매우 성행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값비싼 기념비를 세우기 위하여 과부와 고아와 병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명하신 산 자에 대한 의무는 돌아보지 않는 반면에 이런 일을 위하여 시간과 돈과 노력을 아낌없이 허비한다.
바리새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아름답게 장식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조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리지 않았으리라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취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이 마음을 기만하여 진리의 빛으로부터 돌이키게 하려는 사단의 능력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도록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의 맹목에 대하여 의아해 한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즐거이 받아들였을 것이요 구주를 거절한 자들의 죄에 결코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극기와 겸손을 요구할 때에 그들은 확신을 짓눌러 없애고 순종을 거부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신 바리새인들이 행한 정신과 같은 정신을 나타낸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데 포함되는 자신들의 무서운 책임을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의로운 아벨이 가인의 손에 쓰러져 최초의 무죄한 피가 흘려진 때로부터 그 같은 역사는 죄악을 증가시키면서 반복되었다.
각 시대의 선지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전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서 왕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저희의 음성을 높였다.
대대로 빛과 진리를 거절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형벌은 축적되어 왔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이 형벌을 이제 저희 자신의 머리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죄악은 이전 어느 세대의 죄악보다도 더 컸다.
구주를 거절함으로 그들은 아벨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죽임을 당한 모든 의인의 피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책임을 부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희의 죄악의 잔을 넘치도록 채우려 하고 있었다.
619 이것은 얼마 후에 공정한 보응으로 저희의 머리 위에 부어질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 일에 대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말씀이 진실함을 알았다. 그들은 선지자 사가랴가 어떻게 죽임을 당하였는지 알았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경고의 말씀이 선지자의 입에 있을 때에 배도한 왕은 사단적인 격분에 사로잡혔고 그의 명령으로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피는 바로 성전 마당의 돌에 물들여져 지워질 수 없었으며, 이것은 배도한 이스라엘에 대한 증거물로 남아있다. 성전이 서 있는 한 이 의로운 피의 흔적은 하나님께 복수해 주시기를 부르짖으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 무서운 죄악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에 공포의 흥분이 군중들을 둘러쌌다.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과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그들의 편협을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같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 45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스데반, 야고보와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정죄를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
손을 하늘로 드시고 거룩한 빛이 그분의 몸을 두르고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당신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재판관으로서 말씀하셨다. 자주 친절하게 간청하시던 그리스도의 음성이 이제 책망과 정죄의 음성으로 들렸다. 청중들은 벌벌 떨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안색(顔色)으로 말미암아 받은 인상은 결코 씻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속이고 하나님께 욕 돌리는 위선과 큰 죄악에 대하여 분개하셨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그럴 듯한 기만적인 논법 가운데서 그분은 사단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알아차리셨다.
죄에 대한 그분의 탄핵이 날카롭고 엄중하였지만 그분은 보복적인 말씀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흑암의 왕자에 대하여 거룩한 의분을 가지셨으나 분노한 기분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와 같이 사랑과 자비의 아름다운 특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해 의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욕하는 자들에게 욕하고자 하는 격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620 거짓을 옹호하기 위하여 음부의 세력에 의해 행동하는 자들을 만날 때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평온과 침착 을 유지할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과 청중들에게 미련이 있는 듯한 시선을 던지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얼굴에는 거룩한 동정의 표가 나타났다.
마음의 깊은 고뇌와 쓰라린 눈물 때문에 목멘 음성으로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셨다.
이것은 이별의 몸부림이었다.
그리스도의 애통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신비한 이별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다 같이 잠잠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성전을 떠날 준비를 하셨는데 그것은 그 곳에 있는 원수들에게 져서 내쫓기는 모습이 아니요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고 가는 모습이었다. 그분은 논쟁에서 승리하고 물러나셨다.
