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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의 시장실패를 ‘정치’를 통해 교정하려는 체제
고 세 훈 고려대 교수 ‧ 정치학
복지국가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낳은 시장실패를 ‘정치’를 통해 교정하려는 체제다. 자본주의 시장은 많은 탈락자를 배출한다. 탈락자란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적절히 상품화하는 데 실패한 사람, 즉 시장에서 ‘밀려난 자’를 말하는데 실업자, 노약자, 장애자 혹은 극심한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시장실패가 낳은 이들 탈락자가 직면한 전형적인 문제가 다름 아닌 빈곤과 불평등이다.
복지국가는 빈곤자의 절대적 생활수준이 일정한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망(safety)을 제공하고, 또한 계급이나 계층간의 상대적 박탈감(불평등 정도)이 너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복지제도를 도입한다. 복지국가는 시장진입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않고도 최저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의미에서 ‘탈상품체계’이며, 사회계층간 격차가 너무 벌어지는 것을 예방하거나 교정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재계층화체계’로 불리기도 한다.
국가마다 복지제도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극빈자의 최저생활 보장과 자활을 위한 공적부조가 있고, 실업자를 위한 고용보험, 노약자를 위한 퇴직보험, 건강보험이 있으며, 편모(single mother)의 육아양육을 위한 육아수당도 있다. 이런 제도들을 위한 국가의 재정기여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급여가 보편적 기준에 따라 행해져서 수혜자가 복지급여에의 권리를 당연한 인권(사회권)의 일부로 누릴수록, 그 국가의 복지국가성(welfarestateness)은 크다. 예컨대 국가예산의 50~60%를 복지관련정책을 위해 정례적이고 보편적으로 지출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예산의 20%미만을 투입해 수혜자를 비정상으로 ‘낙인 찍는(stigmatizing)' 방식을 취하고 있는 미국보다 복지국가성이 훨씬 높은 것은 자명하다.
자본주의 산업화와 더불어 발달
산업화이론에 따르면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산업화와 더불어 발달했다. 산업화는 과거의 복지제도들을 소멸시킴으로써 복지기능의 갭(gap)을 만들었고 복지를 위한 새로운 필요(needs)를 창출하는데, 전자를 메우고 후자를 충족시키는 주체로서 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과거의 복지제도로는 봉건제, 교회, 대가족제를 들 수 있다. 봉건제란 영주와 농노 사이의 쌍무적 책임관계에 기초한 것으로 농노가 영주에게 충성과 노역의 의무를 지는 대신 영주는 농노와 그 가족에 대해 최소한의 물질적 복지를 제공했다. 또 교구(敎區, parish)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 이래 교회는 방대한 행정조직인 동시에 교구민을 위한 복지조직의 망이었다.
오늘날 봉건제와 교회는 상위계층의 하위계층에 대한 도덕적 책무의식(nobless oblige)이란 정신적 유산을 남기고 소멸했지만, 그로 인한 복지기능의 공백을 이제 국가가 채우고 있다고 간주된다. 예나 지금이나 대가족제는 가족구성원들에게는 최상의 복지제도인데, 거기서 ‘벌이를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거나 소외되는 가족은 없다.
산업화와 더불어 대가족제가 핵가족체제로 바뀌면서 가족으로부터 소외되고 거리를 떠도는 노인이나 병약자를 국가 이외에 누가 책임질 것인가? 전통적 복지제도의 공백 속에서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시장탈락자를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국가복지를 위한 재원, 특히 방대한 물적 토대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요컨대 복지국가의 발전과 관련하여 산업화는 ‘병 주고 약 주는’ 역할을 하는데, 오늘날 복지선진국들이 동시에 가장 선진적인 산업국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산업화가 복지국가 발전의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인 것은 아니다. 근대적 복지국가의 효시로 기록되는 19세기말 독일의 비스마르크체제는 아직 저급한 산업화 단계에 있었고,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은 가장 고도의 산업사회임에도 국가복지 상황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말할 수 없이 열악하다. 서유럽 국가들은 국민소득 1만달러에 도달했던 1980년대에 이미 복지국가의 완숙기로 접어들었지만, 오늘날 한국의 국가복지 수준은 경제총량이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제3세계 국가들의 평균에도 못미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지국가의 발전을 산업화 관점과는 전혀 다른 논리로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필요보다는 비인격적 시장의 경쟁을 통한 이윤추구에 몰입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진정한 복지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복지국가란 자본주의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에 다름 아니다. 즉 복지국가란 복지급여를 통해 총수요의 위기를 극복하고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완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려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발전된 것이다.
