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병대 제22대 사령관 해병중장 전도봉(全道奉)장군의 해병대바이블 "지휘관 편지"(指揮官便紙) 중에서 발췌.
해병대 약사(略史) II
청룡부대 (제2해병여단) The 2nd Marine Brigade
1965년 6월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2연대를 기간으로하는 해병 제2여단을 편성하였으며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65년 9월20일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제 2여단 결단식을 거행되고, 65년 10월9일 파월 전투부대로써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65년 12월16일 투아호아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66년 8월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67년 12월22일에는 호아안지역 으로 다시 이동하여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병 제2여단은 한국군 최초 전투부대로 파월된 다음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수많은 대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중 주요작전으로는 Tuy Hoa에서 청룡작전을, Chu Lai지역에서는 Tra Binh Dong 전투를, 그리고 Hoi An 지역에서는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역내에서 암약,출몰하는 적을 섬멸하여 Quang Nam 성 지역들을 평정하였다.
파 월 : 1965. 9. 20 경북 포항에서 출범, 1965. 10. 3 한국을 떠나 1965. 10. 9 캄란에 상륙. 1967. 12. 12부터는 호이안에 주둔. 사 령 관 : 이봉출 여단장의 뒤를 이어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 준장 참전기간 : 1965. 10. 9 - 1972. 2. 24 참전군인 : 37,340명 (장교 2,166명, 사병 35,174명) 희 생 : 전사 1,202명 (장교 42명, 사병 1,160명) 부상 2,904명 (장교 99명, 사병 2,805명) 전 투 : 151,522회 (대부대 전투 175회, 소부대 전투 151,347회)
청룡부대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써 "귀신잡는 해병"의 맹위를 베트남에서 보여 주었다. 1967년 2월14일 밤부터 15일까지 사투를 벌인 짜빈동 전투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화중에 신화로써 한국 해병 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따이한로라고 불리는 다낭에서 호이안간의 도로건설과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실시하여 한월간 친선을 도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 청룡부대의 월남참전배경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월남에 지원부대를 보낸 것은 1964년 9월에 파견한 바 있는 1개 의무중대 장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이었다. 월남은 1962년 고.딘.디엠 정권이 붕괴된 이래 정치적,군사적으로 혼돈상태에서 헤매고 있었으며, 그들 자체의 힘만으로는 재건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동남아에서의 월남 정책은 전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심각한 군사문제로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고, 미국의 존슨 정부는 마침내 강격책으로서 월남을 돕게 되었다.
1965년 1월 2일 월남 정부는 외무부 장관 명의로 한국의 외무부장관에게 공식서한을 보내 자체 경비 수단을 갖춘 비전투부대로서 공병대와 수송대를 요청해 왔다. 정부는 즉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제 37회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절대 다수로 가결, 2천명으로 구성된 후방건설 지원부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 비둘기 건설 지원부대는 육군병력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중 해병공병 1개중대가 포함되었는데 해병대로서는 이것이 처음으로 월남에 파견된 것이다. 그후 베트콩과 월남군간의 전투는 점차 치열한 전쟁으로 확대되어갔고, 미국 또한 전쟁 속에 깊이 휘말려 들게 되자 마침내 자유우방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해 왔다.
국군중에서도 해병대는 그 특성이 제반 지상전투 훈련은 물론이려니와 상륙작전의 광범위한 수행 능력을 갖추고 비정규전 및 대 비정규전의 특수훈련으로 국내외 어느 곳이든지 최단시간내에 출동할 수 있는 국가전략기동부대의 성격으로 보아 국군이 외국에 파병 될시 선봉이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에, 해병대 사령관은 1965년 5월 12일을 기해 해병대정책연구위원회에 명하여 파월에 필요로 하는 부대 편성연구를 지시 하였고, 6월4일에는 해병대 <작전명령 제1호>로서 파월부대 파견준비를 실질적으로 서둘렀다.
해병대정책연구위원회에서 작성한 파월부대 편성안 A,B,C안을 재삼 검토한 해병대사령관은 제1상륙사단장에게 1개 상륙여단 편성을 골자로 한 부대 편성과 선발대 구성,파월부대 특별교육 등을 즉각 실시토록 지시, 사단에서는 이미 계획되어 실시되던 년간 교육훈련 계획을 변경, 월남전에서 필요한 특별교육훈련을 즉각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1965년 6월 1일 월남 정부의 구엔카오 키 수상은 정식으로 한국정부에 전투부대 파견을 요청했고, 정부는 동년 7월 2일 국무회의에서 국군 1개사단과 이에 따르는 지원부대를 월남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정부는 제32회 임시국회에 국군 1개사단을 월남에 파견하는데 따른 동의를 요청, 마침내 8월 1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월남전에 파병을 결정지었다. 국방부에서는 지령 제10호로서 월남 파병에 대한 준비를 각군에 지시 하였다.
해병대는 이 준비지시에 의거, 1965년 8월 17일 01시를 기하여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한 제1상륙사단 11연대에서 1개 포병과 공병대대에서 1개 공병소대, 근무대대에서 1개 근무중대, 의무대대에서 1개 치료및 수용중대, 본부대대에서 1개 헌병소대와 수색소대를 제2해병연대에 배속시킴으로서 파월"해병전투단" 편성을 마쳤다.
한편 국군 전투부대 파월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월남 현지의 실정을 파악하고 월남군 및 미군과의 제반 협조 사항을 조사 보고하기 위해 조사단(해병대에서는 김연상장군이 파견됨)을 현지에 파견하였다. 육군과의 병력으로 보아 해병대는 1개대대나 연대 규모로 참가할 것이 예상되었으나 현지 실정으로는 육군과 해병대는 분리되어 작전을 수행함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보고에 의해 해병대는 준장를 지휘관으로 하는 여단급이 참가하게 되어 그 편성을 서둘렀다. 따라서 1965년 9월 20일, 그동안 파월 특수교육훈련을 해 온 제2해병연대를 기간으로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이어 8월 28일 국방부로부터 파월 해병전투단은 해병대에서 준장으로 임명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8월 30일에는 해병대사령관 및 국방부장관 추천에 의거 정부 발령으로 당시 해병대사령부 관리국장인 이봉출 준장이 해병 제2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초대 참모장에는 2연대장 정태석 대령이 취임하게 되었다. 제2해병연대는 사단의 기간연대로서 사단의 상륙작전을 비롯한 각종 지상훈련을 실시해 오던 중 파월이 확정되자, 그간의 모든 교육훈련을 바꾸고, 출동 준비아래 특수훈련에 돌입하게 되었다. 파월 부대원들의 특수교육을 위해 특수교육대를 편성하기에 이르렀고, 이교육대에서는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의 기본 전술과 각종 동굴, 지하 진지 및 지하 벙커, 지뢰 및 부비트랩 제거와 설치법 등에 관해 주야간 없이 교육훈련이 실시되었다.
