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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595년~673년) [ 김수로왕 후손, 신라 대장군, 태대각간, 흥무대왕] |
뛰어난 용맹과 지략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룩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화랑 출신의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생 애
김유신은 소판(蘇判) 겸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인 김서현(金舒玄)과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며 지증왕의 증손녀인 만명부인(萬明)의 아들이며,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世) 자손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김유신의 가계는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 때부터 신라에서 군인으로 벼슬하였는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다투는 시기에 태어난 김유신은 609년 15살에 화랑이 되어 화랑도인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주유하며 심신을 수련했다.
용화향도[龍華香徒]
진평왕 때의 화랑이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낭도집단의 이름이다. 당시의 화랑집단은 화랑 1명에 승려낭도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700∼800명 정도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이들 화랑집단은 각기 특별한 명칭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사람들은 김유신을 따르던 무리를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이것은 화랑도가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용화’는 미래불인 미륵이 후세에 인간세계에 하생(下生)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3회에 걸쳐 설법을 행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며, ‘향도’는 불교신앙단체이다.
그렇다면 용화향도는 미륵을 좇는 무리라는 뜻으로, 화랑인 김유신은 도솔천(兜率天)에서 하생한 미륵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이 미륵의 화신이라는 사상은 진지왕 때의 미륵선화(彌勒仙花)설화라든지 죽지랑(竹旨郎)의 탄생설화에 미륵이 등장하고 있는 점 등에서 추측된다.
낭비성 전투
629년 음력 8월 김유신은 진평왕의 명령을 받고 소판인 아버지와 김춘추의 아버지 파진찬 김용춘을 따라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한 신라군은 사기가 꺾인 채 싸울 의지마저 잃고 말았다. 이때 중당당주로 출전한 김유신은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고구려 진영을 누비며 적을 교란시킨 후 순식간에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 모습을 보고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앞으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사 5천여 명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하고 말았다.
그 뒤 김유신은 점차 지위가 높아졌지만 늘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언제나 앞장 서서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고 추위에 지친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옷을 벗고 맨살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유신의 솔선수범에 감명을 받은 병사들은 그의 명령이라면 언제든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대야성 전투
642년 음력 7월, 신라는 백제에게서 미후성 등 40여 개의 성을 빼앗긴 데 이어, 음력 8월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군에게 당나라와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빼앗겼으며, 백제의 장군 윤충에게 대야성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대야성 전투에서는 당시 도독으로 있던 이찬 김품석 내외가 전사했는데, 이들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김춘추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선덕여왕에게 나아가, 고구려에 가서 도움을 청한 뒤 백제를 쳐서 그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청을 올렸다. 고구려에 사신으로 떠나기 전에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와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만일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 하고 묻자, 김유신은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를 짓밟을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들은 김춘추는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김유신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를 나누었다.
김유신은 선덕여왕의 허락을 얻어 결사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향해 출발하였다. 김유신이 고구려의 국경에 도착하자 때마침 김춘추가 국경을 넘어 돌아왔다. 김춘추는 신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고구려가 다급해진 틈을 타 거짓으로 영토를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서라벌로 돌아오자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 군주로 임명했다.
백제와의 싸움
644년 소판이 된 김유신은 왕명을 받아 백제 공격에 나섰다. 이때 김유신은 최고 사령관인 상장군이 되어 전략적 요충지인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 7개의 성을 점령했고, 이어 가혜진에 나룻길을 열었다.
이듬해 정월,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이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국경으로부터 백제가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상주 장군으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했다.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나가 백제의 병사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해 음력 3월, 싸움터에서 돌아온 김유신이 막 선덕여왕 앞에 나아가 승리를 보고하고 있을 때, 또다시 국경으로부터 백제군이 국경 부근에 주둔한 채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백제는 신라가 전열을 가다듬을 틈을 갖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공격해 왔다.
선덕여왕은 이제 막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김유신에게 다시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한 채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수리한 뒤 다시 싸움터로 향했다.
이때 김유신은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해야 했기에 가족들을 만날 여유가 없었다. 김유신의 가족들이 그의 군대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문 밖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김유신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가족들이 실망한 것은 물론이고 병사들도 어리둥절하였다.
그런데 집을 지나쳐 50보쯤 걸어가던 김유신이 병사에게 자기 집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병사가 가져온 물을 마신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라고 말했다. 이를 본 병사들은 크게 감동을 받아 “대장군도 저렇게 하는데 우리가 어찌 불평할 수 있겠는가”라며 모두들 더욱 용감히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국경에 도착하자 그 기세를 보고 겁을 먹은 백제군은 즉시 물러갔다.
