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의 ‘즐거운 지식’에서 만난 인간 군상
1. ‘즐거운 지식’에서의 지식
우리는 늘 ‘지식’이라는 것에 대해 갈망을 느낀다. 우리는 복잡한 사회현상 속에서 자신의 방어기제로 활용하기 위해 ‘지식욕구’를 충족시키며 또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다. 개인이 지식욕구를 갖는 분야는 자신의 관심사나 직업, 학문 분야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니체가 말하는 지식은 새로운 지식의 눈을 뜨게 한다.
니체의 ‘즐거운 지식’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저서 중의 한 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저서 중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니체의 대표작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 ‘이 사람을 보라’, ‘서광’ 등과는 다른 ‘기쁨의 학’을 ‘즐거운 지식’에서 제공해준다.
이는 니체 자신이 이 책의 제목을 ‘쾌락학(Die Frohliche Wissenschaft)’이라고 명명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쾌락학은 단순히 동성애적인 쾌락의 의미를 떠나 모든 심오하고 체계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엄격한 노력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니체가 말하는 쾌락적인 것은 지혜가 아니라 학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학문’은 엄숙, 규율, 엄격 등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학문을 지식욕구의 충족 과정이거나 지혜의 샘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니체의 ‘즐거운 지식’은 크게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라는 제목의 모두 63개의 단편 시(詩)이다. 마치 명령조의 어구들로 가득 찬 이 시들은 이 시대를 사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로 들린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1부에서 5부가지로 나누어져 마치 백과사전 형식의 니체의 ‘지식’이 현란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재해석이며 도전적인 내용들이다. 세 번째 부분은 ‘프린스 보켈프라이의 노래들’이라는 제목의 비교적 긴 14편의 장편시가 에필로그처럼 장식돼 있다.
이 보고서는 이 가운데 두 번째 부분의 제1부(63~115쪽)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들이 갖고 있는 군상의 모습을 정리하고 그 느낌을 작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니체의 이야기는 지식에 대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 가식을 털어낸, 꾸밈새 없는 진실이라는 점에서 새로움을 더해준다.
2. ‘즐거운 지식’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들
1. 존재의 목적을 일깨우는 교사(敎師)
인간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든 악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든 인간은 자신의 종을 보호유지하기 위해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본능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종과 모든 무리지어 살려는 군축적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종이 전부이며 개인은 언제나 무(無)에 다름없다라는 명제, 이것이 인간성 그 자체에 결합되어 각자에게 늘 이 최종적인 해방과 무책임에의 길이 열릴 때, 그 때에는 ‘즐거운 지식(gay science)’만이 남게 될 것이다.
최고의 인간도 최하의 인간도 마찬가지로 지배하고 있는 저 충동, 종의 보존의 충동은 때로 정신의 이법이나 정열로서 분출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 위대한 목적의 교사들 각각을 홍소와 이성과 자연이 지배하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비웃음과 눈부시게 화려한 지혜뿐만 아니라, 모든 탁월한 비이성(非異性)을 지닌 비극도 종을 보존하는 수단이 되며, 필요한 것이다.
2. 지적양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것을 믿으며 그에 따라 살아간다. 그에 대해 찬반을 논할 궁극적이고도 확실한 이유에 대한 깨달음 없이, 또는 그와 같은 이유를 구할 노력조차 하려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부조화의 조화상태, 생존의 놀라운 불확실성과 애매함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 의문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경멸하는 바로 그것이다.
3. 고귀와 비속
고귀한 인간은 ‘비이성적’이다. 왜냐하면, 고귀하고 관용적이고 희생적인 인간은 진실로 자신의 충동에 따르며, 그 순간 그의 이성은 멈추기 때문이다. 고귀한 인간의 취미는 예외적인 것으로 향한다. 통상 인기가 없고, 뭔가 달콤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에로 향하는 것이다. 고귀한 인간은 독특한 가치기준을 지니고 있다. 대개의 경우 그는 자신과 같은 정열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으리라는 신앙 아래 웅변하게 된다. 그들도 인류의 어리석음이나 반 목적성, 환상적인 속삭임에 대해 말한다. 어찌하여 세계가 이렇듯 미치광이처럼 되어가고 있는가, 또 왜 세계는 <세계로서 필요한>것임을 믿으려 하지 않는가라고 충심으로 걱정하면서… 이것이 고귀한 사람들의 영원한 부당행위이다.