다사한 그 날에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흘러나간 진리의 보석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새로운 사상이 생애 속에 침투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포부가 일깨워졌으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사람들은 선두에 나아와 그 사업의 위대함에 부합하는 지혜와 열심 으로 그들의 거룩한 사명을 성취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며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의 생애를 위축시킨 낡은 미신들을 약화시키는 기별을 전파했다. 그들의 증언 앞에는 인간의 학설과 철학이 쓸데없는 우화(寓話)와 같았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놀라움과 위엄에 눌린 군중들에게 하신 구주의 말씀에서 넘쳐흐른 결과는 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하나님과 절연(絶緣)하였다. 감람나무의 원가지들은 꺾여 나갔다. 마지막으로 성전 내부를 바라보신 예수께서는 비통하게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지금까지 그분은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성벽을 ~ 46 ~
나가실 때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지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영원히 떠날 것이었다.
그 때 이후로 성전의 의식은 무의미할 것이며 성전 봉사는 조롱거리가 될 것이었다.
68장 바깥뜰에서
621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이때에 그리스도의 사업은 쓰라린 패배를 당한 듯이 보였다. 그분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승리자가 되셨지만 그들이 그분을 결코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최후의 결별이 다가왔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절망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업의 완성을 향해 접근하고 계셨다. 유대 민족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계와 관련된 위대한 사건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세상의 갈한 외침의 메아리인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는 열렬한 요청을 들으시고 그리스도의 얼굴은 빛났으며 그분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헬라인들의 요청 가운데서 당신의 위대한 희생의 결과에 대한 전조를 보셨다.
박사들이 그분의 생애의 초기에 동방에서 왔던 것처럼 이 사람들은 그분의 생애의 말기에 구주를 찾아 서방에서 왔다. 그리스도의 탄생 당시 유대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야심적인 계획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분의 강림을 알지 못하였다. 박사들은 구주를 경배하고자 선물을 가지고 이교의 땅으로부터 구유까지 왔다.
622 마찬가지로 헬라인들은 온 세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을 대표하여 예수를 만나려고 왔다. 그와 같이 구주의 십자가는 모든 나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이끌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마 8:11)을 것이다.
헬라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을 쫓아냈고 더욱이 그분은 다윗의 보좌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소문을 퍼뜨렸다.
헬라인들은 그분의 사명에 관하여 진실을 알고자 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의 간청은 허락되었다. 그 요청이 왔을 때 예수님은 유대인들 외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는 성전 경내에 계셨지만 헬라인들이 있는 바깥마당으로 나오셔서 그들과 개인적인 면담을 나누셨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실 때가 이르렀다. 그분은 십자가의 그늘 아래 서 계셨으며, 헬라인들의 질문은, 그분께서 치르시려고 하는 희생이 많은 인간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리라는 것을 그분께 보여 주었다. 그분은 헬라인들이 그 때는 상상도 못했던 처지에 계신 당신을 곧 보게 될 것을 아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석방 결정을 받게 될 강도요 살인자인 바라바 곁에 서 계신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선동에 영향 받은 백성들이 선택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는 질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 27:22)라는 대답이 주어질 것이다.
인간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써 그분의 왕국은 완전하게 되고 다시 온 세상에 퍼져 나갈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아셨다. 그분은 회복자로서 일하실 것이며 그분의 성령은 각처에 편만할 것이다. 잠시 그분은 장래를 내다보셨고 온 세상 각처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전파되는 음성을 들으셨다.
그분은 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민족과 방언과 백성이 구원의 기별을 듣게 될 때에 위대한 수확의 결실에 대한 증거를 보셨다. 그분은 이러한 일에 대한 기대 즉, ~ 47 ~
그분의 소망의 성취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영광을 입으시는 방법에 대하여 잊으신 적이 결코 없었다. 다가오는 그분의 죽으심 뒤에 이방인들을 모으는 일이 있을 것이었다.
오직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세계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밀알처럼 인자는 땅속에 던져져 죽고 눈에 보이지 않게 장사되어야 하셨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다.
62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장래를 나타내실 때에 자연의 사물을 통하여 설명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그분의 사명의 참된 결과는 그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땅에 떨어져서 죽을 때에 밀알은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매를 맺을 것이었다. 식물계의 법칙과 같이 생명은 그분의 죽으심의 결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밭을 가는 자들 앞에는 언제나 실물 교훈이 있다. 해마다 농부는 가장 잘 선택한 곡식을 흩어 뿌림으로써 지속적으로 곡식을 공급받는다. 얼마 동안 그것은 밭이랑 속에 파묻혀서 주의 돌보심을 받는다.