중화력과, 전투지원부대가 거의 전무했던 해병여단에 육군 지원부대인 야전공병중대 및 155미리 포병중대 요원 297명이 8월 21일자로 배속되어 7월 3일 포항 현지 훈련장에 도착, 파월 해병부대와 함께 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영일만 일대의 산악은 수개월간 해병여단과, 육군지원단전우들로 구성된 청룡부대의 실전을 방불케하는 포성으로 초연이 자욱했다.
9월 18일, "해병전투단"의 정식명칭이 박정희 대통령에의해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로 개칭되는 동시에 여단장에 이봉출 장군이 임명되었고, 9월 20일 10시, 포항 해병훈련기지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 주한외교사절등 내외귀빈의 참석하에 "대한민국제2해병여단" 발대식을 거행하였다.
청룡부대의 모체가 된 제2연대는 1953년 8월 15일 해병도서부대를 기간으로 진해에서 창설되었다. 제2연대는 6.25동란중에는 동서 양안에서 교동도,백령도,석도, 원산만봉쇄작전, 양도상륙작전등에서 다대한 전과를 올렸으며 휴전으로 인해 진해로 철수 제 2연대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제2연대는 창설이후 제1전투단 병력을 기간으로 해병여단이 편성되자 여단의 건제부대로 편입되었고, 동년 12월에 체결된 해.공군을 증강하기 위해 한.미 군사협정에 의거 1955년 1월 1일 여단이 정식사단으로 승인되자 해병제1상륙사단의 건제부대로서 서부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1959년 3월 28일에는 포항으로 이동하여 주한 미해군사령관 작전 지휘아래 주한 유엔군의 전략기동예비대로서 임무를 수행하였고, 1960년과 1963년의 2차에 걸쳐 해병 제1임시여단의 예하부대로서 김포반도와 강화도, 교동도를 연한 서부전선 방어를 담당했다.
그후 부대교대로 다시 포항지구로 이동하여 제1상륙사단의 주력부대로서, 국가기동예비대로서 출전준비에 정진하던중 1965년 6월 4일 파월에 대비한 작전준비명령 제1호에 의거 파월부대로 지정되어 3개월 간의 피땀어린 교육훈련을 마치고, 청룡부대로 명명되어 그 결단식을 거행한 것이다. 청룡부대는 월남전 종전후 개선 귀국하여 서부전선과 수도권 방어 임무를 인수하여 1980년대 초반 "염하계획"을 거쳐 완비된 상륙사단으로 증편, 대한민국 제2해병상륙사단"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전의 전우들!
"한국군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 특히 "맹호"를 만나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하여 병력과 장비등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라! (호지명)
맹호부대 (수도사단) The Capital Division (Tiger)
수도사단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14일과 6월26일 2차에 걸친 월남공화국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65년 8월13일 제 52회 임시국회 제 11차 본회의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4주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 1965년10월 22일 맹호부대가 최초로 월남 퀴논에 상륙하였다. 맹호사단은 1965년 11월15일부로 미101공수여단 및 미해병 7연대로부터 1,200평방km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고 거점을 확보하였다. 1965년 10월29일 풍손부락에서 최초로 서전을 장식한 이래 중대수색작전, 대대규모 및 연대규모의 작전을 실시하던중1966. 3. 23 ~ 3. 26일간에 "고보이" 지역에서 1연대와 기갑 연대를 투입,최초의 사단규모작전인 맹호5호작전을 실시하였다. 맹호 5호작전이 끝나자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배하여 오던 베트콩을 소탕하고사단전술 책임지역을 1,400평방 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맹호의 용맹을 알린 9중대의 "둑코전투"
맹호9중대는 캄보디아 국경부근인 둑코지구에서 8월 9일 야간에 증강된 월맹군 1개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6시간의 격전끝에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격퇴시켜 대승하였으며 전술적인 면에서 중대 전술기지 개념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맹호9중대의 중대방어전투 역시 한국군의 우수성과, 미국군이 비웃던 한국군 중대전술작전의 우수성을 증명한 대승이었다.) 세계전사에 새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 전술기지 운용개념을 확고히 입증한 "둑코전투" 승리는 이후 청룡부대의 "짜빈동대첩" 이 있기까지 월남전사상 최고의 대승으로서 한국군의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월남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우방의 각나라 군부대 전술,전략 전문가와 지휘관들이 한국육군 맹호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중대단위 전술기지 운용과 대민사업 활동사항 등을 답습해 가서 교훈을 삼아「무서운 한국군」이란 대명사가 되었고 밀림(정글)의 왕자로서 맹호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월남 중동부 해안 Qui Nhon 에 위치한 수도사단 맹호부대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핵심부대로서 이곳에 침투하고 있는 월맹군 제 18연대를 중심으로한 지방 VC부대들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간 많은 작전중 둑코(Duc Co) 전투, 맹호 6 호 작전, 오작교 작전, 맹호 12 호 작전, 혜산진 9호 작전, 비호 23호 작전, 창군기념작전, 월계작전, An Khe Pass 작전등은 맹호 부대가 남긴 혁혁한 작전으로 상승 한국군의 기백을 널리 과시한 것이다.
맹호파월일지
파 월 : 1965. 10.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월남 퀴논에 상륙 참전기간 : 1965. 10. 22 - 1973. 3. 7 참전군인 : 114,902명 (장교 7,652명, 사병 107,340명) 희 생 : 전사 2,111명 (장교 186명, 사병 1,925명) 부상 4,474명(장교 246명, 사병 4,228명) 전 투 : 175,107회 (대부대 전투 521회,소부대전투 14,586회) 대민사업 : 퀴논 지역에 문화센터, 학교건물,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는 등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벌였으며, 1972. 4. 18부터 5. 15까지 약 한달동안 파월 한국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안케패스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79년 12.12사태때, 진압군측 최고지휘관 이건영3군사령관의 육사동기생인 최영구중장 예하사단으로서, 신 군부의 반란진압을 위해 수도서울로 출동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중, 지휘부가 무력화되며 진압출동이 와해되었다. 명실공히 한국육군을 대표하는 최정예부대인 맹호와, 백마의 12.12 군사반란 당시의 행적을 통해 "좋은지휘관이 좋은부대를 만든다" 는 말을 새삼 느끼게한다.