그러나 복지국가에 대한 이들의 이론적 폄하가 실천적 차원에서의 경멸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서유럽 정부들이 복지 축소를 시도할 때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러한 시도에 반대해왔다. 즉 복지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긴장을 수반한 것이었다.
소위 ‘권력자원진영’으로 분류되는 일군의 학자들에 따르면 복지국가는 산업화가 야기한 기능적 필요에 따른 대응의 결과물이 아니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성공적 재생산을 담보하기 위한 ‘자본의 필요’의 산물도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노동운동이 수행한 역할 혹은 ‘노동의 요구’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노동계급이 (노동조합을 통해) 얼마나 산업적으로 조직돼 있으며, 또한 (노동자정당을 통해) 얼마나 정치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복지국가 발전의 핵심적 관건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복지지출 수준에서 북유럽→중유럽→앵글로색슨 국가들이 보이는 순차적 낙차(落差)는 노조운동이 통합되고, 노조조직률이 높을수록, 그리고 노동자정당의 득표율, 의석점유율, 내각참여율 등에서 나타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동원 정도가 클수록 복지국가성이 강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노동의 요구’ 관점이 복지국가의 발전정도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가설임엔 틀림없지만, 이 관점도 보편적 이론의 틀로써 보완돼야 할 점이 많다. 예컨대 강력한 노동운동의 존재와 그것의 정치적 동원이 고도의 복지국가 수준과 반드시 일관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지국가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특정 이론을 전적으로 수용하거나 혹은 전적으로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화와 복지국가 위기론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첫 사반세기 동안을 복지국가의 황금기로 부르는데, 그 기간은 자본주의의 전무후무한 융성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했거나 과감한 축소 혹은 대대적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복지국가는 원래부터 재정적, 도덕적으로 자기패배적이다.
우선 복지국가는 재정적자로 인한 이자율 상승과 인플레이션(심리)을 유발함으로써 민간부문의 투자를 내모는 구축효과(驅逐效果)를 낳고, 그 와중에 케인스의 승수효과(乘數效果)가 상쇄되고 무력화되면서 저성장, 저고용, 그리고 재정적자 증대라는 악순환을 심화시킨다. 이러한 재정적 딜레마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도덕적 폐해다. 복지국가는 실업과 빈곤의 덫에 갇힌 만성적 복지의존자, 즉 저변계급(underclass)과 복지사기꾼을 양산하며, 노동시장에의 유인을 감퇴시켜 노동시장을 경직되게 만들어 복지재정을 위한 기반 자체를 침식한다. 복지국가의 도덕적 위기는 반(反)효율, 반성장이라는 경제적 함의를 동반하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내적 논리에 대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비판은 세계화라는 외적 조건으로 인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자본의 규모가 크고 빈도가 높아진 세계화 환경에서 국가들은 조세, 사회보장, 임금, 노동운동 등과 관련하여 자본유치에 유리한 조건들을 경쟁적으로 제시한다. 국가들이 ‘경쟁적 긴축’에 몰입할수록 자본유입국과 자본유출국은 모두 고용, 노동조건 그리고 복지지출 등에서 최저수준으로 수렴해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그 기본논리다. 요컨대 세계화와 더불어 종래 일국가 체제내에서 좌 ‧ 우 권력의 당대적 균형에 의거해왔던 복지체제는 위기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노년층의 증가, 생산체제의 변화, 세계화 등 구조적 요인들로 인해 오늘날 복지국가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서양 양안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세계화 담론이 맹위를 떨치던 1980년대 이후에도 복지지출의 증가율은 둔화됐지만, 복지지출의 절대액수는 물론이고 국민총생산이나 예산 대비 복지관련 지출의 규모는 공공부문 전체 규모와 더불어 오히려 꾸준히 증가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GDP의 30%, 정부예산의 50~60%를 복지를 위해 꾸준히 지출하는 서유럽 국가들이 경우를 두고, 복지국가가 위기에 부딪쳤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세계화와 더불어 저임금과 비정규직 등 고용불안과 빈곤과 불평등이 늘어갈수록 복지에 대한 요구는 증대될 수밖에 없다. 서유럽 국가들처럼 이미 중산층까지 아우르는 복지수혜층과 복지서비스에 종사하는 공공부문등 복지국가에 이해관계를 가진 방대한 계층이 존재하는 경우엔 복지국가의 급격한 축소지향적 재편 자체가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때때로 복지국가는 그 부재(不在)로 인해 오히려 그 실체적 진실 혹은 가치를 뚜렷이 드러내는 무엇으로 간주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만일 복지체제가 없었다면 1970년대,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의 경제위기가 어떻게 진행됐을지 아무도 보증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영국의 사민정치인이며 이론가인 데이비드 마르컨드가 복지국가를 “금세기 유럽문명의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격찬한 것도 이같은 맥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국복지의 현황과 복지한국의 전망
