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姓名) |
윤상(尹祥) |
본관(本貫) |
예천(醴泉) | ||
시대(時代) |
1373(공민왕 22)∼1455(단종 3) |
자(字) |
실부(實夫) |
호(號) |
별동(別洞) |
이력(履歷) |
윤상(尹祥) 1373(공민왕 22)∼1455(단종 3).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예천(醴泉). 초명은 철(哲).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 예천군의 향리인 선(善)의 아들로 태어나서 과거를 통하여 양반신분으로 올랐다. 향리 역(役)에 종사하면서 퇴식(退食)을 오가는 사이에 솔기름을 취하여 몰래 숨겨두었다가 밤에 책읽기에 쓸 정도로 끈기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에 역성혁명을 반대하여 예천에 유배되자, 조말생(趙末生)·배강(裵#강15) 등과 함께 수업하여 그 문인이 되고, 그해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에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96년(태조 5) 2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안동·상주 및 한성 서부 등지의 교수관(敎授官)을 거쳐, 예조정랑 때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가친이 연로하여 외직을 청하여 황간·영천(榮川)·대구 등지의 군사(郡事)를 맡은 뒤, 사성을 거쳐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1448년(세종 30)예문관제학으로서 원손(元孫:단종)의 입학례를 거행할 때 특명으로 박사가 되어 선비들이 이를 영예로 여겼다. 오랫동안 성균관의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그 문하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난 사람들이 많았다. 문종 초에 고령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니, 국왕이 사궤(食饋: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음식물)를 내렸는데, 고령으로 은퇴하는 재상에게 궤물(饋物)을 내리는 제도는 이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향리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다가 3년여 만에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조용을 통하여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그는 특히 세종대에 성균관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왕조 초기의 중앙학계에 성리학의 기운을 진작,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개별적으로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주역》을 가르쳐 정몽주 계열의 도통(道統)에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다. 저서로는 《별동집 別洞集》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海東名臣錄, 筆苑雜記. 〈李泰鎭〉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윤상(1373-1455)은 별동(醴泉邑西本里別洞) 출신,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 조용(趙庸)의 제자이다. 예천군 관리로 있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1392년(태조 1)에 진사, 이듬해에 생원이 되고, 1396년(태조 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산, 예천, 상주 등의 향교 교수(敎授)를 거쳐 예조 정랑에 이르러 사신(書狀官)으로 명 나라에 다녀와서 사예(司藝)가 되었다. 