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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의 숙원사업이었던 홈페이지 개설에 수고 많았읍니다 모두 함께 읽읍시다
忠烈祠와 安樂書院과 宋象賢님과의 관계
崇祖思想 補給위하여, 礪山 26世孫 德宇 宋政永(族名:柱元)옮김
忠烈祠(충렬사)는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때 東萊城에서 殉節(순절)하신 분(功臣;공신;선열)들과 亂中(난중)에 東萊釜山地域에서 倭賊(왜적)과 抗戰中戰死(항전중전사)하거나 戰功을 세웠던 護國先烈忠臣烈士(호국선열충신열사)들의 영령 神位를 奉安하여 모시고 있는 祠堂(사당)으로 선열의 崇高(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산 敎育의 場이며 護國精神(호국정신)의 搖籃地(요람지)이다. <* 이곳은 政府에 의해 대대적으로 특별히 聖域化되어 推仰받고 있는 곳으로 이순신장군의 아산현충사와 같은 송상현공과 釜山東萊地域 壬亂功臣들이 모셔져있는 忠烈祠임.> 그리고 安樂書院(안락서원)은 송상현공의 선비로서의 學行(학행)과 忠節(충절)이 後學들에게 師表(사표)가 됨으로 그러한 것을 높이 받들고 그 遺德(유덕)을 後學들에게 가르칠 必要(필요)가 있다고 하여 세워진 것으로 이 고장의 선비들과 兩班子弟(양반자제)들을 勉學(면학)하게한 敎育機關(교육기관)이었다.
忠烈公 宋象賢(송상현; 1551;명종6년正月八日출생~1592;선조;25년;殉節)님께서는
礪山宋氏始祖 惟翊(여산송씨시조 유익)의 16세손이며, 知申公 諱 璘(지신공 휘 린;인)의 11세손으로 1551년(명종6년)正月 8日에 縣監 復興(현감 복흥)의 아들로 出生하시어 남달리 재주가 뛰어났으며 10世때에 벌써 經史(경사)에 뛰어났었고, 글을 세 번만 읽어도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고 하며 15세에 陞補試(승보시)에 壯元(장원)을 하였으며 당시 試驗官(시험관)이 말하기를 문장이 뛰어나 敬歎(경탄)하면서 보기 드문 秀才(수재)라고 하며 後日(훗날)기필코 큰 材木(재목)이 될 사람이라고 했다. 나이 20세에 進士(진사)가 되시어 成均館(성균관)에 들어갔고 * 1575년 別試文科丙科科擧(별시문과병과과거)에 급제하시어 * 1576년(선조9년) 나이 26세에 拔擢(발탁)되시어 벼슬길에 올라 鏡城判官(경성판관)을 지내고 여러 官職(관직)을 거치는데 * 1584년 質正官(질정관)으로 明나라(北京)에 다녀왔고 歸國後(귀국후)에는 戶曹, 禮曹, 工曹正郞(호조,예조,공조정랑), 軍姿監正(군자감정)을 歷任(역임)했다. 宋象賢公은 公正, 謙遜, 潔白(공정, 겸손, 결백)을 信條(신조)로 삼았으며 品性(품성)이 굳고 당시 朝廷黨論(조정당론)이 두 갈래로 나뉘었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고 자신의 榮達(영달)을 위하여 권력에 아부하거나 偏黨(편당)으로 지나치게 어느 한쪽으로 취우치지 않았으며, 그래서 當時(당시)의 朝廷(조정)에서는 便安(편안)히 지낼 수 없어 邊方(변방)으로 內外職(내외직)으로 돌아 다니셨다고 한다. * 선조 24년(1591년) 통정대부(정3품)로 昇進(승진)되시었는데, 朝廷(조정)에서는 文武才略(문무재략)을 兼備(겸비)하고 뛰어났다고 하여 * 1586년경부터 사실 倭國(왜국=일본)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으며 당시 戰運(전운)이 감돌고 있던 최전방이었으며 누구나 오기를 꺼려하던 이곳 東萊府使(동래부사)로 1591년 戰爭勃發直前(전쟁발발직전)에 아무런 準備(준비)나 對策(대책)마련도 되어있지 않았던 이곳으로 보내졌었다. 사실은 朝廷(조정)의 그러한 처사가 善意(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고 하며 훗날(효종8년 1657년) 宋時烈(송시열)先生께서(삼가 하는 마음으로)쓰신 神道碑文(신도비문)에서 보면 “公(공)은 평소 벼슬길에 올라서 바르고 곧았으므로 (黨爭;당쟁;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으니 오히려) 그래서 한편으로는 늘 어떠한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라고 안타까운 듯이 表現(표현)한 것을 보아 당시 그의 性品(성품)과 心情(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公(공)은 任地(임지)에 이르자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백성을 다스리고, 職務(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오로지 誠意(성의)와 信義(신의)로 하였고 牧民에 힘을 썼기에 府民軍民(부민군민)들은 公을 사랑하고 모시는 것이 父母(부모)와 같이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公께서는 당시 東萊로 赴任(부임)해 올 때 마음속에 굳게 다짐한 바가 있었으니, “오늘날 같이 國論(국론)이(利己的인 黨爭等으로)分裂(분열)되어 있으며 政勢(정세)가 어수선하니 이웃의 倭賊(왜적)이 반듯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이다. 만약 그들이 來侵(내침)할 경우 죽음으로써라도 이를 반듯이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이러한 豫見(예견)을 하며 그 뜻을 수차례에 걸쳐 朝廷(조정)에 알리고 당시 定山守令(정산수령)으로 있던 沙溪 金長生(사계 김장생)과는 허물이 없는 친한 친구사이였기에 <그의 아들 金集(김집)을 宋公이 가르쳤음> 當時의 戰雲(전운)을 公께서 詩로 부쳐서 그러한 뜻을 전하니, 사계 김장생은 宋象賢公의 그러한 忠誠(충성)스러운 氣槪(기개)를 欽慕(흠모)하여 그것을 官廳(관청)의 벽에 새겨두고는 항상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으니 그 當時(당시) 公의 決意(결의)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公의 豫想(예상)은 적중하여 赴任(부임)한 다음해인 * 선조 25년(1592) 壬辰年 4월 13일 小西行長(소서행장=고시니유끼나가)이 거느리는 倭軍一陣(왜군일진)이 바다를 건너 4월 14일 釜山에 侵入(침입)하면서 임진왜란이 발생하게 되었고, 釜山鎭城(부산진성)을 陷落(함락)이 되고, 이러한 氣勢로 엄청난 火力(화력)과 大軍(대군)의 威力(위력)으로 東萊城(동래성)으로 進軍(진군)하여 城을 에워싸게 되는데, 이에 앞서 당시 蔚山兵營(울산병영)에 있던 경상좌병사 李珏(이각)은 이 地域(지역)이 管轄區域(관할구역)이었으므로 東萊邑城(동래읍성)으로 들어와 함께 城을 지킬 計策(계책)을 세우고, 步卒(보졸) 수백명을 내어 助防將(조방장)으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남으로 10리가량 갔다가 돌아와서는 말하기를 “적은 너무 많고 우리의 숫자는 적으니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이각’이 “宋府使(송부사) 당신은 마땅히 이 城을 지켜야 할 것이오, 우리는 뒤에서 계속 後援(후원)할 것이오.”라고 하면서 조방장과 함께 달아날 뜻을 보이자, 송상현공은 義理(의리)로 責望(책망)하고 죽음으로서라도 이 城을 함께 지키자고 力說(역설)했으나 ‘이각’은 “이곳은 나의 責任管轄區域(책임관활구역)이긴 하나 나는 내 陣營(진영)이 따로 있으니, 이 城을 지키는 것은 그대의 責任(책임)이오.”라고하고는 老弱(노약)한 軍卒(군졸) 30여명을 내어주고는 不足(부족)한 軍勢(군세)를 알면서도 이 地域(지역)의 軍隊(군대)를 責任(책임)져야할 者(자)가 나머지 兵士(병사)들을 데리고 기어이 북쪽의 蘇山驛(소산역)으로 逃亡(도망)을 하였다고 한다.