4. 종을 보존하는 것
극히 악랄한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인류를 가장 진보시켜 왔다. <새로운 것>이란 정복하는 것, 낡은 경계석과 낡은 숭배심을 정복하는 것으로서 어떤 까닭에서이든 악한 것이다. 사실, 악한 제 충동은 선한 제 충동과 마찬가지로 고도로 합목적적이며, 종을 보존하는 것으로 필요불가결하다.
5. 무조건적인 의무
대개 효과다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웅변조의 언어, 씩씩한 태도나 입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혁명가, 사회주의자, 기독교 혹은 기독교 이외의 참회설교자와 같은 그 어느 것도 미온적인 성과로는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의무>에 대하여 말할 때면 그것을 무조건적인 성격으로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고자하기 때문에 우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무조건 신뢰할 필요를 느낀다. 명성이나 명예의 힘은 국종을 불허하는 듯 보이지만, 이익의 힘은 굴종을 가르친다. 그들은 부끄러움 없이 복종하고 복종상태를 거리낌없이 이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을 무조건적인 당위의 원리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이러한 것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은 체면이며, 동시에 체면만은 아니다.
6. 위엄실추
명상은 그의 형식적인 위엄을 확실히 실추시킨다. 사람들은 명상하는 인간의 엄숙하고도 점잔빼는 태도를 비웃으려 한다. 옛날과 같은 현자를 사람들은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을 것이다.
7. 근면한 사람들을 위한 일언
현재까지 인간이 그의 생존조건으로 생각해 왔던 모든 것, 그리고 이를 고찰하는 도구로서의 모든 이성과 정열과 미신, 이러한 것이 지금 철저히 연구되고 있는가? 인간충동이 여러 가지 도덕적 풍토에 따라 어떻게 만족되는지 또는 만족될 것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성장의 관찰 그것만으로도 이미 근면한 사람들에게는 꽤 많은 일이 제공된다. 모든 이유의 잘못됨과 도덕적 판단이 갖고 있던 종래의 모든 본질을 확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작업이다.
8. 무의식의 덕
어떤 인간이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모든 성질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 인간에게 있는 무의식이나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제 성질, 즉 그 섬세함 때문에 정밀한 관찰자의 눈으로부터 도망하여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이 숨어 있는 제 성질은 완전히 다른 발전법칙에 근거한다.
9. 우리의 폭발
인류가 그 초기 단계에서 획득한 많은 것, 그러나 극히 미약하고 맹아적인 것이어서 누구도 그 획득을 깨닫지 못했던 것, 그러한 것이 오랜 시간, 혹은 수세기를 거치면서 돌연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 사이에 강해지고 성숙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폭발할 때를 기다리며 성장해 가는 화산과도 같다. 이 폭발의 시기가 언제일까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신>조차도 모른다.
10. 일종의 격세유전
나는 모든 시대의 비범한 인간들을, 가능하면, 과거의 문화와 그 힘이 뜻하지 않게 가져온 새로운 싹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소위 민족과 그의 풍습의 격세유전이라 생각하고 싶다는 것이다. 종족과 습관과 가치평가가 매우 급속하게 변화하는 곳에서는 이러한 격세유전이 발생할 확률이 극히 낮다. 우리들의 경우, 정열적이고 원만한 정신의 템포로서 발전의 안단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11. 의식
의식은 유기체의 최후의, 가장 최종적인 발전이며, 따라서 대개는 미완성되어 있는 무력한 부분이다. 의식적으로부터 무수한 실책이 생겨나고, 그것이 동물이나 인간을 필요 이상 빨리 파멸로 도달하게 한다. 인간은 의식을 그저 갖고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획득하는 데에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의연하게 <지혜를 자기 몸에 동화시켜> 본능적으로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새로이 인간의 눈에 들어온 것으로서 아직 확실하게 인식되어 있지 않은 <과제>이다.
