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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초등학교15회
 
 
 
카페 게시글
┃지 리 산 구 간┃ 스크랩 지리산구간(고기리-여원재-고남산-매요리)
백두대간 추천 0 조회 13 07.06.21 12: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리산구간 (고기리- 수정봉 -여원재-고남산-매요리)


1. 일시

 8월16일(2일째)

2, 참석인원

 6개팀 12명

 

 

 


아침 눈을 뜨니 06:00다 모두들 기상하여 출발 준비에 한창이다 07:00 고기리 삼거리 민박집 앞을 출발 아스파트길인 60번 지방도로를 따라 운봉쪽으로 한참 가니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운천초등학교 방향으로 위치한 가재마을로 들어선다 도로 양편에 옥수수 밭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가다 골목길에서 오르면 대간 꾼들에게 유명한 노치샘에 다달은다 이노치샘이 만수천의 발원지 덕산저수지 옆 주천면 덕치리 가재마을이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으로, 비가 와 왼쪽에 떨어지면 주천으로 흘러가고, 오른쪽으로 내리는 비는 운봉으로 흘러간다. 마을 가운데에서 물의 흐름이 갈라진다. 마을의 몇 집은 주천면과 운봉읍의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주방이 있는 아래채는 운봉에 속하고, 안방은 주천면에 속한다. 아침은 운봉에서 먹고, 잠은 주천면에서 자는 희한한 풍경이 생긴다고 한다.


가재마을에서 여원재, 고남산,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활문화권을 구별시키는 경계선이었다. 동쪽의 운봉, 인월, 아영, 산내는 역사적으로 신라에 속했으나, 서쪽의 주천, 이백, 산동은 백제였다. 백두대간에 의한 문화권의 구분을 오늘날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언어다. 백제였던 시내권은 전라 방언을 사용하지만, 신라였던 동부권은 경상 방언에 가깝다. 동부권은 경남 함양과 교류가 빈번해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다. 동부권 지역 주민들이 외지에 가면 경상도 사람이냐는 소리를 듣곤 한다고 한다 노치샘 앞에는 이정표도 있고 누각도 세워 제법 잘 단장 해놓았다


우리는 노치샘에서 수정봉을 오르기 위해 충분한 식수를 마련하여 마을 뒤로 접어들어 소나무 다섯 그루 있는 데를 지나 수정봉으로 오르고 있다 소나무 다섯 그루는 한 500여년 된것 같다 무척 크고 아름답다 노치마을에서 수정봉(804m)까지는 1시간 남짓 걸리는데 무척 가파르다 모두들 힘들어 한다 가다쉬다를 몇번 한참 오르니 수정봉 정상이다 수정봉 정상은 이름의 분위기와는 달리 두루뭉술하다. 수정봉에 오르면 정상에는 잡목으로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더 진행하면 능선의 서편 오른 쪽으로 운봉면 소재지와 크고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수정봉 바로 밑이 운봉면 덕산리고 그옆이 공안리 인데 이곳이 1380년(고려 우왕 5년) 이성계 장군이 왜군 아지발도를 죽이고 크게 이긴 황산대첩의 현장인 황산벌이다


운봉을 지나 인월로 조금 가면 왼쪽에 황산대첩비가 있는 화수리 비전 마을이 있다. 비전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에 황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황산은 운봉의 길목에 있는 산이고 운봉 평야지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산이다. 고려 말에 함양과 운봉을 노략질하며 인월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장수 아지발도를 이성계가 이곳에서 섬멸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투구를 활로 쏘아 입을 벌리게 하고, 그 때 이지란이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 적장이 죽자 적의 기세는 단번에 꺾여 고려군들이 크게 격파했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여기서 여원재 까지는 대간을 중심으로 좌측은 남원시 주천면이고 우측은 남원시 운봉읍이다 남원시 운봉읍은 판소리의 고향으로 판소리 동편제의 발생지이며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이다. 발성이 가볍고 소리의 꼬리가 긴(계면조. 슬픈 가락) 서편제는 전라도 서남 지역의 소리고, 지리산 정기를 받아 태동한 무겁고 호쾌한 발성의 동편제는 백두대간의 이남 즉 전라도 동북 지역의 운봉에서 태어났다.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가왕(歌王) 송홍록(宋興祿 1780년 경-1863년 경)이 태어난 곳인 까닭이다. 최근 남원시에서는 황산대첩비 옆 비전 마을에 송흥록의 동상과 생가를 복원했다.