송상현공은 크게 歎息(탄식)을 하고는 “그러나 나라에서 나에게 이 城(성)을 맡겼으니 내가 살고 城이 陷落(함락)될 수는 없다. 나는 城과 運命(운명)을 같이할 것이다.”라고 決意(결의)를 다지고 群衆(군중)들의 앞에서 죽음으로 城을 지킬 것을 督勵(독려)하고 다짐한 뒤, 모든 사람들을 城안으로 불러들이는 등 準備(준비)를 마치고 南門樓(남문루)에 올라가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泰平時(태평시)에는 國祿(국록)을 먹고, 높은 대우를 받던 주변의 守令方伯(수령방백)들이, 國難(국난)을 당하여서는, 제각기 一身(일신=자기 한몸)의 安全(안전)만을 생각하고 뿔뿔이 흩어져 모두들 逃亡(도망)하여 최전방지역의 군사책임자 ‘이각’이 이러하였듯이 살기를 圖謀(도모)했으나, 동래부사 宋象賢公은 스스로 앞장서서 동래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굳게 決心(결심)하고 군사들과 民衆(민중)들을 불러 모아서 督勵(독려)하며 郡民(군민)들을 이끌고 東萊城(동래성)을 死守(사수)하가로 하였으며 將帥(장수)와 兵士(병사)들 郡民들등 萬餘名(만여명)이 모두 함께 끝까지 싸웠으나, 鳥銃(조총)이라는 新式武器로 武裝하고 그동안 戰鬪(전투)만 일삼던 軍人들을 앞세워 떼거리로 몰려왔던 倭賊(왜적)들을 막기에는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4월 15일의 戰鬪(전투)에서 城은 陷落(함락)되고 당시 42세로 殉節(순절)하신 것이다. * 당시 오랫동안 戰國時代狀態(전국시대상태)였던 日本列島(일본열도)를 온갖 陰謀(음모)와 智略(지략)과 武力(무력)으로 統一한 豊臣秀吉(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은 熾烈(치열)하게 戰爭(전쟁)을 일삼았었던 戰後軍人(전후군인)들의 平定(평정)을 위하고 자신의 政權安定(정권안정)을 위한 方策(방책)의 일환으로 또한 大陸으로 향한 領土擴張(영토확장)의 야망과 그 慾心(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으킨 侵略戰爭(침략전쟁)이었는데, 그 당시 우리의 朝鮮朝廷(조선조정)의 政府(정부)는 無事安逸(무사안일)하게만 지내려했고 자신들의 一身上(일신상)의 利害關係(이해관계)만 생각하며 泥田鬪狗(이전투구)의 黨爭(당쟁)과 漠然(막연)한 事大思想(사대사상)에만 젖어 있으면서 急迫(급박)하게 돌아가고 周邊國家(주변국가)들의 政勢把握(정세파악)이나 나라와 백성들의 安危(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이웃의 日本地域에 대한 情報(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侵掠(침략)에 미리對備(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훨씬 以前의 栗谷先生(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등 뜻있는 사람들의 念慮(염려)속의 豫測(예측)과 警告(경고)를 살펴보지 못한 당시 最高指導者와 政權責任者(정권책임자)들의 無能(무능)한 處身(처신)과 對備不足(대비부족)은 歷史的으로 볼 때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全國土(전국토)가 蹂躪(유린)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拉致(납치)되고 犧牲(희생)되었지만 中央의 벼슬아치들은 국토와 백성들을 保護(보호)할 생각은 아니하고 살기 위해 王과 함께 逃亡(도망)하기에 바빴고 戰後살아남은 그들은 戰果(전과)에 대해서는 살아남은 그들의 위주로 合理化하거나 오히려 排斥(배척)해버리거나 얼버무려 버리고 再發防止(재발방지)를 위한 確實(확실)한 分析(분석)과 잘못에 대한 철저한 反省(반성)이나 考察(고찰)이 없었기에 그 후 또 300여년 後에도 韓日合邦(한일합방)이라는 恥辱(치욕)을 당한다.
아무튼 송상현공은 당시 南門樓(남문루)에 올라 서있으니 4월 14일 오후 마주치게 되는 賊(적)들의 精銳大軍(정예대군)과 鳥銃(조총)을 포함한 相對的(상대적)으로 優秀(우수)한 武器(무기)들 앞에 我軍(아군)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小數(소수)의 兵力(병력)과 조잡하기 짝이 없는 武器(무기) 뿐이었으니, 오직 城壁(성벽)에 의지하여 싸울 수밖에 없는 狀況(상황)에서 弄珠山(농주산=지금의 동래경찰서터)聚兵場(취병장)에 集結(집결)하여 진을 치고 있는 賊(적)들의 主力部隊(주력부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敵(적)은 우리 측이 對備(대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먼저 戰意(전의)를 살펴보려고 백여명의 兵卒(병졸)이 木版(목판)에 글을 써서 南門(남문)밖에 세우고 갔는데, 軍官 ‘송봉수’를 시켜 가서보게 하니, * “戰則戰矣(전즉전의=싸우려면 싸우고=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不戰則假我道<불전즉가아도=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明나라를 치기위해 요동정벌을 하고저 하니) 길을 빌려 달라=비켜달라>”라고 쓰여 있었고, * 宋府使(송부사)도 이에 對應(대응)하여 그 해답으로 역시 목판에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싸워서 죽기는 쉬워도;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써서 賊衆(적중)에 던지고 그는 당시 堪當(감당)할 수 없었던 莫强(막강)한 軍勢였지만 賊들에 대한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어보였고, 東萊城과 운명을 같이할 決心(결심)과 그 뜻을 郡民(군민)들과 굳게 다짐하였다. * 그러자 敵들은 항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城을 세겹으로 包圍(포위)하고 鳥銃(조총)과 화살을 亂射(난사)하기 시작하였으며, 수많은 犧牲者(희생자)들이 생기고 이렇게 싸우기로 반나절 이상 계속하여 進退(진퇴)를 거듭하다가 그 다음날 15일 이른 아침새벽부터 敵(적)들의 攻擊(공격)이 시작되었으나 正面南門의 우리 군사방어선은 鞏固(공고)했으므로 지금의 ‘인생문’쪽인 城의 뒤쪽 경사진 山腹(산복)의 城郭(성곽)이 낮고 守備(수비)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던 곳으로 破竹之勢(파죽지세)로 城壁(성벽)을 무너뜨리고 城안으로 넘어 쳐들어오게 되면서 城內에는 白兵戰으로 창으로 칼로 혹은 도끼로 낫으로 몽둥이로 후리치고 及其也(급기야)는 지붕으로 올라가 기왓장을 거두어 내리치도 했었다. 이러한 抵抗(저항)도 결국 正午(정오)경에 力不足(역부족)으로 城은 陷落(함락)되고 만다.
* 당시 東萊民衆奮戰圖(동래민중분전도)의 모습과 같이 官軍(관군)의 抗戰(항전)도 치열했었지만 民衆의 抵抗(저항)도 매우 치열하였다. 城民(성민)들은 一致團結(일치단결)하여 싸웠으며 기왓장을 던지며 까지 적과 싸웠는데 婦女子(부녀자)들도 加擔(가담)했었고, 公은 이들을 督勵(독려)하며 城안에 머물며 抗戰(항전)하던 사람들과 함께 죽게 된다. * 東萊府殉節圖(동래부순절도=보물 제 392호)가 있는데 당시 東萊城(동래성)에서 倭軍(왜군)의 침략에 對應(대응)하다 殉節(순절)한 府使 宋象賢(부사 송상현)과 郡民(군민)들의 抗戰內容(항전내용)을 묘사한 그림으로 1709년(숙종35년) 처음 그려진 것을 1760년(영조36년)에 畵工(화공) 卞璞(변박)이 보고 다시그린 作品(작품)으로 陸軍士官學校(육군사관학교)에 있다가 용산의 군사박물관에 備置(비치)되어 있었다.
* 당시 賊이 물밀듯이 城門(성문)을 넘어 몰려와 助防將洪倫寬(조방장홍윤관) 右衛將趙英珪(우위장조영규) 裨將宋鳳壽(비장=대장송봉수) 敎授盧蓋邦(교수노개방)등이 모두 죽었고,
* 東萊報國衷情圖(동래보국충정도)에서 보듯이 적들이 城을 넘어 들어와서 城內(성내)를 蹂躪(유린)하게 되자, 주변에서는 송상현부사를 피하도록 권유하였으나 公은 動搖(동요)하거나 피하지 않았고, 그리고 公은 從者(종자) 申汝櫓(신여로)를 불러 “나는 이것을 지켜야하는 臣下(신하)이니 義理(의리)상 마땅히 죽음을 覺悟(각오)하고 떠나지 못할 것이다. 너는 老母(노모)가 있으니 헛되이 죽어서는 안된다 빨리 떠나라.”고 이르고 死力(사력)을 다한 힘겨운 독전에도 불구하고 四面이 賊에게 둘러싸인 외로운 城에서 끝내 戰勢(전세)를 挽回(만회)하지 못하게 되자, 급히 朝服(조복)을 가져다 갑옷위에 입고 투구를 벗고 紗帽(사모)를 쓴 뒤 걸상에 걸터앉아 胡床(호상)에 기대어 손을 모우고 단정히 앉아(端坐;단좌;한채) 있으니 그 우뚝한 모양이 山과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있으면서 적들이 들이닥쳐 가까이와도 꼼짝 않고 그들을 향해 꾸짖기를 “이웃나라의 道(도)가 이렇다 말이냐?, 우리는 너희에게 저버림이 없었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 지경이냐!”하면서 신색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하고는 걸상에서 내려와 殿牌(전패)를 모신 客舍(객사)를 향해서(북쪽을 향해) 國王에게 정중히 하직의 禮를 올린 후 (네 번 절을 하고나서는) 부채에 父親(부친)에게 하직의 글을 다음의 詩로 쓰기를 “孤城月暈(고성월운=외로운 성에는 달이 흐린데), 列陳高枕(열진고침=이웃고을의 진에서는 평안히 누워 돌보지 않습니다)=<*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包圍(포위)되었는데, 이웃한 여러 鎭營(진영)에서는 함께하거나 도와줄 기척이 없구나.>,
君臣重義(군신중의;=임금과 신하의 의는 중하고=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운 것이 오매), 父子恩輕<부자은경;=부자간의 의는 가볍습니다. =아비와 자식의 恩情을(은혜와 정은) 가벼이 하오리다.>” <* 임금과 臣下의 義理는 무겁고 그에 비하여 父母와 자식의 恩惠(은혜)와 情은 가볍습니다.> 하고 붓을 놓고는 壯烈(장렬)하게 殉節(순절)하였습니다.
公은 降伏(항복)을 勸誘(권유)하면서 차례로 좌우의 팔과 다리를 잘리면서도 죽는 瞬間(순간)까지도 卑屈(비굴)하지 않으셨고 그의 四肢(사지)는 칼로 난도질당했고 갑옷위에 입은 조복으로 넘쳐 나오는 붉은 鮮血(선혈)이 의자와 탁자를 적셨다고 하며 당시 아버지에게 남긴 詩句節(시구절)이 적힌 부채도 피에 젖어버리며 最後를 마쳤다고 한다.