늙으신 부모가 가까이 있기를 원하여 김천(金山), 영주(榮州), 대구(大邱) 등지의 골원을 맡은 후 특별히 대사성(大司成)에 뽑히어 16년 간 성균관에 있었다. 1448년(세종 30)에 왕의 맏손자(端宗)가 성균관에 입학하자, 특히 박사(博士)가 되어 선비들의 선망 대상이 되었다.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러 1451년(문종 1)에 사퇴하고 고향 예천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퇴할 때 왕이 재산을 주었는데, 늙어 사퇴하는 공무원에게 퇴직금을 주는 제도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윤상은 유학에 정통하고, 학문에 정교하여 이름을 날렸다. 한때 높은 벼슬로 성공한 제자들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제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 몇 명을 들어본다면,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金時習), 대제학 김구(金鉤), 김종직의 아버지인 김숙자(金叔滋) 등을 들 수 있다. 김숙자는 윤상이 황간(黃澗) 현감으로 있을 때 배웠다. 윤상은 조선 초에 가장 뛰어난 제1의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묘는 예천읍 백전리 능골에 있고, 서본리의 향현사(鄕賢祠), 호명면 황지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고, 보문면 미호리의 청심대(淸心臺)도 윤상을 위해 세운 것이다. 저서로는 <별동집(別洞集)>이 있다. 윤상은 여러 가지 벼슬을 맡아서 그 책임을 다하였다. 때로는 토지 제도를 말하여 백성을 걱정하고, 혹은 성(城)을 쌓자고 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또는 불교의 폐해를 규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상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학문과 문예를 함께 갖춘 대학자로서, 당시 조정의 숭유 정책의 실현에 일익을 담당하여 제자 양성에 힘써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것이다. 과연 윤상은 조선 초의 대학자요, 교육자이면서 문장가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윤상(尹祥) 시대 : 조선전기 국적 : 한국 생몰년 : 1373(공민왕 22)∼1455(단종 3) 정의 : 조선 세종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 애 자는 실부(實夫)이며, 호는 별동(別洞)이다. 본관은 예천(醴泉)으로 윤선(尹善)의 아들이며, 조용(趙庸)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 5) 과거에 급제하고, 선산(善山)·상주(尙州)의 교수(敎授)를 거쳐 예조정랑·사예(司藝)가 되었다. 그 후 금산(金山)·영천(榮川)·대구(大邱)의 수령을 역임하고 대사성에 올랐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제학(提學)으로 성균관박사(博士)가 되어 단종에게 학문을 강의하였다. 문종 초에 향리로 내려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성리학과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 문장에도 뛰어났다. 사 상 그는 인성론(人性論)에서, 성(性)이란 리(理)로서 모든 사물에 품부된 최초의 것이라 하여 성의 보편성과 완전성을 인정하였다. 또한 치도(治道)는 심(心)에 근본하고 심을 찾는 요체는 경(敬)에 근본한다고 하여 경을 통한 수양을 강조하였다. 한편 불교는 오랑캐의 법으로서 편벽되고 허무한 말을 내세워 삼강(三綱)을 말살하고 백성의 재산을 좀먹는 이단(異端)이라고 주장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의 학통은 김숙자(金叔滋)에게 계승되고 다시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졌다. 평 가 김종직은 그를 권근(權近) 이후의 으뜸가는 유학자이며 사범(師範)이라고 칭송하였다. 저 서 저서에 『별동집(別洞集)』이 있다. 