동편제 창시자인 송흥록은 조선 말기 운봉 화수리 비전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창으로 생성시킨 대가들은 모두 송흥록에게 전수 받은 제자들이다 송흥록의 수제자인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의 의해 중고제가. 주덕기의 아들 주산환과 순창사람 박유전에 의한 서편제가 갈려 나갔으며 이 때문에 송흥록은 판소리의 증시조로 추앙 받고 있고 송흥록의  종손으로 송관록 송우룡 등이 있으며 쟁쟁한 명문가 출신인 대천재 송만갑도 운봉면 화수리 비전마을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소리에 입문하여 판소리 200년사에 가장 많은 제자를 가진 송만갑의 가풍(歌風)은 요즘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한다


수궁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국창(國唱) 박초월(1916-1983)의 고향이 아영면 청계리 지만 어릴적에 송홍록과 송만갑의 고향인 화수리 비전마을로 이사 와서 소리를 익혔으며 이외 고종의 생일잔치에 전라도 광대 대표로 임금 앞에서 노래를 불러 절찬 받은 장재백과 가야금의 천재인 장행진도 운봉출신이며  통일신라라 때 옥보고는 거문고를 가지고 운봉에서 제자를 가르첬는데 지리산 바래봉 북쪽의 옥계동 계곡이 옥보고와 관련이 있다 한다


수정봉에서 여원재까지는 소나무 숲과 능선으로 계속이어 지고 있다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이 길의 운치가 보통이 아니다. 끝없이 소나무 숲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참 내려오니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국도에 해발 485m의 여원치에 도달했다 운성대장군 비석 사이로 내려와 횡단보도를 지나니 민가가 두 채가 있다 한채는 대한불교호국선교종 종무원이다 종정실도 있고 그러나 스님은 보이지 않고 아무도 없다 절 뒤편에서 식수를 마련하고 교통표시판 뒤편 대간길을 따라 소나무 숲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 모드들 피곤한가 보다 장교수는 잠에 떨어진 것 같다 시간을 보니 13:00다

 


여원치(재)는 황산대첩시  이성계 장군이 행군 도중 이 여원치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았다. 그녀는 왜장 아지발도가 자신을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자 칼로 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후에 이성계는 노파가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산신각을 지었다. 지리산 산신령은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고, 이곳을 여원치라 부르게 됐다. 연재라고도 불리는 이 고개는 남원과 운봉 더 나아가 영남과 호남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고개다 여원재는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어 임진왜란이나 왜구의 침입 같은 전쟁이나 민란 반란 등이 있을 때마다 항상 쟁탈의 대상이 돼곤 했다고 한다


그건 1984년 1월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며 일어서서 세력을 키워나가던 동학군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동학군의 주요 전투지는 백두대간 서쪽의 호남지방과 충청일부 지역 이었다 동학군이 백두대간 동쪽의 영남지방으로 진격을 시도하기 위해 노렸던 곳이 바로 여원재다 이 고개 너머의 운봉은 삼남을 호령할 수 있는 요지라고 생각한 남원 동학점주 김개남은 일찍부터 이곳을 손에 넣으려고 고심했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에 들어가 군세를 크게 떨치고 있었으며 이때 운봉군수 이의경은 불안을 느껴 세력 있는 지방의 호족들과 단결해 장정들을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의경에게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 일목장군이라고 불리는 운봉사람 박문달이 있었는데 동학군 김개남이 사기충천한 동학군 1만명을 이끌고 여원재로 진격했지만 동학군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던 박달문은 5천명의 병사를 산마루에 숨겨놓았다가 동학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동학군은 여원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남원으로 물러섰으며 결국 동학군은 이 여원재 전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영남지방으로 한발짝도 들여놓지 못했다한다 일목장군은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여원재에서 시작하는 대간 길은 솔숲에서 열린다. 60~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인공 조림된 숲과는 격이 다르다. 캠프사이트로도 더 없이 좋을 숲이다. 길은 계속 소나무 숲 사이로, 오른쪽으로 장교, 가동 마을을 끼고 나들이를 나선 듯 경쾌하다. 마을에서는 합민성(合民城)과 고남산 정상 통신시설물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데 막상 산길로 접어들면 길이 없다 때론 농로와 겹쳐지고 무덤을 지나기도 한다 초창기 종주자들은 길을 이어가는 데 상당히 고심했을 것 같다.


마을 앞을 지나 파란 집 옆길로 대간 길은 이어 진다 파란 집 옆 대문에 할머니 한분과 할아버지 두분이 우리를 보고 있다 안녕 하세요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데 소연님이 할머니에게 집 마당에 심어놓은 고추를 보고 팔 수 없느냐고 물어 본다 할머니는 안된다고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할아버지 한분이 따라오라 한다 자기 밭에서 고추를 따가라고 밭을 안내하고 있다 허브와 소연님이 따라 간다 대간 길 산으로 들어서 한참 기다리고 있자니 고추를 따가지고 두분이 온다 고추 값을 줄려고 하니 절대 받을 수 없다며 도망치다시피 하여 다시 가서 라면 두봉지를 드리고 왔단다 그래서 늦었다고 한다 여기는 그래도 시골 인심이 사라지지 않는 동네인가 싶다 할아버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길을 제대로 잡아 고남산으로 진행하니 합민성에 도착되다 폭이 조그만한 돌길로 이어져 있다 언듯 보기에는 성처럼 보이지 않는다 합민성은 남원지, 문화유적 총람에 '고려말 직제학 양수생의 아내 이씨부인이 남편이 죽은 후 시부모의 개가 권유를 물리치고 홀로지내다가 왜구 아지발도가 쳐들어오자 재산을 보호하기위해 사재를 털어서 비홍치로 부터 순창구미리에 이르기 까지 30리의 성을 쌓았는데 전쟁이 있을 때는 마을 양곡을 거두어 성안에 비장한데서 합미성 혹은 합민성 이라고'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또한 남원지 기록에 의하면 또한 우물을 파니 감천이 솟아 쏟아져 뒷날 사람들이 그성을 가르켜 말하기를 고성, 홀에미성 이라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현재는 비홍산정에 약400m가 남아있으며 20-30m씩 2개소가 무너져 있고 높이는 약 2.5m의 석축으로 주위 약 900m 내의 정적(우물자리)이 있으며 와편이 산재하여 있다.