<日月錄;일월록>과 <淸野謾輯;청야만집>에는 宋象賢公(송상현공)이 賊兵(적병)들에게 칼을 휘두르며 미친 듯이 끝까지 달려들어 抗戰(항전)하며 많은 적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고 하고 있으며, * <寄齋雜記;기재자기>에는 당시 倭軍(왜군)의 將帥(장수)와 함께 온 일찌기 兩國(양국)을 往來(왕래)하면서 송상현공의 인물됨을 알았던 平調益(평조익)등 함께 왔던 官吏(관리)들은 평소 그의 人品(인품)을 아끼고 尊敬(존경)하여 우선 城옆의 공터로 피하도록 했고, 生捕(생포)하려 懷柔(회유)했으나 한마디로 모두 拒否(거부)하며 오히려 죽음을 自招(자초)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그분은 죽는 순간까지도 卑屈(비굴)하지 않으셨고 麾下(휘하)의 郡民(군민)들도 公의 충정에 感動(감동)되어 城을 베개 삼아 수많은 사람들이 壯熱(장렬)히 殉節하였으며. 이에 感服(감복)한 倭將(왜장)은 나중에 公의 屍體(시체)와 또한 倭軍(왜군)의 威脅(위협)속에서도 그의 妻(처)로 생각한 侍女(시녀)로 逃亡(도망)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지붕위에서 기왓장을 뜯어서 던지면서까지 宋公과 함께 殉節했던 이렇게 公의 곁에서 모셨던 烈女(열녀)金蟾(김섬)의 屍體(시체)를 함께 수습하여 禮(예)를 갖추어 東門(동문)밖에 따로 묻고 詩를지어 祭祀(제사)를 지내고 나무를 세워 표지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일은 世界戰史上類例(세계전사상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 그 후 나라와 백성을 사랑했던 公의 人品(인품)과 功績(공적)을 생각하며 적장 ‘가등청정’은 戰爭當時(전쟁당시)라도 公의 家族(가족)들로 하여금 葬禮(장례)를 치루어 故鄕(고향)에 移葬(이장)하도록 주선까지 했으며 敵將(적장)인 그가 훗날 捕虜(포로)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나라 忠臣(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사람뿐 이였다” 라는 記錄(기록)이 전한다. 當時는 이곳이 적의 陣營(진영)이었으므로 護衛(호위)를 붙이고 屍身(시신)의 行列(행렬)이 지나갈 때 禮(예)를 다하였으며 當時 喪輿(상여)가 지나갈 때는 公의 魂(혼)을 慰勞(위로)하기 위해 무례하게 公을 殺害(실해)한 者들을 찾아내어 목을 베어 죽이고, 敵將(적장)들도 말에서 모두들 내려 拜禮(배례)를 하도록 했었고 살아남은 유민들과 고을 사람들의 哀痛(애통)해 하는 행렬이 百餘里以上(백여리이상) 이어졌다고 책에 쓰여 있다. 당시 公의 靈柩(영구)가 의령에 이르렀을 때, 接伴使(접반사)로 中國使臣(중국사신)을 接待(접대)하고자 있었던 그의 友人인 宰相 李恒福(재상 이항복)이 슬퍼하며 公의 魂(혼)을 불러 慰勞(위로)하며 祭祀(제사)를 올렸고, 公의 墓所(묘소)는 旌閭門(정려문)과 함께 현재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구 청원 現 淸州加布谷;청주가포곡; 장촌마을)산 1-1번지 푸라다나스 가로수길 옆 충주와 조치원을 連結(연결)하는 國道(국도)36호선 道路邊(도로변)으로 멀리 京釜線高速道路(경부선 고속도로)가 보이는 곳에 있다. 公의 무덤앞 左側(좌측)에는 지나치게 신분사회였던 당시로는 破格的(파격적)인 待遇(대우)로 함흥의 妓生(기생)이었던 侍女(시녀=烈女 金蟾;김섬)의 무덤이 朝廷(조정)의 許諾(허락)하에 造成(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이곳을 지나가던 시인묵객들은 물론 임금들이 行次時에도 이곳 忠節의 무덤에는 글귀를 남기며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그 節義를 높이 싸지 않은者 없으니 참으로 後學들의 師表(사표)가 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 忠烈祠(충렬사)의 由來(유래)
壬辰倭亂戰後(임진왜란전후) 1594년(선조27년)겨울 陣中(진중)에서 慶尙節度使 金應瑞(경상절도사 김응서)님이 加藤淸正(가등청정)을 만났는데 그곳에서 當時 敵將(적장)도 感銘(감명)시킨 宋公의 來歷(내력)을 듣고 調査報告(조사보고)하여 吏曹判書(이조판서)로 贈職(증직)하고 家門(가문)에 祭物(제물)이 下賜(하사)되게 되었고, 그 후 歲月(세월)이 흐른 후 선조 38년(1605년) 當時 廢墟(폐허)가 되어있던 이곳에 赴任(부임)한 동래부사 尹暄(윤훤)이 와서 보니 당시 官衙(관아)의 奴婢(노비)로 있던 사람 ‘邁同(매동)’이 諱日(휘일=제사날;忌日)과 節辰(절진)에 祭祀(제사)를 모시고 있었을 뿐 나라에서나 東萊府民(동래부민)이 祭祀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官에서 직접 구민들과 송상현공의 忠節(충절)을 기리기 위해 祭祀를 모시기로 議論(의논)하고 宋象賢公(송상현공) 한분을 모신 宋公祀(송공사)壇(단?)을 세웠고, 이듬해 선조 39년(1606년)에는 東萊邑城南門(동래읍성남문)안에 祠堂(사당)을 짓고 位牌(위패)를 모시고 每年祭祀(매년제사)를 올린 것이 그 始初(시초)가 된다. < 별도로 * 1608년(선조41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李安訥(이안눌)에 의해 동래읍성 南門밖의 조그만 野山(야산)이었던 농주산(지금의 동래경찰서자리)에 宋公壇의 시초가 되는 戰亡祭壇(전망제단)을 세웠다가 * 1742년(영조 18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壬亂當時 殉節(임란당시순절)하신 場所(장소=현재 동래시장 내)인 靖遠樓(정원루)의 옛터에 壇(단)을 모아 송상현공을 주벽으로 하여 宋公壇(송공단)을 設置(설치)하여, 지금까지 東萊城陷落(동래성함락)과 公이 殉節하신 음력 4월 15일 여러 先烈들과 함께 祭(제)를 모시고 있으며. 현재 ‘기영회’에서 祭祀를 지내고 있음 >
* 1622년(광해군 14년)宣慰使 李敏求(선위사;이민구)가 建議(건의)하며 宋公祠에 賜額(사액)과 僉使 鄭撥(첨사 정발)을 配享해 달라고 하는 狀啓(장계)를 올리는데, 그 후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遲滯(지체)되다가
* 1624년(인조2년)에 忠烈祠(충렬사)라는 賜額(사액)이 下賜(하사)되어졌다.
忠烈祠는 壬辰倭亂(임진왜란)때의 忠節(충절) 宋象賢을 奉祀(봉사)하기위해 세운 宋公祠(송공사)가 忠烈祠(충렬사)로 改稱(개칭)되었고, 또한 당시 釜山鎭城(부산진성)에서 순절한 부산진첨사 忠壯公 鄭撥將軍(충장공정발장군)과 合享(합향)되는데 이때부터 2분의 神位가 配享(신위배향)됐다. 그 후 * 1652년(孝宗 3년) 동래부사 尹文擧(윤문거)님이 祠堂(사당)을 參拜後(참배후), 지방 선비님들과 議論(의논)후 현재의 祠堂(사당)이 좁고 祠宇(사우)가 낮으며 濕氣(습기)가 많고 城門(성문)이 가까이 있어 시끄러우므로 地帶(지대)가 祠堂의 位置(위치)로 適合(적합)하지 않고 또 송상현공은 선비로써 學行(학행)과 忠節(충절)이 後學(후학)들에게 師表(사표)가 되므로 그러한 것을 높이 받들며 後世(후세)에 전하고 선열들의 忠節(충절)과 이러한 學行을 後世(후세)에 전하며 선비들에게 가르칠 必要(필요)가 있다하여 書院(서원)으로 擴張(확장)하기로 하고 邑民(읍민)들의 呼應(호응)을 얻어 萊山(래산)아래의 安樂里(안락리)에 지금의 場所(장소)를 정하고 禮(예)를 따라서 그해 9월 移建(이건)하여 宋公祠(송공사)의 송상현과 鄭撥公(정발공)의 位牌(위패)를 옮겨 모시고 講堂(강당)과 東西齋(동서재)를 지어 書院의 規模(규모)로 創建擴張建立(창건확장건립)한 후 儒生(유생)들을 수용할 수 있게 하여 洞里(동리)의 이름을 따서 安樂書院(안락서원)이라 稱(칭)하게 되었다.(別稱별칭으로 萊山書院이라고도 했음) 이렇게 되어서 祠宇(사우)와 敎育施設(교육시설)을 갖춘 書院으로 重建(중건)되어 그 機能(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危身奉上을 忠이라하고 剛克爲伐을 烈이라 함>