12. 학문의 목표에 대해서
학문은 아직까지도 인간으로부터 기쁨을 박탈하고, 인간을 차갑고 조형적인, 스토아적으로 만드는 그러한 힘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은 또한 <위대한 고통을 초래한자>에 의해 발견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필히 동시에, 그 반대의 힘, 즉 환희의 새로운 별을 빛낼 위대한 능력도 발견될 것이다.
13. <힘>이라는 느낌에 대한 이론을 위하여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든가 고통을 준다든가 함으로써 우리들은 자기의 힘을 타인에게 미친다. 우리가 고통을 주는 쪽으로 희생을 넓힐 것인가, 기쁨을 주는 쪽으로 힘을 넓힐 것인가는 우리 행위의 최후의 가치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14. 다리를 건너
자기 감정에 대하여 수치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위장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애정에 흡족하거나 또는 몽상적인 고조된 감정의 현장을 억압당하면 그것을 억압한 사람에 대해 갑자기 증오심을 품는다. 마치 소중한 비밀을 들킨 것처럼.
15. 어리석음의 가치
확실히 현명함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또 그것은 대단히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으로서 따라서 고귀한 취미는 이 현명함이라는 필요를 <비속>으로 경험할 것이다. 고귀함이라는 것, 그것은 아마 두뇌 속에 어리석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16. 거짓말을 보태다
모든 습관의 근거와 목적은 항상 거짓말로서, 이는 혹자들이 이러한 습관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근거와 목적을 <물을> 경우에만 행해진다. 이점에서 모든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은 철저하게 불성실하다. 그들은 거짓말을 보탠다.
17. 숨겨진 역사
모든 위대한 인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을 갖는다. 모든 역사는 그 덕분에 재차 저울에 올라간다. 그리하여 과거의 많은 비밀이 그것이 숨겨진 집으로부터 튕겨 나온다.
18. 이단과 마법
이단은 마법의 부속물이다. 그리고 더욱 해가 되며 본질적으로 결코 존경할 만하지 못한 것이다. 종교개혁, 그것은 더 이상 선한 양심을 동반치 않는 시대에 가장 많이 양쪽을 다 만들어 내었던 중세적 정신이 배증되는 한 방법이었다.
19. 폭발적인 인간
우리들은 폭발할 필요가 있는 젊은이들의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할 때, 그들이 전혀 애매하거나 까다로움이 없이 이 이유를 위해 결정하는 것에 대해 놀라서는 안된다. 그들을 유혹하는 것은 그 이유를 둘러싼 열정의 광경이다. 즉 불타는 도화선의 광경이지 이유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20. 취미의 변화
일반 사회의 취미변화는 여러 견해의 변화보다도 중요하다. 견해는 그것의 모든 증명이나 반박이나 지적분식과 더불어 단순히 변화하는 취미의 낌새에 불과하다.
21. 일과 권태
보수를 위해 일을 구한다는 점은 문명제국을 통해 현재 거의 모든 인간이 똑같다. 그들 모두에 있어서 일은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일의 선택에 관하여 지나치게 용의주도하지 못하다.
22. 법률이 말하고 있는 것
우리들이 어느 민족의 형법을 마치 그것이 그 민족성의 표현인 것처럼 연구한다면 우리들은 큰 착오를 저지르게 된다. 법률은 ,민족의 본질을 말하지 않고, 차라리 그 민족에 있어서 소원하고, 기이하며 놀랄 만한, 이국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하고 있다.
23. 정열의 억압에 관하여
우리들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정열의 표현을 자신에게 금지시킨다면, 즉 정열 그 자체를 억압하려는 게 아니고, 정열적인 말이나 태도만을 억압한다면, 그 결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본래 의도하지 않았던 것도 <동시에>달성하게 된다. 즉 정열 그 자체의 억압을, 적어도 정열의 쇠약,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24. 고통의 지식
염세적인 철학의 출현은, 결코 위대한 생산적인 고통상태의 표지가 아니다. 차라리 모든 삶의 가치에 대한 이러한 의문부호는 생존의 세련과 용이화가, 이미 정신이나 육체의 불가피한 고통, 모기에 물리는 정도의 고통을 너무나 지나치도록 잔인하게 악의적으로 취급하여 현실의 고통경험의 빈약으로부터 비롯된<고통의 일반적 표상>을 최고종류의 고뇌로 생각하는 시대에 만들어진다. <고통>에 대한처방은, <고통>인 셈이다.