그 다음에는 싹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은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다. 그러나 곡식이 눈에 보이지 않게 묻히고 감추어져 그 모양이 모두 없어지기 전에는 이러한 발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땅에 묻힌 씨앗은 열매를 가져오고 그리고 또다시 그 열매는 씨앗으로 뿌려진다. 이렇게 하여 수확은 증대된다. 그와 같이 갈바리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희생을 숙고하는 것은 그 결과로 영생할 자들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그대로 보존하는 밀알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한다. 그것은 홀로 살뿐이다.
만일 원하기만 하셨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지 않으실 수 있었다.
만일 그분께서 이렇게 하셨다면 분명히 그분은 홀로 사셨을 것이다.
그분은 인간 자녀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의 생명을 드림으로써 그분은 인류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실 수 있었다.
오직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그분은 그 거대한 수확, 즉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방언과 백성 중에서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큰 무리의 씨앗이 되실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진리를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자아 희생의 교훈과 연결시키신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리스도의 동역자로서 열매를 맺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의 필요라는 밭고랑에 생명을 던져야만 한다. 자기 사랑과 사욕을 죽여야 한다.
자기희생의 법칙은 자기 보존의 법칙이다. 농부는 그의 곡식을 흩어버림으로 그것을 보존한다.
인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주는 것이 사는 것이다.
보존될 생명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는 일에 아낌없이 바친 생명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저희 생명을 희생하는 자들은 저희 생명을 영원히 보존할 것이다.
624 사욕을 좇아 허비한 삶은 먹어 버린 곡식과 같다. 그것은 사라지지만 증가됨이 없다.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을 위해 살고 생각하며, 계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끝나면 그는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자아 섬김의 법칙은 자멸의 법칙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말씀하셨다. ~ 48 ~
희생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같이 지는 자들은 모두 그분의 영광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이다.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 멸시와 고통 가운데 처한 그리스도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자기희생의 열매이다. 그들 가운데서 그분의 품성과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그분이 받으실 보상이며, 영원무궁토록 그분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들의 수고와 희생의 열매로써 그들이 그분과 함께 나누는 이 기쁨은 다른 사람들의 심령과 생애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동역 자들이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듯이 저들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이방인들을 모아들일 것을 예시하는 헬라인들의 기별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사명을 생각하셨다. 하늘에서 그 계획이 세워진 때로부터 죽음이 임박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구속 사업이 그분 앞을 지나갔다. 어떤 신비스러운 구름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가까이 있는 자들도 그 어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은 생각에 잠겨 계셨다. 마침내 그분은 침묵을 깨시고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슬픈 음성을 발하셨다.
그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쓴 잔을 마시고 계셨다.
그분의 인성은 어느 면으로 보든지 그분이 하나님에게서조차 버림받은 것으로 보일 때, 곧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모두가 생각할 그 때의 버림받은 순간에 대한 생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분은 사람들 앞에 드러나 극악한 죄수 취급을 받으며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죽음을 당할 일 때문에 위축되셨다. 예수님은 흑암의 세력과의 투쟁에 대한 예감과 인간의 범죄로 인한 무서운 죄 짐에 대한 생각, 그리고 죄로 인한 아버지의 분노로 의기 저상하셨으며, 그분의 얼굴에는 죽음의 창백함이 서려 있었다.
그 때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다. 그분은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서만 정복할 수 있었다.
인간은 오직 이 방법으로써만 구속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고뇌에 동의하셨으며 그 희생을 받아들이셨다.
하늘의 임금께서 죄 짐을 지는 자로서 고통을 받기로 동의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그분의 머리 위에 떠돌던 구름 속에서 한 응답이 나왔다.
625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말구유로부터 이 말씀이 들릴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 다가오는 시련 가운데서 그분은 신성과 인성의 고통으로 인하여 참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었다.