* 1653년(효종4년) 忠烈이라 追贈(추증)되고 * 1681년에는 오위도총관을 加增(가증)하고 忠烈이란 諡號(시호)가 내렸다. 그 후 * 1709년(肅宗;숙종;35년) 位牌奉安問題(위패봉안문제)가 東萊府民(동래부민)과 當時 府使 權以鎭(권이진)에 의해 論議(논의)되었으며 충렬공과 충장공이 殉節(순절)할 때 함께 戰死(전사)한 諸公(제공)들을 奉祀(봉사)하기 위해서 邑城안에 忠烈祠가 있던 옛터에 別祀祠堂(별사사당)을 建立하고 朝廷(조정)에 청하여 梁山郡守 趙英圭(조영규), 東萊敎授 盧蓋邦(노개방)을 主享으로 모시고 그의 弟子 儒生文德謙(문덕겸), 梁潮漢(양조한)을 配享(배향)하고 그 옆 별채에 송상현공의 秘書였던 裨將 宋鳳壽(비장;송봉수), 군관 金希壽(김희수), 傔人(겸인;개인비서)申汝櫓(신여로), 東萊府鄕吏 公務員 宋伯(향리;송백), 府民으로 평민이었던 金祥(김상)等, 東萊 9 義士(의사)의 神位를 奉安하고 祭祀를 지내다가 朝廷에 追享(추향) 賜額歎願(사액탄원)을 하게 되고, 그 2年後인 * 1711년 別祠賜額(별사사액)이 내려져있던 원래의 구 忠烈祠(=宋公祠)에 또 忠烈別祠(충렬별사)라는 편액을 下賜(하사)받았고 이곳 구(옛) 충렬사에 충렬별사를 追加(추가)로 建立해서 忠烈祠에 있는 정발장군이 武人이므로 宋公과 함께 書院에 配享하는 것은 適合하지 않으므로 忠烈別祠로 다시 옮겨 가장 首位로 모셔야하며, 當時 충렬별사에 있는 노개방은 선비들을 가르쳤던 스승이니 서원으로 옮겨 송상현공과 함께 配享(배향)함이 옳다고 奏請(주청)하여 마침내 * 1714년 忠烈祠(충열사)에 合享(합향)되었던 정발장군과 조영규를 충렬별사로 다시 모시고 祭祀를 施行하여 모시게 된다. 그 후 당시 충렬별사의 左右壁面(좌우벽면)에는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의 두 그림을 그려서 걸게 했는데 당시의 戰況(전황)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 충렬별사에는 東萊城(동래성)이 陷落(함락)된 후에도 投降(투항)을 않고 義兵(의병)을 일으켜 게릴라전과 같이 倭賊(왜적)과 싸운 東萊出身(동래출신) 24위의 壬辰倭亂(임진왜란)別典功臣(별전공신)의 이름 名單(명단)이 또한 이곳 벽에 기록해 놓았었다(그려 새겨졌었다) 그러다가 * 1735년(英祖 11년) 東萊府使 崔命相(최명상)과 慶尙道觀察使(경상도관찰사) 閔應洙(민응수)의 청에 의해서(狀啓를 올려 許諾을 받음) 충렬별사가 城門의 入口로 騷亂(소란)스러우며 祠堂이 낮고 좁으며 陋醜(누추)하고 戒壇(계단)도 없이 큰길 옆에 있으니 撤廢(철폐)함이 마땅하다하며, 또 송상현공은 城內에서 殉節(순절)했음에도 東門밖 안락서원에 모셔져있는데 정발공은 부산진에서 殉節했음에도 南門안쪽인 東萊邑城의 안에 있다는 것과 별사에 있는 宋公의 裨將(비장)等(등)은 宋公과 함께 殉節했기에 두 개의 祠堂이 나뉘어 있음을 指摘(지적)하고 함께 같이 配享(배향)함을 奏請(주청)했던 것이다. < 節義를 表彰함에 文武가 따로 있을 수 없고, 尊卑(존비)의 等級을 매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으며> 그 후 迂餘曲折(우여곡절)을 지난 후 그 이듬해 * 1736년(영조 12년) 충렬별사를 撤廢後(철폐후) 없애면서 別祠에 모셨던 모든 位牌(위패)가 忠烈祠로 옮겨지게 되면서 合享(합향)하여 神位가 모두 13位로 擴大(확대)되어 諸神位(제신위)를 忠烈祠本堂과 東廡,西廡(동무,서무)에 合祀奉安(합사봉안)하였다. 그 以後부터는 東萊城에서 같이 殉國(순국)한 良人(양인)들도 모셔졌다.
* 1766년(영조 42년)에 副提學 趙曮(부제학 조엄)에 의하여 多大浦 僉使 윤흥신의 史蹟(사적)이 드러나게 되어 * 1772년(영조48년)에는 多大僉使 尹興信公(다대첨사 윤흥신공)을 安樂書院 忠烈祠本堂에 追加 配享(배향=추배)했고 안락서원의 講堂인 昭崒堂(소줄당)을 대대적으로 補修하였다. 當時 壬亂때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殉節한 2烈女 ‘金蟾(금섬)’과 ‘愛香(애향)’을 위해 忠烈祠의 東門(동문)밖에 별도로 祠堂(사당)을 세워 모셨다. 忠烈祠(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차례의 重修(중수)와 補修(보수)를 하였다.
望月山脈(망월산맥)을 主脈으로 하고, 盃山(배산)을 案山(안산)으로한 壬坐丙向(임좌병향)의 軸線(축선)에 本堂이 세워져 있다. (* 옛 충렬사의 배치모습 참조요함)
* 傳統的(전통적)으로 書院建築(서원건축)의 配置方式(배치방식)은 風水的視覺(풍수적시각)으로 보면 4가지의 守護神(수호신)이 祠堂地域(사당지역)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로 四神砂(사신사)라고 일컫는데 뒷산(北玄武;북현무),앞(朱雀;주작),좌(측룡),우(백호)로 造成(조성)된 같다. 사진이나 配置圖(배치도)를 보면 鄕校와는 다르게 基本的(기본적)인 配置(배치)에 있어서 中心이 되는 穴(혈)자리에 祠堂이 세워진 祠堂重心(사당중심)이 되는 書院의 配置(배치)였던것 같다. 왜냐하면 朝鮮初期以後(조선초기이후)에는 열심히 공부하여 立身揚名(입신양명)하겠다고 했던 書院들은 大部分講堂重心(대부분강당중심)의 書院이 많았으나 朝鮮中期에 들어오면서 대체로 朋黨黨爭(붕당당쟁)이 만연했던 安東地方書院(안동지방서원)들이 大體的(대체적)으로 祠堂重心으로 하는 書院形態(서원형태)가 많았었기에 그래서 朝鮮中期以後의 대부분의 書院들은 祠堂이 穴(혈)자리에 位置한것 같다.
* 1652년(효종3년)에 세워졌던 옛 충렬사안락서원의 당시의 사진모습을 보면 뒤쪽의 萊山(북현무)아래 穴(혈)자리가 되는 곳에 忠烈祠本堂이 位置해 있고 左側龍(좌측룡)은 좌측의 東齋로, 右白虎(우백호)는 우측의 西齋(서재), 前朱雀(전주작)으로 講堂(강당)인 昭崒堂(소줄당)이 있었고, 소줄당의 좌측에 ‘금섬’과 ‘애향’ 두 烈女의 齋閣(재각)이 있었고 正面左右에 東廡와 西廡가 있었으며 西廡의 뒤쪽 즉 소줄당의 우측으로 出入門이 있고 부속건물 ‘고직사’등이 있었으며 앞쪽 저쪽에는 山봉우리가(案山;안산) 보인다.
當時(당시)의 神位(신위;位牌;위패)의 配置(배치)를 보면 忠烈祠本堂의 主壁(正位)의 좌측은 ‘충렬공’ 우측의 ‘충장공’ 두분이었고 正位의 位置에서 볼 때 左側配位(좌측배열)에는 ‘조영규’‘윤흥신’ 우측배위에는 ‘노개방’을 모셨고, 東齋에 ‘문득겸’‘송봉수’‘김희수’ 西齋에 ‘신여로’‘송백’‘김상’을 모셨고, 忠烈祠堂 밖의 앞쪽 講堂이었던 소줄당의 좌측에 ‘금섬’과 ‘애향’의 齋閣을 配置했는데, 훗날 이곳에는 두 의녀와 함께 ‘義烈閣’으로 마련하였고 현재는 충렬사본당 밖의 우측아래에 마련되어 있다.( * 좌측이니 우측이니 하는 方向設定은 살아있는 사람이 본당 앞에서 보았을 때는 반대편이 된다.)
* 忠烈祠 安樂書院의 由來
壬辰倭亂때의 忠節 宋象賢公을 奉祀하기 위해 세운 宋公祠가 賜額(사액)을 받으면서 忠烈祠로 改稱(개칭)되고 敎育기능을 갖춘 서원으로 重建되면서 붙여진 名稱(명칭)으로 朝鮮末期(조선말기)大院君時節(대원군시절) 1864년(고종 2년)書院의 弊端(폐단)을 통감하고 없앤다고 하면서 亂立(난립)됐던 不必要(불필요)한 전국곳곳의 書院들이 헐리는 書院撤廢令(서원철폐령)의 受難(수난)을 당했을 때도 충렬사안락서원은 毁撤(훼철)되지 않고 維持되었던 全國의 47개 書院중의 하나였다. 賜額祠堂(사액사당인)인 忠烈祠의 書院이며 壬辰倭亂때 이 고장(地域)에서 殉節하거나 戰功을 세웠던 忠臣烈士(충신열사)들의 神位를 合祀奉安(합사봉안)한 書院이었고 이곳에 모신 송상현공의 人物됨과 德行(덕행)은 물론 그와 함께 殺身成仁(살신성인)의 정신으로 殉節한 선열들의 나라에 대한 忠節은 國難克服(국난극복)의 敎育場(교육장)으로 命脈(명맥)을 이어왔으며 계속 後孫들에게 가르쳐야할 德目(덕목)으로 宣揚(선양)되어 功臣들의 偉業(위업)을 중히 여겨서 당시 그 대상에서 제외되어 철폐되어 헐리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리고 釜山地域東萊(부산지역유림)에서는 그동안 이 고장과 국가를 지켜내려고 苦戰奮鬪(고전분투)하였던 先塋(선영)들의 뜻을 기리고 받들면서 그 脈(맥)을 지키며 그분들의 學文(학문)과 德行(덕행)을 닦는 道場(도장)으로써 忠烈祠 安樂書院(충열사안락서원)을 精神的(정신적) 지주로 삼으며 400餘年(여년)以上(이상)동안에 每年 春秋(매년춘추)로 祭享(제향)을 奉行하여 왔습니다.