현재 맹호부대는 대한민국 육군의 가장 강력한 정예부대로서 국민들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있는 최강의 "기계화부대"이다. 만일 남북간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인민군의 최우선적 관심과 공격목표는 "맹호"일 것이 틀림없고, 우리의 맹호는 반드시 한 입에 적의 목줄기를 물어뜯어 "조국통일"의 선봉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대체 한국군은 어찌이리 용맹한가? 백마의 병사들은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단말인가?, 나는 이것을 단순한 "군인정신"이라 인정할 수 없다! (호지명)
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The 9th Division (White horse)
보병 제9사단(백마)사단은 1950년 10월25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에 의거, 서울에서 창설, 예하부대로서는 제 28연대가 대전, 제29연대가 공주, 제30연대가 청주에서 각각 창설 되었으며, 이듬 해 1월 포병사령부가 광주에서 편성되었다. (백마부대는 6.25동란이 한창이던 해에, 역사적으로 충과, 효의 본고장인 충청도 공주와, 청주에서 병력을 충원하여 만들어진 충성의 부대이다. 그러한 유서깊은 부대이니 편성된지 1개월도 못 되어 승승장구하며 역사에 빛나는 한국육군의 위대한 전사들을 쓰기시작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백마사단은 편성 1개월도 못된 1950년 11월23일부터 경북지구(영주, 김천, 문경)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고, 1951년 1월25일 연합군의 제2차 총 반격시는 제1군단 예하부대로서 북괴군 제10사단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여 적 사살 5,549명, 화기 노획 1,622정의 대전과를 올렸으며, 그후 철원지구 반격작전, 금화지구 방어작전, 사두봉 전투를 거쳐 한국전사에 빛나는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정예부대인 제38군의 12차에 걸친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피아 공방전 끝에 적병 8,234명을 사살하고 백마고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휴전이 되기까지 8개월동안 중부 및 중,동부 전선에서 삼각고지, 금화 저격능선등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휴전 이후 금화, 포천, 인제, 화천, 양평, 양주등지에서 부대정비와 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투력을 배양하여 오던중 1966년 6월 1일 국방부 지령 제3호에 의거, 제2차 파월 전투사단으로 지명됨으로써 자유십자군의 일원으로 해외에 파병하게 되었다.
1966년 8월27일 중앙청 광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는 사단장 이소동 소장의 지휘하에 1966년 9월16일 부산 3부두를 통해 출진,1966년 9월22일 월남 나트랑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에 주둔했다. 백마사단은 월남 중동부 해안지력의 1번 도로와 해안을 따라 길이270Km, 폭 50Km에 달하는 책임전술(TAOR)지역을 확보하고,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도시와 항만에 있는 군사시설을 보호 해 왔으며 또한 전술지역 내외의 침투하고 있는 적을 격멸하여 왔다. 초대 이소동 사단장의 뒤를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를 맡았다.
파월기간중 478회 대부대 전투와 211.236회의 소부대 전투를 실시하여 총211,714회의 전투를 치루었다. 전투중에도 대민농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건설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대민사업을 지원했으며 1967년 1월29일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작전을 비롯하여 1967년 3월8일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 개통의 오작교 작전과 1967년 7월9일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 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 작전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파 월 : 1966. 9.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 9. 22 월남 나트랑에 상륙, 닌호아에 주둔. 사 령 관 : 초대 이소동소장에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 참전기간 : 1966. 9. 22 - 1973. 3. 11 참전군인 : 100,336명 (장교 6,445명, 사병 98,891명)이 참전 희 생 : 전사 1,328명 (장교 78명, 사병 1,250명) 부상 2,410명 (장교 160명, 사병 2,250명) 전 투 : 211, 714회 (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 1967. 1. 29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 3. 8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 7. 9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 1번도로 주변을 장악하여 국토의 대동맥을 연결하는 "오작교작전"은 이제까지 월남군과 연합군이 공격기도조차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었으나 1967. 3. 8부터 맹호부대와 백마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월맹군과, 베트콩을 단박에 쓸어버리고 자유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투외에 대민사업으로 대민농사지원,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상승백마, 무적백마의 위대한 전통과 명예를 1979년 노태우소장이 반란군으로 부대를 동원하여 그 이름을 더럽혔다. 백마의 후예들에게는 비록, 부대장이라고는 하나, 반란의 수괴였던 노태우소장을 즉결처단하고 헌정질서를 수호하지 못한 빛을 국민에게 지고있는 것이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충절과 효의 고장 충청도 공주에서 발족한 백마부대가 6.25동란과, 월남전에서 쌓은 그 혁혁한 무공을 더럽히고 반란군의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충청인과, 특히 공주시민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기도하다. 애초에 부대의 상징을 공주에는 별로 있지도 않은 "백마"로 ?ㅗ? 것 부터가 문제가 아니었는가 한다. 공주에서 창설된 정예사단 답게, 공주의 상징인 "곰"을 상징으로 "웅진부대"라 부대명을 바꾸고 새출발하여 "한국육군의 최강부대"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백구부대 (해군 수송전대) "바다의 제왕" The Naval Transport Group
주월 한국군 파월초기부터 해상수송 임무를 맡은 해군의 활약은 지상군들의 눈부신 전과를 올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이공에서 다낭까지 800마일 해상항로를 따라 탄약과 중장비 등의 해상수송임무와 의료및 대민지원사업 및 민사심리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1965년 3월4일 한국함대로부터 LST 1척 812함이 파월되어 비둘기 부대에 편입된 후 해상수송임무를 개시하였다. 1966년 3월15일 LST 2척,LSM 2척을 증파하면서 해군 수송전대 백구부대로 개칭하고, 비둘기부대에서 배속 해제됨과 동시에 주월한국군 사령부 직할대로 승격되어 해상 수송임무를 수행하였다. 1969년 8월29일 월남 해군본부로부터 쿠롱(CUULONG)기지로 이동하였다.
은마부대 (공군 지원단)- "하늘의 보라매" The Aerial support Group
1967년 7월 1일 탄손누트 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은마부대는 4대의 C54기를 주축으로 월남전에서 공중수송의 지원활동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결단식를 가졌다.
창설경위 : 주월한국군사령부 공군지원단은 자유세계 안전과 보호를 위한 자유우방군의 일원으로 월남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주월한국군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6년 6월1일 야전사령부에 전술 항공지원대를 설치하여 수행하던중 전술 항공지원 업무와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 담당하던 항공수송 지원업무를 1967년 7월1일 C-46 미 항공기 파월을 계기로 보다 효율적인 작전지원과 부대운영을 위하여 분산되어있는 모든 기능을 통합운영코져 공군지원단이 창설되었다.
비둘기부대 (건설 지원단) The Construction Support Group
한국군 부대로써는 최초로 파월된 비둘기부대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의료진과 건설 공병으로 구성된 평화의 사도 부대이다. 건설 지원단은 국방부 명령(육)제2호에 의거 서울에서 장교 16명, 사병8명으로 파월 편성을 위한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였으며 (초대단장 조문환 준장) 예하 부대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이동 경비대대, 제8이송중대, 해병 제1독립 공병 중대를 핵심으로 부대편성을 하였다.
1965년 2월5일 보병 제6사단 지역인 경기도 현리에서 국방부 장관 임석하에 주월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게 되었으며, 2월13일 파월 제1진으로 선발대가 출발하여 2월 24일에 월남 사이공 도착하고, 3월 16일에는 전부대가 숙영지 도착과 동시에 불명확한 적정과 지형조건하에 자체 능력으로 경계 및 수색활동을 전개하면서 도로 및 교량보수에 착수 하였으며, 파월이래 처음으로 베트콩의 기습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파월 초창기의 여려운 환경속에서 건설 지원단은 도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학교, 진료소 공사와 태권도 지도 및 심리전 활동등 한국군의 개척자로써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공부할 교실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아담한 교실을 지어 주었다. 전쟁의 초연 속에 맥풀린 어린 동심에 꿈을 심어 주었고, 한국군을 바라보는 현지인들로 하여금 비둘기들이 월남에 날아온 이후 면목이 일신되었다. 비좁은 시골 길이 대로로 바뀌어 훤히 트이고 먼지 투성이 도로가 다듬어지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졌다.