그 음성이 들렸을 때에 구름 속에서 빛이 투사되어 그리스도를 둘렀는데 마치 무한한 능력의 팔이 불꽃의 장벽처럼 그분의 주위를 두른 듯이 보였다. 백성들은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입을 다물고 숨을 죽인 채 모든 사람은 눈길을 예수께 고정시키고 서 있었다. 하늘 아버지께서 증언하실 때 구름은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흩어졌다.
당분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가시적인 교제는 끝났다.
“곁에 서서들은 무리는 우레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씀하였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의하려 왔던 헬라인들은 구름을 보고 음성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였으며 과연 그분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들에게 나타나신바 된 그리스도임을 분별하였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분의 봉사의 시초인 예수님의 침례 시에 들렸고 그분께서 변화하시던 때에 다시 들렸다. ~ 49 ~
이제 그분의 봉사 사업이 거의 마쳐갈 때에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환경 아래에서 세 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상태에 관한 가장 엄숙한 사실을 방금 전에 말씀하셨다. 그분은 마지막 호소를 하셨고 그들의 운명을 선고하셨다.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사명에 대하여 인을 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절한 그분을 인정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였고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아버지께서 주신 징표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 이러라.” 이것은 세계의 위기이다.
만일 내가 사람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된다면 세계는 밝아질 것이다.
사람들의 심령을 붙들고 있는 사단의 속박은 깨질 것이다.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회복될 것이며 믿는 성도들의 가족은 마침내 하늘 집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이다.
구주께서는 당신 앞에 펼쳐진 승리의 장면에 대한 명상에 잠기신다.
그분은 십자가와 그에 따른 모든 공포와 빛나는 영광과 함께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보신다.
626 그러나 인간 구속의 사업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에까지 나타난다.
이 세상 임금은 쫓겨난다. 사단이 하나님께 제기했던 비난들은 논파된다. 사단이 하늘에 퍼뜨린 비난의 말은 영원히 제거된다.
사람들과 같이 천사들도 구주께 이끌리게 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그분 주위에는 많은 백성들이 둘러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고 하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이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 하”였다. 그들이 한 번은 구주께 “우리를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요 6:30) 하고 물었다.
셀 수 없는 표적들이 주어졌으나 그들은 눈을 감고 마음을 굳게 하였다.
이제 아버지께서 친히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표적을 요구할 수 없었으나 여전히 믿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보다도 사람들의 칭찬을 더 좋아하였다. 그들은 질책과 수치를 면하려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영생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 때 이후로 모든 세기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일을 행하여 왔는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라고 하신 구주의 경고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예수께서는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고 말씀하셨다.
오호라! 저희의 재난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여! ~ 50 ~
그리스도께서는 천천히 그리고 슬퍼하시면서 성전 경내(境內)를 영원히 떠나셨다.
69장 감람산 위에서
627 그리스도께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8)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공포로 사로잡히게 하였다. 이 말씀에 그들은 무관심한 체하였으나 저희 마음 가운데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그들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족의 영광인 이 장엄한 성전이 곧 폐허의 무더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불길한 전조는 제자들도 함께 느끼게 되었으며 그들은 예수님의 더욱 분명한 말씀을 고대하였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성전을 나갈 때에 그들은 성전의 견고함과 아름다움에 예수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성전의 돌들은 순백색의 순수한 대리석이었으며 그 중 어떤 돌들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어떤 부분의 벽은 느부갓네살 군대의 공격에도 끄떡없었다.
완전한 석조 건축물인 성전은 마치 견고한 돌을 채석장에서 통째로 떠내 온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이 견고한 벽들이 무너질 수 있을지 제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전의 장대함에 그리스도의 주목이 이끌렸을 때에 거절 받으신 분의 말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예수님 앞에 전개된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아노라고 슬프게 말씀하셨다. 건물들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너희는 이 벽들이 분명히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가리키나 내 말을 들으라. 날이 오리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628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백성들이 듣는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감람산에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가 예수께 나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당신의 재림의 큰 날을 따로 분리하여 제자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 두 사건을 섞어서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께서 당신께서 보신대로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셨다면 그들은 그 광경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분은 두 큰 위기를 섞어서 설명하시고 제자들이 스스로 그 뜻을 연구하도록 하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셨을 때 그분의 예언의 말씀은 그 사건을 넘어 주께서 일어나사 세상의 죄를 심판하셔서 땅이 더 이상 죽임을 당한 자들의 피를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는 그 최후의 날에 일어날 대재화의 사건에까지 미쳤다.