기 타 예천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윤상(尹祥) 字는 實夫, 號는 別洞, 醴泉尹氏 別洞先生集(奎4072), 尹祥(朝鮮)著, 日아山齋舍開刊. 3卷 1冊(89張) 木板本 29.4×18.9cm. 四周單邊 半郭:17.5×13.5cm. 10行 18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尹祥(1373∼1455)의 詩文遺集. 그의 初名은 哲, 字는 實夫, 號는 別洞, 醴泉尹氏인 善의 아들이다. 1393년(太祖 2)에 進士試와 계속 生員試·文科에 合格하여 善山·安東·尙州·西部敎授官을 거쳐 成均館 直講·司藝·司成·大司成 등 成均敎官職을 전후 50年 동안 역임하였다. 그 동안 그는 많은 弟子를 양성하였으며 1448년(世宗 30)에는 藝文館 提學으로서 世孫(端宗)의 成均館 入學禮를 擧行할 때 博士가 된 바 있었다. 이와 같이 그는 일생을 교육계에서 활약하여 學統을 陽村 權近으로부터 金宗直, 金宏弼, 鄭汝昌에게 전하고 그가 高齡으로서 隱退·歸鄕하였을 때 文宗은 그에게 食物을 下賜하였다(退老宰相에게 食物을 주는 制度는 이 때부터 생겼다 한다). 尹祥의 榮達은 오직 그의 끈기있는 노력의 결과였으며 그가 일개 郡吏로서 一代의 文章大官이 되었던 것은 고려말까지의 鄕吏의 兩班化를 설명해 주는 좋은 경우이다. 醴泉 尹氏는 마지막으로 양반화한 家門이고 그 계기가 尹祥에게 있었다. 따라서 그의 祖上 三代의 追贈도 尹祥의 顯達 때문이었다. 尹祥은 文章에 능할 뿐아니라 統術에도 通達하였다. 尹祥은 陽村 權近의 弟子였으므로 文章을 重視하는 풍이 있었다. 그의 文章은 平易簡潔하였으며 그러한 文章은 그의 풍부한 經學 지식에서 우러나왔다. 그러나 尹祥의 詩文은 旋作旋棄하여 별로 모아져 있지 않았던 것을 그의 아들 軍威縣監 尹秀殷이 逸稿를 收拾하여 遺集一冊을 만들고 그의 同年進士인 金宗直에게 序文을 부탁하였다. 이것이 別洞集의 初刊本이다. 그 후 本集은 1745년(英祖 21)에 10代孫 三徵 등이 再印刊하게 되었다. 本集은 이때의 板本이 아닌가 추측된다. 卷頭에 1487년(成宗 18)에 쓴 金宗直의 序文이 있고 그 다음에는 別洞先生世系之圖(이에 의해 醴泉 尹氏의 家門이 尹祥에 의하여 일어난 것을 곧 알 수 있다.), 目錄이 있다. {卷1}:賦1首(夢金尺賦), 五言節句 13首, 五言律 7首, 七言絶句 37首, 七言律 33首, 表箋 12首(請傳位表, 賀正朝表, 謝賜諸佛名稱歌曲方物表, 禮曹請建箕子祠堂碑箋, 兵曹請於山河險阻皆置關防以嚴守禦箋 등). {卷2}:疏·陳言 4首(成均館闢佛疏, 李澹嫡妾分揀陳言), 書 1首(黃澗與琴永同書), 序(碧松亭松陰唱和詩序), 記 2首(成均館賜준뢰記, 醴泉客舍東軒重創記), 祭祝文 4首, 策文 1首, 拾遺 2首(義興開刊鄕藥救急方跋, 刻杜律跋), 歌謠 6首(甫州鄕校歌謠 등). 「成均館闢佛疏」는 世宗이 末年에 佛敎를 酷信한 데 대한 儒學者로서의 反對上疏이다. 陳言은 旱災를 당하여 國王에게 國政에 관한 시정책을 개진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貢法과 築城의 二事를 지적하고 있다(年分九等, 田分六等制反對). 「李澹嫡妾分揀陳言」은 士大夫의 二三妻 率居와 그 子孫들에 대한 土地와 奴婢相續의 不可함을 주장한 것이다. 策文에 나타나는 것은 倫理的 側面을 강조한 내용과 闢佛에 관한 내용이 있다. 歌謠도 역시 儒敎的 道德觀을 鄕校生들에게 周知시키려는 의도에서 지은 것이다. { 卷3}:附錄으로 年譜와 墓碣銘(林霽光撰), 聞見錄, 奉安文 등이 있다. 聞見錄은 後世人들의 尹祥에 대한 評으로 그 典據로서 ≪筆苑雜記≫(徐居正), ≪용齋叢話≫(成俔), ≪척言≫(金正國), ≪海東名臣錄≫, ≪彛尊錄≫(金宗直), ≪退溪集≫(李滉) 등이 있다. 卷末에는 李光庭의 後敍가 있다. 本集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5세기 교육사연구에 도움되는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국조 문과 방목> 윤상(尹祥) More Info. 태조(太祖)5년(1396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2(同進士2)
>>> 인적사항 생년(生年) 1373년, 계축 자(字) 실부(實夫) 호(號) 별동(別洞) 초명(初名) 윤철(尹哲) 본관(本貫) 예천(醴泉)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윤선(尹善) 생부(生父) 조부(祖父) 윤신단(尹臣端) 증조부(曾祖父) 윤충(尹忠)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전경충(全敬忠)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임신1392진사시,계유1393생원시(壬辛1392進士試,癸酉1393生員試)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제학&(提學&), 대사성&&(大司成&&) | ||||