비둘기부대의 노고에 따뜻한 월남 사람들의 인정어린 보답이 뒤따랐다. 비둘기부대 병영 앞에 '디안'의 마을 사람들이 정장한 수녀들을 앞세우고 정문 가까이 다가오는 시위가 있어 한때 긴장하였으나, 이것이 바로 비둘기부대 장병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선의의 시위였던 것이다. 또한 펀펀한 황무지에서 소를 모는 목녀가 그들 허리에 찬 소중한 물통을 한국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광경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름 아닌 인정의 교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깜은 꼬', 깜은 비둘기 '비둘기 고마워요'라는 이 월남말은 한국의 장병들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월남인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비둘기의 주변에도 평화로운 풍경만이 전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베트콩'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철저한 경비태세로 전투능력을 강화하고 부대 둘레에 철조망과 지뢰지대를 구축하여 5중방위선을 펴고 요새화된 자체경비로 장병들의 안전도를 높이는 가운데 임무에 임했다.
십자성부대 (제100군수 사령부) The 100th Logistic Command
최초 파월 전투부대인 맹호사단과 청룡부대가 파월됨에 따라 이들 전투부대에 대한 효과적인 군수지원을 위하여 국본 일반명령(육) 제31호에 의거, 1965년 9월1일부로 강원도 흥천에서 수도사단 예하부대로서 군수지원사령부를 창설하고 초대 사령관에 이범준 준장이 부임하였다. 파월이후 백마사단을 비롯한 추가부대가 증파됨에 따라 국본 일반명령(육)제22호에 의거, 1966년 6월1일부로 군수지원 사령부를 100군수사령부로 개편, 수도사단으로부터 예속해제, 육군본부에 예속과 동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배속하게 되었다.
임무와 기능
1. 주월 한국군에 대한 군수 및 행정 지원 2. 평정 및 개발사업의 적극적 지원 3. 전술 책임지역에 대한 자체방어 4. 보급품의 획득 및 저장분배 5. 3~4단계 정비 지원 6. 입원 및 후송 7. 인쇄 및 영현 업무 8. 대민 지원
십자성부대의 의료활동
파 월 : 1965. 10. 12 여의도 광장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출범 1965. 10. 16 부산항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퀴논에 상륙, 맹호부대 사령부와 같이 퀴논 인접지역에 주둔. 출국 당시에는 군수지원 사령부였으나 1966. 6. 1 퀴논에서 부대명칭을 100군수 사령부로 개정. 1966. 8. 20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 사 령 관 : 초대 이범준 사령관에 이어 유학성, 이영일, 이창복, 김종달, 신유정 준장이 사령관을 맡아 부대를 지휘했다.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23 참전군인과 희생 : 전사 213명(장교 26명, 사병 187명) 부상 439명(장교 27명, 사병 412명) 전 투 : 106,665대의 차량수송과 396,019명의 병력수송 및 233,669동의 군수등 수송작전을 치루었다. 군수업무를 수행하면서 민사 심리전으로 베트공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환자 진료와 구호품을 전달하여, 전쟁의 적은 있어도 인류의 적은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평소에 십자성 사령부를 위협하던 지역내 혼톰산 일대에 1969. 3.1~ 3.11일간에 걸쳐 십자성 3호 작전(일명 올개미 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116공병대대, 237수송대대, 경비중대로서 적 사살 : 4명, 포로:1명, 용의자:6명, 소화기:5정, 문서:8점, 취사기구등 150여점을 노획했다. 대민사업 : 사찰, 교회, 교량, 유치원 등을 설치해 주고 농사짓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한국의 혼을 심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한국군이 빛나는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적기 적소에 군수 지원을 원활히 수행한 지대한 공로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파월 한국군 부대의 동맥과 젖줄로 그 소임을 다해 온 십자성 부대는 월남참전 한국군전체의 어머니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동외과병원 Medical support 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
한국 육군 제1이동외과병원은 '사이공'에서 멀지않은 해안 가까운 '봉타우'라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군으로써는최초로 월남에 온 이 인술부대는 그동안 온갖 정성과 기술을 발휘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전란속에서 시달려 보건 따위를 돌볼 겨를도 없는 월남 사람들의 건강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온 이들에겐 이제 '따이한박시' 라는 호칭과 더불어 봉타우'에 없어서는 아니될 일급 유지의 서열에 오르게 되었다.
전투에 다친 월남군인을 위시하여 민간인들의 질병을 퇴치해 주는가 하면 우리한국군 의무관들은 적인 '베트콩'의 목숨까지도 구해주는 박애의 정신을 발휘했다. 주둔기간동안의 실적을 보면 비전투원인 지역시민들의 수 만도 5천 3백여명을 훨씬 넘게 치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적은 육체적인 질병의 퇴치와 생명의 구조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월남땅에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감명을 씨뿌린 크나 큰 성과라고 하겠다.
'따이한 박시'들은 의술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만 의술을 베풀었던 것은 아니다. '사이공'의 명의들을 두루 찾아가서도 고칠 수 없었던 병을 고쳐 주기도 하여 '따이한 박시'의 인기는 높아가기만 했다. '봉타우'의 세관장 '챵 곡 환'씨는 자기 장모의 병을 고쳐준 한국의 '박시'들을 위해 절에서 중까지 데려다 '따이한 박시'의 기적에 감사하는 사은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봉타우'에 있는 한국 장교들에게는 언제나 문호를 개방하는 친절을 베풀어 밥도 지어주고 고향의 막을 느낄 수 있도록 김치며 깎두기등을 담가 주는등, 한국 장교들은 고향이 그립거나 김치 생각이 나면, 김치 집 또는 깍두기 집이라고 불리우는 '챵씨'집을 허물없이 드나들게 되었다. 때로는 '챵씨'의 아이들에게 줄 과자봉지를 들고가서 아이들의 재롱도 보고 고향에 있는 아들 딸을 대하는 마음으로 목마를 태워주기도 하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총을맞아 입원중인 월남군의 한 해병소위는 한국에서 받아 주기만 한다면 귀화하여 살고싶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할만큼 한국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게하는 대민지원부대로서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수십명의 월남해병들이 피를 쏟으며 '봉타우'의 한국군 이동 외과병원에 운반되었을 때 수혈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으나 이러한 광경을 본 월남사람들 누구 하나 팔을 걷고 자기 피를 뽑아 달라고 자청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서슴치 않고 자신들의 몸에 주사기를 박아 그들의 몸에 수혈해가며 수술을 하는등 이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모처럼 휴일을 맞아 맥주로 피로를 달래던 군의관들은 응급환자의 입원 소식을 들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자를 돌보려고 달려가는등, 이러한 장면을 목격하는 '봉타우'의 시민들은 국경없는 그들의 인술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군인들이 거리로 나오면 '박시''박시'하면서 손짓으로 반기는 모습은 부대주둔지인 '봉타우'에서는 낯익은 풍속이 되고 말았다.