이 모든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 살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서도 주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나타나 이적을 보이며 유대 민족의 구원의 때가 왔다고 선언할 것이다.
이런 일들이 많은 사람을 잘못 인도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예루살렘이 포위된 그 사이에 많은 거짓 메시야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경고는 또한 오늘날 이 시대에 사는 자들에게도 주어졌다.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에 성행하던 것과 같은 기만이 각 시대를 통하여 행해졌고 또다시 행해질 것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예루살렘의 멸망 전에 사람들은 주권을 잡으려고 서로 다투었다.
황제들은 살해되었고 보좌를 잇기로 예상되는 자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유대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의)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 51 ~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랍비들이 이 징조들을 보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나라들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 징조들이 메시야 강림의 표적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629 그러나 속지 말라. 이 징조들은 그분의 심판의 시작이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그들을 치료하여 줄만큼 그들은 회개하지도 않고 거듭나지도 않았다. 그들이 속박에서 해방되는 표라고 말하는 그 징조는 바로 그들의 멸망의 징조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고통을 당하였다.
부모들은 저희 자녀들을 배반하였고 자녀들은 저희 부모를 배반하였다. 친구들은 저희 친구들을 산헤드린에 넘겨주었다. 박해자들은 스데반과 야고보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여 저희 목적을 성취하였다.
63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유대 백성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증인들이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며 옥에 갇히는 경우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죽임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와 같이 이 일은 반복될 것이다. 당국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들을 만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리를 횡령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만 지배하실 수 있는 양심을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벌써 그들은 착수하고 있으며, 저희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경계선에 이를 때까지 계속적으로 이 일을 추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당신의 충성스러운 백성을 위하여 개입하실 것이다.
박해가 일어날 경우 언제든지 그것을 목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든지 혹은 그분을 반대하든지 결정하게 된다. 부당하게 정죄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나타내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애착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진리의 원칙이 저희 행동을 직접 부당하다고 선을 긋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
한때 그들이 옹호하던 신앙을 배반하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자들이 많다.
시련의 때에 배교하는 자들은 저희 자신의 안전을 얻기 위하여 거짓 증언을 하고 저희 형제들을 배반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빛을 거절하는 자들의 몰인정하고 잔인한 행동을 보고 놀라지 않도록 이 일을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의 징조를 보여 주면서 그들에게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이 경고는 40년 후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에 유의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경고에 순종하였으며 한 사람도 도성이 함락될 때에 멸망당하지 않았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그리스도는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으셨으며 이것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으셨다. 안식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무효가 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40년 후에도 안식일은 여전히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40년 동안 제자들은 그들의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었다. ~ 52 ~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그보다 더 큰 사건, 곧, 이 세상 역사의 사슬의 마지막 고리인 위엄과 영광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재림으로 빠르게 나아가셨다. 이 두 사건 사이에 긴 흑암의 세기들 즉 그분의 교회를 피와 눈물과 고통으로 특징지은 세기들이 그리스도의 눈앞에 전개되었다.
631 그 당시 제자들은 이 장면들을 바라보고 견딜 수 없었을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짤막한 말씀으로 그 장면을 지나치셨다. 예수께서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을 감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천년 이상 계속될 미증유의 박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를 것이었다. 수백 수천만 명의 예수님의 충실한 증인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만일 당신의 백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길이 펼쳐지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분명한 말로써 우리 주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말씀하며 당신의 재림 전에 세상에 임할 위험을 경고하신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예루살렘의 멸망의 징조 중의 하나로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백성들을 속이며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광야로 나아갔다. 마술사들과 요술사들은 놀랄 만한 능력을 보이며 백성들을 끌고 한적한 산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예언은 또한 말세를 위하여 예언되었다. 이 징조는 재림의 징조로 주신 것이다. 지금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유혹하려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있다.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는 부르짖음을 우리는 듣고 있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희망으로 광야에 나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사람들이 죽은 영혼들과 교제한다고 공언하는 수많은 집회들에서 “보라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고 부르짖는 소리가 지금 들리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강신술이 제시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구주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징조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한 것을 주신다.