묘(墓) |
| ||||
부(父) |
윤선(尹善) 증(贈)참판(參判) | ||||
모(母) |
| ||||
배(配) |
안동전씨(安東全氏) 낭장(郎將) 전경충(全敬忠)의 女 | ||||
녀(女) |
권효당(權孝當) 종사랑(從仕郞) | ||||
녀(女) |
임형(林泂) 별시위(別侍衛) | ||||
자(子) |
윤백은(尹伯殷) 생원(生員) | ||||
자(子) |
윤중은(尹仲殷) 생원(生員) | ||||
녀(女) |
고영석(高永碩) 승사랑(承仕郞) | ||||
자(子) |
윤숙은(尹叔殷) 승사랑(承仕郞) | ||||
자(子) |
윤계은(尹季殷) 군위현감(軍威縣監)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윤계은은 15세기 말 예천읍 서본리 별동(別洞) 출신으로, 자는 문경(文卿), 본관은 예천, 대사성 상(祥)의 넷째 아들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음사로 벼슬에 나가 정3품 통훈대부로서 군위 현감을 하여 다스린 공적이 많았다. 벼슬을 그만둔 후에는 예천에 머물면서 때마침 유향소가 재건(1488)되자, 그 별감(別監)이 되어 고향을 위해 힘써 일하였다. 윤계은은 집안이 대대로 문관 벼슬을 하였으므로 예천 군민을 예의 범절로 이끌기 위하여 향사당(鄕射堂)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거처하는 집 가까이에 터를 잡고 좌우 채와 주방 등 모두 20칸의 건물을 짓기 시작(1492)하였다. 예천 유지들이 함께 돈을 내어 기와를 굽고 재목을 모았으며 군수 이잠도 재목을 도와주었다. 1493년에 준공하였다. 준공일에 윤계은이 이르기를, "우리 고을에서 이 향사당을 지으려고 한 것이 오래 되었으나 그 적당한 터를 잡지 못하여 어떤 이는 북정(北亭)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우고자 하는 이도 있었다. 끝없는 여러 사람의 논의가 몇 해를 끌었다. 하루는 군청 서쪽 2리 남짓한 곳에 가 보게 되었다. 거친 언덕 개암나무 망초대 우거진 사이로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신기한 곳을 발견하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경치 여러 산은 푸른 것으로 둘러싸고, 한천은 옥같은 물결을 쏟고 있는데, 숲은 무성하고 대나무들은 길며 지세가 막히어서 마치 하늘 아버지와 땅 어머니가 감춰두고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라고 하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 ||||
자(子) |
윤흥은(尹興殷) 예천훈도(醴泉訓導) | ||||
형제(兄弟) |
| ||||
문헌(文獻) |
1. 이준록(彛尊錄) 윤상(尹祥)예천인(醴泉人)인데, 향공(鄕貢)으로 등제(登第)하였고, 경학(經學)에 매우 조예가 깊었으며, 열심히 후진들을 가르쳤다. 무려 16년 동안을 국학(國學)에 있었고, 누천(累遷)하여 예문 제학(藝文提學)에 이르렀다. 조정(朝廷)에 가득한 경대부(卿大夫)들이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 나이 78세가 되어 고향에 물러나 늙으니,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83세에 작고하였다.
2.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윤상(尹祥) #경상도(慶尙道) 예천(醴泉) *향사우(鄕祠宇) 인조경진건(仁祖庚辰建). 제향. 조 용(예문관대제학 시문정 본진보). 윤 상(호별동 대사성 본예천). 권오복(호수헌 사가독서 증도승지 본예천). 祭享. 趙 庸(藝文館大提學 諡文貞 本眞寶). 尹 詳(號別洞 大司成 本醴泉). 權五福(號睡軒 賜暇讀書 贈都承旨 本醴泉).
*향현사(鄕賢祠) 인조경진건(仁祖庚辰建) (1640) 예천읍 서본동 제향. 조 용(예문관대제학 시문정 본진보). 윤 상(호별동 대사성 본예천). 권오복(호수헌 사가독서 본예천). 정 탁(호약포 좌의정 서원부원군 본청주). 祭享. 趙 庸(藝文館大提學 諡文貞 本眞寶). 尹 詳(號別洞 大司成 本醴泉). 權五福(號睡軒 賜暇讀書 本醴泉). 鄭 琢(號藥圃 左議政 西原府院君 本淸州).
