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림을 감상하시죠.
(먼저 이글을 올리면서 제가 과거나 현재 소위 말하는 운동권 또는 그쪽 성향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며
단지 일반감상자들에게 아직도 많은 오해와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민중미술에 대해 간략히 소개 하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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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동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
격동의 시간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시고 받아 들였었습니까?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 처럼
많은 분들은 북쪽의 남침과 간첩의 테러에 불안해 했고
그때 어른 들은 최루탄의 고통과 교통 마비와 생업의 어려움에 분노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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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던지고 전투경찰의 몽둥이를 피해 도망다니는 학생들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로 치부되기도 했었습니다.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광주의 어린이 부터 노인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특전사의 M-16의 총알에 배가 갈라지고 뇌수가 흘러나와 죽어도
우리는 보지도 듣지도 그들을 위해 울어주지도 못했었습니다.
너무 착하고 여리고 무지했던 우리들은
군사정권의 폭력에 양처럼 순종하며 살았고 참았고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 일지라
이렇게 떠들고 있는 제 자신도
그냥 그렇게 살았었습니다.
눈감고 귀막고 최루탄때문에 콧구멍까지 막고
짭새들 때문에 입도 막고
하지만 그 당시 돌 던지고 데모가 부르던 학생들만 있던게 아닙니다.
그림으로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며
항거하고 광란의 상황을 일반인에게 알리려던 그림패들이 있었습니다.
돌대신 붓을 들고 시대에 저항하던 사람들
그들이 민중미술가 입니다.
나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그때거리로 나가 콧구멍 밑에 치약바르고 돌을 던졌던 분들이나
문닫아걸고 집에서 반쪽자리 티비뉴스에 흥분했던 분들이나
지금은 모두 40-50대의 장년이 되어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 살아들 가고 있습니다.
나이제 가노라(1970.8.28 김민기 작사 작곡)
이제 가야할 때 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왔던것 처럼 그렇게 가야 합니다.
앞으로 살면서 찌는 더위에 타오르는 목마름이 있더라도
광야에 홀로 버려지는 일이 있더라도, 서럽더라도
우리에겐 아침이슬 같은 주님의 은총이
목과 영혼을 촉촉히
적셔 주실테니까.
당시 이러한 그림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빨갱이 그림이란 명칭으로 더 잘 알려졌었습니다.
이러한 그림들이 남미의 민중미술과는 달리 한국에 정착되지 못한이유로 저는 다음의 몇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아랫글은 80년대 동시대 미술인이었던 당시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테클 금지 ^^)
1) 그림의 소재와 주제가 너무 현실적이고 직접적이었으며 당시 동시대인들의 교감을 이루지 못했다
(언론통제와 강력한 반공법 그리고 일제치하 전부터 내려오던 국가관, 의식화 되지 못한 국민정서등)
2) 작품 표현의 미숙함 또는 의식적 거친 표현 기법과 색채의 사용
(전통적 회화양식에 좁혀진 일반인의 시야는 이러한 거친작품을 수용할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사실
당시 민중미술가중엔 전공자들도 있었지만 비전공 작가 들도 많았었습니다)
3) 작품의 목적화 또는 수단화로 인한 작품성의 저하
(당시 많은 작품들(특히 걸개그림)은 시위의 도구와 시위의 목적을 알리고 대중들이 모르는 사실을 홍보
하는데 많은 비중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점이 작품성에서의 입지를 스스로 줄였다 할수도 있습니다)
4) 생활인으로서의 민중미술작가들의 작업중단으로 인한 작품생산의 중지와 이로인한 단절
(당시 민중미술가들도 구속대상이었고 이후에도 민중미술로는 생활을 꾸려 나갈수 없었습니다.
이로인해 민주화과정이 어느정도 진행되며 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한시대의 조류로 그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노동자 집회현장이나 시위 현장에서 그들의 남아있는 자취를 엿볼수 있습니다)
(책표지:오윤作)당시 그들은 민족통일, 대동단결, 계급투쟁등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반국민에게 프로레탈리아의 봉기나 혁명으로 인식되어지며 빨갱이의 멍에를 스스로 쓰게도 됩니다.