어느 월남의 어머니는 딸 여덟에 아들 하나인 독자의 생명을 구해준 한국 군의관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마치 종교적 신앙같이 엄숙하기까지도 했다. 또 언청이를 수술받아 나았다는 소문이 월남 전체에 퍼져 언청이 처녀들의 환성이 울려 퍼지는가 하면 턱이 없는 사람에게 가슴 살을 떼내어 턱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 어머니가 요술을 보는 듯 주문을 외이는 등 '따이한 박시'들의 의술의 혜택을 받은 월남인들의 반응은 여러가지 흐뭇한 정경을 자아내어 감동을 주었다한다.
이동외과 병원장 이형수대령은 인구 3만을 헤아리는 휴양 도시 '봉타우'의 당당한 A급 유지로 등장되어 크고 작은 모든 행사에는 억지로 상좌에 앉혀지게 되는등 소학교 졸업식에 참석해서는 축사를 해야했고 결혼식장에서는 주례를 서야했으며 심지어는 카페의 중년 마담이 결혼하는데 주빈으로 초대받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고한다.
그러니 별을 몇개씩이나 단 미군 장성도 한국군 병원장의 권위를 따르지 못했다는 특색은 바로 '봉타우'에서 구축한 이동외과병원 의사들의 명예와 신뢰의 의 상징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더욱이 관청등에서 마련라는 행사 때에 병원장이 나타나면 군악을 울리면서 환영과 경의를 나타낼 정도였으며, 병원장이 끼지않는 모든 행사는 싱겁다는 평까지 받았다고한다.
'봉타우'의 빠나식당에서는 '따이한 박시'에 한해서만은 외상술도 '오케이'를 내세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월남인 상점에서는 '어서 오십시오'라는 한글 간판도 볼 수 있어 한국군인들의 눈을 끌기도 했다. 이 '봉타우'는 월남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관광도시이며 또 '봉타우'에는 교포가 경영하는 '아리랑 하우스'를 비롯하여 '코리아의 집', '충청도의 집'등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김치 깎두기와 된장국도 팔고 있으므로 한국 장병들의 식탁을 푸짐하게 만들고는 했다.
'봉타우'에서의 군의관들의 활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장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베트콩'에게 세금을 바치고 사는 농민도 적지 않다는 월남의 땅에서 칼대신 인술을 가지고 대민 사업을 성과있게 달성하여 월남인들의 짐심에서 우러나오는 대우를 받게 된 이면에는 우리 장병들의 수많은 고생이 거름이 되었으며, 부대 자체방위에도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중의 효과를 보게 된 것dlek.
월남출병
"프랑스가 씨를 뿌린 이래, 미국과 호주등 십여년간 월남에서 죽어간 연합군의 전과만을 나열하다보면 그것은 "한국군의 전쟁"이라는 자연스럽고 놀라운 귀결로 안착된다" (워싱턴 포스트)
"대체 한국군의 용맹과 우수성을 알리는데 일조한 것 이외에, 우리 미군이 월남에서 기여하고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뉴욕 타임스)
"12년간 수백만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수천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월남군, 미군에게마저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 공산군의 요새를 한국해병대가 단 두시간만에 점령했다, 대체 우리연합군에게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르몽드)
남국의 야자수와, 상아빛 해변, 아오자이의 남국미인을 기대하며 해병들은 앞을 다투어 월남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기대와 달리 월남에 상륙한 한국해병대가 야자수해변을 뒤로하고 부대를 정비하며, 주둔지로 이동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을때 해병대 최초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후방과 전방이 따로 없었던 밀림의 정글전, 월남에서의 첫 해병대원 전사자는 "머리에 정조준 저격"을 당한 어느 분대장이었다. 월남상륙 3일만에 청룡해병전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군 LST에 실려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싸늘한 주검에는 목숨값으로 단돈 3달러가 놓여져있었고, 해병들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스물두해의 젊은 목숨 값이 단돈 3달러란 말인가? 피부색만 다를뿐, 같은 전장에서 함께 싸우는 한국군의 목숨 값이 어찌 미군의 100분지 1에 불과하단 말인가? 가난한 나라의 병사들은 피로서 가난의 댓가를 치룰 수 밖에 없음을 해병들은 뼈저리게 실감했던 것이다.
"한국해병대, 바다를 넘다"
부대를 정비하고, 전투준비를 완료한 청룡부대는 11월 4일 최초의 공격작전을 감행한다. 목표는 "까두산요새" 월맹군 최고정예부대와 베트콩 혼성부대가 방어하고 있으며, 십여년동안 월남군과 프랑스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았고 수천명의 전사자를 낸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공군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어마어마한 물량공격을 감행했던 미군조차도 손을들고 물러났던 공산월맹의 자존심이자 보루였던 "까두산요새" 파월한국군 장병들의 처우문제를 미국과 협의하고있던 한국군대표단에게 주월 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전투력에 대하여 노골적인 의문을 감추지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청룡부대가 미군들의 무덤과도 같았던 "까두산요새"를 공격하겠다고 나서자 월남에서 잔뼈가 굵은 미군지휘관들은 코웃음을 쳤다.
"신참들이 치룰 댓가를 뻔히 알면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우군으로서 매우 미안한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은 많은 것 을 배울 것이다."
"총원 돌격앞으로!"
청룡의 낡아빠진 PRC-10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직직거리는 "한국어 공격명령"은 미군의 고성능 PRC-25-47을 통해 주월 미군사령부에도 중계되고 있었다. 두시간 후, 그 낡아빠진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한국해병의 보고는 단 세마디였다.
"목표제압완료, 아군피해 무, 생포한 적 압송중"
"이제 한국해병대의 새로운 신화가 시작된다"
짜빈동 전투 (Battle at Tra binh dong) "그 위대한 승전보"
짜빈동 작전(1967.2.14. 23:20 ~ 1967.2.15. 07:24)은 해병여단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1967.2.14. 23:20분 손틴군 짜빈동에서 월맹정규군 제2사단 1연대와 21연대 및 지방 게릴라 1개대대의 인해전술로 파상적 기습공격을 받아, 제11중대 장병들이 중대전술지에 구축한 외곽과 내곽방어선으로 연하는 쿄통호를 이용하여 일제 사격과 수류탄 및 크레모아등으로 침입하는 적을 격퇴한 전투이다. 한때 적의 완강한 공격으로 제3소대의 진지가 돌파되어 치열한 진 내 육박전까지 전개하였지만, 지원화기의 적절한 운영, 역습부대의 과감한 공격, 아군진지에 대한 "진내포격"으로 4시간의 사투 끝에 적의 주력을 격멸하고 전술기지를 방어하였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지향한 "중대전술기지운용"의 우수성과 효율성을 증명한 "짜빈동전투"는 월남군및, 미군의 전술, 전략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어 실전에 적용되었고, 미군은 "청룡방어전술"이란 고유전술로 육군과 해병대의 야전교범에 수록하여 사관학교및 각종과정에서 정식교재화하였다.