3.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산청(山淸) ● 도사관(道士館) 세연정(洗硯정), 한석봉(韓石峯) 제액(題額) 윤상(尹祥) 본관 예천(醴泉) 자(字) 실부(實夫) 호(號) 별동(別洞). 시(詩)
4.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예천(醴泉) ● 선몽대(仙夢臺) 재(在) 호명면 백송리 이열도(李閱道) 창건(創建), 본관 진성(眞城) 자(字) 정가(靜可) 호(號) 우암(遇岩) 윤상(尹祥) 본관 예천(醴泉) 자(字) 실부(實夫) 호(號) 별동(別洞). 시(詩)
5.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군위(軍威) ● 영귀정(詠歸亭) 재(在) 별동(別洞) 북(北) 윤상(尹祥) 본관 예천(醴泉) 자(字) 실부(實夫) 호(號) 별동(別洞). 시(詩) | ||||
문헌(文獻) |
별동집 ( 別洞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別洞先生集(原集) 판심제 別洞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49年刊 권책 3권 1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18.7×15.1(㎝)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072 총간집수
권수제 別洞先生續集(續集) 판심제 別洞先生續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00年刊 권책 2권 1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18.6×15.6(㎝)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우촌古3648-文61-22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8
저자 성명 윤상(尹祥) 생년 1373년(고려 공민왕 22) 몰년 1455년(조선 단종 3) 자 實夫 호 別洞 본관 예천(醴泉) 초명 철(哲)
가계도 조부(祖父) 윤신단(尹臣端) 증(贈)참의(參議) 부(父) 윤선(尹善) 증(贈)참판(參判) 본(本) 윤상(尹祥) 배(配) 안동전씨(安東全氏) 낭장(郎將) 전경충(全敬忠)의 女 여(女) 권효당(權孝當) 종사랑(從仕郞) 여(女) 임형(林泂) 별시위(別侍衛) 자(子) 윤백은(尹伯殷) 생원(生員) 자(子) 윤중은(尹仲殷) 생원(生員) 여(女) 고영석(高永碩) 승사랑(承仕郞) 자(子) 윤숙은(尹叔殷) 승사랑(承仕郞) 자(子) 윤계은(尹季殷) 군위현감(軍威縣監) 자(子) 윤흥은(尹興殷) 예천훈도(醴泉訓導)
기사전거 : 世系 및 墓碣銘(林霽光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공민왕 22 1373 계축 洪武 6 1 10월 10일, 醴泉郡 別洞里에서 태어나다. 태조 1 1392 임신 洪武 25 20 진사시에 합격하다. ○ 이름을 祥으로 바꾸다. 태조 2 1393 계유 洪武 26 21 생원시에 합격하다. 태조 5 1396 병자 洪武 29 24 문과에 합격하다. 태조 6 1397 정축 洪武 30 25 1월, 善州儒學敎授가 되다. 정종 2 1400 경진 建文 2 28 12월, 甫州儒學敎授가 되다. 태종 3 1403 계미 永樂 1 31 12월, 西部敎授가 되다. 태종 4 1404 갑신 永樂 2 32 7월, 山陰監務가 되다. 태종 6 1406 병술 永樂 4 34 12월, 尙州敎授가 되다. 태종 11 1411 신묘 永樂 9 39 2월, 黃澗監務가 되다. 태종 13 1413 계사 永樂 11 41 7월, 校書校理가 되다. ○ 12월, 성균직강이 되다. 태종 15 1415 을미 永樂 13 43 3월, 刑曹都官正郞이 되다. ○ 8월, 예조정랑이 되다. ○ 11월, 正朝使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가다. 태종 17 1417 정유 永樂 15 45 安東府學敎授가 되다. 세종 1 1419 기해 永樂 17 47 6월, 成均司藝 直集賢殿 知製敎가 되다. ○ 12월, 부모봉양을 위해 金山郡事로 부임하다. 세종 4 1422 임인 永樂 20 50 10월, 宗簿少尹 兼成均直講 五部儒學敎授가 되다. ○ 12월, 慶昌府少尹이 되다. 세종 6 1424 갑진 永樂 22 52 12월, 知榮川郡事가 되다. 세종 8 1426 병오 宣德 1 54 부친상을 당하다. 세종 11 1429 기유 宣德 4 57 12월, 성균사성이 되다. 세종 12 1430 경술 宣德 5 58 1월, 知大丘郡事가 되다. 세종 14 1432 임자 宣德 7 60 모친의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다. 세종 15 1433 계축 宣德 8 61 4월, 모친상을 당하다. 세종 17 1435 을묘 宣德 10 63 6월, 성균대사성이 되다. 