1번 설명 흑백대비가 강렬한 목판화로 민중의 아픔을 그려낸 고(故) 오윤(1946-1986)의 작품(제목 칼바람)서울대 미대 출신이며 목판화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빈부의 격차와 외세등을 단칼에 쳐버리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특히 목판화는 날카로운 조각칼선과 단순한 색채의 대비로 강렬한 표현에 효과적이고 또한 많은수의 작품을 짧은시간안에 찍어 낼수 있어서 민중미술가들이 애용하던 쟝르이며 그중 최고봉은 오윤이라 할수있다.
2번설명 역시 오윤의 목판화로서 색채를 사용하지않은 1도(단도) 판화이다. 한손에는 쇠스랑을 들고 아이를 품에 한팔로 단단히 안은채 날카로운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보는 여인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외세의 간섭과 굴욕에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힘이 넘치는 작품이다.
3번 설명 걸개 그림이다. 건물외벽에 걸거나 광장에 깔거나 여러명이 들고 행진하는데 사용했다. 작품 규모가 커서 보통 1인혼자 작업은 어렵고 거의 여러명이 공동작업으로 완성한다. 너무나 잘아려진 故이한열군을 소재로한 작품이며 걸개그림의 대표적 작가라고 할수있는 최병수의 작품이다. 이작품은 이열군 사망시 연세대에 걸렸던 작품의 리바이벌 작품이다.
어느시대에나 한두명의 스타는 탄생합니다. 그시대가 만들어 내기도 하고 다음세대가 만들어내기도..
작가 오윤은 다음세대에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의 목판화는 작년 기준으로 2천만원대입니다. 회화와 달리 판화는 오리지널 작품이 여럿있기 때문에 가격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데
그의 작품은 희소성(젊은나이에 사망)과 뛰어난 작품성때문에 높은 편에 속합니다,.
제 동기들도 민중미술을 하던 친구가 여럿 있엇습니다. 지금은 다들 미술학원이나 순수예술로 돌아섰지만..
그 친구들은 지금도 넉넉치 못한 생활을 하는 편입니다.
청춘을 불사르며 했던 미술운동, 하지만 후회하는 친구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에는 그려야만 했고 지금도 떳떳 하니까. 그런 녀석들이 흰머리 생기는 지금도 존경스럽고 부럽습니다.
첫댓글 blanc 노동법을 특별히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세월이 지나고 공장 인사과장이 되어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달래는 역할을 맡았으니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겠지요. 모든 것이 過猶不及(과유불급)이라고 했거늘~ 08.06.25 22:13
어~ 지난 번에 내가 썼던 글이 아닌가요? 사회가 아직도 사용자와 노동자라는 대립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안타깝지요. 대부분 국내 기업은 조그만 자영업체가 아니면, 모두 봉급쟁이- 근로소득자 - 이지요. 다만 노동조합원이냐, 아니냐, 차이인데, 예전처럼 하위직 직원이 박봉도 아니고, 관리자들이 군림하는 것이 아닌데~ 대립하는 것보다 상생하는 개념에서 해법을 구했으면 좋으련만~
아,,블랑형님 글이 맞습니다,,앞에,영어로 balnc만쓰고 댓글이란말을 빼먹었네요ㅡㅡㅋㅋ,,아,,댓글ㅋㅋ 댓글까지 모두 옮기려니 참,,힘들더군요,,그레이스님이 그사모 분리해주신걸 늦게 알라서 토요일밤을 새가며 글을 모두 옮겼습니다.글작성하는 만큼 시간이 걸리더군요,,이젠 완전한 둥지를 틀었으니 튼실한 알만 가득담으면 우리 아가페 단원들이 모두 훌륭한 미술감상자들로 부화하겠죠?..ㅋㅋ..생각만해도 흐믓,,뿌듯,,감격스럽습니다,,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