한국이 본격적인 복지제도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였다. 그러나 ‘생산적 복지’의 구상 아래 진행된 제도정비에도 불구하고 한국복지의 양적 ‧ 질적 내용은 여전히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한국복지의 근본적 문제는 복지에 대한 국가의 기여도 혹은 비용부담이 형편없이 낮다는 데서 비롯된다. 서유럽 국가들이 국민총생산의 50%를 차지하는 국가예산 가운데 50~60%를 복지관련 항목에 지출할 때, 한국은 국민총생산의 20% 정도에 불과한 국가예산의 15% 내외만을 복지와 관련하여 지출했다. 산업화 혹은 경제총량의 양적 수준이 문제라면, 한국은 이미 국가복지의 발전을 위한 충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은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진전된다고 해서 복지체제가 자동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복지선진국들은 오늘날의 한국보다 산업화 수준이 훨씬 낮았던 1950년대에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국가복지체계를 발전시켰고, 오늘의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국민소득에 도달했던 1980년대에는 복지국가의 위기 담론들이 왕성하게 거론될 정도로 그들의 복지국가성은 이미 완숙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오늘날 서유럽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대세에 편승하여 회자되는 ‘복지다원주의(복지의 민영화)’ ‘복지국가 위기론’ 등 담론들은 서유럽 국가들의 경험과 유산을 전제로 하는, 즉 자유주의나 복지국가가 자신의 몫을 일정하게 수행한 이후에나 가능한 ‘역사적’ 개념이다. 변변한 자유주의의 유산도, 복지국가의 경험이나 기억도 없는 한국적 실정과는 전혀 다른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다.
서민층 ‧ 노동계층이 대항적 정치세력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복지국가가 방대한 예산배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은 곧 세입의 규모와 세제개혁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그런 점에서 복지는 예산배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타협의 소산이다. 복지가 곧 정치적 문제일 때 복지의 잠재적 주수혜자인 서민층 혹은 노동계층이 하나의 대항적 정치세력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지 어느덧 한 해가 지났지만, 한국의 노조조직률은 아직 10% 전후에 불과하고, 노조운동은 여전히 기업별 ‧ 노선별로 분산 혹은 분열돼 있으며, 진보정당의 중앙정치로의 진입도 요원한 상태다.
노동의 객관적 권력자원과 노동운동의 여건이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서도 국가와 시민사회가 노동운동에 대해 던지는 부정적 시선에는 이렇다 할 변화의 조짐이 없다. 시민사회가 냉전 반공주의나 지역주의 같은 퇴행적 폐습에 포획돼 있고, 노동 혹은 정직한 노동을 통한 소득에 대한 경시풍조가 만연하며, 정치적 대표체계는 폐쇄적 보수주의를 완강히 고수한다면, 노동운동의 ‘실질적’ 정치세력화 과정은 참으로 끝이 안 보이는 험난한 도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긍정적 조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IMF 외환위기가 뼈아프게 증시해주었듯이, 지난 반세기 동안 누적된 한국적 자본주의의 불합리성과 한국사회 안전망체제의 낙후성이 요동치는 시민사회와 더불어 그 몰골을 드러내면서 시민권으로서의 복지와 국가복지의 필요성이 언제까지나 막무가내로 부인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복지국가란 제도적 유산들의 연쇄적 집적물이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복지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움트고’ 있다는 것과 만시지탄이나마 김대중 정부 이래 정치와 노동분야에 근대적 의미의 입법화가 ‘시작’됐다는 것은, 복지한국의 향후 전망과 관련하여 그 의의가 결코 사소하다 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통일 이후에 체제에 대한 진지한 구상을 해야 하는 역사적 시점에 서 있다는 점이다. 미래의 대안체제로서 복지한국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모색하는 일은 이론적 수준에서도 매우 절실한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