세종 18 1436 병진 正統 1 65 儒生들이 遊山한 일로 被推되다. ○ 5월, 直集賢殿 知製敎가 되다. 세종 20 1438 무오 正統 3 66 6월, 僉知中樞院事 世子左輔德이 되어 세자(文宗)에게 周易을 進講하다. ○ 12월, 僉知中樞 兼成均司成이 되다. 세종 24 1442 임술 正統 7 70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세종 26 1444 갑자 正統 9 72 12월, 예문관제학이 되다. 세종 27 1445 을축 正統 10 73 7월, 同知中樞院事가 되다. ○ 7월, 慶昌府尹이 되다. 세종 30 1448 무진 正統 13 76 3월, 특명으로 博士가 되어 元孫(端宗)에게 禮를 敎授하다. 세종 32 1450 경오 景泰 1 78 10월, 치사하다. 세조 1 1455 을해 景泰 6 83 3월 9일, 병으로 卒하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 아들 尹季殷이 유고를 모아 편집하고 金宗直의 序를 받다. 영조 25 1749 기사 乾隆 14 - ?山齋舍에서 문집을 초간하다.(李光庭의 序) 고종 37 1900 경자 光武 4 - 續集 2권을 편집하여 원집과 함께 간행하다.(柳道獻의 跋)
기사전거 : 연보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문집은 일찍이 아들 尹季殷이 散佚되고 남은 遺稿 약간 편을 收拾하여 1帙로 완성하여 同年 金宗直에게 序를 받았으나 간행에는 이르지 못한 듯하다. 그 뒤 10세손인 尹三徵촵尹應徵 등이 平原 李光庭에게 유고의 교정을 부탁하여 1745년(영조 21) 편집을 완료하고, 아울러 年譜촵墓碣銘(林霽光 撰)촵聞見錄을 부록으로 엮어 1749년(영조 25) ?山齋舍에서 木板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4072),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1900년(고종 41) 후손 尹友進 등이 諸家의 글 속에서 저자의 시문과 表箋 수 편을 모으고, 行狀(柳厚祚 撰)촵行錄(朴周鍾 撰)촵神道碑銘(李中麟 撰)을 부록으로 하여 「續集」2권을 간행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우촌古3648-文61-22), 성균관대촵고려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원집은 1749년 간행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며, 속집은 1900년에 간행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와 跋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3권촵續集 2권 합 2책으로 되어 있다. 原集은 권수에 1487년(성종 18)에 지은 金宗直의 서문과 世系圖촵目錄이 실려 있다. 권1에는 賦 1편과 詩 82題, 表箋 12편이 실려 있다. 詩는 시체별로 편차되어 있으며 5언절구 6제, 5언율시 7제, 7언절구 33제, 7언율 27제 및 오촵칠언 장편시가 각각 1제이다. 권2에는 疏촵陳言 4편, 書 1편, 序 2편, 記 2편, 제문 7편, 策 4편, 拾遺 2편, 歌謠 6편이 실려 있다. 그중 〈成均館闢佛疏〉는 세종 연간 불교 崇信에 대한 反對疏이며, 〈陳言〉은 旱災를 계기로 국정에 대한 시정책을 논한 것으로 貢法과 築城에 대한 폐단을 논하고 있다. 또 〈碧松亭松陰唱和詩序〉는 1442년(세종 24) 성균관에서 講論하는 여가에 金學源촵江西李公 등과 화답한 詩序이다. 그 외에도 1442년에 쓴 〈醴泉客舍東軒重創記〉와 1417년 중간된 「鄕藥救急方」에 대한 跋文 등이 있다. 권3은 부록으로서 연보촵묘갈명 및 聞見錄촵奉安文촵常享祝文이 실려 있다. 이 중 聞見錄은 후인들의 評이나 관계 기록을 모은 것으로서 「筆苑雜記」촵「?齋叢話」촵「?言」촵「海東名臣錄」촵「?尊錄」촵「退溪集」 등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어 ‘崇禎紀元後百二十二年己巳二月日?山齋舍開刊’이란 刊記가 있고, 권미에는 1745년에 쓴 李光庭의 後敍가 실려 있다. 「續集」에는 目錄에 이어 권1에 17제의 시와 9편의 表箋이 실려 있다. 시는 詩體別로 5언율시 4제, 7언절구 6제, 7언율시 7제가 실려 있으며, 表箋은 冬至촵誕日촵正朝 등에 대한 축하 箋文이다. 권2는 附錄으로 1867년 柳厚祚가 지은 行狀, 朴周鍾이 지은 行錄, 李中麟이 지은 神道碑銘, 그리고 聞見錄과 上言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미에는 1900년 속집 발간 당시에 쓴 柳道獻의 발문이 있다. 필자 : 辛容南 | ||||
기타(其他)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