이 전투결과 해병대 청룡부대는 국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룡부대 제11중대는 1967.2.15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제11중대 전원 191명(장교제외)은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대한민국 군인의 최고 명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1968.5.28 제11중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과, 부대원이 "은성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한국군전사편찬위원회 공식기록인용, 편집)
주월한국군사령부에 파견된 특사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진 보고서. (편집)
"작전명: 짜빈둥 기습방어전"
존경하옵는 대통령각하! 본관은 대한민국국군 주월사령관으로부터, 우리국군의 용맹한 전과를 보고받아 각하께 올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본 전투는 구랍 2월 14일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가 1개중대의 방어 병력으로 1개 연대의 공산군 기습부대를 격퇴시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전투로서, 지금까지의 월남전 사상 가장 빛나는 승전기록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전투라 사료됩니다. (중략)
당시 제3해병대대 11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짜빈둥 (광나이성 손틴군.추라이지구)진지는 남북간 약 300미터, 동서간 약 200미터 가량 되는 나직한 야산에 구축해 놓은 4주 防禦陣地 입니다. 교통호로 연결시켜 놓은 각 진지 외곽에는 조명 지뢰군과, 단선 철조망을 매설하거나 가설하고, 그 안쪽에는 개인지뢰, 그리고 그 안쪽에는 5중으로 된 원형철조망을 가설해 놓은 견고한 진지였습니다. 청룡부대에서 이처럼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까닭은 1967년 초 추라이지구로 침투한 월맹군 제2사단이 해병여단 본부와 포병대대 및 추라이의 美海兵隊 비행장을 차례로 공격하여 추라이 지구에서의 전세 역전을 획책하고 있었고, 짜빈둥이 그 관문지대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해병여단본부에서는 짜빈둥 진지에 제1해병대대 1중대에서 차출한 1개 소대(3소대)를 배속시켜 병력보강을 도모하는 한편 105 밀리 야포 1문을 11중대에 배치하는 등 가능한 조치를 사전에 강구했던 것 입니다. (중략)
짜빈둥 진지가 일제히 돌격해온 적 주공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은 시각은 2월 15일 새벽 4시 10 분경 이었고, 공격에 투입이 된 적 병력은 증강된 1개 연대로 추산됩니다. 60밀리 박격포와 82밀리,120밀리 및 4.2인치 重박격포의 支援 하에 새벽녘의 허를 찌른 적 공격부대는 2개대대를 주공방향인 3소대 정면에 투입하고 1개 대대의 조공부대를 2소대 정면에 투입했는데, 그 3소대쪽 접근로 상에는 관목이 빽빽이 우거진 암석지대가 있었습니다. 공산군의 지원포격이 개시되자 우리중대원들은 반사적인 대응으로 단 한문이 배치되어있던 105밀리 야포를 활용, 포탄을 적의 예상 접근로에 강타하여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하는 한편 진지 전방의 장애물지대에 VT.탄을 때리기 시작했고, 적 포탄이 진지 후방으로 연신 되며 적이 돌격전을 감행할 시기에는 진지 전방의 장애물지대 상공에 무수한 조명탄을 밝히는 가운데 중대의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공격력에 타격을 가했습니다.
적이 돌격을 감행해오자 3소대 대원들은 어둠을 밝혀주는 조명탄 불빛아래 필사적인 최후 저지사격을 가했으나 4시 40분 경에 이르러 3소대 진지에는 두 군데나 구멍이 뚫려 그 구멍으로 적병들이 물밀 듯이 난입하는 바람에 1분대 진지와 화기반 진지에서는 처절한 육박전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소대 1분대장 "배장춘하사"는 다급했던 나머지 중대장에게 보고를 마치기도 전에 들고 있던 무전기를 버리고 교통호 위에 놓인 야전삽과 곡괭이를 집어 들고 좌충우돌, 2-3명의 적병들을 때려 누이다가 그도 역시 어깨와,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 유혈이 난자 한 상태에서 2소대 쪽으로 후송을 당했고, 분대장을 대신해 "진지를 사수하라!!!"고 외치고 있던 1조장 "이학현상병"은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몸으로도 난입해 오는 적에게 실탄을 퍼붓다가 수명의 적이 약 20미터 전방의 오물통(똥통)속으로 뛰어들자 질풍같이 달려가 그 오물통 속에 빠진 적병들을 수류탄으로 폭사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급히 교통호로 돌아온 그는 분대장 "배장춘하사" 쪽으로 수명의 적병들이 접근해 가자 수류탄으로 그들을 처치하며 분대장의 위기를 구했으나 오른쪽 발목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도성룡일병"도 전사를 했고, 다른 일각에서 버티고 있던 "조정남상병"과 "김중대일병"도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보이며, "윤창호", "전수철", "김명덕", "방기장일병"과 "배장춘하사"등은 중상을 입는 등 분대장을 2소대 진지로 부축해 간 "이영복일병"을 제외한 1분대 전원이 전사를 하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또한 거의 같은 시각에 돌파 당한 화기반 진지에서도 경기관총 사수 "김낙성상병"이 적탄에 맞고 쓰러지자 부사수 "이내수일병"이 사수를 대신하여 계속 방아쇠를 당겼고, 그가 쓰러지자 1번 탄약수 "오준태일병"이. 그리고 그마져 쓰러지자 2번 탄약수 "송영섭일병"이 기관총을 붙들고 사투를 계속하다가 그도 또한 장렬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중략)
3소대 1분대 진지가 무너지자 약 20분 후 2분대 진지도 무너지고 말았으나 3분대 진지에서는 분대장 "송영옥하사"의 진두지휘 하에 BAR사수들이 계속 불을 뿜을 수 있도록 M1사수들이 BAR탄창에 실탄을 끼워주고 BAR의 총신이 과열하자 M1사수들을 위해 BAR사수들이 M1소총의 빈 클립에 실탄을 끼워주어 계속 불을 뿜게 하다가 소대장 "이수현소위"의 명령에 따라 2선으로 철수했고, 2선에서는 3소대에 배속되어 있던 1중대 3소대1분대 대원들이 철주를 뽑아들고 좌충우돌하고 있는 分隊長 "김경동 하사"의 진두지휘 하에 수 십명의 적과 혈투를 벌였으며, 2소대에 배속되어 있던 1중대 3소대 3분대의 "이다성상병"과 "김희도병장" 및 통신병 "이정식상병"은 최후의 순간까지 용전분투 하다가 산화했습니다. 더구나 이런 와중에 적진에서 발사한 4.2인치 포탄이 아군 4.2인치 중박격포의 탄약고에 명중되어 아군진지는 수라장으로 화하였고, 그런 틈을 타서 3문의 화염방사기를 앞세운 적 특공대가 화염을 내 뿜으며 돌진해 왔습니다. (중략)
공산군의 조공부대가 투입이 된 11중대 1소대 진지에서는 소대장 "신원배소위"와 2분대장 "이중재하사"등 용맹한 대원들이 陣內로 침투한 적 화염방사기 사수를 공격하여 화염방사기 1문을 노획했고, 먼동이 틀 무렵에는 1소대 진지 전방 약 100미터 지점의 바위 뒤에서10여 명의 적병들이 대전차 유탄포와 로켓포 등을 가지고 아군진지를 공격하는 것을 "이 진병장"과 "김용길중사"등이 수류탄을 투척하여 섬멸한 후 유탄포3문을 노획했습니다. (중략) 그 날 새벽 11중대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陣內에 돌입해 백병전을 펼쳤던 적은 약 1개중대 였으며, 날이 샐 무렵까지 계속된 피아군의 혈전은 3선 근처에서 적을 견제할 수 있었던 중대장 "정경진(丁京鎭)대위"가 11중대 1소대의 1개 분대를 좌측으로, 2소대의 1개 분대를 우측으로 전개하여 돌파구를 양쪽으로 포위하는 한편 중대본부에 배치된 4문의 3.5인치 로켓포로 맹공을 펼치는 가운데 화기소대장 "김기홍중위"로 하여금 중대본부 요원과 일부 3소대 병력으로 특공대를 편성하여 중대본부 바로 아래쪽으로 돌격을 감행케 하여 들쥐새끼들 처럼 진지를 빠져나가고 있는 적을 공격, 섬멸함으로써 작전을 종료시킬 수 있었습니다.