< * 公式的인 祭禮始作年度는 선조 38년 1605년부터 奉享(봉향)되고 있다 >
* 1945년 日帝植民地(일제식민지)에서 解放(해방)될 때 까지는 13位(위)의 功臣이 모셔졌었고 解放以後 40위에 이르러게 되는데, * 1956~1958년 충의단에 奉安되어 있던 별전공신 24位가 모셔졌고 東廡와 西廡에 從位로 奉安된다. 더불어 東萊城에서 기왓장을 던지며 끝까지 倭賊과 맞서다가 죽은 이름 없는 2분의 義女(撤瓦殺賊義女;철와살적의녀)까지 모셔지는데 東門밖의 우측편에는 금섬과 애향의 2烈女之閣과 좌편에는 無名의 2義女(二村女)之閣이 있었다고 한다. * 1976년의 75位에는 녹도만호 정훈장군, 수영의 25인 義兵等 35위가 추가됐고 無名氏(순절한 이름 없는 사람)들과 노비 3명(송공을 지키다 죽은 노비 철수와 매동, 정발장군과 죽은 노비 용월)도 처음으로 모셔졌다.
* 1983년 忠烈祠享祀(충렬사향사)때 安樂書院 증경원장님들이 모여 제관선정 및 祭享準備를 하는 場所로 그리고 重要한 行事때 사용되고있는 昭義堂(소의당)이 建立된다.
* 1991년 새로 밝혀진 13위의 壬亂중에 義兵을 일으켜 적과 抗戰하면서 戰功을 세웠거나 殉節함으로서 선무원종공신의 녹권이 下賜(하사)되신 諸公들 중에 史料의 未發掘(미발굴)로 漏落(누락)되어 그동안 충렬사에 모시지 못했던 先烈들 合祀 * 1996년 추가로 밝혀졌다는 壬亂功臣(임란공신) 3위 * 2003년과 2007년 各一位의 推捧(추봉)으로 現在(현재)는 93位(本殿 89위, 의열각 4위)의 神位(신위)를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 특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곳에 壬辰倭亂當時(임진왜란당시)에 公과 함께 혁혁한 功을 세웠던 礪山宋氏東洲公(여산송씨동주공)님의 直系後孫(직계후손)여섯 분이나 功臣(공신)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 * 추가로 한분은 世德祠;세덕사;에 俎豆;조두; 되고 있음)
* 日帝時代 때는 祠宇(사우)의 補修(보수)와 祭享行祀(제향행사)를 妨害(방해)받아서 頹落(퇴락)했었고 光復後(광복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처 補修(보수)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있던 것을 뜻있는 地域儒林(지역유림)들의 끊임없는 活動(활동)과 觀心(관심)속에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特別指示(특별지시)에 의하여 再整備後(재정비후) 聖域化(성역화)된다.
* 지금 이곳의 모습은 1977년 5월 11일부터 1978년 7월 21일까지 淨化作業(정화작업)으로 境域(경역)은 28,300평의 면적에 이르렀다. 그 以前까지는 東萊儒林(동래유림)에서 管理(관리)하고 있었으나 聖域化以後부터는 釜山市로 移關(이관)되었다. 그리고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7호로 指定(지정)되었고, 忠烈祠本堂의 현판은 박정희대통령의 친서친필 휘호이다.
* 당시 護國先烈(호국선열)들의 神位奉安(신위봉안)은 이때 이곳 忠烈祠 한곳으로 모두 함께 모셔 祭享(제향)하도록 하였고, 그 戰功(전공)에 따라 모셔졌으며 中央壇上(중앙단상)에는 首位(수위)로 東萊府使 宋象賢公(동래부사송상현;정3품)님 釜山僉使 鄭撥將軍(부산첨사정발장군;종3품) 다대진첨사 윤흥신장군(종3품)을 함께 모셨다. 그리고 이때 東西廡(동서무)에 奉安(봉안)되었던 24위의 功臣(공신)의 神位를 首位(수위)의 東西配位로 奉安되고 내삼문안의 서편에 義烈閣(의열각)을 세워 2烈女와 2義女를 合祀(합사)하였다.
이렇게 지금의 忠烈祠本堂(충렬사본당)에는 東萊府(동래부), 釜山鎭(부산진),多大鎭(다대진) 및 釜山浦海戰(부산포해전)等, 당시 釜山地域(부산지역)에서 戰死(전사)한 先烈(선열)들 無名勇士(무명용사), 義兵(의병)으로 活躍(활약)한 분들이 송상현공과 함께 모셔져 계신다.
* 忠烈祠의 祭祀는 日帝時代(일제시대) 36년 동안 때는 서슬이 시퍼렀던 日本警察(일본경찰)의 갖은 懷柔(회유)와 脅迫(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夜半(야반) 월담하여 隱密(은밀)히 奉行(봉행)하는 苦楚(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러한 日帝强占期(일제감점기)때 뜻있는 사람들과 功臣(공신)들의 後孫(후손)들은 忠臣烈士(충신열사)들과 祖上(조상)님들 이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日帝의 嚴(엄)한 監視(감시)속에서 라도 祭祀를 지낼 때 그들의 妨害(방해)를 피해 뒷산으로 가서는 祭祀床(제사상)의 불빛을 막기 위해 검은 ‘치마단’으로 四方(사방)으로 불빛을 막고 한발자국이라도 祠堂(사당)의 가까이에 가서 祭祀를 모실려고 日本憲兵(일본헌병)까지 動員(동원)되기도 했던 團束(단속)을 피하여 忠烈祠의 뒷산에서 祭祀床(제사상)을 마련하여서는 들고 지금의 명륜동 뒷산까지 하루에 몇 번이고 쫓고 쫓기며 왔다 갔다 하며 밤을 세워가면서도 祭祀를 모시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그런데 오늘날에는 聖地化(성역화)가 되어 잘 가꾸어져 있고, 우리나라가 存在(존재)하는 한, 일종의 불천위로 國家에서 釜山儒林에서 忠烈祠安樂書院(충렬사안락서원)院長을 初獻官(초헌관)으로 하여 그 뜻을 기리며 祭祀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언제든지 出入(출입)할 수 있는 이곳 忠烈祠와 우리의 德山齋,世德祠(덕산재,세덕사)等과 같은 地域(지역)護國(호국)의 祠堂같은 곳에는 觀心을 갖이지 않고 당연히 肯志(긍지)와 自負心(자부심)을 가지고 追慕行事(추모행사)에는 마땅히 參與(참여)하여야 함에도 協助(협조)조차도 하지 않고 혹시 外面(외면)하는 경우가 없도록 부디 우리들은 周邊(주변)의 젊은이들과 後孫들에게 알리고 가르쳐서 風前燈火(풍전등화)와 같았던 국가와 우리지역의 위기 속에 救國의 一念(구국일념)과 祖國을 지키기 위했던 殺身成仁(살신성인)의 情神, 이러한 자랑스러운 우리 고장의 先賢(선현)들과 조상님들의 얼을 그들에게 심어주면서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 원래 宗廟大祭(종묘대제)는 孟月(맹월)이라하며 1, 4, 7, 10월에 지내며 鄕校(향교)나 書院(서원)은 仲月(중월)로 2, 4, 8. 11월에 지내는데 忠烈祠祭享(충렬사제향=忠烈大祭)은 儒林(유림)들에 의해 매년 陰曆(음력) 2월과 8월 中丁日(중정일)에 그리고 5월 25일에는 釜山市에서 市民들의 精誠(정성)을 모아 祭享(제향)되고 있으며 보기 힘든 謹嚴(근엄)한 儒林祭享(유림제향)의 形式美(형식미)는 극치를 이룬다.
* 요즈음도 鄕校(향교)를 根據(근거)로 하여 釜山市儒道會員들은 忠烈祠를 出入하면서 孔孟의 가르침에 따르는 모임이 있는데 이들을 儒林이라고 칭한다. 충렬사제향의 集禮와 大祝, 陳設과 謁者(알자)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제 제 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분들에 의해 충렬사제향의 그 원형이 傳承되어 오고 있다.
義烈閣(의열각)은 殉國(순국)한 義女(의녀)들을 모신 祠堂(사당)이며, 동래성전투에서 왜적과 기왓장으로 싸웠던 無名(무명)의 두 義女(의녀)와 당시의 東萊府使宋象賢公(동래부사송상현공)과 釜山僉使 鄭撥將軍(부산첨사 정발장군)을 따라 殉節(순절)한 金蟾(금섬)과 愛香(애향), 두 烈女(열녀)등 모두 네 분의 位牌(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모두 함께 儒林(유림)에서 春秋(춘추)로 음력 2월과 8월 中丁日(중정일)에 연중 두번 충렬대제와 함께 祭祀(제사=제향)를 지내고 있다. <* 行義能終을 義라 하고 剛克爲伐을 烈이라함)
* 昭崒堂(소줄당)은 1652년(효종3년)에 敎育(교육)의 道場(도장)으로 建立한 講堂(강당)으로 堂號(당호)는 韓愈(한유)의 夷齊頌(이제송)에 나오는 싯구의 첫머리글자를 따서 지었으며 壬辰倭亂(임진왜란)때 先烈(선열)들의 忠節(충절)은 日月(일월)보다도 밝고 泰山(태산)보다도 높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소줄당 주련의 글귀는
使君忠節冠千齡 ; (사군충절관철령) 송부사의 충절은 천년에 뛰어났는데,
古廟秋風木葉零 ; (고묘추풍목엽령) 옛 사당에 가을바람이 불어 낙엽이 지는 구나,
精返雲天添列宿 ; (정반운천첨열숙) 넋은 하늘로 돌아가 별이 되고,
氣成河獄護生靈 ; (기성하옥호생령) 장한기개는 산이되고 강이되어 백성을 護衛하도다,
深羞徹地何年雪 ; (심수철지하년설) 깊은 부끄러움은 땅에 사무치는데 이를 어느
해나 씻을 것 인고,
怒髮衝冠一夜星 ; (노발충관일야성) 밤새도록 잠 못 이루어 성난 머리카락이 관을
찌르는구나.