그분은 그 징조들 가운데 첫째 징조가 나타날 시간을 정하신다.
632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법왕권의 큰 박해 끝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리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선언하셨다. 그 다음에는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 33)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재림에 관한 징조를 주셨다. 그분이 가까이 문 앞에 이른 때를 우리가 알 수 있다고 그분은 선언하신다. ~ 53 ~
이 징조들을 보는 자들에게 그분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징조들은 나타났다. 이제 우리는 주의 재림이 박두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 예수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큰 영광으로 오신다.
수많은 빛나는 천사들이 그분을 수행할 것이다.
그분은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살아있는 성도들을 변화시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려고 오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킨 자들을 높이고 그들을 당신께로 데려가려고 오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고 당신의 약속도 잊지 않고 계신다.
가족이란 고리가 다시 연결될 것이다.
우리의 죽은 자를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나고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 하”는 부활의 아침에 대하여 생각할 것이다(고전 15:52).
조금 후에 우리는 아름답게 단장한 왕을 볼 것이며 조금 후에 그분은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며 조금 후에 그분은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유 24) 우리를 서게 하실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징조를 주실 때에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날과 시간은 밝히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이 다시 나타나실 날이나 시간은 자신이 알게 할 수 없다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만일 그분이 이것을 자유로 나타내실 수 있었다면 왜 항상 기다리는 태도를 가지도록 그들을 권유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 주께서 나타나실 그 날과 시간을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매우 열심히 그들은 미래의 시간표를 상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633 인자의 재림의 정확한 시간은 하나님의 오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재림하실 때의 세상의 형편을 지적하면서 계속 말씀하신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 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현세적 천년 기를 모든 사람이 내세를 위하여 준비해야 하는 일천 년으로 제시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가 다시 오시는 때에도 그럴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노아의 때의 형편은 어떠하였는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홍수 이전 세상의 주민들은 여호와를 떠나고 그분의 거룩한 뜻을 행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거룩하지 못한 상상과 악한 생각을 따라 행하였다.
그들이 멸망당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으며 오늘날 세상도 같은 길을 따라가고 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천년기적 영광으로 돋보이는 징조들이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 세상을 죄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들의 노름, 경마, 도박, 방탕, 음란한 행위, 억제할 수 없는 정욕들은 이 세상을 신속하게 난폭한 행위로 가득 채우고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다시 성취될 것이다. 그 시대의 차고 넘치던 그와 똑같은 죄악을 현대에서 본다. 복음 전파에 관한 예언도 그와 같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바울의 기록에는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골 1:23) 전파된 바라고 선언하였다.
그와 같이 인자가 오시기 전에 이제 영원한 복음이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 54 ~
(계 14:6, 14) 전파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 하”(행 17:31)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이 언제 이르게 될는지 우리에게 알리신다. 그분은 온 세계가 다 회개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 주의 강림을 촉진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시는 날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 날을 재촉해야 한다(벧후 3:12 상단 참조).
634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께서 명하신 대로 맡겨진 사업을 이루었다면 온 세계는 벌써 경고를 받았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다.
당신의 재림의 징조를 주신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주의하라 깨어 있어 기도하라”(영문 성경 참조)고 말씀하셨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셨다.
저희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기별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중에 믿음을 실천한 자들은 불순종하고 불신하는 자들에게 내린 심판을 면하였다. 노아에게 “너와 네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는 말이 전해졌다.
노아는 순종하여 구원을 얻었다. 롯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 에서 떠나라”는 기별이 임하였다(창 7:1, 19:14). 롯은 자신을 하늘의 사자의 보호에 맡겨 구원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다가오는 멸망의 징조를 바라보고 그 도성을 피한 자들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와 같이 이제 우리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에 임할 멸망에 대한 경고가 주어졌다.
경고에 주의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시간을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7). 주의 오심을 바라는 자들은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게 하며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게 한다. 이것은 그분의 자비의 제안을 거절하는 큰 죄를 그들에게 깨닫게 해 준다.
