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야구가 전성기를 구가한 7, 8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을 만나면 꼭 언급되는 이가 있다. ‘선동열과 김태업’. 선동열 삼성 감독은 국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만, 김태업이라는 이름 석 자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김태업은 1980년 광주일고의 선동열과 함께 고교 최고 에이스를 다툰 이다. 게다가, 타격에서도 봉황대기에서 3경기 연속 홈런을 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홈런왕과 에이스가 될 재목이었다.
그러나 연세대를 졸업하고 1985년 해태에 입단한 그를 기다린 것은 김성한이라는 ‘넘사벽’. 1988년 11월 타율 .149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남기고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야구라’에서는 고교 시절 선동열을 능가하는 강속구 투수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대표적인 불운한 야구선수로 말해지는 김태업을 만났다.
내가 지금 넥센 2군이 있는 강진에서 태어났어. 그때만 해도 강진군 내에서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가 4개나 있었거든. 도민체전 등이 있어서 정책적으로 장려한 거지. 그러다가 광주 서림초등학교로 전학을 왔어. 계속 야구를 할 거면 광주에서 하는 게 낫다고 해서. “강진에서 스카우트된 거를 보면 그때부터 강속구를 던졌느냐?”라고.
(웃으면서) 초등학생이 던져봤자 거기에서 거기잖아. 요즘 부모를 보면, 초등학교 때 조금만 해도 벌써 메이저리그에 가 있고 그러는데, 초등학생이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어. 참, 그때는 많이 맞았지. 우스갯소리로 그날 안 맞으면 다음날 곱빼기로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날 맞고 가야 잠이 잘 오던 시대였잖아. 또, 지금처럼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훈련이 어디 있어. 무조건 치고받고 뛰었지.
근거도 없이 물 마시면 안 된다고 해서 한여름에 물도 못 마시게 하고. 운동부라고 빵이 간식으로 나왔는데, 그거 하나 더 먹으려고 하다가 걸려서 얻어터지고. 얼마나 서럽던지. 지금 애들은 고급 빵을 갖다 줘도 남더라고. 우리는 없어서 못 먹었는데. 아마 지금 그렇게 하라면 못할 거여.
근데 그때만 해도 선생님이나 감독님의 말은 법이었으니까. 감독님이 시키면 그게 법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지. 정말 당연하게. 요즘 그렇게 하면 다들 도망가 버리고, 인터넷에서 난리가 날 거여. 우리는 한 대 맞아도 그걸 집에서 알까 봐 숨기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 어떻게 보면 지금 애들이 현명한 거지 (웃음).
잊혀진 오래된 야구장
돌이켜보면, 중·고교 감독님들이 하나같이 독종들이었어 (웃음). 참말로 연습을 많이 했어. 전남중학교 때는 진흥고 감독님이셨던 강의원 선생님인데, 정말 죽으라고 시켰어. 그때 강 감독님이 대학을 막 졸업했는데, 데이트 한 번 안 하고 지독하게 시켰지. 정말 존경스러워. 그때는 코치가 어디 있어. 또, 야구공도 몇 개 없었잖아. 근데도 한 사람 앞에 내·외야에서 각각 100개씩 펑고를 쳤어.
게다가, 중학생이니까 볼도 잘못 던지잖아. 배팅볼도 강 감독님이 다 던지고. 정말 열성적으로 가르쳤어. 초 ·중학교 지도자는 그렇게 열성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기술보다 체력이 우선이라고 봐. 아무리 고급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체력이 없으면 안 되잖아. 요즘 선수들이야 웨이트트레이닝을 누구나 하지만, 우리 때는 못하게 했어. 키도 안 자라고, 몸이 딱딱해진다고. 근데 강 감독님은 헬스랑 기계체조를 시켰어.
내가 중학생으로는 최초로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홈런을 쳐부렸잖아. 그때 투수가 누구일 거 같아? (입꼬리를 올리면서) 3학년 때인데, 선동열이었어. 그날도 사실 내가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데도 학교에서 공을 던지게 하더라고. 타격에서 중요한 게 허리인데, 투구로 허리를 풀 게 한 거지. 그러고 보면 내가 동열이 공은 잘 쳤어. 고등학교 때는 지역예선에서 연타석 홈런을 친 적도 있으니까.
전남고로 진학할 때나 전남고가 해체해서 광주상고로 갈 때도 피신을 다녔지.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부쩍 자라면서 전국에 내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시작한 것도 있어서, 서울에서 스카우트하기 위해 학교 관계자들이 내려왔어. 그래서 팔자에도 없이 한 달 정도 남해안의 섬에서 생활했어. 그때도 조건 같은 것도 모르고, 그냥 감독님이 추천해준 곳이 전남고였으니까 가야 된다고 생각한 거여.