* 記念館(기념관)은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의 戰況(전황)을 보여주는 6폭의 記錄畵(기록화)와 泉谷(천곡=宋公의 號)수필등 古書(고서),갑옷,致祭文(치제문)등의 遺品(유품)을 所藏,展示(소장,전시)하고 있다. 記念館展示物의 殉節圖(순절도)는 임진왜란 당시의 戰鬪狀況(전투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동래부순절도는 1709년(숙종35년)에 동래부사 권이진이 當時(당시) 無名의 畵工을 시켜 그린 것이며 부산진순절도는 1760년(영조36년) 동래부사 洪名漢(홍명한)이 畵工(화공) 卞璞(변박)에게 옛 순절도를 模寫(모사)하도록 한 것으로 歷史를 考察(고찰)하는데 重要(중요)한 資料(자료)로 쓰이고 있다. 戰況記錄圖(전황기록도)는 임진왜란당시 東萊釜山地方에서 벌어진 격렬한 戰鬪狀況(전투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낸 6폭의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동래성수사결의도에는 宋象賢公의 名言<명언=公의 왜적과 싸울 결의와 호국정신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나타내 보이는 말씀>인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을 쓴 팻말을 倭軍(왜군)에게 던져지며 東萊城(동래성)을 죽음으로 死守(사수)하려는 결연한 意志(의지)를 表現하고 있다.
* 忠烈大祭 祭享의 節次
1, 望報(망보)
祭享(제향)의 主體(주체)는 釜山地方儒林들과 忠烈祠에 모셔진 功臣(공신)들의 後裔(후예)들에 의해 받들어 올려지고 있다. 모신 位牌(위패;神位;신위)가 많기 때문에 가장 重要한 일이 獻官과 執事들을 定하는 일인데, 昭崒堂(소줄당)에서 행사 10일전 쯤(鄕校祭享하루이틀後)에 時(지금현재)院長, 증경원장들이 모여 議論(의논)하는데 이날을 望報日(망보날)이라고 한다. 祭官(제관)은 원래는 한 門中(문중=집안)에서 可能限(가능한) 2인 이상 薦擧(천거)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봄에 春季祭享(춘계제향)을 했으면 秋季祭享에는 맡지 않도록 薦擧(천거)하지 않는 것으로 原則(원칙)으로 하면서, 祭官이 되는 名譽(명예)를 각 고을유지들에게 미치도록 했다. 그만큼 行祀(행사)때의 祭官(제관)으로 薦擧(천거)되는 것을 名譽(명예)로 생각했었다고 하며 지금 역시 忠烈祠祭享(충렬사제향)의 祭官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祭官과 齋生(재생;執事;집사들)을 뽑을 때는 우선대상자의 8촌까지 初喪(초상)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제외된다.
諸執事(제집사)와 祭官(제관)들은 일단 初望(초망)이라고 하여 1차적으로 祭官들을 決定(결정)을 한다. 이렇게 初望이 決定(결정)되면 각 고을의 該當者(해당자)에게 연락을 하기위해 望報를 쓰고 각 고을과 그 門中에 傳達(전달)을 한다.
望報(망보)에는 獻官 3사람과 集禮,大祝,學生,陳設,謁者(집례,대축,학생,진설,알자)에게 보내는 것은 한지 2절지를 쓰고 그 밖의 諸執事(제집사)들은 4절지 望報를 쓴다. * 選定(선정)된 祭官(제관)들에게는 원래 붉은 보자기에 싼 망보를 전달했는데, 옛날 동래고을에는 7개면이 흩어져 있었고 ‘고직이’나 ‘원직이’를 맡은 사람이 일일이 걸어서 가야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望報를 傳達(전달)하려면 여러 날이 걸렸었다고 한다.
望報(망보)가 到着(도착)하면 祭官(제관)은 衣冠(의관)을 淨齋(정재)하고서 大廳(대청)마루에 초석을 깔고 井華水(정화수)를 한 그릇 떠올린 床(상)을 차려서 望報를 올려놓고 절을 한 다음 정중히 받아들인다. 祭官은 우선 몸과 마음이 바르고 행실이 곧아야하며 가능한 德望(덕망)있는 修身齊家(수신제가)가 잘 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祭享(제향)의 神聖(신성)함을 위해서 祭官을 選定(선정)할 때 다루는 德目(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망보에는 春季(춘계) 또는 秋季享祀(추계향사)의 表示(표시)가 되어있고 어떤 職責(직책)을 맡으라는 것이 표시되어 있다.
* 입재일 전날에 고사를 지내는데 2시경부터 시작한다.
2, 入齋(입재)
享祀(향사) 하루전날을 入齋日(입재날)이라고 한다. 이날은 내일 享祀를 모실 準備(준비)에 차질이 있는지 祭需(제수)는 모두다 장만이 되었는지 祭官(제관;헌관)과 諸執事(제집사)들은 望報(망보)를 받고 별탈이 없는지를 點檢(점검)하고 내일 있을 祭享(제향)의 節次(절차)를 習禮(습례)하는 날이기도 하다. 워낙 嚴肅(엄숙)해야 하며 節次가 까다롭고 嚴格(엄격)하기도 하여 失手(실수)를 하면 그것 자체가 先烈先靈에 대한 缺禮(결례)와 不敬(불경)이기 때문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기위해 選定(선정)된 祭官과 執事들 諸生(제생)들에게는 習禮(습례;習儀;습의)를 통해 注意(주의)를 환기시키도록 가르치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동안 購入(구입)하며 準備(준비)한 祭需를 이날 장만한다.
忠烈祠(충렬사)의 祭需(제수)는 一般閭閻(일반여염)집의 祭需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祭需거리는 大部分이 날것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단지 魚脯(어포)나 肉脯, 肉醢(육해)는 절여서 쓸 뿐이고 익히거나 굽거나 삶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날것으로 祭需를 쓰는 理由(이유)는 죽은 것을 쓰는 것과 산(生)것을 쓰는 것의 차이가 있는데, 대개 一般的으로 집안에서 祖上을 모실 때에는 죽은 것(熟說;숙설)을 사용하지만 그러나 宗廟社稷(종묘사직)이나 聖人(성인)이나 鄕校, 賜額(사액)을 받은 書院, 賜額을 받았거나 그와 類似(유사)한 身分의 始祖나 入鄕祖(입향조)로서 훌륭했던 先賢(선현)들에게 祭祀를 올려 지낼 때는 살아있는 生으로 쓰는데 이러한 生說(생설)은 祭祀(제사)란 그러한 어떤 生氣(생기)를 빌리고자 하는 것이므로 날것을 써야한다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 朱子語類(주자어류)에 祭祀(제사)를 지낼 때 피(血)와 생고기를 쓴 것은 그 生氣를 빌리고자 했을 뿐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옛사람들이 祭祀를 지낼 때 尸(시)를 세웠는데 이는 살아있는 사람의 生氣를 가지고 가서 神靈(신령)에게 접하게 한 것이다. ‘가례 設饌圖(설찬도)’에서는 이른바 魚肉이라는 것은 바로 血腥(혈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마땅히 生魚와 生肉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禮記’에 보면 ‘血食君子(혈식=군자는 날고기를 歆饗;흠향한다)’라는 글이 있다. 또한 尙古(상고)의 뜻으로 古禮(고례)를 尊重(존중)하고 根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血食을 올린다는 것은 그러한 生氣의 根源(근원)이 되는 部分, 즉 이러한 것을 完全하게 또 精誠(정성)스럽게 마련한다는 것이다. 丘濬(구준)의 家禮儀節(가례의절)에는 犧牲(희생)을 혹 羊(양)으로 하거나 돼지, 닭, 거위, 오리로 한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체례’라고도 하는데, ‘체례’라고 하는 것은 弟子가 스승에게 배우려고 할 때는 禮物을 가져간다는 의미이고 흔히 忌祭(기제)를 지낼 때와 같이 아침저녁으로 드리듯이 飮食(음식)을 올려서 자시도록 하는 禮와는 다르다는 것이 된다. 체례라고 하는 것의 경우에는 이렇게 飮食을 자시도록 하는 것과는 다르며 ‘선생님 제가 먼 곳에서 선생님을 배우려고 찾아왔습니다, 우리고을에는 이러한 것이 나옵니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라고 하며 請(청)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앞뒤의 禮가 다르기 때문에 飮食(음식)이 다른 것이다. 라고 한다. 이렇게 다 장만한 祭需는 초백이(대나무나 짚으로 만든 상자그릇)에 차곡차곡 담아서 내일 아침 陳設時(진설시)에 가지고 간다.
入齋日午後(입재일 오후)에는 망보를 받은 祭官들은 忠烈祠의 昭崒堂(소줄당)에 모인다. 내일지낼 享祀(향사)에 대한 마지막 點呼(점호)를 하는 날이며 요즘은 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또 하나는 祭需중에서 가장 가운데 올려지는 犧牲(희생)에 대한 監牲禮(감생례)를 한다. 昭義堂 앞마당에서 하는데 요즘은 享祀 이틀 전에 元老들이 모여 告祀를 지내는 것으로 代替하기도 한다. 監牲이란 廟祠(묘사)에 祭祀를 드릴 때 통 生채로 바치는 犧牲物이 祭需로서 적절한 지를 살피는 儀式의 禮를 지내는 것인데 犧牲이 오면 犧牲섶을 깔아놓은 다음에 集禮의 笏記(홀기)에 따라 獻官과 執事들이 움직인다.