25. 타인이 우리들에 관하여 아는 바의 것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에 관하여 알고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로 우리들 인생의 행복에 있어서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다. 나쁜 평판에 대처하는 것보다도, 양심의 가책에 대처하는 것이 훨씬 쉽다.
26. 고뇌에의 욕망
수백만이라는 젊은 유럽인이 모두 권태에 어찌할 바를 몰라,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을지라도 그리하여 그들을 끊임없이 때리거나 찌르거나 하는 일을 어떻게 해서든 하고 싶다는 욕망을 고려한다면, 그런 고민에서부터 마땅한 행동, 행위 됨됨이의 근거를 끌어내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 속에는 무엇에 고심할까 하는 욕망이 있을 법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고통이 필요하다! 거기서부터 정치가들의 규환이 오며 거기에서부터 많은 잘못된 허구의 과장된 온갖 계급의 <고민하고 있는 상태> 및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믿어 버리는 맹신이 생겨나고 있다.
3. 천 개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군상
니체의 ‘즐거운 지식’은 마치 격언투와 같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니체의 거의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미립체이다. 풍자시, 노래들, 경구, 철학적 논쟁, 지식학과 지식의 윤리, 예술과 신의 죽음에 대한 사색, 영원한 반복, 그리고 짜라투스트라까지 사색할 수 있는 기회와 발견할 수 있는 기쁨을 던져준다.
그 가운데 제1부에서 인간군상의 모습을 접근하고 새롭게 해석한 니체의 ‘지식’은 어떤 면에서는 책의 제목처럼 즐거운 대목이 있다. ‘즐거운 지식’, 특히 제1부에서 말하는 정의들은 매력 있고 중요한 인간행동 분야에 대해 많은 새로운 통찰을 갖게 만든다. 조금은 난해하는 듯한 백과사전식 나열형의 인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대부분 연속해서 읽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전체를 모두 이해하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강요하는, 연속성 있는 한 편의 철학적 논문과 같은 허식이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마음에 드는 부분은 간직하고, 나머지는 모두 당장은 잊어버려도 될 듯 싶다.
예를 들면 제1부에서 말하는 ‘지적양심’, ‘위엄실추‘, ’어리석음의 가치‘, ’폭발적인 인간‘ 등과 같은 각 소절들은 별도의 정의를 담고 있다. 반면 그 정의들은 교묘하게 서로 얽혀있다는 데서 우리는 니체의 지식적 충동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최고의 인간도 최하의 인간도 마찬가지로 지배하고 있는 종의 보존의 충동”이라든가 “명상은 그의 형식적인 위엄을 확실히 실추시킨다”, “고귀함이라는 것, 그것은 아마 두뇌 속에 어리석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등등은 각각 다른 소절에서 표현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한 겹 벗겨내는 듯하다.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제1부에서 인간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이 책의 새로움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타인이 우리들에 관하여 아는 바의 것’이란 소절에서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에 관하여 알고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은” “우리들 인생의 행복에 있어서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다”고 말하지만 “나쁜 평판에 대처하는 것보다도, 양심의 가책에 대처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니체는 마치 천 개의 눈을 가진 사람처럼 인간군상의 모습들을 극명하게 들여다보며 말하고 있다. 즉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어디 있을 것인가를 지적하는 니체는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거나, 큰 것을 작게 보거나,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에 우리는 길들여져 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어떤 진리도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역설적인 이야기로 인간군상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은 사람에게 필요한 무기이다. 그러나 무기를 잘못 쓰면 도리어 자신을 해하듯 지식도 진실의 밑받침이 없다면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과 같이 오히려 몸을 망치기 쉽다. 페스탈로치는 진정한 지식은 꾸밈새 없는 순진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이라 했다. 또 진실과 함께 있는 지식은 불행을 물리칠 수 있는 굳센 힘이 된다고 했다.
‘즐거운 지식’에서 새롭게 니체를 만났다. 막연히 삶을 살아오던 인간군상에게 던져준 이 메시지는 세계는 무한히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세계는 배후에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도리어 무수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