본관이 직접 돌아본 바에 의하면 격전이 치루어졌던 그 짜빈동 진지는 한마디로 끔찍한 인간 도살장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3소대 진지 전방의 장애물지대(철조망과 지뢰매설지대)와 교통호 안팎에는 수많은 공산군의시체가 널려 있었고, 백병전이 벌어졌던 교통호 에는 본관이 직접 시찰하는 순간까지 시뻘건 피가 발목이 잠길 만큼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이 거둔 전과는 敵射殺- 243명, 포로- 2명, 화염방사기-3문, 대전차포- 6문, 경기관총- 2문, 4.2인치 重박격포- 1문, 75밀리무반동총-7정, 수류탄-350발, 등이 있었고, 아군의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33명에 불과 했습니다. =중략=
월남이 전장화된지 십여년만에 최대의 승리를 공산군측으로부터 빼앗은 짜빈동 전투는 많은 기록과 화제를 남겼다. 전투가 끝난 그날 아침부터 3월 중순경에 이르기까지 짜빈동 진지와 청룡부대 본부에는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전투당일 오후에는 미 해병대 제3상륙군사령관 "월트 중장"과 전투가 시작되기 전날 시찰차 월남에 도착했던 "강기천 해병대 사령관" 및 한국 언론계의 중진들이 방문했고, 16일에는 월남군 최고사령부 참모부장과, 주월한국군사령부 작전참모 및 UPI기자들이, 그리고 17일에는 "정일권 국무총리", "김성은 국방장관"이 "신상철 주월대사"와 함께 방문을 했으며, 21일에는 월남공화국의 국가원수 "티우대통령"과 "키 수상" 및 "람 1군단장" 일행이 방문하는 등 귀빈들의 방문이 그치지를 않았다.
특히 월남군 과 미군 당국에서는 전술연구반 을 보내어 진지견학과 방어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게 했고, 또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하여 "강서룡 국방차관"과 "장창국 합참의장", "주월 미군사령관"등 이 짜빈동전투에 참가한 청룡여단 장병들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와 장병들의 사기를 높혔다.
당시 전투의 승전보를 보도한 지면에 소개된 세계각국 신문의 머릿 기사 들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듯 월남전 사상 최대의 전과를 거둔 짜빈둥 전투처럼 대서특필된 승전보도, 기사도 2차세계대전이래 일찌기 없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국내의 여러 신문들 중 맨 먼저 특종으로 보도했던 신문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가 특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청룡부대장의 지시에 따라 16일에 개시할 한.미. 월남군 합동작전(거룡작전)을 취재할 종군기자들을 안내(초청)해 오기 위해 미 해병대의 C-47 수송기 한 대를 빌려 정훈참모실 공보장교 "정기인 중위"를 사이공으로 보냈는데, 중앙, 동아, 한국등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위험한 곳으로 가기를 꺼려했지만 조선일보사의 "목사균 특파원"만이 용산 고등학교 후배인 정 중위의 간청에따라 스스로 용기를 내어 따라 나섰기 때문 이었다.
기록 가운데 가장 빛나는 기록은 훈장과 특진의 기록이다. 이 전투에 참가한 모든 사병들에게는 일 계급 특진과 함께, 전 장병에게는 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해병여단장 "김연상 준장"에게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지만, 특히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정부의 은성 무공훈장, "하사 배장춘", "중사 김용길", "상병 이학현", "상병 조정남" 에게는 을지 무공훈장, "중위 김기홍", "일병 이영복"을 비롯한 8명에게는 충무무공훈장, 나머지 장병들에게는 화랑무공훈장과, 인헌 무공훈장이 각각 수여되었다. 이처럼 엄청난 훈장의 기록은 대한민국의 훈포장법이 제정된 이래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제2해병여단본부를 방문한 월남공화국 "티우 대통령"과 "키 수상"을 위한 브리핑 석상에서 "키 수상"은 이런질문을 했다.
"청룡부대 장병들은 육박전을 할 때 상대방의 갈빗대도 부러뜨린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그 질문에 작전참모 "오윤진 중령"이 실전에서는 그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전제한 다음 손가락을 펴 보이며 "이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눈알도 쑤셔 빼지요" 라고 말해 질문자를 경악하게 했다. 또한 한국군주월사령부 보도실에서 가진 외신기자들을 위한 브리핑 석상에서는 어떤 외신기자가 이런 질문을했다. "월맹군이 얼마나 강하더냐?" 이에 중대장 정경진 대위가 말하길, "매우 강하더라, 그러나 우리 청룡들 보단 덜 강하더라"고 답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나중에 청룡부대의 브리핑 장교들이 상대방의 눈알을 쑤셔 뺀다는 말을 한데 대해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그렇잖아도 한국군이 잔인하다는 말이 있는데, 하필이면 대통령앞에서 그런 말을 하느냐"며 주의를 환기시켰다고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김성은 국방장관은 "죽기 아니면 살긴데, 까짓거 눈알이 아니고 불알을 잡아떼면 어때" 하면서 브리핑 장교들을 두둔했다는 말이 에피소드로 함께 전해지고 있다.