* 獻官(헌관)과 執事(집사)들은 단 옆에 서시오, (부로~) / 진생희생을 가져오시오, / 축 삼순, /大祝(대축)은 執事(제생)들과 세 바퀴를 돌아 살피시오, / 거모(털을 뽑으시오)=이때는 세 번 뽑는 시늉을 한다, / 그 후 大祝은 읖을 하고서 獻官에게 충~충~충이라고 세 번을 크게 말하는데 이것은 充實(충실)한가를 물어보는 뜻이다, / 獻官은 確認後(확인후) 腯(돌;살찌다;盛하다)~腯~腯을 웨친다,(살찌고 좋다는 뜻이다) / 그 뒤에 獻官과 執事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掌饌(장찬)은 犧牲(희생)을 부엌으로 잡아간다. / 그 후 禮畢(예필)로 監牲禮(감생례)를 마친다.
이러한 儀式(의식)을 마친 후 오후 5시쯤(요즘은 3시반)이 되면 點呼(점호)를 하는데 ‘相揖禮(상읍례)합시다’를 세 번 告한후 ‘開座(개좌)하리오’를 3번 告하며, 이 時間이 지나면 出入門을 잠그고 일체 넣어주지 않기 때문에 매우 嚴格(엄격)하게 時刻(시각)을 지켜 點呼하고 여기에서 또한 八寸(팔촌; 3종)까지 喪(상; 복을 입게되는것)을 당했다 던지 本人의 몸이 아프다던지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推薦(추천)을 받는데 이것을 敦薦(돈천)이라고 한다. 敦薦이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내일 행사에 參與(참여)하는 祭官,執事齋生(집사재생)을 確定(확정)짓는다. 이것을 ‘爬定(파정=所任을 定함=分定)’이라고 한다. 爬定이 確定이 되고나면 望報날에 적었던 초망(望記;망기)를 보고 다시 고쳐 쓰게 된다. <망보에는 안락서원 院中이라고 쓰는데 入齋日날 敦薦;돈천;때는 院長의 이름을 쓰지 않고 院中이라고 쓴다> 爬定이 作成되고 나면 ‘파정지’를 걸어두고 각자가 자신이 무슨 職分인지를 알게 한다. 이 名單은 忠烈祠의 오랜 전통인 祭享參祭錄(제향참제록)에 記錄되어 後世에 남기게 된다. 忠烈祠祭享의 祭官이 되고나면 벌써 禮遇(예우)가 달라진다. 우선 祭官이 되고나면 동상방에 앉게 된다. 그 외의 元老들과 前任 安樂書院院長을 歷任(역임)한분들은 西上房에 앉고 諸執事들은 大廳(대청)마루에 앉게 된다.
이러한 東西房의 區分(구분)은 역시 享祀에 임하는 祭官들의 위상을 높게 함으로서 그 偉容(위용)을 세우고 祭享의 嚴肅(엄숙)함을 더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待遇(대우)의 區分은 저녁상을 받는데 에서도 區分된다. 祭官들은 個個人이 獨床(독상)을 받는다.
그러나 西上方의 元老들과 其他齋生(기타재생)들은 모두 兼床(겸상)을 받는다. 이것 역시 祭官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入齋日에 모인 祭官齋生들은 과거에는 이날 저녁 밤을 모두 이곳에서 宿食(숙식)을 해야 했었다. 과거에는 거리가 멀었고 교통편이 불편하여 이곳에서 먹고 자고 그 다음날 이후에야 각각의 고을로 돌아갔었다.
3, 祭享(제향)
祭享이 擧行(거행)되는 陰曆(음력) 2월과 8월 中丁日(중정날)祭享日(제향당일)아침에의 忠烈祠境內(충렬사경내)에는 마치 降神(강신)이라도 한 듯한 瑞氣(서기)가 넘쳐흐르는 느낌을 주는 듯이 嚴肅(엄숙)한 雰圍氣(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침 7시가 되면 祭官諸生(제관제생)들은 衣冠(의관)을 淨齋(정재)하고 祭享準備(제향준비)를 하는데, 陳設(진설=祭物을 차리기)을 위해 祭物(제물)이 담겨있는 ‘초백이’를 本堂(본당;本殿;본전)으로 옮긴다. 獻官(헌관), 集禮(집례), 大祝(대축), 陳設(진설), 謁者(알자), 掌饌(장찬)의 뒤를 諸生(제생=執事)들이 嚴肅(엄숙)하고 節度(절도)있게 祭需(제수)와 초석들을 가지고 禮法(예법)에 따라 本殿(본전)으로 간다.
節次(절차)와 禮法(예법)에 따라 正殿祭閣(정전제각)안에서는 陳設圖(진설도)에 의해 祭物들이 바르게 陳設된 後에는 習禮(습례)를 하며, 그동안 大祝은 本殿앞에서 初獻官(초헌관)이 엎드려 있고 亞獻官(아헌관) 終獻官(종헌관)과 分獻官(분헌관)들이 入侍(입시)하는 가운데 그 옆에 조심스럽게 엎드려서 奠祝(전축=祝板위에 祝文作成)을 한다.
<* 이렇게 祝文을 本堂(本殿)앞에서 조심스레 쓰는 것은 神(신;혼령;魂靈)에게 嚴肅(엄숙)하게 告한다는 뜻으로 一般家禮(일반가례)에서도 祝文을 쓸 때는 집에 있는 祠堂(사당)앞에 가서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行爲(행위)는 神位에게 告하는 것이 되며 그 앞에서 祝文을 쓰는 것이 禮法(예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初獻官(초헌관)은 오늘 祭酒(제주)로 사용할 술을 點檢後 항아리에서 술통으로 들어내어 準備(준비)한다.
<* 祭享에서 사용되는 술에는 3가지가 있는데 醴齊(예제)라고 하여 周禮(주례)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齊(제)의 하나로 술이 다 되어서 술과 술찌개미가 서로 어울러져있으며 동동주와 같은 것으로 술이 完成(완성)되어나가는 順序(순서)인 맨 처음에 술을 뜨는 것으로 흔히 하룻밤사이에 익어가는 一宿酒(일숙주) 혹은 鷄鳴酒(계명주)라고도 불리우고도 있는데 단술이 아닌 걸러지 않은 맑은 술로서 初獻官이 올릴 때 쓰는 것이며 요즘은 便宜(편의)에 의해 주로 단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盎齊(앙제)는 역시 周禮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의 齊의 하나로 술이 다 되어 충분히 잘 익은 희게 된 하얀 술로, 흔히 파의 밑둥치처럼 빛깔이 희다고 하여 蔥白酒(총백주)라고도 하는데, 亞獻官(아헌관)이 올릴 때 사용하며, 淸酒(청주)는 술맛이 진한 것으로 終獻官과 分獻官이 올릴 때 쓰는 술이다.> * 이러한 술(酒)들이 祭享行祀時(제향행사시)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인지 술독과 술항아리위에다가 표시를 하여서 술이 바뀌거나 잘못 올리는 것을 防止(방지)하고 그러한 혼돈되는 事例(사례)가 없도록(일어나지 않도록) 管理(관리)를 한다.
忠烈祠에서는 사용하는 祭器(제기)에도 그 숫자와 크기 형식이 嚴格(엄격)하게 規定(규정)되어 있으며 神位를 中心으로 左六籩, 右六豆(좌육변,우육두)를 쓰는데, 먼저 神位를 중심으로 左側(좌측)이며 앞에서 볼 때는 오른쪽(우측)에는 대나무로 만든 祭器가 設置되는데 이곳 6籩에는 魚脯(어포)를 陳設時에 대구를 통째로 말려서 등이 보이도록 놓는데 오징어나 명태를 쓰기도 한다. 肉脯(육포)는 쇠고기를 脯로 떠서 말린 것이며, 黃栗(황률)은 익은 밤, 胡桃柏子(호도백자)는 호두와 잣이며, 乾棗(건조)는 익은 마른대추, 杏仁(행인)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銀杏(은행)을 쓴다. 그리고 또 神位를 중심으로 右側(우측)이며 앞에서 볼 때 왼쪽(좌측)이 되는 곳에는 木器로 만든 祭器로 6豆의 魚醢(어해)는 조기를 소금에 절인 것을 쓰며 芹菹(근저)는 미나리를 아래위로 잘라 4치 크기로 만든 것을 쓰며, 菁菹(청저)는 무우(순무)를 4치 크기로 깍두기처럼 잘라 썰어 만든 것을 鹿醢(녹해)는 사슴이나 노루고기를 말린 뒤에 얇게 쓸어 누룩과 소금물에 썩어서 술을 담아 백일동안 항아리에 넣어두어 만든 것을 썼는데 요즘은 쇠고기절인 것으로 대신 사용한다. 塩(염)은 소금을 形象化(형상화)하여 놓았는데 요즘은 그냥 소금을 쓴다. 韭菹(구저)는 정구지나 파를 4치 크기로 만든 것을 놓았다. 籩(변)과 豆(두)에 담은 물건은 물과 흙에서 난 新鮮(신선)한 것이어야 하며 加味(가미), 선미로 즉 사람이 加工(가공)한 飮食(음식)은 쓰지 못한다고 禮記(예기)에 記錄(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이 되는 중앙부위 左側(좌측)의 簋黍(궤서)는 놋그릇에 찐 수수나 피를 담고 그 옆 右側의 簠稻(보도)는 역시 놋그릇으로 쪄진 쌀이나 기장을 담는다. 그 아래가 되는 中央에는 豕腥(시성)으로 豚(돈;돼지머리)를 놓고 아래에 설치되는 幣篚(폐비)는 대나무바구니(광주리)로 폐백 드리는 물건으로 ‘갈베수건’을 담는다.