전남고가 해체되고 광주상고에 갈 때는 정말 난리가 났어. 그때는 한 2달 정도 피신해 있었어. 1학년(78년) 때 봉황대기에서 당시 고교 최강이던 신일고를 상대로 6피안타 완봉승을 거두어 부렸잖아. 게다가, 9회 말에 끝내기 안타도 치고. 후에 들은 얘기지만, 한동화 당시 신일고 감독이 나를 걸러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김)정수 형(전 MBC, 작고)이 승부한 거더라고.
사실 다들 신일고가 콜드게임으로 이길 거로 생각한 경기에서 이겼기 때문에, 주목을 크게 받았지. 우린 1학년이 주축이었고, 신일고는 김정수 형, 양승호 형, 김경표 형 등 쟁쟁한 멤버들이었거든. 경기 전에 연습할 때 (김)정수 형 볼이 정말 빠르더라고. 그래도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몰랐기 때문이야.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신일고가 세다든지 하는 생각을 전혀 안 했어. 오히려 우리가 최강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했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거지 (웃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그라운드
광주상고에 가서는 처음에 후회했어. 그때 이한구 감독님이었는데, 내가 야구를 하고 나서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한 적도 없어. 중학교 때도 많이 했지만, 그건 비교도 안 됐어. 합숙훈련하면 한밤중이 되어서야 ‘오늘 운동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운동을 많이 시켰어. 또 기술적으로도 많이 아셨고. 이 감독님이 광주상고에 잠깐 계셨는데, 계속 있었으면 우리가 우승을 몇 개는 더 했을 거여.
광주상고가 2학년 때인 봉황대기 때 우승을 차지했는데, 윤여국 선배가 혼자 다 던졌지. 나는 부상으로 못 나갔어. 나 혼자 예선부터 다 던졌어. 그때는 참말로 밥만 먹여주면 던졌어. 그러다 보니까 발목도 아팠고, 팔꿈치에도 무리가 왔던 거야. 요즘처럼 거짓말로 아프다고 하면서 몸 관리하는 게 어디 있어. 아파도 던지고 싶어서 안 아프다고 하고 던지는데. 멍청한 짓이었지 (웃음). 프로야구도 없었고, 실업에 가도 27, 8세가 되면 다들 은퇴하고 그랬잖아.
(선)동열이는 고등학교 때도 슬라이더를 잘 던졌는데, 나는 오로지 속구로 승부했어. 그때는 스피드건도 없어서 몇 km/h가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강속구를 던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 중학교 때 강 감독님이 “너는 일본에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때는 귀에 안 들어오더라고. 백인천 선배님이 일본 프로야구에 갔지만, 병역 문제도 있어서 그 길이 안 보였던 시대였으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정말 아쉬움이 많이 남아. 1980년이라는 시대상황만 아니었다면, 내 야구인생도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마수걸이인 대통령배에서 광주일고랑 결승에서 만났어.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광주팀끼리 결승에 오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지역예선에도 광주일고 매번 이긴 것도 있어서 우리가 우승할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어.
근데 예상과는 달리 광주일고에서 선동열이 아니라 (차)동철이가 선발로 등판했는데, 경기가 꼬이더라고. 2:8로 졌어. 결국에는 학생야구에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팀워크나 정신력이 더 중요한 것 같아. 우리는 학교 관계자를 비롯해 우리 선수들까지 다들 경기도 하기 전에 김칫국부터 마셨거든. 우승했다고. 우리 멤버 대부분이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경기 경험도 많았고 실력도 좋았지만, 정신력의 차이가 점수로 나타난 거지.
첫 대회인 대통령배를 놓쳤다고 해도 다른 대회는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는데,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광주민주화운동이 나버렸잖아. 지금도 기억하는데, 대통령배 결승이 5월 1일이었어. 그거 끝나고 내려와서 6월에 열릴 청룡기를 준비하는데, 5·18로 참가도 못했고, 연습할 계제도 아니었지. 그게 내 운이었던 것 같아. 돌이켜보면.
빛바랜 한국의 베이브 루스
그러고 나간 대회가 봉황대기였어. 팔꿈치 등이 안 좋아서 투수로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어. 그래도 대부분 경기를 매조지 했고. 경남고, 전주고에 이어 4강전인 천안북일고를 상대로 3경기 연속 홈런을 쳤어. 근데 천안북일고와의 경기에서 연장 11회 초 우리가 1득점 하면서 4:3으로 앞서나갔지만, 11회 말에 천안북일고한테 2점을 주면서 역전패를 당했어.