합민성에서 고남산 까지는 길 상태가 좋다 고남산 오르는데 여전히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사이로 길이 잘 이어져 있다 고남산으로 한참오르니 비가 내린다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는 비는 지나가는 소나기로 한 30여분 내린다 비를 맞고 나니 신발에 물이 들어온 회원들도 있단다 계속 오르니 능선이다 시원한 바람도 불어준다 고남산 정상 못 치치는 곳 암릉에서 밧줄을 잡고 올라서기를 몇 번하며 바라다보는 산동마을과 88고속도로 그리고 한줄기 물줄기가 내려다 보인다 고남산 정상에 도착하니 삼각점이 있으며 통신시설과 산물감시초소와 고남산을 알려주는 표지판이서 있다 남쪽을 바라보니 지리산 능선이 한줄기로 다가 온다


고남산은 높이가 846.5m에 지나지 않는 산이지만 조망만큼은 높은 산에 뒤지지 않는다. 반야봉을 비롯하여 노고단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능선과 남원시가 까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입지적 특성은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한국통신의 중계탑이 대변한다. 괴기스러울 정도의 살풍경이다. 전파도 백두대간은 쉽게 넘지 못하는 모양인지, 광주의 무등산과 합천의 가야산이 이 산에 선 중계탑 덕분에 핸드폰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편리는 자연으로부터 꾸어온 것이다. 자연이 동의한 바 없으니 약탈인 셈이지만. 오래 전부터 고남산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때는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리었다 한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이 이 산에 천제단을 세우고 전승을 기원했는데, 동행한 정도전이 이 산의 기운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 했다는 데서 산 아랫마을 이름이 ‘권포(權布)’가 됐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성계는 이 산 정상에서 전장의 지형지물을 샅샅이 살핀 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고남산을 뒤로 하고 통안재와 유치재를 지나야한다 고남산에서 매요리까지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편한한 길인데 그런데도 모드들 무척 힘들어 한다 고남산 정상에서 내려와도 내려와도 매요리 마을은 다달하지 않고 있다 고남산에서 바로 밑에 보이는 마을이 매요리로 착각하고 물을 다들 마셔버렸다 목은 타지 마을을 안보이지 모두들 불평이다 그야 말로 죽을 지경이다 왜 이리도 지루한지 모르겠다


힘들게 매요리에 도착하였다 먼저 내려온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 백두대간의 등마루에 걸터앉은 매요리는 대간 종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쉼터다. 마을 인심도 좋아서 경로당은 곧잘 종주자들의 잠자리로 변한다. 하루 종일 소나무 숲만 지나온 것 같다 마을 끄트머리에서 매점을 하는 신순남(70) 할머니는 우리의 행색을 보고 대뜸 이렇게 왜 늦었서 하고 반긴다 수만은 종주자들은 이 할머니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어떤 할머니가 여자회원들을 보고 집에 애들 밥이나 지어주지 왜 이렇게 다녀 하며 투명스럽게 말 한다 여기서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막걸리 한사발씩을 단숨에 들이 킨다 막걸리 두어잔 하고 나니 몸이 풀린다 올래는 사치재 까지 가야하는데 도저히 못가겠다고 한다 비박도 필요 없고 민박을 하자고 한다 비에 젖은 신발 땀에 젖은 옷 냄새 등 민박을 하며 철수 할 것인가 다음 종주산행을 계속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한다

 

 

 


매요리에는 민박집이 한곳이 있는데 풍산개 농장이라고 한다(063-634-1030) 주인은 장영두인데 부산에서 도서관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혼자 지내고 있다고 자랑한다 명함을 보니 법명은 칠석 호는 금파라고 적어놓고 있다 집에는 개가 3마리 있는데 이개들이 풍산개라고 한다 장씨는 풍산개 자랑이 대단하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평양에서 가져온 풍산개의 새끼란다 작년에는 200만원 받고 분양도 했다한다 장씨아저씨는 주막집 할머니와는 달리 무척 친절하다 살겹살을 사오라고 주문 해놓았는데 살겹살 사다 놓고 상치 고추 등 모든 것을 준비하여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살겹살과 막걸리에 정신없이 먹고 내일 산행을 위해 취침에 들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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