이렇게 本殿(본전)에 陳設(진설)을 할 동안 일부 집사들이 4분의 神位가 모셔진 義烈閣(의열각)에도 陳設을 한다. *‘애향과 금섬’ 그리고 東萊城戰鬪(동래성전투)당시 지붕위에 까지 올라가서 기와장을 던지며 抗戰(항전)하다 죽은 이름 모를 2烈女를 모시고 있다.
이렇게 陳設과 전축이 끝나면 本殿祭閣(본전제각)의 門을 닫아놓고 다시 내려와 사시인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奉行하는데 忠烈祠에서는 10시에 奉行한다.
< * 이곳에 모셔진 先賢聖賢(선현성현)들께서는 그렇게 자기 自身의 生命까지도 草芥(초개)같이 전부 던져 죽어가면서까지 國家와 民族을 그리고 이 지방을 지키기 위했던 그러한 위대한 정신들은 우리 民族史가 存在하는한 계속 귀감으로서 後學들을 가르쳐 나아가야할 하나의 敎訓(교훈)의 場所로서 그 가르치는 標本(표본)으로의 그 根本的인 것이 되는 現場이기 때문에 더욱더 崇尙心(숭상심)을 높이게 되고 또 同參(동참)하며 많은 사람들 모두가 參席參與(참석참여)하면서 지키고 배워야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이곳주변의 地方뿐만 아니라 民族의 敎育(교육)의 道場(도장)으로 아주 重要(중요)한 곳이다 忠烈祠祭享(충렬사제향)이 지금까지 흐트러짐이 없이 嚴肅(엄숙)하게 치루어져 오고 있는 그 밑바탕에는 安樂書院이 있었고 이곳 書院(서원)이 主體(주체)가 되는 東萊(釜山)儒林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사시가 되면(요즈음은) ‘昭義堂(소의당)’에서 祭服(제복)을 갖추어 입고 옮겨 ‘昭崒堂(소줄당)’에 모여 衣冠(의관)을 整齊(정제)하고 祭享(제향)이 始作되는 10時가 되기를 기다려 時間이 되면(원래는 홀기에 따라) 먼저 謁者(알자)가 맨 앞에 서서 獻官(헌관)들과 諸執事(제집사)들을 本殿(본전)으로 引導(인도)해 올라간다. 集禮(집례)의 笏記(홀기)에 의하여 祭享이 始作된다. ( * 忠烈祠 祭享笏記(충렬사 제향홀기)를 참조요함.)
獻官以下諸執事 各服其服 俱就 門外位(=헌관과 모든 집사는 의복을 정제하고 문밖에 나아가서시오) 忠烈祠에서는 本殿의 계단아래 (앞에서 보아서 우측에)서 있음.
初獻官에 의한<진설된 것이 혹여 잘못 놓여있는지 禮法에 어긋나게 되어 있는지 법식으로 차려져 있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 되는> 點視陳設(점시진설)後 이어서(學生就門外位後 入就位)이번 祭享에 모든 節次(절차)와 規範(규범)을 禮法으로 행하는지 笏記(홀기)를 틀리게 부르지는 않는지 술잔을 올릴 때 예법을 따르는지를 監察(감찰)하고 살펴보는 學生 2명 제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大祝과 陳設 2사람과 각종소임을 갖인 執事들이 再拜後(재배후) 신성한 祭物을 다루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는 儀式(의식)인 盥手帨手(관수세수)후 各執事들은 대축과 진설을 따라 殿閣(전각)의 右側階段(우측계단)으로 합족을 하며 本殿으로 올라들어 가는데 자기가 맡은 役割(역할)을 위해 각자의 位置에 자리한다. 그리고 陳設(진설)과 執事들에 의해 술잔을 딲아서 神位 앞의 床(상)위에 올리고 大祝과 執事들에 의한 點燭(점촉),開櫝擧盖(개독거개)後 殿閣內의 각자 任務가 완전히 準備(준비)되면, 謁者는 獻官들을 모시고 제자리로 한 후 初獻官의 왼쪽으로 나아가서(白有司 謹具 請行事) 各部署(각부서)를 擔當(담당)하는 사람(責任者)들에게 ‘행사 아뢰오’를 큰 소리로 세 번 외치며 아뢴다(아뢰며 여쭌다). 그리고 謁者(알자)는 제자리로 간다. 이렇게 행사가 시작됨을 公式的으로 알리고 나면 祭禮樂器(제례악기)가 演奏(연주)되면서 祭享이 시작되며(獻官及 學生 皆 再拜) 初獻官,亞獻,終獻,分獻官들이 學生 2명과 함께 神(靈)殿에 再拜를 한다. <* 祭禮樂은 省略(생략)되기도 한다.>
(이때 學生은 獻官들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再拜後에는 제자리로 還復位를 한다)
그 후에 參祭者一同拜禮가 있고, 行奠幣禮(행전폐례=幣帛;폐백;을 올리는 행사)가 시작되는데 謁者는 初獻官을 마주보고는 읍을 한 후에 本殿의 神位前으로 引導하며 初獻官은 盥手帨手後 忠烈公 神位前 跪(궤=꿇어앉는다)후, 焚香禮(분향례=神을 모셔오는 降神儀式)를 하며 奉香奉爐(봉향봉로)에 의한 三上香과 함께 이어서 大祝에 의한 ‘幣篚奠于(폐비전우)神位前’이 奉行됨된다. 모든 順序(순서)는 忠烈公 宋象賢님에 이어서 충장공 정발과 윤흥신공님의 순서로 봉행함. <* 옛날에는 東萊府使가 官服(관복)을 입고 初獻官의 禮를 행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安樂書院時院長이 初獻官으로 행하고 있다>
< *奠幣禮혹은 獻幣禮라는 것을 우리가 古代祭祀(고대제사)에서 음미해볼 수 있는 있는 것은 사람이 입고 쓰는 그러한 貴物(奇物)을 드린다는 것으로 하나의 織物(직물)이기 때문에 工藝品(공예품)인 것이 된다. 그런가하면 옛날에는 주력이라고 해서 寶石(보석)같은 것을 올리기도 했고 또는 鑛物質(광물질)적인 工産品까지 올리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지만 그 原因(원인)은 天地自然을 調和(조화)롭게 하여주신 天地神明(천지신명)에게 있다고 하여서 ‘우리가(에게) 이러이러한 것이 있다고 하며 보여주는 것이 되며, 흔히 명주나 삼베모시나 이러한 것들 絹織物(견직물)등으로 옷감을 짜서 입는 그러한 것을 선물로 드리는 것이 된다.>
三上香으로 降神(강신)을 請(청)하고 幣帛(폐백)으로 禮物을 올린 그 後 이번에는 술을 올린다. 初獻禮로 오른쪽의 奉爵(봉작)이 盞(잔)을 들고 司罇(사존)의 位置로 가서 獻官의 立會로 司尊(사준)에게서 술을 받아서 獻官의 定座자리 (우측)오른쪽에서 가능한 獻官보다 낮은 位置로 앉아서 獻官에게 盞을 올리면 獻官이 받아서 읖을 한 후 왼쪽(좌측)의 奠爵(전작)에게 주며 奠爵은 그 盞을 받아 恭遜(공손)히 祭床(제상)에 神位前에盞을 올린다. 이때 左右執事(좌우집사)인 奉爵,奠爵(봉작,전작)은 盞을 獻官에게 주거나 받거나 할 때는 서서 있는 姿勢(자세)로 있으면 아니 되고 언제든지 꿇어앉아서 주고받는다. < * 이때 執事들의 姿勢模樣(자세모양)이 獻官보다 낮아야한다>
首位正位가 되는 충렬공과 충장공,윤흥신공에게 次例로 初獻官은 禮齊의 盞(醴酒)을 올린 후에 忠烈公의 神位앞으로 와서 끓어 앉고 大祝은 축문을 읽으며 告하게 된다.
祝文(축문)의 內容(내용)은 大略(대략)보면 “行 東萊府使 贈 左贊成 諡 忠烈公,..충장공,.. 다대첨사윤공 伏以(복이=神位앞에 엎드리나이다. 엎드려 생각 컨데) 孔曰殺身(공왈살신=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몸을 죽인다고 했고), 孟曰捨生(맹왈사생=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생명을 버린다고 하셨는데=삶을 버리고 목숨을 버리고), 義絶凜凜(의절늠름) 義理節槪가 늠름하여 百代英盛 100대 동안(영원히 오랫동안) 그 靈靈의(英雄的;영웅적;인 소리들이)名聲이 (殺身成仁의 情神이) 전해질 것이옵니다. ....., 牲幣禮齊(생폐예제) 산(牲;생)祭物과 폐비(비단과 화폐) 醴酒(예주=맑은술)을 가지런히 하여 式陳明薦 以(식진명천이)로 格式에 맞추어 진설하여(베풀어) 정성껏(밝게) 올리나이다. 東萊府,釜山鎭,釜山浦,多大浦殉節(순절=충절을 위하여 죽은 목숨을 버림) 諸公(功臣들), 壬辰起<임진기=임진란에(스스로 자발적으로)분연히 일어난 사람>, 討賊(토적=역적을 토벌함;도둑을침)公臣, 水營義勇들께서는 함께 配享하였아오니 바라옵건대 歆饗(흠향)하시옵소서(마음껏 드시옵소서).
그리고 亞獻禮와 終獻禮, 分獻禮를 행한다. (* 忠烈祠祭享笏記참조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