사실 나는 투수보다는 타자가 더 좋았어. 타자는 매일 경기에 뛸 수 있잖아. 반면, 투수는 날마다 등판 못하잖아. 그런 것도 있어서 연세대에 진학해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완전히 타자로 전업했지. 지금 생각하면, 나는 선택이 늦었던 것 같아. 투수를 할 것인지, 아니면 타자를 할 것인지를. 그것도 아니면 타자가 아닌 투수를 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미련도 남아.
연세대에 다른 투수도 있었고, 나 자신이 타자가 더 좋아서 너무 빨리 투수를 포기해버렸어. 투수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면 1, 2년 재활하고 다시 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우선 경기에 뛰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거여. 나는 이것을 꼭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었어. 대학에서도 그렇고 프로에서도. 프로에 갈 때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야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정신력이 부족했어.
김응룡 감독님이 참 기대도 많이 하셨고, 기회도 주셨는데. 군대로 2년 공백을 가진 것도 있지만, 야구에 대한 목표의식이 없었어. 그때는 야구가 아니더라도 입에 풀칠을 못하겠느냐고 생각했거든. 참 잘못된 생각이지. 군대에서 해태로 복귀하고 나서도 내가 안 해부린다고 하고 그만뒀어. 그 자체가 후회스러워. 지금은 은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지만, 유니폼은 언제든지 입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때 주위 선배 중에 나를 잡아줬다면 좋을 텐데 라는 후회도 들지만, 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누구를 탓하겠어. 그래서 내가 방황하는 후배를 보면 신경이 가는 거여. 내가 그랬으니까. 온 힘을 다하고 안 되어서 유니폼을 벗으면 미련이나 후회는 안 남는데 …. 그러지 못한 게 한스러워. 지금도.
야구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은퇴하고 나서 이것저것 사업을 했어. 돌이켜보면 야구인생도 그렇고, 그 후로도 우여곡절이 많아. 돈도 많이 벌었지. 제일 처음에는 카페를 했어. 그때는 밤 12시 이후로는 영업할 수 없었는데, 손님이 가지 않아서 파출소에 전화해서 쫓아낼 정도였어. 근데 어느 날 모 선배가 “네가 평생 술집 명함을 내밀어서야 하겠느냐?”라고 하더라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틀린 말이 아니어서, 정리했어. 그리고 세차장을 갖춘 자동차 정비소를 차렸어.
근데 웃기는 게 그때 나는 자동차의 ‘자’자도 몰랐거든. 시동을 거는 거 외에 자동차에 대해 아는 게 없었어. 그런데도 때마침 마이카 붐이 일면서 정말 크게 성공했어. 그러다가 아는 이의 어음할인을 해준 게 부도가 나면서 어려움에 부닥쳤어. 그리고 조명가게를 하다가 말아 먹고, 2002년에는 일식집을 열었어. KIA에서도 많이 도와주고 해서 잘 됐는데, 2번이나 보증을 선 게 화근이 되어서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어.
사람을 쉽게 믿었기 때문인데….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한 자동차나 조명가게, 일식집이 잘 된 것은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거든. 그러니 나도 쉽게 사람을 믿은 거지. 근데 한 번 당했으면, 두 번은 안 당해야 하는데, 보증을 또 서준 거는 내가 미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웃음).
사업이 망한 거는 세상사 잘 될 때도 있으면 안 될 때도 있는 거니까 그렇게 아쉽지는 않은데…. 안타까운 거는 소프트볼을 도와줄 여유가 없어졌다는 거여. 내가 사업을 하면서 야구 선수 출신들은 안 만났어.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은 야구장이 아니라 돈 벌어서 불운한 후배들 도와주는 거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다른 이들은 지도자로 후배들을 배출하면, 내가 할 일은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거로 생각한 거지.
근데 딱 하나 한 게 소프트볼이야. 내가 광주지역 소프트볼은 다 만들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어. 내가 15, 6년간 소프트볼과 인연을 맺었어. 우연히 체육 교사인 친구가 소프트볼의 열악한 현실을 얘기한 게 그 계기였어. 그리고 보니까 여성이 야구를 하기는 좀 제약이 많지만, 소프트볼은 쉽게 하더라고. 야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야구 저변 확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소프트볼과 이별했지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다시 만나려고 해. 그게 내가 야구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유일한 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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