전쟁의 개념과, 양상이 이십여년 전의 그 것과는 현저히 달라진 오늘날에 이르러, 우리육군과 해병대를 다시한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포탄과, 기관총의 공격앞에 참호를 파고 들어않아 응사하는 가운데, 아군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역습돌격을 감행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던 이십여년전의 전쟁양상은, 일견 무모한 돌격과,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병사들의 투철한 군인정신만으로도 승리를 쟁취할 수는 있었다. 비록 엄청난 피의 댓가를 강요당하는 것 이기는 하지만, 그런점에서 월남전에 참전했던 맹호와, 백마, 청룡들은 세계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인한 군대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수십미터를 파고 들어가 온 천지를 뒤집어 엎는 가공할 신형폭탄들과, 사방 수백미터를 단 한발로 초토화시키는 강력한 무기와 화력으로 무장한 현대전의 적들을 마주해 수류탄을 까들고, 포복으로 기어가며 돌격을 감행해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특히,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용맹을 떨쳐, 그 이름을 세계만방에 알린 해병대의 경우는 더욱 비관적이다. 이십여년전의 개인화기는 물론, 분대, 소대, 중대지원화기는 지금도 그대로이고, 변한 것은 "판저파우스트"가 중대당 몇발만이 보급된 것이 전부이다. 미군은 고사하고, 타군의 지원이 없이는 서부전선에서 수원까지 이동하는 데만도 하루이상이 걸려야하는 "청룡부대"의 미래는 암울하다. 곡괘이자루와 삽자루로 단련되어, 오파운드로 완성된 "청룡부대"의 돌격정신만으로는 수도서울의 뒷통수인 서부전선을 지켜낼 수 없다.
타군에 비해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무장되어있으며, 소수의 군세로도 빛나는 승전기록과, 찬란한 승전의 진중문화를 보유한 해병대가 아니던가? 선배들이 죽음으로 쌓은 역사와 전통을 살려 "국가전략기동군"으로서 충성스런 국민의 군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 속에 안주해, 조직개혁을 통한 "저비용, 고효율, 정예강군"으로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채 "자살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같이 싸웠던 육군의 백마와 맹호는 보이지도 않을만큼 앞서가있다.
만일 그날이 온다면, 이제 무엇으로 "청룡부대"가 저 빛나는 "짜빈동"의 승전보를 국민앞에 약속할 수 있겠는가?
부대원 전원이 항복하지 않고, 장열하게 싸우다가 전멸했다는 끔찍한 소식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장열하고 용감하다 할지라도 국민들은 켤코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영광뒤에 오는것!
월남에 참전한 해병대와, 육군의 맹호, 백마등은 자유월남이 패망하면서 본국으로 개선하지만, 등에 멘 군장을 벋는 순간부터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게된다.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받을만큼 열심히 싸웠다는 말과, 병든 몸, 정신적상처였고, 아무도 그들의 상처입은 몸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지 않았다.
주월 한국군에 대한 외국 언론들의 시각
미국의 The Observer
It was in June 17 years ago that the North Korean Communists, attacking across the 38th parallet,began a full-scale invasion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South Korean Army, at that time.was much like the South Vietnamese Army of today. Now, many years later and many miles form the Pusan perimeter, the Bay of Inchon,the frozen waters of the Yalu and the hills of Chorwon.the ROK Armed Forces are again facing Communists in combat. - The Observer 24 May 1967 -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할 당시 이 한국군은 지금의 월남군과 같았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 한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떠나, 철원의 고지를 떠나, 그리고 인천항, 부산항을 떠나 수천만리 이역 땅에서 다시금 공산주의자와 싸우고 있다. - 1967. 5.24 옵져버 -
미 대통령 Richard Nixon
The enormous contribution which your country has made towards a free future for South Vietnam is tangible proof that both the confidence and assistance America placed in Free Korea 17 years ago was the wisest of investments. - Richard Nixon 17 Dec 1967 -
자유 월남의 자유로운 미래를 위한 한국이 이룩해 온 크나 큰 공헌은 17년 전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명이 되고 있다. - 1967.12.17 리처드 닉슨 -
미국의 News week
The Americans in South Vietnam give the Koreans top markes both as fighting men and for their pacification efforts. Indeed, some Americans who have worked with the ROKs believe that it would not hurt the U.S to study their methods. "It's a little bit like being a teacher and having an extraor dinary student." mused ond U.S offical"You come to class one morning and discover he has gone past you." -News week 10 April 1967 -
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사업에 있어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일부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법(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마치 미국은 한국이라는 비범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거와 같습니다. 어느날 아침 교실에 와서 선생님인 미국보다 학생인 한국군이 앞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읍니다" 라고 한 미국 관리는 심각하게 말했다. - 1967.4.10 뉴스 위크지 -
월남의 Tieng Vang(News Paper)
The central area of this country where ROK Forces are stationed is best secured area. ROK soldiers are brave enough to guard the area of their responsibility against the enemy, who is skilful in particualr tactics. They are also mutually understandable to the regional people, and experienced ROK surgeons kindly take medical care of the people. - Tieng Vang(New Paper) 17 Feb 1968 -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지역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수한 전술을 가진 적과 대치하고 지역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용감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료를 열심히 해주고 있다. - 월남 띠엔.반 지에서 1968. 2.17 -
월남의 Saigon Post
Koreans killing ratio has been 15:1,and they drove out the enemy from the swamp area of Vin Dhing,where both the French and Vidtnamese were not successful during the past 20 years. The basic characteristic of Koreans is their unending fighting spiril. It is not at all surprising that the enemy is avoiding contact with the Tiger,White Horse and Blue Dragon Warriors. Capured enemy documents indicate that the VC are instructed not to make contact with Koreans. - Saigon Post March,20,1968 -
한국군은 우군 피해에 대해서 15:1 이라는 비율로 적을 사살했으며, 프랑스와 월남이 20년간 시도하다 실패한 빈딩성의 늪지 해안으로 부터 적을 추격, 격파 시켰다. 기본적인 한국인의 특성으로 지적할 만 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다. 맹호, 백마, 청룡 용사들에 대하여 적이 조심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노획된 베트콩이나 월맹군의 문서에 의하며 한국군과는 가급적 접전을 피하도록 전 병사들은 명령 받고 있는 것이다. - 사이공 포스트 1968년 3월 20일 -
뉴욕 타임즈에 보도된 노획한 "베트콩 지령문"
Captured Viet Cong orders now stipulate that contact with the Koreans is to be avoided at all costs unless a Viet Cong victory is 100% certain. Never defy Korean soldiers without discrimination, even when are not armed, for they all well trained with Taekwondo. - An excerpt from an enemy directive seized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냅活?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 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 무장한 한국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 1966.7.22 뉴욕 타임즈 -
미국의 Evansille Journal
What would happen of six hundred thousand Koreans were exclusively conducting the Vietnam war? only fifty thausand Koreans repelled the enemy from their strategic responsibility area just overnight during the enemy's Tet offensive ...... The central coast area which Viet Cong had been occupying since their anti-French war is now completely under Koreans's control. - Evansille Journal, U.S.A- March,1966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 중 전술 책임 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루 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합되고 있다 - 1966.3 미국 에반스빌 저널-
The London Times
If the Korean forces had taken charge of the whole of South Vietnam or the U.S forces had drawn a lesson from "Go Boi", the Vietnam war would already have been won.When one takes a ride in a car for 96 kilometers in the pitch-back dark,there is not a single sign of rifle shooting or ambush attack. None but the Korean soldiers could do so anywhere in South Vietnam -The London Times.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고보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을 96키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다 - 영국 런던 타임즈 -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 once a marine always ma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