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맛있는 한국음식 몇 가지
토종 돼지구이․똥국
한국인들이 가장 고맙게 생각해야 할 가축이 있다면 무엇일까? “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람을 잘 따르고 ‘보신탕’이라는 조상 전래의 훌륭한 음식까지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눈물겹도록 고마운 개를 보신탕용으로 잡을 때는 왜 잘 데리고 다리를 건너다 난간 아래로 걷어차 목 매달아 죽이고 그슬려서(예전에 일부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도살했다는 말이다) 브리지드 바르도 같은 서양인들에게 빌미를 주는가 말이다. 그리고 요즘 보신탕이 과연 전래의 토종 똥개로 만든 한국의 토종 음식인지 서구식 사료를 먹인 외국종 도사견으로 만든 무국적 음식인지 살펴봐야 한다. 가둬 길러서 악이 오를 대로 오른 도사견과 제맘대로 룰루랄라 시골길 헤치고 다니며 똥 주워 먹고 자란 토종 똥개 중 어느 것이 그 육질에 엔톨핀이 많을까?
조상 대대로 우리의 식생활에 크게 기여해온 돼지는 우리가 정말 돼지머리 올려놓고 수백 번 큰절을 올려도 될 만큼 고마운 가축이다. 오늘날 돼지가 없었더라면 돈 없는 우리들이 어떻게 고기 맛을 보며 동물성 단백질을 넉넉히 섭취할 수 있었을까. 별 생각 없이 한낱 자고 먹기에만 급급한 동물이지만 돼지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순국 돼지에 대한 묵념’을 올려도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돼지 알기를 돼지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쳐주니 돼지의 눈빛이 늘 사람을 째려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 나무란다.”, “그슬린 돼지가 달아맨 돼지 타령한다.”에서부터 “돼지 멱 따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힘없고 약한 돼지를 능멸하는 사람들의 언사는 그칠 줄 모른다. 얼마 전에는 ‘공포의 삼겹살’이니 뭐니 하여 사람의 못난 생김새를 돼지의 구체적인 부위에 비유하더니 김영삼 정권 때는 머리 나쁘고 편협한 정치인을 가리켜 ‘삶은 돼지머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예로부터 돼지는 단지 고기만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모로 사람과 가까웠다. 지신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상해일(上亥日)에 궁중에서는 젊고 지위가 낮은 환관 수백 명을 동원해 횃불을 땅 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며 “돼지 주둥이 지진다.”고 말하면서 돌아다니게 했다. 이는 풍년을 비는 뜻이었다고 한다. 산모가 돼지 족발을 삶아 먹으면 젖이 많이 나고, 돼지 꼬리를 먹으면 글씨를 잘 쓰고,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오고 재수가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우리 민족이 2천 년 넘게 돼지 덕을 보면서 살아왔으니 전국 땅 이름에도 돼지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돼지를 많이 길렀던 제주 지역에서 그런 땅 이름이 많은데 남제주군 대정읍 보성리 ‘돝귀둥’은 돼지귀처럼 생긴 곳이고, 제주시 회천동 ‘돝 죽은 산밭’은 멧돼지가 많이 잡혀 죽은 곳이다. 대전 유성구 학하동 골짜기의 ‘도야지 궁그러 죽은 골’은 산이 험해 굴러 떨어져 죽은 돼지들이 많은 곳이고, 경상남도 창녕의 ‘돼지 목 자른 만댕이’나 전라북도 남원의 ‘돼지 무덤’ 등은 제사용으로 돼지를 희생시킨 곳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축산단지가 생기면서 백도야지가 돼지의 주종으로 등장하고 이제는 세계화인지 자유시장인지의 바람을 타고 돼지고기, 돈가스, 베이컨 등 ‘서양 돼지’들이 물밀듯 쳐들어오니 우리의 토종 돼지들을 만나거나 돼지 멱 따는 소리 듣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돼지 멱 따는 소리’처럼 반가운 소리가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그 소리가 윗말에서 들리면 아이든 어른이든 달려갔다. 아이들은 빨리 가서 불캐(돼지 오줌보)를 얻어내 오줌을 빼내고 겉기름을 뜯어낸 뒤 적당히 불어서 축구공으로 썼다. 지푸라기 묶은 공만 차던 그 무렵 아이들에게 돼지 불캐는 요즘 아이들 컴퓨터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그 불캐가 다 닳아 터질 무렵이면 어른들은 가마솥에 내장과 곱창을 잔뜩 씻어 넣고, 무 줄기 말린 것도 넣고, 한두 시간 가량 장작불에 끓여낸 돼지국에 막걸리 마시는 판을 벌이곤 했다. 그 구수한 돼지국을 이젠 맛보기가 어렵지만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런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던 몇 군데를 소개한다.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상항리. 지리산 실상사 바로 앞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주둥이가 뾰족하고 털이 새까만 우리 토종 돼지를 측간에 넣어 기른다. 사료를 먹여 기른 돼지보다 훨씬 연하고 쌈박한 맛이 있다. 비계가 두껍지 않고 돼지고기 특유의 노린내도 안 난다. 상항리 부근 부운리 일대에서도 이렇게 돼지를 기르는데 상항리와 부운리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을 추렴용으로 잡거나 도시 사람들이 예약 주문한 것이다. 상항마을 앞 실상사 주변 식당에 가면 이 토종 똥돼지 고기를 언제나 맛볼 수 있다.
전남 곡성군 석곡면 석곡리는 돼지고기 석쇠숯불구이로 유명한 곳이다. 예전에 광주에서 여수, 순천 방면을 오가는 버스들이 석곡리를 지나다닐 때 점심때가 되어 운전수와 승객들이 요즘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듯 그곳 식당에 들르면 푸짐하고 맛있는 돼지국밥과 석쇠숯불구이를 내놓은 것이 유래가 됐다. 요즘엔 10여 곳의 돼지숯불구이 전문식당이 있다.
내가 최근에 가장 맛있게 먹어본 돼지고기 음식은 전남 곡성 5일 장터에서 먹은 ‘똥국’이다. 위에서 말한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듣고 반가워 돼지 잡는 곳에 달려가 얻어먹는 그 ‘가마솥 시래기 곱창국’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직도 그 구린내 살짝 나는 구수한 돼지곱창국이 남아 있다는 것은 사라져 버린 고향을 송두리째 만나는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똥국이란 말은 원래 돼지국이라는 뜻의 ‘돈국‘이었는데 ’구린내가 (살짝) 나는 곱창국‘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별칭이라고 한다. 똥국은 막 잡은 돼지에서 대창을 걷어내 소금물로 깨끗이 씻은 뒤 그 안에 선지를 가득 채워 순대를 만들어 하루종일 돼지머리를 곤 국물에 머릿고기와 순대를 넣어 말아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