주를 기다리는 자들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저희 영혼을 순결하게 하고 있다. 깨어 기다리는 한편 열심히 일한다. 주께서 문 앞에 이르신 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을 내어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거룩한 지혜 자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주의 식구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눅 12:42) 신실하고 지혜 있는 종들이다.
그들은 특별히 오늘날 적용되는 진리를 전파하고 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이 각각 저희 시대에 알맞는 진리를 전파한 것처럼 지금 그리스도의 종들은 이 시대에 대한 특별한 경고를 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신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리라.” 악한 종은 마음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말한다.
635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견해를 비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행동과 말로써 또는 마음속으로 주의 오심이 지체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는 주께서 빨리 오시리라는 확신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지게 한다.
그의 영향으로 사람들을 외람되게 하고 부주의하여 지체하도록 한다. ~ 55 ~
그들은 세속적인 취향과 무감각 속에 굳어진다. 세상 정욕과 부패된 사상이 저희 심령을 점령하고 있다.
악한 종이 주객과 같이 먹고 마시며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 세상과 연합하고 있다.
그는 그의 동료 종들을 때리며 저희 주께 충성스러운 자들을 비난하며 정죄한다. 그는 세상과 섞인다.
범죄 하는 일에는 동류끼리 어울린다. 이것은 무서운 융합이다. 그는 세상과 더불어 함정에 빠져 있다.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 하리”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그리스도의 재림은 거짓 교사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들은 “평화와 안전”을 말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의 제사장들과 교사들처럼 그들은 교회가 세속적 번영과 영광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들은 시대의 징조를 이 일의 전조인 것처럼 해석한다. 그러나 영감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 하리”(살전 5:3)라.
온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세상을 그들의 집으로 삼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날은 덫과 같이 임할 것이다. 주의 날은 그들을 노리는 도둑처럼 올 것이다.
방탕함과 불경건한 향락으로 가득 찬 세상은 잠들어 있으며 육적인 안전에 마비되어 있다. 사람들은 주의 오심이 먼 훗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경고를 비웃는다.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벧후 3:4; 사 56:12)고 거만하게 자랑한다. 우리는 향락을 사랑하는 데 더 깊이 빠져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계 16:15)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이 조롱하면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묻는 바로 그 때에 징조는 성취되고 있다. 그들이 “평화와 안전”을 부르짖을 때에 홀연히 멸망이 이른다.
진리를 경멸하고 거절하는 자가 뻔뻔스럽게 될 때에, 여러 가지 영리적 사업에서 원칙을 무시하고 일과를 수행할 때에, 학생이 성경은 연구하지 않고 각 방면의 지식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도적과 같이 임하신다.
636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흥분 상태에 있다. 때의 징조는 불길하다. 다가오는 사건들은 그 앞에 그늘을 드리운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에서 떠나고 있으며 바다와 육지에서 재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태풍, 지진, 화재, 홍수 그리고 온갖 부류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누가 미래를 알 수 있는가? 어느 곳이 안전한가? 인간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것 중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한 깃발 아래로 신속하게 정렬하고 있다. 그들은 들뜬 기분으로 그 지도자들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바라보며 일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첫 대 반역자가 지도하는 대열로 전락(轉落)하고 있다. 피해야할 지옥과 얻어야 할 하늘이 있음을 마음과 심령으로 믿는 사람들은 드물다.
위기는 서서히 우리에게 덮쳐오고 있다. 태양은 하늘에서 비치며 여전히 궤도를 따라 돌며 하늘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심고 짓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다. 상인들은 여전히 사고팔고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밀면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싸운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여전히 극장과 경마장과 도박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최고조의 흥분이 편만해 있는 반면 은혜의 시간은 속히 마쳐지려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영원히 결정되려고 한다.
사단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안다. 사단은 은혜의 때가 끝나고 자비의 문이 영원히 닫힐 때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현혹시키고, 마음을 사로잡아 도취시키려고 그의 모든 대리자들을 일하게 하였다.
다음과 같은 우리 주의 경고의 말씀이 감람산으로부터 수세기를 통하여 엄숙하게 전하여 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 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