비담의 반란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이 염종과 짜고, “여인을 군주로 섬길 수는 없다.”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신라 왕실에 선덕여왕을 계승할 수 있는 성골 귀족은 여왕의 사촌인 승만 공주밖에 없었고, 그녀를 제외한다면 진골 귀족인 비담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왕궁 진입에 실패한 반란군은 명활성에 들어가 시위를 벌였는데, 선덕여왕으로부터 반란군 진압을 명령받은 김유신과 김춘추는 월성에 진영을 설치하고 반란군과 대치했다. 열흘이 넘도록 양측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비담이 병사들에게 “내가 듣기로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를 흘린다고 했다. 이것은 이 싸움에서 여왕이 패하고 내가 승리한다는 하늘의 계시다.”라고 말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오르기 시작했고, 반대로 진압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이에 김유신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그는 비밀리에 허수아비와 커다란 연을 만들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허수아비에 불을 붙인 뒤 연에 실어 하늘로 띄워 보냈다. 그 모습은 마치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김유신은 병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 반란군에게까지 전해졌고, 반란군의 사기는 뚝 떨어졌다. 이와 반대로 진압군의 사기는 치솟았다.
김유신이 군사들을 독려하며 쳐들어가 반란군을 대파하자 비담 등은 도망쳤다. 김유신은 이를 놓치지 않고 쫓아가 그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일족을 멸하였다. 김유신이 반란을 무사히 진압하고 돌아오자 그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그 사이 선덕여왕이 서거하고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이 되었다.
진덕여왕 시기
유신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의 허가를 받고 출전하였다. 김유신이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김유신은 갑자기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것을 본 백제군은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뒤쫓았다. 이때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후퇴하던 김유신도 즉시 군사를 돌려 협공을 가했다. 이 싸움에서 김유신은 백제의 장수 8명을 사로잡고, 군사 1천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백제 진영에 사람을 보내 대야성의 도독이었던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포로들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곧이어 백제에서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오자 김유신은 약속대로 백제의 장수 8명을 돌려보냈다.
그 후 김유신은 승세를 몰아 백제를 쳐서 악성 등 12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 이어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의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649년 음력 8월, 백제의 장군 은상의 공격으로 석토성 등 7개의 성이 빼앗겼다. 이에 맞서기 위해 김유신은 또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갔다. 김유신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5가지 경로로 백제군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양측 간에 치열한 공방전만 계속될 뿐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유신은 도살성 아래 군사를 주둔시킨 후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잘 먹이며 다음 싸움을 준비했다. 김유신은 군사들에게 “구원군이 올 때까지 밖으로 나가 싸우지 말고 성만 굳게 지켜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백제의 첩자가 이를 엿듣고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다음날 김유신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신라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구원군이 왔기 때문이라고 믿은 백제군의 사기가 떨어졌고, 그 틈을 타서 신라군이 쳐들어가자 백제군의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김유신은 백제의 장수 달솔 정중 등 100명을 사로잡고, 좌평 슨상과 달솔 자견 등 장군 10명과 군사 8,980명을 죽였다. 그리고 말 1만 필, 투구와 갑옷 1,800필을 노획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이 직접 나와 맞아주는 영광을 누렸다.
654년 음력 3월, 진덕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서거하자 귀족들의 추천을 받아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이때 김유신은 김춘추에게 두 누이를 모두 시집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었다.
삼국 통일
상대등에 오른 김유신은 660년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유신은 계백과 그가 이끄는 5천 병력과 황산벌에서 만나 겨뤄서 계백군을 전멸시켰지만 이때 김유신의 휘하의 장졸이 무려 1만 명이나 전사했다.
그리고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667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그 대신에 태종 무열왕이 원정을 나가고 김유신은 국내 내정을 맡아보았다. 668년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이때 김유신은 총사령관인 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으며, 김인문(金仁問)·김흠순(金欽純) 등이 주장(主將)으로 나섰다. 그해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다. 김유신은 그 공으로 태대각간으로 승진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옛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하려 들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던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때에도 역시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김유신은 원로로서 군사 작전에 자문을 맡았다. 672년 신라군은 석문벌에서 당나라군을 맞아 싸웠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자기 아들인 김원술이 싸움터에서 도망쳐 오자 이를 부끄럽게 여긴 김유신은 패하고 도주한 김원술에게 죄를 물어 처형해줄 것을 문무왕에게 진언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은 김유신의 청을 거절하고 김원술을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김원술은 이후 다시는 김유신을 만나지 못하고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산 속에 근신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김유신은 노쇠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어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되찾은 후, 673년 음력 7월 병세가 악화되어 병문안을 온 문무왕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고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79살이었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내려 장례식에 쓰게 했으며, 군악의 고취수 100명을 보내주었다. 또한 금산원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신하들에게 명하여 비를 세워 공명을 기록하게 했으며, 그곳에 민호를 정착시켜 김유신의 무덤을 지키게 했다. 835년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가족 관계
○ 외고조할아버지 : 신라 지증왕
○ 증조할아버지 : 금관가야 구형왕
○ 외증조할아버지 : 신라 갈문왕 입종
○ 할아버지 : 김무력
○ 외할아버지 : 숙흘종
○ 아버지 : 김서현(金舒玄)
○ 어머니 : 만명공주(萬明公主)- 만호태후 김씨와 숙흘종의 딸
○ 부인 : 지소부인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新羅花郎の硏究』(三品彰英, 平凡社, 1974)
「신라(新羅) 화랑도(花郎徒)의 사회학적(社會學的) 고찰(考察)」(이기동, 『역사학보(歷史學報)』82, 1979)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용화향도 [龍華香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